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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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생애
- 3. 사상과 신념
- 3.1. 독립에 대한 좌절과 희망
- 3.2. 국민 의식 개조론
- 3.3. 자유주의
- 3.4. 노비 해방
- 3.5. 보편교육론
- 3.6. 탈가족주의
- 3.7. 유교 및 동도서기론에 대한 관점
- 3.8. 기술, 노동 장려론
- 3.9. 민중 계몽 운동
- 3.10. 민중 경멸론
- 3.11. 국민성에 대한 지적
- 3.12. 지방 자치제도 실천론
- 3.13.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 3.14. 강력한 치안사회 주장과 징병론
- 3.15. 정부 맹신에 대한 비판
- 3.16. 합리주의적 사고관
- 3.17. 독립운동에 대한 관점
- 3.18. 위임통치론, 자치론에 대한 관점
- 3.19. 김옥균 애국자론
- 3.20. 이완용에 대한 경멸
- 4. 평가
- 참조
1. 개요
서재필은 1864년 전라도 보성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개화 사상가이다. 그는 1882년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섰으나, 개화 사상을 접하고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1896년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민중 계몽 운동을 펼쳤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의사로 활동하다가 1947년 다시 귀국하여 미군정 최고정무관을 지냈으나, 1951년 사망했다. 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국민 의식 개혁을 강조했지만, 일부에서는 친미적 성향과 민중을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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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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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서재필 |
한자 | 徐載弼 |
로마자 표기 | Seo Jae-pil |
다른 로마자 표기 | Sŏ Chaep'il |
호 | 송재(松齋), 쌍경(雙慶) |
아명 | 윤경(允卿) |
영문 이름 |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 또는 필립 제이슨(Philip Jason) |
필명 | 피제손(皮堤遜), 피제선(皮堤仙), 오시아(Nelson Samuel Osia, Nelson Howard Osia) |
출생일 | 1864년 1월 7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 |
사망일 | 1951년 1월 5일 |
사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
묘지 | 서울국립현충원 |
국적 | 조선(1890년까지) 미국(1890-1951년) |
가족 | 대구 서씨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
웹사이트 | 서재필 기념재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서광효 |
어머니 | 성주 이씨 부인 |
양아버지 | 서광하 |
양어머니 | 안동 김씨 부인 |
배우자 | 경주 이씨 부인 광산 김씨 부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Muriel Mary Armstrong) |
자녀 | 슬하 1남 3녀 |
형제 | 동복 친형: 서재춘 이복 형: 서재형 동복 친동생: 서재창, 서재우 동복 여동생: 서기석 |
친인척 | 사위 김두진, 매부 정해은, 사위 파울 보이드, 조부 서상기, 조모 울산 김씨 부인, 장인 이씨, 장인 김영석, 장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 양외조부 김온순 |
학력 | |
학력 |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원 M.D. |
경력 | |
직업 | 문신, 혁명가, 언론인, 교육인, 정치가, 의사, 병리전문의, 시인, 소설가, 작가, 상인, 독립운동가 |
주요 경력 | 중추원 고문 농상공부 고문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초빙교수 미 육군 명예 공중보건의 미 육군 명예 군의관 |
군 복무 | |
군 복무 | 조선 관군 |
복무 기간 | 1884년 6월 30일 ~ 1884년 12월 8일 |
계급 | 조선 병조 조련국 사관장 |
근무 | 조선 병조 조련국 |
지휘 | 사관장 |
참전 | 갑신정변 미국-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
정치 활동 | |
정당 | 무소속 |
관직 | 조선국 교서관 예하 부정자 미군정청 고문 |
재임 기간 | 1882년 8월 21일 ~ 1882년 9월 18일 (조선국 교서관 예하 부정자) 1945년 9월 8일 ~ 1947년 11월 20일 (미군정청 고문)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섭정 | 영의정 홍순목 |
수상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
대통령 |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
장관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
사령관 | 존 리드 하지 미군정청 군정사령관 |
서훈 | |
서훈 | 미 육군 명예 공중보건의(1898년 4월 25일에서 1898년 8월 29일까지 미국 육군본부 군의참모부 예하 병원선 소속 명예 공중보건의(무계급 신분 공중보건의) 복무) 미 육군 명예 군의관(1941년 1월 6일에서 1945년 4월 26일까지 미국 육군본부 소속 징병징집 담당 명예 군의관(무계급 신분 군의관) 복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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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864년 1월 7일(1863년 음력 11월 28일) 전라도 동복군(현재의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진사 서광효(徐光孝)와 이기대(李基大)의 5녀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3] 아명은 쌍경(雙卿)이고, 자는 윤경(允卿)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 생모 성주 이씨는 초당 후원의 뽕나무를 큰 용이 감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23] 외가인 성주 이씨는 외고조부 대에 동복군 문덕에 정착한 뒤 외증조부 이유원은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외종조부 이기두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동복, 문덕의 대지주로 성장한 가문이었다.[24]
그 뒤 아버지 서광효의 고향인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현, 논산시 구자곡면 화석리)로 온 가족이 옮겨가 그 곳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25] 이어 근처 구자곡면 금곡리(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1리)에 있던 집으로 이주하여 유아 시절을 비롯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서광효의 집이자 본적지는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금곡리 256번지(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256)였다.
서재필은 조선 영조의 국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8대손으로, 6대조 서덕수는 경종 때 세제인 연잉군(뒷날의 영조)을 추대하려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26] 가세는 몰락했고, 할아버지 서상기(徐相夔)는 유복자로 가난한 삶을 보냈고, 아들 광교(光敎), 광언(또는 광효), 광업(光業) 형제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아버지 서광효는 처갓집[27]에서 10여년 간 생활하다가 집을 마련하여 다시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그가 태어날 무렵 누나 1명과 친형 서재춘(徐載春), 서모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 서재형(徐載衡[28])이 있었고, 어머니 성주이씨에게서 남동생 서재창(徐載昌), 서재우(徐載雨 또는 載愚)와 여동생 서기석 등이 태어났다.
본래 서재필의 집안은 당색으로는 노론 비주류였지만 당파 싸움을 극도로 혐오하던 서재필은 후일 1947년 당시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장인 김도태 등과 면담할 때 나는 노론이 뭐고 소론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거짓 진술하기도 했다.
1명의 친 누나는 그가 태어날 무렵 담양군에 사는 영일 정씨 정해은(鄭海殷)에게 시집가 전남 담양군 지실마을로 시집갔다.
그의 가계는 6대조 서유승이 통덕랑을 지낸 이후 변변한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아버지 서광효는 진사시에 합격했을 뿐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29][30] 생부 서광효는 늦게 처가가 있는 보성군수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서재필은 생부모와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하였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6촌 서광하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30]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근처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관직에 오른 양부 서광하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갔다. 양어머니는 안동김씨 세도가의 하나였던 김온순의 딸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신을 지낸 김성근의 누나였다.[31][32][33][34][35]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키가 남보다 크고 기운이 세어 동네 아이들을 잘 때리기도 하였으나, 남달리 패기와 기상이 흘러 넘쳤다.[25][36]
어느 여름날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에 내려갔다가 어느 원님이 부임하러 행차하던 중 어느 정자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동리 어른들도 감히 원님 근처에 가지 못했는데, 소년이던 서재필은 두려움없이 다가가더니 호기심에 찬 눈으로 수령을 바라보았다. 수령은 비굴한 기색이 없고 당당해보이는 소년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아가 너 노래 한번 불러 보렴'하니 서재필은 바로 받아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말을 더듬은 사유를 원이 묻자 '원님이 갖고 계신 부채를 빌려 주시면 그것으로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 하였다. 수령은 부채를 빌려달라는 소년의 엉뚱함에 내심 기특해 하면서 부채를 빌려주었더니, 소년은 그 부채를 가락에 맞추어 흔들면서 민요를 한바탕 불렀다.
소년의 비범함을 알아본 수령은 그의 이름을 물었고, 소년은 "서재필입니다. 호는 쌍경이라 합니다."라며 당당히 밝혔다.
"제 아버지께서 진사에 급제한 해에 제가 태어나 경사가 두가지 겹쳤다 하여 제 이름을 쌍경이라 하였습니다."
원은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예견하고는 임지로 떠났다.[37] 한편,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던 그는 동리 아이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고, 한성부로 상경한 뒤에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여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잡다한 지식에 해박했으며 평소 자존심이 강하였다.[38]
1872년(고종 10년) 양부 서광하 내외는 서재필을 한성에 있는 동생 김성근의 집에 보내 수학하게 했다.[5] 서재필은 김성근을 찾아가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글과 학문을 배웠다. 김성근의 학숙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 《사기》(史記), 《사서 육경》을 배웠는데, 대부분 암송하였다고 한다.[39][40]
김성근의 집에 머물던 중, 서재필은 그의 집에 출입하던 서광범과 김성근의 일족인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41][42] 또한 서재필은 김옥균을 통해 3년 연상의 박영효와도 만나, 그와도 사귀게 되었다. 김옥균은 그를 각별히 대했다고 한다. 이어 김옥균과 서광범을 통해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손목시계 등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생가와 양가는 당색으로는 노론 계열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는 노론 북학파 계열의 영향을 받고 개화파의 형성에 참여한다.
1878년 봄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며, 1879년 봄 고종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전강(殿講)에서 1등하여 직부전시[43]의 명을 받아, 바로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전강에서 시관이 사서 삼경 중 아무데나 지적하자 이를 막힘 없이 일곱 번을 반복해서 줄줄 외웠다 한다. 1879년 4년 연상인 경주이씨(慶州李氏)와 조혼, 1881년 봄 다시 김영석(金永奭)의 딸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두번째 부인 광산 김씨는 한성부의 명문 거족으로 사계 김장생과 허주 김반, 신독재 김집, 광남 김익훈의 후손이었다.[44][45]
18세 되던 1882년 3월 증광 문과에 병과(3등)으로 급제하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급제함으로써 주위의 촉망[46]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러나 과거 급제 직후, 서재필은 이렇다 할 보직에 제수되지 못하다가, 4월 6일 승문원가주서로 임시 보직되었다가 김중식(金中植)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4월 18일 다시 승문원가주서로 임명되었다. 급제 직후 정식 보직을 받지 못하자 4월 19일 박영교의 상소로 군직에 임명되었다. 4월 21일의 병조의 병비에 의해 부사정이 되고, 경연가주서를 겸하였다. 4월 25일 병으로 승문원가주서에서 체차되어 송세현(宋世鉉)과 교체되었다. 그해 6월 서재필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서광범, 김옥균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김옥균 등이 만든 충의계(忠義契)에 가입했고 이는 그대로 개화당으로 발전하였다.
; 개화 사상 접촉
|섬네일|박영효]]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47]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후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을 만나게 된다. 당시 개화파는 한성부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48]
이동인을 처음 만난지 2개월 뒤, 이동인은 책, 사진, 성냥 같은 것을 일본에서 돈주고 사왔다. 역사책도 있고 지리, 물리, 화학 관련 서적도 있었다. 이것이 신기하다 여긴 그는 친구들과 이를 보려고 서너 달 동안 봉은사에 다니다가 동대문 밖 영도사(永導寺)로 자리를 옮겨 남몰래 탐독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이동인 등은 모두 한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1883년(고종 20년) 1월 14일 승정원 가주서가 되었다가, 병으로 당일 이민영(李敏英)으로 갈리게 되었다. 1883년 2월초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가 2월 27일 이조(吏曹)의 건의로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보직되었다.[49] 서재필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히 활동하였다.
그해 3월 6품으로 특별 승진하고, 훈련원부봉사가 되었다. 이때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 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몰락한 양반이었던 탓에 양반이라는 권위의식이 적었고 이는 평민 출신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는 배경이 된다.
1883년(고종 20년) 5월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과 일행은 6개월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다. 유학생 대표는 서재필이었다.[50]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51] 어학의 재능도 뛰어나 유학 몇 달 만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46] 일본어를 익히면서 일본에 체류중인 미국인들을 만나 기초 수준의 영어를 배웠다.
서재필은 18세의 나이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최연소 합격자 중 한 명이 되었고, 1882년에는 하급 관리가 되었다. 이후 그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와 승문원 가주서(承文院假主書)에 임명되었다. 1883년에는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와 훈련원 부봉사(訓鍊院 副奉事)에 임명되었다.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14명의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12] 도쿄 육군 도야마 학교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54] 1884년 6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조련국 사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조련국이 폐지되었다.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계획하고, 신분제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 심양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 등을 담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56] 서재필은 조련국 병사들과 신식 군대로 구성된 행동대를 총 지휘하고 병력들을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였다. 7월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여 12월초 정변 준비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 거사 자금 등을 동원한다.[56]
정변 계획 중에 그는 일본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재조선주둔 일본육군 중대장 무라카미(村上)와 개화당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51], 일본의 토야마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웠고, 정변진행 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현장 지휘를 맡았고 그의 동생 서재창과 박영교 등은 병력을 이끌고 수구파 대신들의 처단 등을 계획했다.
1884년 11월 승지(承旨)로 특별 승진하였다.[57]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에 가서 서광범, 홍영식, 김옥균 등과 만나 12월 4일로 거사 날자를 정하였다. 12월 4일에 거사를 개시할 각 부문의 담당자의 임무도 이때 결정하였다.[58]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에서 거사를 일으켜, 민영익 등 수구파 대신들을 처단하고 고종 내외를 경우궁으로 피신시켰다.[6] 개화파는 개화 신내각을 발표하고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후영 정령관에 임명되었다.[6]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6]
갑신정변이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본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62] 갑신정변 주역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62] 생부 서광효는 은진 감옥에 투옥당했다.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 등 가족들이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 광산김씨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 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어린 딸 한 명은 딸이라 하여 연좌되지 않고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풀려난 딸은 후에 안동김씨 김태균(金泰均)의 아들 김두진(金斗鎭)과 결혼하였는데, 그는 선원 김상용의 10대손으로 청음 김상헌의 자손 고죽 김옥균과는 먼 친척이었다. 그러나 김두진과 결혼한 딸과는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서재필의 배우자 광산 김씨는 자신의 본가를 찾아갔는데, 부모들은 대역의 죄인이라 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63] 승지였던 장인 김영석은 딸에게 서씨 집 귀신이 되라며 되돌려보냈는데 가서 자결하도록 하며 가마에 태울 때 독약 그릇을 하나 넣어 시가로 쫓아보냈다.[63] 이에 서재필은 후일 귀국한 뒤 장인 김영석이 찾아오자 거지 취급하고 냉대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옥중에서 절곡 끝에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63]'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맏형 서재춘은 은진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노사령들이 화석이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주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망했지만 며느리 김씨는 못다 죽어, 어느날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63] 그러나 생모 성주이씨나 배우자 광산김씨는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의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아내의 묘소는 연무읍 죽평리 어머니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구자곡면으로 이장된 뒤, 서재필의 유골이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자 1995년 서재필 묘소에 합장되었다.
한성부 종로방 화동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김옥균의 집과 인접해 있었는데, 김옥균의 집과 서재필의 집터는 조정에 의해 몰수당한 뒤 후일 한성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현. 서울 정독도서관 터)가 된다.[64] 담양 가사문학면 지실 정해은과 결혼한 큰누나 서씨는 이미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모면하였다.
; 연좌제와 친인척 처벌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은 1884년 19세에 종로 사직동에 살던 보국숭록대부를 지낸 서상우(徐相雨)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65] 그런데 생가의 둘째 형 서재필을 따라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노를 앞세우고 도주하던 중 붙잡혀 의금부로 끌려갔다가 처형당했다.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로 피신하여[66]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그의 양가(養家)에도 화가 미쳐 그의 양아버지이자 재종숙인 서광하는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하였다.
17세 된 남동생 서재우(徐載雨)만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했다.[67] 서재우는 훗날 사면됐다.[68]
1884년 초에 죽은 그의 양어머니 안동 김씨를 제외한 그의 가족은 모두 몰살되거나 화를 입었다. 그의 가족 중 형인 서재춘의 아들들이 살아남아 손자인 서명원 등을 두었고, 서재창의 처 조씨에게서 나온 유복자의 손자가 서희원이었다. 또, 기생으로 끌려간 동생 서재우의 처가 아들 서호석을 두었다.[69] 서재우의 일가 역시 겨우 후사를 잇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그의 서씨 집안에서는 광(光)자 대신 병(丙)을, 재(載)자 대신 정(廷)자를 사용하였으나 일부는 광(光)자 항렬과 재(載) 항렬을 쓰기도 하였다.
연좌제는 전라도 보성군에 있던 친 외가에도 미쳤다. 가산은 압수, 탕진되고 가족은 이산되는 참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외사촌 형제인 이교문과 그의 아들 이용순 등은 살아남았고,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23] 그의 일가족이 몰살당한 소식이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에 전해지자 그의 외삼촌들, 외사촌들 등 그의 외가 친척들은 약사발을 든 금부도사나 포졸들이 언제 나타나지 않나 하고 문덕마을 어귀를 수시로 내다보며 오랫동안 전전긍긍했다 한다. 비통한 소식을 해외에서 접한 서재필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분노와 슬픔에 치를 떨었다.[63] 서재필과 평소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그의 친구들 역시 투옥, 심한 고문을 당했다. 정변의 실패와 그의 가족, 친지들이 몰살당하자 민중에 대한 증오와 함께 조선 사회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고, 이후 일본에서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국내 문제에는 관심을 서서히 줄여나가게 되었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70]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 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망명 초기 그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의 위협에 시달려 은신하였으나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이 있던 독지가의 후원으로 도쿄 근처의 판자촌에 숨어 지냈다. 일본 도착 직후 그는 혁명의 실패와 서툴렀음을 자책하며 대성통곡을 하다 실신했다. 한달 가까이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1개월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수시로 자객을 보냈고 그는 변장하고 은신해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그의 딱한 소식을 듣고 생활비와 음식과 옷을 지원해 주었다.
1885년(고종 22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비용이 없었고 능통하지 못한 영어 실력과,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을 피해 숨어있어야 했던 이들은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후원과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씨가 보내준 생활비와 차비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70]
조병옥에 의하면, 이들은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상륙하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닥쳐올 생활위협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서광범도 얼마 동안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결국 앞서 돌아간 박영효의 뒤를 따라 그도 양반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70]
훗날 서재필은 그가 처음 미국 땅에서 살기 위해서 발버둥쳤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71]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 뿐, 말도 모르고 풍속이 다른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의 진로를 개척하려던, 고독에 겨운 참담한 생활은 그의 자립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71]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문방구점의 경영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근면과 창의력은 상점의 번영을 가져왔던 것이다.[71] 그러나 유색인종에 대한 무시와, 차별에 시달림을 당했고 열차에 탑승할 때도 짐칸으로 밀려나는 등의 모욕을 당한다.
미국 망명 초기 장로교 선교사이자 안면이 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편지로 보낸 소개장 덕에 거처를 구할 수 있었다. 미국생활 중 감리교회에 나가 감리교 신자로 개종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1887년 3월부터 1894년 3월 10일까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번갈아가며 홍국영을 부관참시하고 노륙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동시에 서재필과 서광범, 박영효도 기한을 정해 잡아들이거나 사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매일 올렸다. 이는 승정원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동일한 내용의 상소가 수시로 계속되자 고종은 나중에 이를 모두 물리쳤다.
1885년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70] 영어를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을 시작으로, 막노동, 식당 서빙, 청소부, 인쇄소 전단지 돌리는 일 등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70] 윤치호에게 여러번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치호는 우편환으로 생활비를 송금해주었다.[72] 조선에서는 미국에 있는 서재필을 제거하려고 자객을 보냈다.
1886년 9월 서재필은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 배리(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51] 낮에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YMCA) 야간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였다.[62]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2. 1. 생애 초반
1864년 1월 7일(1863년 음력 11월 28일) 전라도 동복군(현재의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진사 서광효(徐光孝)와 이기대(李基大)의 5녀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3] 아명은 쌍경(雙卿)이고, 자는 윤경(允卿)이다.그가 태어나기 전 생모 성주 이씨는 초당 후원의 뽕나무를 큰 용이 감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23] 외가인 성주 이씨는 외고조부 대에 동복군 문덕에 정착한 뒤 외증조부 이유원은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외종조부 이기두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동복, 문덕의 대지주로 성장한 가문이었다.[24]
그 뒤 아버지 서광효의 고향인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현, 논산시 구자곡면 화석리)로 온 가족이 옮겨가 그 곳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25] 이어 근처 구자곡면 금곡리(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1리)에 있던 집으로 이주하여 유아 시절을 비롯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서광효의 집이자 본적지는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금곡리 256번지(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256)였다.
서재필은 조선 영조의 국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8대손으로, 6대조 서덕수는 경종 때 세제인 연잉군(뒷날의 영조)을 추대하려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26] 가세는 몰락했고, 할아버지 서상기(徐相夔)는 유복자로 가난한 삶을 보냈고, 아들 광교(光敎), 광언(또는 광효), 광업(光業) 형제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아버지 서광효는 처갓집[27]에서 10여년 간 생활하다가 집을 마련하여 다시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그가 태어날 무렵 누나 1명과 친형 서재춘(徐載春), 서모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 서재형(徐載衡[28])이 있었고, 어머니 성주이씨에게서 남동생 서재창(徐載昌), 서재우(徐載雨 또는 載愚)와 여동생 서기석 등이 태어났다.
본래 서재필의 집안은 당색으로는 노론 비주류였지만 당파 싸움을 극도로 혐오하던 서재필은 후일 1947년 당시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장인 김도태 등과 면담할 때 나는 노론이 뭐고 소론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거짓 진술하기도 했다.
1명의 친 누나는 그가 태어날 무렵 담양군에 사는 영일 정씨 정해은(鄭海殷)에게 시집가 전남 담양군 지실마을로 시집갔다.
그의 가계는 6대조 서유승이 통덕랑을 지낸 이후 변변한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아버지 서광효는 진사시에 합격했을 뿐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29][30] 생부 서광효는 늦게 처가가 있는 보성군수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서재필은 생부모와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하였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6촌 서광하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30]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근처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관직에 오른 양부 서광하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갔다. 양어머니는 안동김씨 세도가의 하나였던 김온순의 딸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신을 지낸 김성근의 누나였다.[31][32][33][34][35]
2. 1. 1. 가계와 출생
1864년 1월 7일(1863년 음력 11월 28일) 전라도 동복군(현재의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진사 서광효(徐光孝)와 이기대(李基大)의 5녀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3] 아명은 쌍경(雙卿)이고, 자는 윤경(允卿)이다.그가 태어나기 전 생모 성주 이씨는 초당 후원의 뽕나무를 큰 용이 감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23] 외가인 성주 이씨는 외고조부 대에 동복군 문덕에 정착한 뒤 외증조부 이유원은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외종조부 이기두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동복, 문덕의 대지주로 성장한 가문이었다.[24]
그 뒤 아버지 서광효의 고향인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현, 논산시 구자곡면 화석리)로 온 가족이 옮겨가 그 곳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25] 이어 근처 구자곡면 금곡리(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1리)에 있던 집으로 이주하여 유아 시절을 비롯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서광효의 집이자 본적지는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금곡리 256번지(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256)였다.
서재필은 조선 영조의 국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8대손으로, 6대조 서덕수는 경종 때 세제인 연잉군(뒷날의 영조)을 추대하려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26] 가세는 몰락했고, 할아버지 서상기(徐相夔)는 유복자로 가난한 삶을 보냈고, 아들 광교(光敎), 광언(또는 광효), 광업(光業) 형제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아버지 서광효는 처갓집[27]에서 10여년 간 생활하다가 집을 마련하여 다시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그가 태어날 무렵 누나 1명과 친형 서재춘(徐載春), 서모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 서재형(徐載衡[28])이 있었고, 어머니 성주이씨에게서 남동생 서재창(徐載昌), 서재우(徐載雨 또는 載愚)와 여동생 서기석 등이 태어났다.
본래 서재필의 집안은 당색으로는 노론 비주류였지만 당파 싸움을 극도로 혐오하던 서재필은 후일 1947년 당시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장인 김도태 등과 면담할 때 나는 노론이 뭐고 소론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거짓 진술하기도 했다.
1명의 친 누나는 그가 태어날 무렵 담양군에 사는 영일 정씨 정해은(鄭海殷)에게 시집가 전남 담양군 지실마을로 시집갔다.
그의 가계는 6대조 서유승이 통덕랑을 지낸 이후 변변한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아버지 서광효는 진사시에 합격했을 뿐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29][30] 생부 서광효는 늦게 처가가 있는 보성군수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서재필은 생부모와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하였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6촌 서광하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30]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근처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관직에 오른 양부 서광하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갔다. 양어머니는 안동김씨 세도가의 하나였던 김온순의 딸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신을 지낸 김성근의 누나였다.[31][32][33][34][35]
2. 1. 2. 유년기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키가 남보다 크고 기운이 세어 동네 아이들을 잘 때리기도 하였으나, 남달리 패기와 기상이 흘러 넘쳤다.[25][36]어느 여름날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에 내려갔다가 어느 원님이 부임하러 행차하던 중 어느 정자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동리 어른들도 감히 원님 근처에 가지 못했는데, 소년이던 서재필은 두려움없이 다가가더니 호기심에 찬 눈으로 수령을 바라보았다. 수령은 비굴한 기색이 없고 당당해보이는 소년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아가 너 노래 한번 불러 보렴'하니 서재필은 바로 받아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말을 더듬은 사유를 원이 묻자 '원님이 갖고 계신 부채를 빌려 주시면 그것으로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 하였다. 수령은 부채를 빌려달라는 소년의 엉뚱함에 내심 기특해 하면서 부채를 빌려주었더니, 소년은 그 부채를 가락에 맞추어 흔들면서 민요를 한바탕 불렀다.
소년의 비범함을 알아본 수령은 그의 이름을 물었고, 소년은 "서재필입니다. 호는 쌍경이라 합니다."라며 당당히 밝혔다.
"제 아버지께서 진사에 급제한 해에 제가 태어나 경사가 두가지 겹쳤다 하여 제 이름을 쌍경이라 하였습니다."
원은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예견하고는 임지로 떠났다.[37] 한편,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던 그는 동리 아이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고, 한성부로 상경한 뒤에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여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잡다한 지식에 해박했으며 평소 자존심이 강하였다.[38]
2. 1. 3. 수학과 소년기
1872년(고종 10년) 양부 서광하 내외는 서재필을 한성에 있는 동생 김성근의 집에 보내 수학하게 했다.[5] 서재필은 김성근을 찾아가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글과 학문을 배웠다. 김성근의 학숙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 《사기》(史記), 《사서 육경》을 배웠는데, 대부분 암송하였다고 한다.[39][40]김성근의 집에 머물던 중, 서재필은 그의 집에 출입하던 서광범과 김성근의 일족인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41][42] 또한 서재필은 김옥균을 통해 3년 연상의 박영효와도 만나, 그와도 사귀게 되었다. 김옥균은 그를 각별히 대했다고 한다. 이어 김옥균과 서광범을 통해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손목시계 등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생가와 양가는 당색으로는 노론 계열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는 노론 북학파 계열의 영향을 받고 개화파의 형성에 참여한다.
2. 2. 관료 생활
1883년(고종 20년) 1월 14일 승정원 가주서가 되었다가, 병으로 당일 이민영(李敏英)으로 갈리게 되었다. 1883년 2월초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가 2월 27일 이조(吏曹)의 건의로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보직되었다.[49] 서재필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히 활동하였다.그해 3월 6품으로 특별 승진하고, 훈련원부봉사가 되었다. 이때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 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몰락한 양반이었던 탓에 양반이라는 권위의식이 적었고 이는 평민 출신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는 배경이 된다.
1883년(고종 20년) 5월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과 일행은 6개월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다. 유학생 대표는 서재필이었다.[50]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51] 어학의 재능도 뛰어나 유학 몇 달 만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46] 일본어를 익히면서 일본에 체류중인 미국인들을 만나 기초 수준의 영어를 배웠다.
서재필은 18세의 나이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최연소 합격자 중 한 명이 되었고, 1882년에는 하급 관리가 되었다. 이후 그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와 승문원 가주서(承文院假主書)에 임명되었다. 1883년에는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와 훈련원 부봉사(訓鍊院 副奉事)에 임명되었다.
2. 2. 1. 과거 급제와 관직 진출
1878년 봄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며, 1879년 봄 고종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전강(殿講)에서 1등하여 직부전시[43]의 명을 받아, 바로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전강에서 시관이 사서 삼경 중 아무데나 지적하자 이를 막힘 없이 일곱 번을 반복해서 줄줄 외웠다 한다. 1879년 4년 연상인 경주이씨(慶州李氏)와 조혼, 1881년 봄 다시 김영석(金永奭)의 딸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두번째 부인 광산 김씨는 한성부의 명문 거족으로 사계 김장생과 허주 김반, 신독재 김집, 광남 김익훈의 후손이었다.[44][45]18세 되던 1882년 3월 증광 문과에 병과(3등)으로 급제하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급제함으로써 주위의 촉망[46]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러나 과거 급제 직후, 서재필은 이렇다 할 보직에 제수되지 못하다가, 4월 6일 승문원가주서로 임시 보직되었다가 김중식(金中植)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4월 18일 다시 승문원가주서로 임명되었다. 급제 직후 정식 보직을 받지 못하자 4월 19일 박영교의 상소로 군직에 임명되었다. 4월 21일의 병조의 병비에 의해 부사정이 되고, 경연가주서를 겸하였다. 4월 25일 병으로 승문원가주서에서 체차되어 송세현(宋世鉉)과 교체되었다. 그해 6월 서재필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서광범, 김옥균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김옥균 등이 만든 충의계(忠義契)에 가입했고 이는 그대로 개화당으로 발전하였다.
; 개화 사상 접촉
|섬네일|박영효]]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47]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후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을 만나게 된다. 당시 개화파는 한성부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48]
이동인을 처음 만난지 2개월 뒤, 이동인은 책, 사진, 성냥 같은 것을 일본에서 돈주고 사왔다. 역사책도 있고 지리, 물리, 화학 관련 서적도 있었다. 이것이 신기하다 여긴 그는 친구들과 이를 보려고 서너 달 동안 봉은사에 다니다가 동대문 밖 영도사(永導寺)로 자리를 옮겨 남몰래 탐독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이동인 등은 모두 한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2. 2. 2. 일본 유학과 신문물 수용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14명의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12] 도쿄 육군 도야마 학교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54] 1884년 6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조련국 사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조련국이 폐지되었다.2. 3. 갑신정변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계획하고, 신분제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 심양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 등을 담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56] 서재필은 조련국 병사들과 신식 군대로 구성된 행동대를 총 지휘하고 병력들을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였다. 7월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여 12월초 정변 준비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 거사 자금 등을 동원한다.[56]정변 계획 중에 그는 일본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재조선주둔 일본육군 중대장 무라카미(村上)와 개화당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51], 일본의 토야마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웠고, 정변진행 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현장 지휘를 맡았고 그의 동생 서재창과 박영교 등은 병력을 이끌고 수구파 대신들의 처단 등을 계획했다.
1884년 11월 승지(承旨)로 특별 승진하였다.[57]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에 가서 서광범, 홍영식, 김옥균 등과 만나 12월 4일로 거사 날자를 정하였다. 12월 4일에 거사를 개시할 각 부문의 담당자의 임무도 이때 결정하였다.[58]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에서 거사를 일으켜, 민영익 등 수구파 대신들을 처단하고 고종 내외를 경우궁으로 피신시켰다.[6] 개화파는 개화 신내각을 발표하고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후영 정령관에 임명되었다.[6]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6]
갑신정변이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본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62] 갑신정변 주역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62] 생부 서광효는 은진 감옥에 투옥당했다.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 등 가족들이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 광산김씨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 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어린 딸 한 명은 딸이라 하여 연좌되지 않고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풀려난 딸은 후에 안동김씨 김태균(金泰均)의 아들 김두진(金斗鎭)과 결혼하였는데, 그는 선원 김상용의 10대손으로 청음 김상헌의 자손 고죽 김옥균과는 먼 친척이었다. 그러나 김두진과 결혼한 딸과는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서재필의 배우자 광산 김씨는 자신의 본가를 찾아갔는데, 부모들은 대역의 죄인이라 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63] 승지였던 장인 김영석은 딸에게 서씨 집 귀신이 되라며 되돌려보냈는데 가서 자결하도록 하며 가마에 태울 때 독약 그릇을 하나 넣어 시가로 쫓아보냈다.[63] 이에 서재필은 후일 귀국한 뒤 장인 김영석이 찾아오자 거지 취급하고 냉대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옥중에서 절곡 끝에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63]'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맏형 서재춘은 은진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노사령들이 화석이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주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망했지만 며느리 김씨는 못다 죽어, 어느날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63] 그러나 생모 성주이씨나 배우자 광산김씨는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의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아내의 묘소는 연무읍 죽평리 어머니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구자곡면으로 이장된 뒤, 서재필의 유골이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자 1995년 서재필 묘소에 합장되었다.
한성부 종로방 화동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김옥균의 집과 인접해 있었는데, 김옥균의 집과 서재필의 집터는 조정에 의해 몰수당한 뒤 후일 한성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현. 서울 정독도서관 터)가 된다.[64] 담양 가사문학면 지실 정해은과 결혼한 큰누나 서씨는 이미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모면하였다.
; 연좌제와 친인척 처벌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은 1884년 19세에 종로 사직동에 살던 보국숭록대부를 지낸 서상우(徐相雨)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65] 그런데 생가의 둘째 형 서재필을 따라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노를 앞세우고 도주하던 중 붙잡혀 의금부로 끌려갔다가 처형당했다.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로 피신하여[66]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그의 양가(養家)에도 화가 미쳐 그의 양아버지이자 재종숙인 서광하는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하였다.
17세 된 남동생 서재우(徐載雨)만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했다.[67] 서재우는 훗날 사면됐다.[68]
1884년 초에 죽은 그의 양어머니 안동 김씨를 제외한 그의 가족은 모두 몰살되거나 화를 입었다. 그의 가족 중 형인 서재춘의 아들들이 살아남아 손자인 서명원 등을 두었고, 서재창의 처 조씨에게서 나온 유복자의 손자가 서희원이었다. 또, 기생으로 끌려간 동생 서재우의 처가 아들 서호석을 두었다.[69] 서재우의 일가 역시 겨우 후사를 잇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그의 서씨 집안에서는 광(光)자 대신 병(丙)을, 재(載)자 대신 정(廷)자를 사용하였으나 일부는 광(光)자 항렬과 재(載) 항렬을 쓰기도 하였다.
연좌제는 전라도 보성군에 있던 친 외가에도 미쳤다. 가산은 압수, 탕진되고 가족은 이산되는 참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외사촌 형제인 이교문과 그의 아들 이용순 등은 살아남았고,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23] 그의 일가족이 몰살당한 소식이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에 전해지자 그의 외삼촌들, 외사촌들 등 그의 외가 친척들은 약사발을 든 금부도사나 포졸들이 언제 나타나지 않나 하고 문덕마을 어귀를 수시로 내다보며 오랫동안 전전긍긍했다 한다. 비통한 소식을 해외에서 접한 서재필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분노와 슬픔에 치를 떨었다.[63] 서재필과 평소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그의 친구들 역시 투옥, 심한 고문을 당했다. 정변의 실패와 그의 가족, 친지들이 몰살당하자 민중에 대한 증오와 함께 조선 사회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고, 이후 일본에서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국내 문제에는 관심을 서서히 줄여나가게 되었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70]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 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망명 초기 그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의 위협에 시달려 은신하였으나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이 있던 독지가의 후원으로 도쿄 근처의 판자촌에 숨어 지냈다. 일본 도착 직후 그는 혁명의 실패와 서툴렀음을 자책하며 대성통곡을 하다 실신했다. 한달 가까이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1개월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수시로 자객을 보냈고 그는 변장하고 은신해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그의 딱한 소식을 듣고 생활비와 음식과 옷을 지원해 주었다.
2. 3. 1. 갑신정변 계획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계획하고, 신분제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 심양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 등을 담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56] 서재필은 조련국 병사들과 신식 군대로 구성된 행동대를 총 지휘하고 병력들을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였다. 7월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여 12월초 정변 준비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 거사 자금 등을 동원한다.[56]정변 계획 중에 그는 일본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재조선주둔 일본육군 중대장 무라카미(村上)와 개화당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51], 일본의 토야마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웠고, 정변진행 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현장 지휘를 맡았고 그의 동생 서재창과 박영교 등은 병력을 이끌고 수구파 대신들의 처단 등을 계획했다.
2. 3. 2. 갑신정변 직전
1884년 11월 승지(承旨)로 특별 승진하였다.[57]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에 가서 서광범, 홍영식, 김옥균 등과 만나 12월 4일로 거사 날자를 정하였다. 12월 4일에 거사를 개시할 각 부문의 담당자의 임무도 이때 결정하였다.[58]2. 3. 3. 갑신정변과 삼일천하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에서 거사를 일으켜, 민영익 등 수구파 대신들을 처단하고 고종 내외를 경우궁으로 피신시켰다.[6] 개화파는 개화 신내각을 발표하고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후영 정령관에 임명되었다.[6]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6]2. 3. 4. 정변의 실패와 가족들의 최후
갑신정변이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본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62] 갑신정변 주역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62] 생부 서광효는 은진 감옥에 투옥당했다.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 등 가족들이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 광산김씨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 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어린 딸 한 명은 딸이라 하여 연좌되지 않고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풀려난 딸은 후에 안동김씨 김태균(金泰均)의 아들 김두진(金斗鎭)과 결혼하였는데, 그는 선원 김상용의 10대손으로 청음 김상헌의 자손 고죽 김옥균과는 먼 친척이었다. 그러나 김두진과 결혼한 딸과는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서재필의 배우자 광산 김씨는 자신의 본가를 찾아갔는데, 부모들은 대역의 죄인이라 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63] 승지였던 장인 김영석은 딸에게 서씨 집 귀신이 되라며 되돌려보냈는데 가서 자결하도록 하며 가마에 태울 때 독약 그릇을 하나 넣어 시가로 쫓아보냈다.[63] 이에 서재필은 후일 귀국한 뒤 장인 김영석이 찾아오자 거지 취급하고 냉대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옥중에서 절곡 끝에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63]'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맏형 서재춘은 은진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노사령들이 화석이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주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망했지만 며느리 김씨는 못다 죽어, 어느날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63] 그러나 생모 성주이씨나 배우자 광산김씨는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의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아내의 묘소는 연무읍 죽평리 어머니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구자곡면으로 이장된 뒤, 서재필의 유골이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자 1995년 서재필 묘소에 합장되었다.
한성부 종로방 화동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김옥균의 집과 인접해 있었는데, 김옥균의 집과 서재필의 집터는 조정에 의해 몰수당한 뒤 후일 한성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현. 서울 정독도서관 터)가 된다.[64] 담양 가사문학면 지실 정해은과 결혼한 큰누나 서씨는 이미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모면하였다.
; 연좌제와 친인척 처벌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은 1884년 19세에 종로 사직동에 살던 보국숭록대부를 지낸 서상우(徐相雨)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65] 그런데 생가의 둘째 형 서재필을 따라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노를 앞세우고 도주하던 중 붙잡혀 의금부로 끌려갔다가 처형당했다.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로 피신하여[66]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그의 양가(養家)에도 화가 미쳐 그의 양아버지이자 재종숙인 서광하는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하였다.
17세 된 남동생 서재우(徐載雨)만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했다.[67] 서재우는 훗날 사면됐다.[68]
1884년 초에 죽은 그의 양어머니 안동 김씨를 제외한 그의 가족은 모두 몰살되거나 화를 입었다. 그의 가족 중 형인 서재춘의 아들들이 살아남아 손자인 서명원 등을 두었고, 서재창의 처 조씨에게서 나온 유복자의 손자가 서희원이었다. 또, 기생으로 끌려간 동생 서재우의 처가 아들 서호석을 두었다.[69] 서재우의 일가 역시 겨우 후사를 잇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그의 서씨 집안에서는 광(光)자 대신 병(丙)을, 재(載)자 대신 정(廷)자를 사용하였으나 일부는 광(光)자 항렬과 재(載) 항렬을 쓰기도 하였다.
연좌제는 전라도 보성군에 있던 친 외가에도 미쳤다. 가산은 압수, 탕진되고 가족은 이산되는 참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외사촌 형제인 이교문과 그의 아들 이용순 등은 살아남았고,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23] 그의 일가족이 몰살당한 소식이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에 전해지자 그의 외삼촌들, 외사촌들 등 그의 외가 친척들은 약사발을 든 금부도사나 포졸들이 언제 나타나지 않나 하고 문덕마을 어귀를 수시로 내다보며 오랫동안 전전긍긍했다 한다. 비통한 소식을 해외에서 접한 서재필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분노와 슬픔에 치를 떨었다.[63] 서재필과 평소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그의 친구들 역시 투옥, 심한 고문을 당했다. 정변의 실패와 그의 가족, 친지들이 몰살당하자 민중에 대한 증오와 함께 조선 사회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고, 이후 일본에서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국내 문제에는 관심을 서서히 줄여나가게 되었다.
2. 3. 5. 일본으로 피신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70]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 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망명 초기 그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의 위협에 시달려 은신하였으나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이 있던 독지가의 후원으로 도쿄 근처의 판자촌에 숨어 지냈다. 일본 도착 직후 그는 혁명의 실패와 서툴렀음을 자책하며 대성통곡을 하다 실신했다. 한달 가까이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1개월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수시로 자객을 보냈고 그는 변장하고 은신해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그의 딱한 소식을 듣고 생활비와 음식과 옷을 지원해 주었다.2. 4. 1차 미국 망명
1885년(고종 22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비용이 없었고 능통하지 못한 영어 실력과,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을 피해 숨어있어야 했던 이들은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후원과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씨가 보내준 생활비와 차비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70]조병옥에 의하면, 이들은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상륙하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닥쳐올 생활위협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서광범도 얼마 동안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결국 앞서 돌아간 박영효의 뒤를 따라 그도 양반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70]
훗날 서재필은 그가 처음 미국 땅에서 살기 위해서 발버둥쳤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71]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 뿐, 말도 모르고 풍속이 다른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의 진로를 개척하려던, 고독에 겨운 참담한 생활은 그의 자립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71]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문방구점의 경영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근면과 창의력은 상점의 번영을 가져왔던 것이다.[71] 그러나 유색인종에 대한 무시와, 차별에 시달림을 당했고 열차에 탑승할 때도 짐칸으로 밀려나는 등의 모욕을 당한다.
미국 망명 초기 장로교 선교사이자 안면이 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편지로 보낸 소개장 덕에 거처를 구할 수 있었다. 미국생활 중 감리교회에 나가 감리교 신자로 개종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1887년 3월부터 1894년 3월 10일까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번갈아가며 홍국영을 부관참시하고 노륙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동시에 서재필과 서광범, 박영효도 기한을 정해 잡아들이거나 사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매일 올렸다. 이는 승정원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동일한 내용의 상소가 수시로 계속되자 고종은 나중에 이를 모두 물리쳤다.


1885년, 미국 체류 초기에 제이슨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1886년, 제이슨은 펜실베이니아주 노리스타운에 거주하며 존 웰스 홀렌백의 도움으로 해리 힐먼 아카데미(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리)에 다녔다. 그는 이때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890년, 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최초의 한국 이민자가 되었다. 그는 컬럼비아 의과대학(현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892년 의학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의사가 되었다.
1894년, 그는 전 미국 대통령 제임스 부캐넌의 먼 친척이자 미국 철도우편 서비스의 설립자로 알려진 조지 B. 아암스트롱의 장녀인 머리얼 메리 아암스트롱과 결혼했다.[7] 그들은 스테파니와 머리얼 두 딸을 두었다.
2. 4. 1. 미국 망명생활 초기
1885년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70] 영어를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을 시작으로, 막노동, 식당 서빙, 청소부, 인쇄소 전단지 돌리는 일 등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70] 윤치호에게 여러번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치호는 우편환으로 생활비를 송금해주었다.[72] 조선에서는 미국에 있는 서재필을 제거하려고 자객을 보냈다.2. 4. 2. 고등학교 재학 시절
1886년 9월 서재필은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 배리(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51] 낮에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YMCA) 야간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였다.[62]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2. 4. 3. 대학 재학 시절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의 예과(대학 예비 과정) 야간부인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 야간반에 입학, 1년간 전공 없이 주로 자연과학과 역사를 배웠다.1889년 6월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홀렌벡과의 약속 문제로 결별하게 되었다. 1890년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889년 컬럼비안 대학 의과대학(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에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낮에는 문구점을 운영하고 밤에는 학생으로 공부하였다.
2. 4. 4. 의사 면허, 미국 시민권 획득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52][62][75][76] 1893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무박사가 되었다.1892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재학 중 바로 가필드 병원(Garfield Hospital)에서 1년간의 수련의 인턴 과정을 거쳤다.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1893년 6월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 야간반을 2등으로 졸업하였다.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1893년 6월 바로 모교인 컬럼비안 대학교의 강사가 될 목적으로 모교의 조교가 되었다. 그러나 유색인종에게서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1년만에 그만두고 만다.

1894년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Muriel Mary Armstrong)과 6월 20일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카버넌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됐다.[62][77][78]

서재필은 1894년 6월 워싱턴에서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로 생계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894년 3월 김옥균의 암살 소식과, 5월 뉴스와 신문을 통해 김옥균의 부관참시 소식을 접하게 된다. 김옥균의 참혹한 죽음과 부관참시를 보고 그는 조선 조정과 조선 민중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한층 증폭시켰다.
2. 5. 복권과 귀국
1895년(고종 32년) 3월 1일 법무대신(法務大臣) 서광범(徐光範)의 건의로 작위가 회복되었다.[80][81] 5월 10일에는 미국 체류 중 외부 협판(外部協辦)에 임명된다. 8월에는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다.서재필은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주미조선 공사관에서는 그에게 공사관의 방 하나를 무료로 빌려주었고, 식비까지 제공하였다.[78]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1895년 가을, 미국을 방문 중 워싱턴 시에 들른 박영효를 워싱턴 시 내에서 10년만에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조선의 정세를 접하게 된다.
박영효를 만난 뒤 다시 조선을 개혁해 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그는 김홍집 내각이 다시 서재필에게 귀국을 요청함에 따라 귀국을 결심한다.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추가로 마련해준 여비까지 더 받고, 1895년 11월 10일 워싱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를 출발, 하와이와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게 된다.[78]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경유할 때 일본 동경의 모교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12월 26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인천항에 도착한 서재필과 그의 부인 뮤리엘은 출국 전 고용한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인력거로 비밀리에 한성부에 당도하였다.
그는 귀국 직후 외무 협판과 학부대신 서리 직을 사직한다. 후일 1900년 6월 윤용선은 그가 이름뿐이지만, 당시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된 것을 근거로 을미사변 관련자로 몰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주하기도 한다.
2. 5. 1. 개화 계몽 운동
갑신정변의 실패에 크게 낙심, 좌절했고 이를 역적시하는 고종 등의 태도, 일가족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82] 일본 망명 중에 조선 조정에서 자신을 암살할 자객을 보낸 것과 미국생활 초에 당했던 온갖 인종차별과 멸시는 그에게 원한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거의 영어로 대화했고, 독립문 기공식 때에도 영어로 연설했다.[82] 또한 윤치호 등과 살아남은 조카들이 그에게 자결로 죽은 전처의 묘소와 논산 연무대 근처에 있던 생모 성주 이씨의 묘소 위치를 알려주었으나 그는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보라는 권고를 거절한다.[83][84]그를 파양했지만 연좌제에 의해 천민으로 격하된 양아버지이자 7촌 당숙인 서광하가 찾아왔지만 못본 척 냉정하게 외면하였다.[85] 역시 연좌되어 삭탈관작 당하고 거지가 된 본부인 광산 김씨의 친정부모 김영석과 박씨 내외 역시 외면했다.[86] 서재필은 김영석 내외에게 그대가 어떻게 나의 장인인가, 자신의 딸과 어린 외손을 외면한 금수(禽獸)에게 내가 왜 인사하느냐며 박대하고 내쫓았다.[87]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서재필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자기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또는 제이슨(Philip Jason), 피제손으로 지칭하였다. 피제손은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한글로 음역한 것이다. 1900년대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다시 제선(堤仙) 또는 피제선(皮堤仙)으로 음역하였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896년 6월 2일 독립협회를 설립하였다.
1897년 5월 23일 독립관을 건립하였다.
1897년 8월 8일 '만민공동회'라는 공개 포럼을 시작하였다.
1897년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1898년 의회 헌법을 제안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서재필 추방을 압박했다.

1895년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下関条約)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귀국하여 개화파 운동 기관으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 발간에도 힘썼다. 이 무렵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서구 사상은 대한제국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고종의 칙령으로 해산되었다. 이후 1898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2. 5. 2. 조선 정부 고문
그는 조선인으로서 관직을 임명받는 것을 거부하는 대신 1896년(고종 33년) 1월 김홍집 내각으로부터 10년 계약으로 총리대신과 같은 액수였던 월봉 300원(연봉 3,600원)을 받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78] 이런 우대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78]당시 환율은 원과 달러가 같았으며 미국에서 받는 월급은 100달러였다. 이어 장기체류를 결심하고 우편으로 컬럼비아 대학 의과대학의 세균학 강사직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한편 그는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하였다. 고종 앞에서 자신을 부를 때에도 외국인 고문관과 같이 '외신'이라고 하였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였다.[78]
2. 5. 3. 독립신문 발간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순한글과 영어로 인쇄, 발간하였다.[98]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창립 자금 4400원을 지원 받아 시작하였다.[99]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박영효, 윤치호, 유길준, 이상재, 박정양, 이완용, 주시경, 김규식, 박중양 등을 영입했다. 주시경은 독립신문사 회계사무원 겸 교보원(校補員)으로 신문사의 재정과 교열을 담당했다. 언더우드 학당에서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인 김규식을 취재기자로 고용하기도 했다. 독립신문 편집 때 띄어쓰기를 반영하였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건을 기념해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57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독립신문의 논설은 서재필이 혼자 원고를 썼다고 회고했지만, 윤치호는 1893년 미국에서 서재필이 모국어 쓰기와 말하기를 거의 잊어버렸다고 기록했다.[92] 신문 발간 추진 과정에서 윤치호에게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업무를 제안하였다.[78]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문 용어보다는 쉽게 한글로 풀이하도록 했고, 처음에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발행부수 3,00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다.[46]
1896년 4월 독립신문 설립 직후 조선도 감사나 수령, 관찰사나 군수, 부윤 등은 주민이 직접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지방관이 황제나 정부에서 임명하는 지방관보다 훨씬 낫고, 훨씬 자기 소신껏 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4월 15일~4월 16일에는 독립신문 사설에도 지방관을 백성들이 직접 선출하게 할 것을 서술하였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의 아관파천을 보고 조선에 가능성이 없음을 간파하고 단념했다.
독립신문을 통해 국내외 사정, 고종과 대신들, 조정의 결정 사항, 국외 정세를 한글로 번역하여 보도하고, 그 옆면은 영어로 된 기사를 보도했다. 매관매직과 인맥, 문벌로 채용된 인사들, 탐관오리들을 비판했다.
배재학당에 출강하여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등에게 자유 민주주의와 참정권, 인권 개념, 사회 계약론 등을 가르쳤다. 협성회를 지도하고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활동하며 토론 문화를 보급했다.
2. 5. 4. 독립문 건립과 독립협회 활동
1896년 초부터 서재필은 서울 영천에 있는 영은문이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치욕스러운 존재라고 하여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이 일을 위해 1896년 7월 2일 이완용, 남궁억, 박영효, 김가진, 안경수 등과 함께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다. 독립협회의 지도자는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양기탁, 이동녕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서재필은 독립협회 고문에 선출되어 윤치호와 함께 협회의 제반사무를 총괄하였다.[72] 윤치호는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 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72]

1897년 11월 20일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迎恩門) 맞은 편에 '독립문'이 들어섰다.[110] 그는 미국에 있을 때 입수한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그린 그림을 소지하고 있었다. 독립협회가 기금을 모아 완공한 독립문은 서재필이 가지고 있던 화첩 중에서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그 규모를 축소하되 모양만은 똑같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6]
독립문은 서재필이 특별히 초빙한 건축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하였다. 후일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곽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담당했다. 토목·건축공사는 한국인 건축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고 중국인 노무자들이 노역을 맡았다.[107]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107]
후일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의 출신과 관련, 서재필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인 기사라고 언급했다.[108][108][109]
그는 사대사상의 증거인 한성부 서대문방 현저동(峴底洞) 모화관과 영은문을 헐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모화관은 조선 말기인 1897년 서재필 같은 독립협회 인사들에 의해 '독립관'(獨立館)으로 개축돼 독립협회 회관으로 쓰였다.[110]
또한 독립협회보를 발간, 자유 민권활동과 참정권,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는 조선이 신라, 고려, 조선의 1,200년간 중국의 속국이자 종으로 살아왔다며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천명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초기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탈바꿈시켜 대중 토론회를 조직하였고, 이 토론회는 만민공동회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111] 그러나 정부 관료들은 그가 황제에 불충하는 선동을 한다고 비난했다. 대한제국 조정의 수구파는 서재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가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해코지하였다가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중단하게 되었다. 한편 서재필은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배우고 유학을 가서 신문물을 보고, 보는 시야를 넓혀야 된다고 하였다. 이승만과 김규식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한 것도 서재필이었다.
1897년(고종 34년) 7월 30일의 한 강연에서 서재필은 "인간의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112]"는 발언을 하였다. 서재필은 인간의 권리는 하늘이 내린 것(천부인권)이며 아무런 잘못 없이 누구도 다른 인간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113] 한편 대한제국 중추원에서 대신의 물망에 적합한 인사들을 추천하고 그 명단에 서재필이 들어있는 것을 본 대신들은 그가 중추원을 사주하여 체제 전복을 꾀한다고 무고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배재학당과 언더우드 학당을 비롯, 학생 청년들을 모아 배재학당 회관에서 토론, 토의하는 법을 비용없이 무료로 가르쳤다. 또한 원산에 있는 원산학사에도 매주 주말에 방문하여 토론 기술과 화법을 가르쳤다. 그는 배움을 청하러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신분 차별을 두지 않고 받아들였다.
서재필의 귀국 직후부터 노비 해방문제를 상의하던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의하고, 1897년 10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하고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의 토론에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론을 공론화시켰다.
1897년 11월 1일의 제8회 토론회의 광경을 보면, 약 500명의 회중이 참석한 가운데 먼저 회원의 호명이 있었고, 다음 지난 회의 토론회 기록의 확인이 있었으며, 내빈 소개와 신입 회원 소개가 있었다.[114]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회장에게 노비 해방에 대한 것을 건의하였고, 11월 1일 독립협회 회의의 주제로 채택된다. 회장이 토론회의 주제, 이날의 주제는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 상에 대단히 불가하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전 주의 선정에 의거하여, 주제에 대한 찬성편은 힘껏 주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주제에 대한 반대편은 토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발언을 했으며, 토론회에 참석한 일반 회중은 토론에 자유롭게 토론하였다.[114]
이 중 한 발언자가 용역은 '하나의 필요한 제도이며 노비 제도(奴婢制度)는 그러한 용역의 하나라고 발언하자, 회중의 하나가 일어서서 토론자가 명제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않다고 의사 규칙 위반을 들어 항의했으며[115], 많은 회원들이 주제의 찬성편에 서서 발언하였다. 1897년 11월 1일 윤치호는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는 연설을 하고,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들의 참상을 들어 설명하였다.[116] 다음으로 주제에 대한 회중의 의견을 투표에 붙인 결과 만장일치로 주제에 대한 찬성이 의결되었으며, 주제에 찬성한 사람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가 가결됨으로써 토론회를 끝내었다.[115]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한성부의 양반 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각각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다녔다. 시중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위험한 사상이며 반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해괴한 요설, 궤변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97년 11월 1일의 노비해방에 대한 기습 토론 이후 노비 해방 풍조가 한국사회에 점차적으로 확산되었다.
1898년(고종 35년) 1월 초, 수구파 대신들이 보낸 자객이 서재필의 거처를 내습했으나, 그가 고용한 미국인 경호원의 총격을 받고 달아났다. 1898년 3월 8일 김홍륙 등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하자, 정교(鄭喬)와 최정식(崔廷植) 등은 그에게 시골로의 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
은신처에서 그는 척신파 대신들의 김홍륙 사건을 계기로 연좌 제도와 노륙형을 부활하려는 움직임을 규탄, 항의하는 소를 지어 올렸다. 은신해있던 그는 윤치호와 함께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를 주관한다. 1898년 3월 16일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수원부 유수로 임명되면서 공직과 협회 직을 겸할 수 없으므로 서재필이 회장이 되었다. 결국 그해 5월 14일 서재필이 추방령에 의해 용산을 출발, 미국으로 추방되자 그는 윤치호에게 독립협회의 권한을 일임하게 된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의 시민운동과 참정권 운동에서 서재필(Philip Jaisohn)의 목표는 한국이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러시아나 일본의 영향력 아래 지나치게 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 독립문 건립을 주도했다.[6] 저널리즘과 정치 활동 외에도 그는 현대 정치와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강연을 정기적으로 했다.[6]
그는 국가 독립을 주요 정치적 이상으로 내세우고 중국, 러시아,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중립적인 외교 접근 방식을 강조했다. 또한 공교육, 근대화된 산업, 공중 위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립협회는 정부 관리들의 비리에 대해 특히 비판적이었고, 이는 보수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서재필은 정치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공개적인 공론의 장인 국민회의를 조직했다. 국민회의는 젊은 개혁가들로부터 칭송을 받았고 전국적인 지부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897년 11월, 서재필은 독립문(독립문;獨立門) 건립을 완료했다.[8] 이때 그는 영은문(영은문;迎恩門) 정책도 종식시켰다.[9]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한국의 정책이었다(영은문은 한국어에서 영어로 대략 "환영의 문"으로 번역됨).
1898년 보수파는 서재필과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공화제로 대체하려 한다고 비난했고, 한국 정부는 서재필에게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그가 귀국한 후 한국 정부는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하고 이승만을 포함한 지도자 17명을 체포했다.
2. 5. 5. 정부의 탄압과 외세의 공격
1898년 러시아 및 청나라, 일본 등의 서재필 추방 압력과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정부의 권유로[51] 중추원 고문 직에서 해고되고, 1898년 5월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62]당시 주조선러시아공사 스페이어는 독립협회가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 할양 요구를 반대하는 구국선언 상소를 올리고 언론에 공표한 것을 두고 주조선미국공사 알렌을 방문해 항의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강력히 요청했다. 러시아 공사관의 계속된 항의에 결국 알렌은 서재필이 봉급을 받는 즉시 출국시키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주미러시아 대사 캐시니 백작은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에게 이를 전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요청했다. 일본 역시 일본의 정부고문으로 와 있는 미국인 윌리엄스를 설득, 미국 정부에 서재필의 소환을 강력히 요청하게 했다.
미국정부는 서재필이 지도하는 독립협회가 열강의 이권침탈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그가 미국 시민권자임에도 그와 같은 행위를 함을 그를 불온시하기 시작했다.
훗날 서재필은 '어느 날 미국 공사 알렌이 나를 찾아와 황제와 정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니 신변에 위해가 미치기 전에 속히 가족과 함께 귀국할 것을 권했다. 나는 내가 떠난 뒤라도 성과를 거둘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할 수 없이 다시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하였다. 서재필은 거절했고, 주조선미국공사 알렌은 서재필을 귀국시키기 위해 그의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의 친정어머니를 설득하여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를 보내게 했다. 뮤리엘이 조속한 귀국을 재촉하는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촉하면서 그의 출국을 요청했다. 그는 이 사실을 알렸고, 독립협회는 조정에 항의공문을 발송했으며, 남대문 앞에서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열고 정부의 행위를 강력 규탄했다. 서재필은 자신을 고문 직으로 초빙할 마음이 확고하다면 체류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대한제국 정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2. 5. 6. 의회설립운동 참여 (1898)
1898년 3월 서재필·윤치호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간에 의회설립문제가 논의되고, 4월 3일 독립협회토론회에서 ‘의회원을 설립하는 것이 정치상에 제일 긴요함’이라는 주제로 의회의 필요성을 공식 거론함으로써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은 표면화되었다.[118]독립협회 고문 서재필은 1898년 4월 30일자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세계 개화 각국의 선례에 따라 의회를 설립하면, 첫째 정책의 결정업무(의회)와 집행업무(내각)가 분업화되어 국정에 효율성을 기할 수 있게 되고, 둘째로 민의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어 국민과 국가가 일체감을 갖게 되며, 셋째로 관(官)과 민(民)이 협력하여 국가와 왕실의 기초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취지하에 의회설립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118]
1898년 10월 독립협회와 민중이 수구파의 7대신(신기선, 이인우 李寅祐, 심순택, 윤용선 尹容善, 이재순 李載純, 심상훈, 민영기)을 탄핵하여 모두 퇴진시키고 내각교체를 단행시킴으로써 의회설립운동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118]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운동이 계획대로 진전되자 국정의 기본방향을 관민이 협의하기 위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 개최를 정부에 제의하였다. 1898년 10월 29일 관민대공동회에서 6개조의 국정개혁강령(헌의 6조)을 결의하고 정부대신을 통해 국왕의 재가를 얻었다.[118]
그러나 1898년 11월 4일 밤 조병식·이기동 등 수구반동세력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고종을 충동하여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전복시키고 독립협회를 혁파시켰다. 이로써 눈앞에 둔 의회식 중추원의 실시도 좌절되고 말았다.[118]
2. 5. 7. 출국 (1898)
1898년(고종 35년) 5월 14일 그는 독자와 동포들에게 올리는 인사말을 남기고 독립협회 간부들의 환송 속에 서울서 낳은 큰 딸 스테파니와 부인을 대동한 채 용산에서 인천행 배에 올랐다.[120] 5월 27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해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향했다.[121] 자신을 박해하고 생명을 노린 대한제국 조정에 대해 분노한 서재필은 주변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貴國) 정부가 나를 필요없다고 하여 가는 것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인천항을 통해 한국을 떠난다. 한편 그가 조선 조정을 "귀국 정부"라고 지칭하자 예상 외의 발언에 그를 전송하러 나왔던 윤치호, 이승만, 박영효, 박정양, 이상재, 김규식 등은 충격을 받고 말문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한편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에 입사한 김규식 등 청년들에게 미국으로 유학할 것을 설득, 권고하여 그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내는 데 성공한다. 이승만, 김규식 등이 미국으로 유학한 뒤 이들의 학비를 일부 송금해주기도 하였다.[122] 그가 출국하고 그해 12월 26일 독립협회도 결국 해산되고 만다.
2. 6. 2차 미국 망명
1898년 고종의 칙령으로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자,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1898년 12월, 대한제국 정부에 상소문을 보내 양자를 들여 가계를 잇도록 허락해줄 것을 청하는 탄원서를 보냈으나[123] 대한제국 정부는 그의 탄원을 거절했다.
1898년 4월 미국으로 돌아와, 4월부터 1899년 8월까지 미국-스페인 전쟁에 미국군 군의관으로 참전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뒤 필라델피아 대학교 의학부 해부학 강사가 되어 1914년까지 해부학 강좌를 담당했다. 1899년말부터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위스터 연구소에서 병리학 연구원으로도 근무하였다.[11]
1904년 해롤드 디머(Harold Deemer)와 함께 문구 및 인쇄업체인 "디머와 자이슨 상점(Deemer and Jaisohn shop)"을 설립했다. 1915년에는 상점 이름을 필립 자이슨 회사(Philip Jaisohn Company)로 바꾸고 인쇄업에 특화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황제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는 윤치호에게 편지를 보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고, 윤치호로부터 이미 정부 고관들이 나라를 팔아치우기로 작심한 것 같다는 내용의 답장을 받았다.[12] 같은 해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온 이승만을 만나서 테오도어 루즈벨트에게 전달할 청문서의 영문을 유려하게 고쳐주는데 도움을 주었다.[124] 또한 그 해 8월 5일, 서재필은 주미국 조선공사 김윤정에게 이승만을 소개하는 소개장을 하나 써 주었다.[124]
1910년 8월 미국 체류 중 한일 합방의 소식을 접하였다. 서재필은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개혁 인사들을 제거하고 척신들로 정부를 채웠으며, 내부부터 부패한 이상 어쩔수 없다고 봤다. 1914년 9월 유길준의 부음 소식을 듣고 일제 치하 조선에 입국했다가 문상 후 바로 출국하였다.
1918년 12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회장으로 있던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에서 서재필은 조선의 독립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재개했다.[10] 1919년 4월 14일부터 1919년 4월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제1차 한국의회)를 개최했다.[10] 그는 리텐하우스 광장에 있는 성공회 필라델피아 성 삼위일체 교회의 목사인 플로이드 W. 톰킨스(Floyd W. Tomkins) 목사의 도움을 받아 21개 도시에 한국 친구 연맹을 조직하고 "한국 정보국"을 설립했다. 그는 미국 대중에게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미국 정부가 한국인의 자유를 지지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코리아 리뷰''라는 정치 저널을 발행했다.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9월 29일 서재필을 워싱턴 군축 회의 부대표로 임명했다.[13]
1924년 5월 유일한이 정한경 등과 함께 류한주식회사을 설립하고 서재필을 초대 사장으로 추대했다.[133] 1926년 12월 10일까지 류한주식회사의 사장이었다.[134] 유일한은 서재필에게 회사명을 '유일한 주식회사(New-il Han Company)'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서재필은 흔쾌히 수락했다.[134]
서재필은 회사명을 '유일한 주식회사(New-il Han Company)'로 할 것을 제안하며, "'유일한'은 세상에 하나 뿐인 기업이라는 뜻도 되거니와, '한'을 대한제국의 '한'으로 읽을 때, 새로운 한국이라는 뜻이기도 하니 그렇게 하기로 하세. 자네 이름을 걸어야 책임감을 가지고서 회사를 경영하지 않겠나."라고 유일한에게 권했다.[134],[136]
유일한은 서재필의 제안을 받아들여 회사 이름을 한글로는 류한주식회사로 하고, 영어로는 New il-han & Company라 하였다. 한국어로는 '유일한'에서 일을 빼고 유한이라는 이름만 사용하게 되었는데, '한(Han)'을 나라 한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을 때 그 뜻은 새로운 한국이 되었던 것이다.[134] 류한주식회사는 1926년 12월 10일 유일한이 정동에 유한양행을 건립하면서 소멸되었다.[135]
1926년 유일한이 귀국할 때 서재필은 조각가였던 장녀 스테파니 보이드에게 유일한에게 줄 선물을 제작하게 했다. 스테파니 보이드는 유일한의 성씨 '버들 류'를 상징하는 버드나무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여 기념 선물로 주었는데, 버드나무처럼 무성하게 번성하라는 뜻도 되었고, 그대가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는 뜻도 되었다.[137] 유일한은 이 그림을 유한양행의 회사 상표로 사용하였다.[137]
서재필은 펜실베이니아 주 대학병원에서 연구 생활을 계속하였다.[131] 1926년 암 치료 전문 병원인 잔느 병원(Geanes Hospital)에 취직하였다.

1936년부터 다시 필라델피아에서 병원을 개업, 개업의로 생활하였다.[51] 1939년에는 한민족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편지를 한국의 언론에 보내오기도 했다.
그 뒤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 성 요셉병원, 요옥 병원 등 여러 병원에서 병리학자로 근무하였으며, 종두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기도 했다. 또한 찰스턴 종합병원 병리과장이 되었다가 1936년 펜실베이니아주 펜실베이니아 체스터 병원(Chester Hospital) 피부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8년 3월 10일 안창호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간장병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차 일제강점기 한국에 입국, 경성의 안창호 장례식에 참석하고 되돌아갔다.
태평양 전쟁 초기 자신의 병원을 개소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며 병원일과 징병검사일을 동시에 한다.[142] 병원은 필라델피아에서 8마일 정도 떨어진 메디아에 있었다.[142]
1941년 1월 6일 미군 예하 무계급 명예역 군의관으로 자원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77세에 미군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기도 했다.
1944년 아내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이 사망했다.
1941년 1월 6일부터 1945년 4월까지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여 1945년 1월에는 미국 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142] 1942년 2월 말부터 3월초에 구미위원부 주최 하에 열리는 전승 축원 기념식과 한인 자유대회 참석 통보를 받고, 체스터에서 워싱턴으로 건너갔다. 서재필은 구미위원부 공관에서 이승만과 함께 기거하였다. 1942년 3월 1일, 미주와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 13단체의 대표가 워싱턴에 모여들었다. 서재필은 이승만과 함께 이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다시 체스터로 돌아갔다.

2. 6. 1. 해부학 강의와 상점 경영
1898년 4월 미국으로 돌아와, 4월부터 1899년 8월까지 미국-스페인 전쟁에 미국군 군의관으로 참전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뒤 필라델피아 대학교 의학부 해부학 강사가 되어 1914년까지 해부학 강좌를 담당했다. 1899년말부터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위스터 연구소에서 병리학 연구원으로도 근무하였다.[11]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황제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는 윤치호에게 편지를 보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고, 윤치호로부터 이미 정부 고관들이 나라를 팔아치우기로 작심한 것 같다는 내용의 답장을 받았다.[12]
1904년 해롤드 디머(Harold Deemer)와 함께 문구 및 인쇄업체인 "디머와 자이슨 상점(Deemer and Jaisohn shop)"을 설립했다. 1915년에는 상점 이름을 필립 자이슨 회사(Philip Jaisohn Company)로 바꾸고 인쇄업에 특화되었다.
2. 6. 2. 양자 입양 탄원과 거절
1898년 12월 미국으로 2차 망명을 떠난 후 서재필은 대한제국 정부에 상소문을 보내 양자를 들여 가계를 잇도록 허락해줄 것을 청하는 탄원서를 보냈다.[123] 1898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보낸 이 상소문은 김원홍에 의해 발견되었고, 1982년 9월 8일 김원홍은 자신이 소장한 것을 국사편찬위원회 최근영 교육연구사에게 공개하였다.[123]상소문의 내용은 주로 대가 끊긴 가계를 양자로 잇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123]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그의 탄원들을 거절했다. 이후 조선 사회와 조선인에 대해 분노와 환멸감을 느끼게 된 그는, 해방 후 양자 또는 봉사손을 들이라는 친척들의 권고를 스스로 물리치게 된다.
2. 6. 3. 을사 조약 전후
1905년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온 이승만을 만나서 테오도어 루즈벨트에게 전달할 청문서의 영문을 유려하게 고쳐주는데 도움을 주었다.[124] 또한 그 해 8월 5일, 서재필은 주미국 조선공사 김윤정에게 이승만을 소개하는 소개장을 하나 써 주었다.[124]2. 6. 4. 한일 합방과 독립운동 준비
1910년 8월 미국 체류 중 한일 합방의 소식을 접하였다. 서재필은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개혁 인사들을 제거하고 척신들로 정부를 채웠으며, 내부부터 부패한 이상 어쩔수 없다고 봤다. 더구나 왕족들이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고 합방 은사금을 받는 것을 보고 실망,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는 친구 윤치호와 유길준이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1914년 9월 유길준의 부음 소식을 듣고 일제 치하 조선에 입국했다가 문상 후 바로 출국하였다.
1918년 12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회장으로 있던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에서 서재필은 조선의 독립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2. 6. 5. 독립운동 참여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재개했다.[10] 1919년 4월 14일부터 1919년 4월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제1차 한국의회)를 개최했다.[10] 이 대회 이후, 서재필은 자신의 에너지와 사유 재산을 한국의 자유를 위해 헌신했다.그는 리텐하우스 광장에 있는 성공회 필라델피아 성 삼위일체 교회의 목사인 플로이드 W. 톰킨스(Floyd W. Tomkins) 목사의 도움을 받아 21개 도시에 한국 친구 연맹을 조직하고 "한국 정보국"을 설립했다. 그는 미국 대중에게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미국 정부가 한국인의 자유를 지지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코리아 리뷰''라는 정치 저널을 발행했다.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9월 29일 서재필을 워싱턴 군축 회의 부대표로 임명했다.[13]
2. 6. 6. 유한양행의 초대 사장 (1924)
1924년 5월 유일한이 정한경 등과 함께 류한주식회사을 설립하고 서재필을 초대 사장으로 추대했다.[133] 1926년 12월 10일까지 류한주식회사의 사장이었다.[134] 유일한은 서재필에게 회사명을 '유일한 주식회사(New-il Han Company)'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서재필은 흔쾌히 수락했다.[134]서재필은 회사명을 '유일한 주식회사(New-il Han Company)'로 할 것을 제안하며, "'유일한'은 세상에 하나 뿐인 기업이라는 뜻도 되거니와, '한'을 대한제국의 '한'으로 읽을 때, 새로운 한국이라는 뜻이기도 하니 그렇게 하기로 하세. 자네 이름을 걸어야 책임감을 가지고서 회사를 경영하지 않겠나."라고 유일한에게 권했다.[134],[136]
유일한은 서재필의 제안을 받아들여 회사 이름을 한글로는 류한주식회사로 하고, 영어로는 New il-han & Company라 하였다. 한국어로는 '유일한'에서 일을 빼고 유한이라는 이름만 사용하게 되었는데, '한(Han)'을 나라 한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을 때 그 뜻은 새로운 한국이 되었던 것이다.[134] 류한주식회사는 1926년 12월 10일 유일한이 정동에 유한양행을 건립하면서 소멸되었다.[135]
1926년 유일한이 귀국할 때 서재필은 조각가였던 장녀 스테파니 보이드에게 유일한에게 줄 선물을 제작하게 했다. 스테파니 보이드는 유일한의 성씨 '버들 류'를 상징하는 버드나무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여 기념 선물로 주었는데, 버드나무처럼 무성하게 번성하라는 뜻도 되었고, 그대가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는 뜻도 되었다.[137] 유일한은 이 그림을 유한양행의 회사 상표로 사용하였다.[137]
2. 6. 7. 의사 생활
서재필은 펜실베이니아 주 대학병원에서 연구 생활을 계속하였다.[131] 1926년 암 치료 전문 병원인 잔느 병원(Geanes Hospital)에 취직하였다.1936년부터 다시 필라델피아에서 병원을 개업, 개업의로 생활하였다.[51] 1939년에는 한민족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편지를 한국의 언론에 보내오기도 했다.
그 뒤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 성 요셉병원, 요옥 병원 등 여러 병원에서 병리학자로 근무하였으며, 종두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기도 했다. 또한 찰스턴 종합병원 병리과장이 되었다가 1936년 펜실베이니아주 펜실베이니아 체스터 병원(Chester Hospital) 피부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8년 3월 10일 안창호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간장병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차 일제강점기 한국에 입국, 경성의 안창호 장례식에 참석하고 되돌아갔다.
2. 6. 8. 일제 강점기 후반
태평양 전쟁 초기 자신의 병원을 개소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며 병원일과 징병검사일을 동시에 한다.[142] 병원은 필라델피아에서 8마일 정도 떨어진 메디아에 있었다.[142]1941년 1월 6일 미군 예하 무계급 명예역 군의관으로 자원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77세에 미군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기도 했다.
1944년 아내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이 사망했다.
2. 6. 9. 광복 직전
1941년 1월 6일부터 1945년 4월까지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여 1945년 1월에는 미국 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142] 1942년 2월 말부터 3월초에 구미위원부 주최 하에 열리는 전승 축원 기념식과 한인 자유대회 참석 통보를 받고, 체스터에서 워싱턴으로 건너갔다. 서재필은 구미위원부 공관에서 이승만과 함께 기거하였다. 1942년 3월 1일, 미주와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 13단체의 대표가 워싱턴에 모여들었다. 서재필은 이승만과 함께 이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다시 체스터로 돌아갔다.2. 7.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서재필은 미국에서 한국의 광복과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했다.[13] 미군정이 실시된 후 10월,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귀국길에 올랐고,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공항까지 나가 이승만 내외를 배웅했다.1946년 10월, 서재필은 미군정에 의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관선)으로 선출되었고, 그 해 12월에 의원직에 취임했다.
1947년 1월 25일, 이승만이 미국 국무부 내 일부 인사가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고 비판하자,[144] 하지는 격분했다.[145] 하지는 이승만을 견제할 대안으로 서재필을 고려했다.[146] 미군정은 이승만·김구에 대항할 세력으로 서재필을 급히 귀국시키려 했다.[147][148][149]
미군정은 김규식과 서재필의 협력을 기대했다. 미군정은 두 사람의 제휴가 김규식 노선을 강화할 것이라 판단했다.[52] 김규식도 서재필의 귀국을 원했다. 과도입법의회 의장 김규식은 서재필에게 여러 차례 귀국을 요청했다. 서재필은 김규식의 노선에는 동의했지만, 고령을 이유로 정치 참여를 사양했다.[52]
1947년 2월 27일, 서재필은 하지 중장의 추천으로 군정최고고문에 추대되었다.[150]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다.
1947년 3월 11일, 서재필 박사 환국을 환영하기 위해 을우회관에서 160명의 환영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이시영, 부위원장은 이극로, 홍명희, 홍남표, 윤기섭, 김항규였다.[151]
미군정의 요청을 거듭 고사하던 서재필은 미군정청 사령장관 하지의 요청을 수락, 미군정청 최고정무관 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특별의정관으로 1947년 7월 1일 귀국했다.


1947년 7월 1일 오후 4시, 서재필은 49년 만에 85세의 나이로 귀환했다. 부두에는 이승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김형민, 김용무 등이 마중 나왔다.[152]

1947년 7월 12일 오후 2시, 서울운동장에서 '서재필귀국환영대회'가 개최되었다. 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규식의 개회사, 이승만의 환영사가 있었다. 서재필은 서투른 한국어로 답사했다.[153] 그는 한국말을 잊었고 한국 사정을 잘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하면서도,[154] '힘을 다하여 한국 인민들을 도와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며, 다만 하지 사령관에게 진언할 따름이다'고 덧붙였다.[154]
윤치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귀국 직후 윤치호 묘소를 참배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의친왕 등을 찾아가라는 권유를 거절했다. 김규식, 여운형, 김성수, 김구 등을 만나고, 김성수, 이광수, 조병옥 등에게서 국내 정세를 들었으나, 파벌 다툼이 여전하다며 50년 전과 같다고 한탄했다.
1947년 7월 3일 하지 중장의 최고정치고문으로 조미특별의정관에 취임했다.[147] 하지 미 육군 중장에게 자문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했다.[155] 매일 중앙청에서 근무했고,[154]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매주 금요일 영어로 자유 민주주의를 설명하고, 손금성 박사 등이 한국어로 통역했다.[154]
1947년 8월 15일 해방 2주년 기념식에서 서재필은 국권 회복과 통일된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파를 초월한 조선인민의 정부를 강조했다.[156]
1947년 11월 5일 산업 부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치에만 몰두하는 조선의 현실을 비판했다.[157] 인민이 주인인 정부, 산업 부흥과 도덕을 갖춘 나라를 강조하며, UN을 통한 진정한 애국자 선출을 주장했다.[157]
1948년 3월 14일 신민일보 사장 신영철과의 면담에서, 이 박사의 반소운동 때문에 미소관계가 험악해졌다고 말했다.[158] 전쟁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하며, 평화를 강조했다.[158]
1948년 3월 18일 서재필이 5·10 선거 반대의사를 표명하자 총선거대책위원회 등은 강력히 반발했다.[159]
1948년 4월 10일 기자회견에서 남북협상이 잘 되어 통일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160]
1948년 5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잘 되었다고 호평했다. 남북 통일 선거를 희망하지만 현실과 이상이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우선 힘을 모으고 자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북회담과 같은 민족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161]
1948년 5월 29일 '反단독선거론 측에서 단독정부론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서재필의 정계출마 공작을 일으키고 여기에 김구·김규식도 가담한 것 같다'는 풍설에 대해 서재필은 '원칙적으로 남북통일운동은 옳으나 금번 그러한 운동[164]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라고 말하였고, 김구·김규식은 '우리가 단선을 반대한 사람들인 만큼 단정에 관여할 이유가 만무하며 그런 운동은 전연 사실무근이다'라고 말하였다.[165]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결정되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1948년 6월 11일 흥사단계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최고 정치지도자로 추대하고자 간원문을 보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민의 뜻에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 이 나라에는 그러한 인격자가 한분 계시니 그는 서박사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163] 정인과, 백인제 외에도 최능진과 그 계열 인사들이 서재필의 대통령 후보 출마를 주도했다.[166]

1948년 6월 20일, 서재필은 흥사단계 독립협회의 간원문에 대해 '조국의 독립이 위태로운 이때 이러한 정당조직은 우리나라를 더욱 혼란케 할 뿐'이라며 거절했다.[167]
1948년 6월 24일 서박사추대연합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168] 7월초,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을 비롯한 1,929명이 서재필에게 대통령 출마를 요청했으나,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서재필 추대 운동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의해 견제됐다.[163] 6월 24일 조선언론인협회에서 서재필, 안재홍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1948년 7월 4일 서재필은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밝혔다. 그는 '나는 과거에도, 지금도, 장래에도 관직에 입후보하지 않을 것이며, 설혹 그 지위가 제공되어도 수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국 시민이며 미국 시민으로 머무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169]
1948년 7월 20일,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추천되어 1표를 얻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서우석은 서재필이 미국 국적이라며 후보자격이 없다고 주장, 서재필의 1표를 무효처리하는 데 앞장섰다.[170][171]
1948년 8월 14일, 서재필은 해방 3주년 축사에서 '권리와 책임은 국민에게 있으며, 독재자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니, 국민은 감정 싸움을 포기하고 합심하여 신정부를 육성해야 한다. 진정한 독립정부로 발전하면 죽어서라도 만족하겠다.'고 말했다.[172]
1948년 8월 29일, 서재필은 고국을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8·15선거는 옳지 않다', '신정부는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청년에게 직장을 주라'고 말했다. 그는 조선 체류 중 가장 기쁜 것은 민족이 처음으로 선거권을 얻은 것이고, 슬픈 것은 청년들이 일없이 정당만 왕래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마라. 정부에게 맹종만 하지 말고 정부는 인민의 주인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마라.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 하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라고 강조했다.[173]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기자 김을한에게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 모르고 당파 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50년이 지났지만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라고 토로했다.[174] 그는 과도입법의원 선거와 시도지사 선거로 선출된 의원과 시도지사를 윗사람처럼 대하는 시민들에게 잘못을 지적했지만, 시민들은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고 한다.
1948년 9월 10일, 미군정청 최고의정관 직을 사직했고, 다음 날인 9월 11일 '고국 떠나며 동포 여러분께'라는 대국민 서한을 기고했다. 그는 '첫째로 여러분의 권한을 가치있게 효용할 것, 둘째로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사람이 될 것, 셋째로 남자들이 부녀자와 자녀들의 복지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175]
1948년 9월 11일 오전 8시 40분경, 서재필은 김구, 이용설, 손원일, 김형민, 강진국(姜辰國) 등 백여 명의 환송을 받으며 인천을 떠났다. 그는 통일독립국가 수립 방법에 대해 '4천년 역사를 가진 대한민족이므로 분리될 리 없다. 당파싸움과 정치이권을 떠나 국민의 권리를 잘 이용하면 자주독립국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답했다.[176]
배 안에서 음력 8월 15일 밤, 서재필은 선장에게 한국 음식을 마련하게 하고 갑판 위에서 남녀 학생들과 파티를 열었다. 그는 유학생들에게 '미국에 가거든 군인들이 쓰는 비속어를 쓰거나 어깨를 으쓱하는 몸짓 같은 것을 하지 말고, 독립국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살려 올바른 영어를 쓰도록 하시오.'라고 조언했다.
2. 7. 1. 광복 직후 (1945~1946)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는 미국에서 한국의 광복과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하였다.[13]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고 10월, 미국에 체류하던 이승만은 비행기편으로 필리핀 마닐라와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귀국했다. 서재필은 출국하는 이승만을 배웅하러 필라델피아 공항까지 직접 마중나가 이승만 내외를 전송하였다.1946년 10월, 미군정에 의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관선)으로 선출, 그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취임하였다.
2. 7. 2. 귀국 (1947)
1947년 1월 25일, 이승만이 '미 국무성내의 일부 관리가 공산주의에 기울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발표하자[144], 하지는 이승만에게 격분하였다.[145] 하지는 이승만의 대안 모색에 매달려 서재필을 이승만의 대안으로도 고려하였다.[146] 미군정은 이승만·김구에 맞서는 지도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재필을 급히 귀국시키고자 하였다.[147][148][149]미군정은 김규식과 서재필의 제휴, 협력을 은근히 바랐다. 미군정은 두 사람의 제휴가 성립되면, 그 무렵 미군정이 뒷받침하던 김규식 노선이 현실적으로 큰 지지를 얻게 되리라고 판단했다.[52] 김규식도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고 있었다. 과도입법의회 의장 김규식의 추천을 받고 서재필에게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하였다. 서재필은 김규식의 노선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나이가 많음을 내세우며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를 사양했다.[52]
1947년 2월 27일, 서재필은 하지 중장의 추천으로 군정최고고문에 추대되었다.[150] 그는 좌우합작운동에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1947년 3월 11일 서재필 박사 환국을 환영하기 위하여 을지로2가 을우회관(乙友會館)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를 대표한 160명의 서박사환국환영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이시영, 부위원장은 이극로, 홍명희, 홍남표, 윤기섭, 김항규였다.[151]
몇 차례 미군정의 요청을 고사했던 서재필은 미군정청 사령장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군정청 최고정무관 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받아 1947년 7월 1일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1947년 7월 1일 오후 4시, 서재필은 49년만에 85세의 고령으로 귀환하였다. 부두에는 이승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민정장관, 김형민 서울시장, 김용무 대법원장 등이 마중을 나왔다.[152]
1947년 7월 12일 오후 2시, 서울운동장에서 '서재필귀국환영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과 각 단체대표자 등 5만여명이 참석, 김규식의 개회사가 있었고, 이승만의 환영사가 있었다. 서재필은 서투른 한국어로 답사를 하였다.[153] 귀국 인사로 서재필은 '자신이 한국말을 잊어버렸으며 한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였다.[154] 그러나 '힘을 다하여 한국 인민들을 도와주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며, 다만 하지 사령관에게 진언할 따름이다'고 덧붙였다.[154]
한편 그는 윤치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귀국 직후 충청남도 아산의 윤치호 묘소를 참배하였다. 기자회견장에서 의친왕 등이 존재하니 그들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는 기자들의 요청을 그는 거절하였다. 귀국 직후 김규식, 여운형, 김성수, 김구 등을 찾아 면담하기도 하고, 김성수, 이광수, 조병옥 등을 만나 그들로부터 국내 정세를 접했으나, 파벌 다툼이 여전한 것을 보고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파벌 다툼은 여전하다며 한탄하였다.
2. 7. 3. 귀국 후 정치활동 (1947~1948)
1947년 7월 3일 하지 중장의 최고정치고문으로 조미특별의정관에 취임했다.[147] 하지 미 육군 중장에게 자문을 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였다.[155] 매일 중앙청 207호실에 출근해 근무하였고,[154]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매주 금요일 영어로 자유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손금성 박사나 다른 번역가들이 한국어로 통역했다.[154]1947년 8월 15일 해방 2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서재필은 국권 회복과 통일된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당파를 초월하여 국권 회복 후 조선인민으로 조직된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156]
1947년 11월 5일 산업 부흥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정치에만 몰두하고 방향 없는 조선의 현실을 비판했다.[157] 인민이 주인인 정부, 산업 부흥과 도덕을 갖춘 나라를 강조하며, UN을 통한 대표자 선거에서 진정한 애국자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57]
1948년 3월 14일 신민일보 사장 신영철과의 면담에서, 이 박사의 반소운동 때문에 미소관계가 험악해졌다고 말했다.[158] 전쟁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하며, 평화를 강조하였다.[158]
1948년 3월 18일 서재필이 5·10 선거 반대의사를 표명하자 총선거대책위원회 등은 강력히 반발하였다.[159]
1948년 4월 10일 기자회견에서 남북협상이 잘 되어 통일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160]
1948년 5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잘 되었다고 호평했다.[161] 남북 통일 선거를 희망하지만 현실과 이상이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우선 힘을 모으고 자립할 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북회담과 같은 민족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161]
2. 7. 4. 대통령 추대운동과 사양 (1948)
1948년 5월 29일 '反단독선거론 측에서 단독정부론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서재필의 정계출마 공작을 일으키고 여기에 김구·김규식도 가담한 것 같다'는 풍설에 대해 서재필은 '원칙적으로 남북통일운동은 옳으나 금번 그러한 운동[164]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라고 말하였고, 김구·김규식은 '우리가 단선을 반대한 사람들인 만큼 단정에 관여할 이유가 만무하며 그런 운동은 전연 사실무근이다'라고 말하였다.[165]남한 단독 정부 수립 결정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1948년 6월 11일 흥사단계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최고 정치지도자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재필에게 간원문을 보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민의 뜻을 알아서 이에 충실히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 이 나라에는 그러한 인격자가 한분 계시니 그는 서박사입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서재필이 '정계 최고지도자로 출마하시기를'간청했다.[163] 정인과, 백인제 외에도 흥사단 계열 중 최능진과 최능진 계열 인사들이 서재필의 대통령 후보자 출마 운동을 주도했다.[166]
1948년 6월 20일, 서재필은 흥사단계 독립협회가 보낸 간원문(懇願文)에 대해 '조국의 독립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위기에 서 있는 이때 이러한 정당조직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더욱 혼란케 할 뿐이오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라는 말로 이를 거절하였다.[167]
그럼에도 1948년 6월 24일 서박사추대연합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168] 7월초,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을 비롯한 1,929명이 서재필에게 '한국 초대 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하니 대통령 출마를 승낙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냈으나,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노라'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한편 서재필 추대 운동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의해 공개적으로 견제됐다.[163] 6월 24일 조선언론인협회에서 서재필, 안재홍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1948년 7월 4일 서재필은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피력하였다. '나는 조선 각지로부터 나에게 조선 대통령 입후보를 요청하는 동시에 내가 출마하는 경우 나를 지지하겠다는 허다한 서신을 받았다. 나는 그들의 후의에 깊이 감사하는 한편, 나는 과거에 있어 그 관직에 입후보한 일 없으며 지금도 그리고 장래에도 그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그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이다. 설혹 나에게 그 지위가 제공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터이다. 나는 미국 시민이며 또한 미국 시민으로 머무를 생각이다.'[169]
1948년 7월 20일,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로 추천되어 1표를 얻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서우석은 서재필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후보자격이 없다고 주장해 서재필이 득표한 1표를 무효처리 시키는 데 앞장섰다.[170][171]
1948년 8월 14일, 서재필은 다음과 같은 해방 3주년 축사를 하였다. '권리와 책임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며 어떠한 독재자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니 국민은 감정의 싸움을 포기하고 합심하여 신정부를 육성하여 가기를 바란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조선 민족이 참으로 자성하여 진정한 독립정부로 발전하면 죽어서라도 나는 만족하겠다.'[172]
2. 7. 5. 출국 (1948)
1948년 8월 29일, 서재필은 고국을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8·15선거는 옳다고 볼 수 없다', '신정부는 무엇보다도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청년에게 직장을 주라'고 발언했다. 그는 조선 체류 중 가장 기쁜 것은 민족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권을 얻은 것이고, 슬픈 것은 청년들이 일이 없어 1일의 식사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할 일 없이 정당만 왕래하며 쓸 데 없는 건의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마라. 정부에게 맹종만 하지 말고 정부는 인민이 주인이라는 것이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 하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나의 평생 소원이다.'''라고 강조했다.[173]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기자 김을한에게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 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50년이 지났지만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라고 토로했다.[174] 그는 과도입법의원 선거와 시도지사 선거로 선출된 입법의원과 시도지사를 상관처럼 깎듯이 대하는 시민들에게 선거로 뽑은 것은 국민의 대리인이지 윗 사람이 아닌데, 윗 사람처럼 깎듯이 존대한다.'며 잘못을 지적했지만, 시민들은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고 한다.
1948년 9월 10일, 미군정청 최고의정관 직을 사직하였고, 다음 날인 9월 11일에는 '고국 떠나며 동포 여러분께'라는 제목으로 대국민 서한을 기고하였다. 이 서한에서 그는 '첫째로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권한이란 특권을 가치있게 효용할 것을 배웁시다. 둘째로 현실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마지막으로 할 말은 나의 친애하는 남자 친구들이 자기네 부녀자와 자녀들의 안락과 복지와 편의를 위해서 일층 유의하는 동시 노력하여 주기 바라는 바이다.'라고 당부했다.[175]
1948년 9월 11일 오전 7시 반, 서재필은 김구, 이용설, 손원일, 김형민, 강진국(姜辰國) 등 백여 명의 환송을 받으며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과 비서 임창영(林昌榮)을 대동하고 숙소인 조선호텔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였다. 오전 8시 40분경 인천에 도착하여 기자와 문답을 가졌는데, 통일독립국가를 조속히 수립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에 '4천년 역사를 가진 대한민족이므로 분리될 리 없다. 당파싸움과 정치이권을 떠나 국민의 권리를 잘 이용하면 자주독립국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답했다.[176]
승선한 이후에도 창 밖으로 인천 제물포 부둣가를 한참 쳐다봤다고 한다. 당시 이 선박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미국에 가는 유학생 32명이 동승하였다. 그는 배 안에서 음력 8월 15일 밤, 선장에게 한국 음식을 특별히 마련하게 하고 갑판 위에서 남녀 학생들과 파티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미국에 가거든 쓸데없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고, 군인들이 쓰는 비속어를 쓰거나 어깨를 으쓱하는 몸짓 같은 것들을 하지 말고, 독립국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살려 서투르더라도 점잖고 올바른 영어를 쓰도록 하시오.'라고 조언했다.
2. 8. 생애 후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 서재필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군정(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은 그를 최고 자문관으로 초청했다. 1946년 12월, 그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Interim Legislative Assembly)에 선출되었다. 1945년 5월, 자유주의(Liberalism in South Korea) 및 온건 사회주의(Progressivism in South Korea) 지식인들은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유엔(United Nations)이 첫 대통령 선거일을 확정하자, 김대중을 포함한 3,000명이 그에게 대통령 출마를 요청했지만, 그는 결국 거부했다.
서재필은 당선자 이승만과의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국가를 위해 정치적 통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1948년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2월 29일 심장마비를 일으킨 지 일주일 만인 1951년 1월 5일, 한국 전쟁 중 87세 생일 이틀 전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고, 그의 유골은 필라델피아의 비브 교회에 안치되었다. 1994년 그의 유해는 한국으로 송환되었고,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11]
1947년 이승만이 세운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되자, 권력이 커지고 있는 이승만을 견제할 인물을 찾던 미군정(在朝鮮アメリカ陸軍司令部軍政庁)은 서재필을 미군정 최고 고문으로 초빙하려 했다. 서재필은 처음에는 이를 고사했으나, 여운형, 이승만 등에게서도 초청을 받아 귀국했다. 그러나 점차 이승만과 대립하게 되었고, 김성수, 이광수, 조병옥과의 대담에서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파벌 싸움은 여전하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후 좌우 협작 운동을 지지했다. 1948년 7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지지자들에 의해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이승만과 끝내 화합하지 못하고 출마를 고사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1년 1월 5일 암과 노환으로 필라델피아 몽고메리 병원에서 사망했다.
2. 8. 1. 입원과 사망 (1948~1951)
1948년 9월 미국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다시 의료활동에 전념했다.[177] 그러나 후두암과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1950년 6월 미국에서 방송을 통해 한국 전쟁 소식을 접하였고, 6월 병세가 악화되면서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에 입원하였다. 주미 한국대사 장면은 수시로 문병하였으며, 서신을 보내 입원 중인 서재필의 빠른 완쾌를 비는 한편, 당시 전쟁 상황을 전하며 '지금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는 것과 '자유로운 분위기 내에서 제2대 총선거가 진행되었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휴전을 못보고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5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병실에서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일생을 마쳤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88세였다.
2. 8. 2. 사후
장례식은 필라델피아 메디아 교회에서 간소하게 진행되었다.[11] 유해는 화장되어 필라델피아 비브 교회에 안치되었다.[11] 1994년 그의 유해는 한국으로 송환되었고,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11]3. 사상과 신념
3. 1. 독립에 대한 좌절과 희망
서재필은 개화당에 참여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킬 당시에는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193] 미국에서 귀국한 후에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며 언론과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초기에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친일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다.[193] 1896년 귀국 직후 발표한 글에서는 조선인이 과학, 예술 분야에서 학습 능력이 뛰어나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추고 있어 조선이 동양의 강대국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며 민족성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193]1904년 4월, 한성 감옥에 수감 중이던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러일전쟁을 수행 중인 일본이 옳은 편에서 문명화된 국가들의 지지를 받아야 할 원칙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하나님의 정의와 문명을 위해 싸우는 국가와 함께하기를 기도한다고 언급하며 일본의 의도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193] 그러나 1918년 11월,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한국이 일본의 밥이 되었고 모든 권리가 박탈되었으며 백성들이 승전국의 노예가 되어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고 기술하며, 이 억울한 사정을 알리고자 한다고 밝혀, 그 사이에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음을 보여준다.[193] 이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제1차 한국의회)를 개최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3. 2. 국민 의식 개조론
그는 갑신정변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실패 원인을 지지 세력의 부족과 민중의 호응이 미진했던 탓으로 보았다. 따라서 부당한 정부와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려면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권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참정권과 민권 의식을 심어주고, 인권의 신성불가침을 말한 천부인권론과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을 소개했다. 모든 인간의 인권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며, 임금도 부모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배재학당과 기독교청년회관, 원산학사의 학생들에게 토론의 방법을 가르쳤다. 회의에서 누군가 의견을 개진하면, 그 의견에 대한 반론과 반박을 제기하는 법을 가르쳤다. 양자의 생각과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면 그 중 한발 물러서서 절충적인 방법을 찾도록 하기도 했다. 그리고 토론 중에 감정적인 발언이나 인신공격은 하지말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시민이 합리적인 판단력을 갖춘 뒤에야 시민으로서 제 구실을 하여 참정권과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독립신문을 통해 국민 계몽과 민권 의식의 고취를 목적으로 움직였다. 밖으로는 열강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이를 국민에게 자세히 알림으로써 새로운 각성을 갖게 하고, 안으로는 국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국민 상하가 합심 협력하여, 충국 애국하되, 세계 대세와 신문명에 눈을 떠야만 된다고 외쳤다.
그는 상호간에 인권을 존중하고 정부 관리나 일반 국민이 각자의 직책을 다하되 뜬 이름보다는 실천을 존중하도록 요청했다. 온 국민이 총력을 기울여 국민 교육을 장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권을 가졌으므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길을 닦고 수도 시설을 개선하는 동시에 의복, 음식, 거처를 깨끗이 하여 위생에 주의해야만 국민의 품위가 향상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온 국민이 뭉쳐서 국가 주권을 수호하도록 강력히 촉구했다.
3. 3. 자유주의
서재필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아무도 상대방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자격은 없다고 역설했다. 이는 1896년 귀국 직후부터 1898년 5월까지 각지의 강연과 연설을 통해 천부인권설을 주장하며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역설한 것이다. 1897년 7월 30일의 한 강연에서는 '인간의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윤치호는 그의 이 발언을 일면 수긍하면서도 너무 나갔다고 평가했다.3. 4. 노비 해방
1895년 12월, 서재필은 귀국 직후 윤치호와 노비 해방 문제를 상의하였다.[194] 1897년에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이 문제를 상정하여 노비 해방에 대한 여론을 확산시켰다.[194] 1897년 11월 1일에 개최된 독립협회 토론회에서는 '동포 형제 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 상에 대단히 불가하다는 문제'를 주제로 선정하여 토론을 진행했다.[194] 일반 회중이 자유롭게 토론에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했으며, 윤치호는 노비 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지적했고,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참상을 언급하며 노비제도의 부당함을 역설하였다.[194] 토론회 결과,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노비제 폐지에 찬성하였고,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해방하자는 결의를 이끌어냈다.[194] 당시 참관자에 의하면 토론은 매우 진지하였으며, 토론회 결과 100명 이상의 노비들이 자발적으로 해방되었다고 한다.[194]3. 5. 보편교육론
서재필은 민중에 대한 평등한 교육 및 기회의 부여로 국민 전체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국가 경제도 부강해지며 여성들의 권리도 향상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여자에게도 학문을 가르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여성 교육에 힘쓸 경우 어머니의 지식과 학문이 높아지게 되므로 자연히 우리의 후세들이 총명한 사람이 된다고 역설하였다.서재필은 국가와 개인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든지 배워야 함을 강조하였고, 그는 이러한 교육을 통해 국가의 산업을 일으키고 도덕과 사회 풍속을 개혁해 나갈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다만, 그는 배워서 힘쓸 것이 고답적인 이론이 아니라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는 기술, 실용적인 학문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3. 6. 탈가족주의
서재필은 후사가 끊어진다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서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196] 그는 이미 가족관념을 청산한 인물이었다.[197] 문중에서 양자를 세우려고 권고하였을 때, 서재필은 '쓸데없는 일들이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둘이나 있소. 이제 새삼스럽게 양자를 세운다니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소이다.'하고 사양하였다.[196] 종증손 중의 한 명을 봉사손으로 들이라는 조카의 부탁도 거절하였다. 서재필은 '이런 생각은 모두 고루한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오.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사상을 길러가는 것이 우리나라가 빨리 독립할 수 있는 길이오.'라며 '부지런히 일이나 하고 착실하게 살기 위한 새로운 힘을 연구하시오.[196]'라고 하였다.서재필은 한국인의 가족 관념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가족주의가 바로 끼리끼리 해먹는 패거리주의를 만드는 원인이며, 이방인을 배척하는 근간이라 생각하고 끔찍히 여겼다. 서재필은 지나친 형식 위주의 완고한 족벌의식은 조국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198] 송건호는 서재필이 형식과 금전과 동양적인 가족 관념을 청산한 크나큰 인물이었다[198] 라고 칭송했다. 서재필은 가족주의와 혈연에 대한 집착이 사회를 폐쇄적, 배타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봤다. 그는 어설픈 온정주의와 가족주의가 사회를 폐쇄화시키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죽고 못살듯이 가족을 찾더라도 큰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터지면 자기 혼자 살려고 도망칠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지적했다.[119][199]
그는 두 딸을 아꼈지만 두 딸에게 공짜로 선물을 주지 않고, 두 딸이 구두를 닦거나 집안일을 하게 한 뒤에 그 대가로 용돈을 주었다. 서재필의 이러한 풍모를 두고 그의 둘째딸인 뮤리엘 제이손/Muriel Jaisohn영어은 후에 '파파는 심플맨이에요.'라고 하였다.[198] 또, 서재필은 윤치호가 1920년대부터 추진한 족보 폐지 운동, 제사 폐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독려하였다.
3. 7. 유교 및 동도서기론에 대한 관점
서재필은 유교 사상에 대해 환멸감을 드러냈다. 그는 동도서기론조차도 부정적으로 판단하였다. 서재필은 '동도서기론'이 아니라, 서양의 생명과학의 문명을 인문, 문화 과학에 직접 수용하려 했던 것이다.[200] 서재필은 동양의 가치관과 도덕을 버리거나 포기하거나 재실험하였다. 그는 동도서기론의 전통과 보수성, 그리고 유교적 인간관계에 대해 냉소적이었다.[200]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 '조선에 아들과 딸, 친구들이 환자의 병구완할 생각들을 아니하고, 남의 일 보듯이 보고들 있어서, 조선 인민이 인정있고, 의리있고, 경계가 없다고 할 수 없음'[201]을 지적하였다.[200] 그는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이지만 중병에 걸리거나 아쉬운 처지에 놓이면 수시로 표변하는 인심을 지적했다.
서재필은 병이 없어지면, 나라가 태평하고 군민이 안락하게 된다고 보았다. 실학파, 개화파는 정신과학(道)에서 경제 사상을 도출하였지만, 서재필은 자연과학에서 병을 직접 치유할 과학 기술과 학문을 도출한 것이다.[200] 또한 그는 유교 사상이 말하는 계급적 인간관계가 인간의 평등권과 존엄성을 침해하고 나이나 지위로 다른 사람을 깔아뭉개는 권위주의와 폐쇄성 등 악습의 근간이 되었다고 역설했다.
3. 8. 기술, 노동 장려론
서재필은 농·공·상을 천시하는 고루한 전근대적 사고와 전통을 비판했다.[202] 글공부와 고답적인 철학 이론만을 숭상하고 노동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며, 물자와 노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글공부와 고상한 이론이 있을 수가 있겠느냐며 반문하였다. 서재필은 땀흘려 노동하는 것은 창피스러운 일이 아니며, 노동을 천시하고 창피하게 여기는 인간이야말로 천박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고 하였다.그는 기술 도입과 신기술 개발 역시 국력을 부강하게 하는 지름길임을 역설하였다. 농사의 후진성이 농사 짓는 법과 종자 개량에 소홀한 때문 임을 지적 하면서 농사에 관해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선진 기술 등을 배워 소득을 높일 것을 주장하였다.[195] 특수 작물이나 과실수 기르는 법, 묵혀 둔 농토와 산지를 개발하여 이용하는 법, 고기 잡는 기술과 해양 자원 개발, 그리고 제조업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등 을 익혀 실행할 때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195] 농사 외에도 그는 자원의 개발과 제조업 등의 기술 역시 중요함을 지적했다.
그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 정립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노동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며, 국가가 부강해지려면 제조업 기술과 지식 등을 힘써 익혀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고 해도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론, 학문은 좋은 이론, 좋은 학문이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3. 9. 민중 계몽 운동
서재필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민중을 지도하여 '자주독립의 완전한 국가'를 만든다는 뜻으로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립했다.[203] 독립협회는 초기에는 개혁 인사와 고급 관료들의 사교 모임 수준이었으나, 점차 개혁을 추구하는 관료와 지식인층이 모이는 사회단체로 변화했다. 협회가 만민공동회 개최를 시작으로 민권을 지키기 위한 사회운동을 벌이자, 보수 세력은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협회 요인 17명을 체포했다.[203]그는 개혁 이전에 민중들의 의식 수준이 개화되고 합리적으로 변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배재학당과 협성회를 통해 토론을 보급하려 했다.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105] 그는 토론하는 문화가 백성들 사이에 정착되기를 바랐고, 자신의 토론회에 참석하는 젊은이들을 통해 토론 문화가 확산되기를 기대하였다. 또한 그는 유길준의 민중 계몽[88] 주장에 적극 공감하였다.
한편 일본 외상은 일본제국 의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조선 왕조의 주체성 결여와 무능력을 비웃었다.[204] 이에 서재필은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그 뜻을 해석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감정적인 대응을 비판했다.
그는 청년들에게 각지를 여행하고 외국 여행도 다녀올 것을 권고했다. 보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봐야 사람의 시야와 눈이 트이게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에 따라 이승만과 김규식에게 해외 유학을 권고하고 그들의 학비와 경비를 대주기도 했다.
독립협회를 통해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나[111] 정부를 전복하려는 반역자로 취급당하자 그는 상당히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갑신정변과 독립협회의 실패 이후 그는 민중에 대해 냉소적으로 보게 된다. 그는 사고방식의 개선과 합리성 없이는 개혁도, 독립도 달성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3. 10. 민중 경멸론
그는 개혁이 실패한 것은 무조건 변화를 거부, 적대시하는 민중들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을 너무 믿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 때문이었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이 없고, 잘 훈련된 후원이 없이 다만 몇몇 사람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로마 사람에게 처형되었으나 로마 사람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하기는 유대 사람이었다. 즉, 그의 동포가 그를 알지 못한 탓이다.[205]'라고 하였다.그는 갑오경장이나 을미개혁 이후로도 서양의 것, 외부의 것을 두려워하고 배타적으로 행동하는 민중들을 경멸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사설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벼슬하고 백성된 이들은 눈을 뜨고도 눈먼 판수(盲人)요, 귀가 있고도 귀먹은 사람들'이라고 개탄하면서 갑오경장 이후의 조선의 모습이 '외면은 개화, 내면은 미몽[204]'이라고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3. 11. 국민성에 대한 지적
서재필은 한때 '세계에서 제일 불쌍하고 더러운 백성은 조선 백성'이라 했다.[206] 그리고 한국인은 속임수와 협잡, 뒤통수에 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늘 '대한 사람은 외국에 가서도 협잡을 하려 하고 남을 속이려 든다[207]'고 지적하였다. 또 '한국의 독립이 일본의 힘으로만 될 것이며 따라서 한국인은 이와 같은 일본의 덕택을 인정하여 일본에 감사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06] 그리고 그는 허례허식으로 가득찬 유교 사상 대신 미국을 개척한 청교도의 합리성과 시민윤리를 보급해야 함을 설파했다.한편 서재필과 윤치호의 한국인의 국민성 경멸에 대해 1990년대 초, 미국의 휘튼 대학 동양사 담당 교수인 비판 찬드라(Vipan Cchandra)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경멸로 변한 것으로 봤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08]
필자는 서재필, 윤치호 양 씨의 몇가지 극단적인 친일적 진술과 한국을 경멸하는 발언이 그들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발언은 어떤 순간적인 좌절감이나 안타까움으로 인한 감정의 폭발이라고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힘이 압도적으로 약할 때 사람들은 가끔 이런 태도를 나타내게 마련이다.[208]
이들의 친미 내지는 친양적 자세는 제도적인 문제이다. 그들은 유교 사상을 극력 반대하면서 적극적으로 서양 문화를 도입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개신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필자는 그들의 애국심, 즉 민족주의적인 정신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208]
3. 12. 지방 자치제도 실천론
서재필은 백성이 뽑은 사람이 천거받은 사람보다 열번에 아홉번은 나을 것이라며[100] 공직자를 백성들이 선거로 선출할 것을 주장했다. 1896년 4월 독립신문 창간 직후부터 그는 국민들 스스로가 생각하고, 스스로 비판하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감사나 군수 등의 지방관을 백성들이 직접 선거하는 것이 임금이나 조정에서 임명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을 앉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선거로 뽑은 지방관은 임금이나 정부에서 임명한 지방관과는 달리 자기 소신껏 백성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서재필의 주장이었다.[100]정부에서 사람을 골라 보내지 말고 백성에게 자기 관찰사와 원을 투표법으로 고르게 하여 정부에 보고하면, 정부에서 그 사람을 임명하여 보내면 일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정부에 책망이 없을 것이며, 또 이렇게 뽑은 사람이 대신이나 협판이 천거하는 사람보다 열 번에 아홉 번은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10][100]
3. 13.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해방 후 서재필은 한국이 통일, 독립되고 번영하려면 자유민주주의를 착실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52] 그는 민족 통일의 비결도 자유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는 물론이고 히틀러의 나치, 무솔리니의 파시즘,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등을 봉건제도 만큼이나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말살시키는 악마의 사상으로 규정하였다.서재필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혐오하였다. 그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히틀러의 나치와 같은 유해한 집단이라고 반복해서 언급, 지적하였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당 독재체제 아래서는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독립된 인격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52]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사상이라며 반대 의사를 여러번 반복하였다.
3. 14. 강력한 치안사회 주장과 징병론
서재필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이며, 각자 나름대로의 욕망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금전, 수단과 방법의 유무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의 욕망은 통제, 제재되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등은 정치적 입장과 세계관은 달랐지만, 일본식의 강력한 경찰제도를 도입하고 모든 ‘역적’(동학·의병)들을 소탕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했다. 이들의 강력한 경찰권 주장은 당시 사회에서 유일하게 반발 없이 채택되었다. 대한제국 경무부 대신(경찰청 총장) 서리 이근택(1865~1919)이 서너 명 이상 모여 속닥거리면 엄벌하겠다는 계엄령을 내린 것은 1901년 6월 22일의 일이었다.
서재필은 1895년~96년 조선에 체류할 무렵 징병제 도입을 주장했다. 양반 자제라는 이유로 병역에서 빠지는 조선의 농병제도는 부당한 차별대우라 판단하고, 누구나 공정하게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890~1900년대에 유길준과 함께 “징병제가 곧 국민을 만든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권리의 소중함을 모르는 자들에게 억지로 권한을 부여할 필요가 없으며,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인간은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대접받을 권리가 없다고 보았다.
3. 15. 정부 맹신에 대한 비판
서재필은 한국이 봉건 왕조체제였던 1894년 무렵부터 강연과 글을 통해 인간의 평등, 자유의 필요성, 신분 차별 철폐, 국민의 참정권을 요구하였다. 갑신정변으로 그는 민중들을 대상으로 한 개혁 설득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였으나, 1895년 12월 귀국하면서 다시 평등, 자유, 차별철폐, 참정권 요구를 강연과 글을 통해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6년 10월의 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와, 각 지역민의 시도지사 선거 때에도 국민들은 선거를 자신을 다스려 줄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서재필은 선거를 통해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자신을 다스릴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했다.정부를 맹신하고 관리들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1948년 9월 11일 다시 출국하면서 서재필은 '인민들은 정부에 맹종만 하지 말것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214]'고 거듭 당부하였다.
그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관존민비(官尊民卑) 사상과 고루한 봉건적 유습이었으며, 스스로 개척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과 게으름과 의뢰심이었다.[215]
3. 16. 합리주의적 사고관
그는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그는 온정주의를 심히 불쾌하게 여겼다.[142] 그는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된다[142]'고 생각하였다. 이는 자녀 교육에도 적용되었다. 딸들이 집안 일을 하거나 어머니를 도우면 상으로 1센트에서 1달러씩 용돈을 주기도 했다. 그는 1947년 귀국해서도 민생을 시찰하면서 조선인들에게 부모들이 자녀들의 빨래와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을 보고 자녀들의 빨래와 살림살이는 자녀들에게 시키는게 당연하지 않느냐며 나무라기도 했다.그는 늘 '오직 충실과 근면만이 인생의 올바른 생활태도'라고 항상 이야기했다.[143] 사람을 상대할 때도 편견이나 차별대우를 하지 않고 똑같이 객관적으로 대하였다. 한편 그는 민족주의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맹목적인 민족주의는 인간을 비이성적이고 불의(不義)하게 만든다는 게 그 이유였다. 민족과 정의,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권리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3. 17. 독립운동에 대한 관점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함부로 약탈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살하는 인사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과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71] 1928년 박용만이 의열단원 박인식과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료에게 누명을 씌워서 살인을 한다며 의열단을 성토하기도 했다.서재필은 독립운동이나 사업을 명목으로 자신의 생계를 꾸리지 않고 남의 재산을 빼앗아 생활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71]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은 비양심적인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71] 그는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자신의 집까지 저당 잡혔지만, 독립운동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았다.[71]
서재필은 애국 운동, 민족 운동을 한다 하면서 동포들의 성금에만 의존하는 것은 애국심을 가장한 민폐라고 규탄하였다. 애국과 민족 운동은 순수한 봉사여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그는 자신이 직접 일하여 생활비와 활동비를 조달했고, 자신의 재산도 대부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안창호가 서재필을 존경하게 된 것은 3.1 운동 당시 재산과 몸을 다 바쳐 헌신한 그의 봉사 정신 때문이었다.[71]
서재필은 안창호와 같이 독립된 문명국가를 건설하되, 국민을 계몽시켜 가며 민주주의 방식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다.[216] 또한 안창호는 서재필을 끝까지 스승으로 섬겼다.[216] 서재필은 조선인들이 요령과 술수, 협잡에 능하면서도 자신들은 피해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며,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기르기 전까지는 독립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3. 18. 위임통치론, 자치론에 대한 관점
1928년 박용만이 베이징에서 의열단원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과 함께 삼일신보에 박용만 암살을 규탄하는 장문의 글을 기고했다.[217] 중외일보 기자 이우섭(李于燮)이 그를 만나 국내에서 자치운동을 하는 것이 어떠한가 묻자, "나는 오래 해외에 있어서 국내 사정을 모르니 그것이라도 하여야 되겠다면 반대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217] 서재필은 그것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해보라며, 그것이 독립을 위한 첫 번째 단계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박용만 암살은 암살이 아니라 처형인데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하는 동시에 자치운동이라도 해보라는 발언이 사실이냐고 추궁하였다.이승만의 UN 위임통치론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위임통치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나오자, 서재필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에 대하여 별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218] 현실적으로 당시 한국은 독립할만한 힘이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러한 방편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218] 서재필은 어떠한 형태로든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자유를 되찾는 길이라고 봤다.
3. 19. 김옥균 애국자론
서재필은 김옥균을 위대한 애국자라고 칭송하였다. 1894년 3월 김옥균이 암살당한 뒤, 그해 5월 조선 조정에서 그의 시신을 능지처사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그는 김옥균을 '대인격자였고 진정한 애국자였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회고갑신정변'에서 당시까지도 역적으로 인식되던 김옥균이 역적이 아니라 진정한 애국자요 혁명가였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비록 때를 잘못타고나 불행히도 현대식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려 노력했고 조선도 힘 있는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서재필이 김옥균을 대 애국자라고 칭송한 이유로 그가 안동 김씨라는 당대의 명문 세도가문의 자제로 편안히 고위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는데도, 자신에게 주어진 영예를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서재필은 '회고갑신정변'에서 김옥균의 당시 심경을 이같이 대변했다. '김옥균은 서구가 몇 세기에 걸쳐 이룬 문명을 일본이 불과 한 세대에 달성한 사실을 알고는 일본을 모델로 하여 조선을 개혁시키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한때 조선이 열강에 휘둘리지 않는 영세중립국이 되기를 희망했는데, 이는 김옥균의 영향이라 밝혔다. '김옥균은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조선을 아세아의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그의 원대한 꿈이었고 유일한 야심이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믿고 우리의 책임을 완수하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이다.
3. 20. 이완용에 대한 경멸
서재필은 평생 이완용을 경멸하였다.[219] 한때 이완용을 애국자라고 생각하였으나 그가 친러파와 친일파로 변신하자 그를 혐오하였다.[219] 서재필은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논설에서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며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했다.[219] 그러나 이완용이 친러파가 되어 독립협회를 공격하고, 나중에는 한일 합방에도 참여하자 그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한층 강화하였다.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미국 교민사회에서 서재필은 미국 주류 사회에 최초로 성공적인 진입을 이룩한 인물로 기려지고 있다.[78] 미주지역에서 한국의 통일운동을 전개해 온 임창영, 현봉학 등은 서재필을 이승만과 대비되는 자유민주주의와 통일운동의 선구자로 간주하였다.[78]조병옥은 그가 우리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미국식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배우고 나가서는 그 현실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최초의 선각자라고 평가하였다.[70]
송건호는 "그는 이 땅에서 다시 견줄 바 없는 개혁, 구국, 자유, 독립의 애국투사였으며 조국의 장래와 동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사랑의 봉사자였다.[215]"라고 하였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초당파적 정치가'를 염원하는 중도파에 의해 1년2개월 동안 귀국했던 서재필은 조국의 통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최후의 봉사를 한 셈이었다고 평가하였다.[220]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독립운동에 투입한것에 대해, 신용하는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7만 6,000 달러를 모두 독립운동에 투입함으로써 충분히 청산하였다.[127]"며 "여기서 그의 헌신적 애국심과 그의 인품을 볼 수 있다.[127]"고 평하였다.
사학자 최태영은 "일부에서는 서재필선생이 미국 국적을 가졌고 이름도 미국식으로 바꿨다고 비판하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생각했지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진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216]"며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대전대 총장을 역임한 이광린(李光鑛)과 언론인 송건호는 서재필을 '한국의 볼테르'라고 평하였다.[221]
4. 2. 부정적 평가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은 서재필에게서 강렬한 양반의식(양반으로서의 우월의식)을 느꼈다고 평가했다.[223] 허정은 그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태도가 이미 상당히 미국화되어 있었고,[224] 차갑고 냉소적인 인물이었다고 평했다.[119]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서재필이 독립신문 설립 과정에서 자본을 전혀 투자하지 않았음에도 신문사를 자기 명의로 등록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소유권을 일본에 양도하려 했으며, 운영만 윤치호에게 넘긴 채 많은 연봉을 받기로 계약했다고 비판했다.[225] 또한, 주진오는 서재필이 귀국 후 철저하게 미국인 제이슨으로 행세했으며,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점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서재필이 '독립신문' 등을 통해 동학혁명이나 의병 운동을 철저하게 비난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과 시장 개방 요구를 '문명화'로 합리화하거나 옹호했다고 비판했다.[226]
방선주 박사(한림대 교수)는 서재필이 과거를 회상할 때 무책임할 정도로 시일을 혼동하였고, 냉엄한 이국 사회에서 처신 상 그때그때 적당히 호도하는 습성이 있었다고 평가했다.[119]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 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던 점과,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점,[23] 독립신문의 시국관, 친미적 시각[119] 등도 역사학계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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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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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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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20년) 서재필은
http://www.chosun.co[...]
2004-08-24
[47]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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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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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푸른 꿈을 꾸다
포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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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서재필
http://en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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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송재 서재필(해방공간의 주역:18)
http://www.donga.com[...]
199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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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푸른 꿈을 꾸다
포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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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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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188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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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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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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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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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60]
웹사이트
갑신정변 다시 보기 - 근대화 10년 늦춘 '실패한 혁명'
http://163.180.153.4[...]
2003-03-17
[61]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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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만물상> 워싱턴의 서재필 동상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8-05-07
[63]
간행물
송건호전집 12
한길사
2002
[64]
웹사이트
역사속의 오늘 한국 최초 관립중학교 개교 (1900.10.3)
http://kid.chosun.co[...]
2006-10-02
[65]
간행물
미국에 기려하는 서재필씨를 회함, 혁청파의 소장군인, 자립정신의 고취자
삼천리사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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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내 외할머니는 서재필 박사의 동생이었다
http://www.ohmynews.[...]
201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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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매천야록
서해문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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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똑바로 살아라
다산초당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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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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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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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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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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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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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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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내일을 여는 역사 13호
서해문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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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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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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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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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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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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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www.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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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급진주의에서 기독교 입국론으로
배재대학교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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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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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정혼녀 빼앗은 죄 1,500냥 배상하시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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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내일을 여는 역사 13호
서해문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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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 기독교 건국공로자열전
한국문학도서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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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강상인 2 파천황
동서문화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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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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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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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인간관계 필드북
경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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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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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독립신문` 창간(1896. 4. 7)
http://kid.chosun.co[...]
2024-04-13
[100]
뉴스
“고을 원님, 백성 투표로 뽑자”
http://www.sisapress[...]
시사저널
1991-05-02
[101]
일반
[102]
뉴스
일본인 발음으로 영어 못 배우겠소!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10-22
[103]
뉴스
근대에 만들어진 한국의 이상적 남성상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9-09
[104]
서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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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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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독립문과 개선문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11-17
[107]
뉴스
독립문 준공 (1897.11.20)
http://kid.chosun.co[...]
조선일보
2007-11-19
[108]
뉴스
한국 서양건축의 비조 사바친 베일 벗어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10-23
[109]
간행물
(제목 없음)
국제한국사학회, 러시아 국립인문과학대학
[110]
뉴스
서대문구 현저동(峴底洞)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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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독립협회의 민권사상연구
한국사학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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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윤치호일기
1897-07-30
[113]
간행물
(제목 없음)
[114]
서적
독립협회 연구 (상)
일조각
2006
[115]
서적
독립협회 연구 (상)
일조각
2006
[116]
서적
독립협회 연구 (상)
일조각
2006
[117]
간행물
(제목 없음)
[118]
웹인용
의회설립운동(議會設立運動)
http://encykorea.aks[...]
[119]
웹인용
http://www.sisajourn[...]
2024-04-14
[120]
웹인용
(2) ≪獨立新聞≫ 買收의 件
http://db.history.go[...]
1898-01-15
[121]
웹인용
(17) ≪獨立新聞≫ 讓受의 件
http://db.history.go[...]
1898-05-23
[122]
간행물
(제목 없음)
[123]
뉴스
한말 서재필 상소문 발견, 2차 망명 후 미서 보낸것
경향신문
198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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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人間 李承晩
신태양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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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임시정부의 ‘비밀 공군사관학교’
http://weekly1.chosu[...]
조선일보
201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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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정한경은 한 달 만에 쫓겨났다
https://www.ohmynews[...]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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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독립협회 연구(상):독립신문,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사상과 운동
일조각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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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948년판 조선연감
조선통신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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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실록 대한민국임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24-04-14
[130]
간행물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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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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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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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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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버드 나무를 찾아서:유일한
작은씨앗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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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徐載弼 박사 柳韓洋行 초대사장 지냈다
매일경제
199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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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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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통제경영의 종말: 노부호의 스마트 시대 신 경영
21세기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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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생계에 궁한 서재필씨 의과대학에 입학
동아일보
1926-11-23
[139]
뉴스
조선일보 사장열전/①월남 이상재 선생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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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서재필의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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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서재필의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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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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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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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중 이승만,미국성의 하지성명 부연설명에 대해 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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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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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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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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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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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및 군정최고고문에 서재필 지명
http://db.history.go[...]
동아일보
1947-02-27
[151]
웹인용
서재필박사 환국환영준비위원회 결성
http://db.history.go[...]
조선일보
2021-04-03
[152]
웹인용
서재필 미국에서 돌아오다
http://db.history.go[...]
조선일보
1947-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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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서재필환영대회
http://db.history.go[...]
동아일보
1947-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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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송재 서재필(해방공간의 주역:18)
http://www.donga.com[...]
1995-12-13 # 추정 날짜. 원본 링크가 깨져 정확한 날짜 확인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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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만물상> 워싱턴의 서재필 동상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8-08-09
[156]
웹인용
해방2주년기념식 거행
http://db.history.go[...]
1947-08-15
[157]
웹인용
서재필, 산업부흥의 중요성 역설
http://db.history.go[...]
1947-11-05
[158]
웹인용
서재필, 그가 꿈꾼 나라는?… 현대한국학연구소 자료집 발간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10-10-11
[159]
웹인용
서재필의 선거반대의사 표명 각계 물의일으킴
http://db.history.go[...]
2021-04-03
[160]
웹인용
서재필, 당면 정치문제에 대해 기자회견
http://db.history.go[...]
2021-04-03
[161]
웹인용
서재필, 기자회견에서 5·10선거 논평
http://db.history.go[...]
1948-05-15
[162]
기타
[163]
뉴스
송재 서재필(해방공간의 주역:18)
http://www.donga.com[...]
1995-12-13 # 추정 날짜. 원본 링크가 깨져 정확한 날짜 확인 불가능.
[164]
기타
[165]
웹인용
관계자들, 단선반대파에 의한 서재필 정계진출공작설 부인
http://db.history.go[...]
1948-05-29
[166]
기타
[167]
웹인용
서재필, 독립협회의 추대 거절
http://db.history.go[...]
동아일보
2021-04-03
[168]
웹인용
徐박사 추대 연합準委 결성
http://db.history.go[...]
자유신문
1948-06-24
[169]
웹인용
서재필, 대통령 불출마 피력
http://db.history.go[...]
1948-07-04
[170]
웹인용
국회,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 선출
http://db.history.go[...]
1948-07-20
[171]
웹인용
서우석(徐禹錫)
http://encykorea.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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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대한민국수립과 해방3주년을 맞이하여 각계 담화 발표
http://db.history.go[...]
194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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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徐載弼, 고국을 떠나며 기자와 문답
http://db.history.go[...]
한성일보
202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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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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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 떠나며 동포 여러분께 : 徐載弼> (1)~(2)
http://db.history.go[...]
자유신문
194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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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徐載弼박사, 미국으로 귀환
http://db.history.go[...]
서울신문
194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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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칼을 든 혁명투사에서 청진기 든 의사가 된 서재필
https://news.naver.c[...]
중앙SUNDAY
2010-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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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79]
웹인용
서재필선생 전명운의사/태극기 앞세우고 그리던 조국땅에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24-04-14
[180]
뉴스
서재필 박사 유해 미 납골당에 방치
동아일보
1993-07-06
[181]
웹사이트
서재필 동상 내달 워싱턴서 제막
http://www.donga.com[...]
[182]
일반
[183]
뉴스인용
“보성군에 서재필 기념공원 개관식 열려”
나라사랑
2008-08-09
[184]
일반
[185]
웹사이트
“서재필 박사 큰 뜻 함께 느꼈으면…”
http://www.seoul.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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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문화] 학술신간 산책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24-04-14
[187]
웹사이트
서재필 박사 어록비 제막식 열려
http://news.chosun.c[...]
[188]
웹사이트
송재 서재필 박사 추모제
https://news.naver.c[...]
[189]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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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논산> 논산시 서재필박사 생각 복원
http://www.jbnew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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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서재필박사 생가 복원된다
https://news.naver.c[...]
대전일보
200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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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박사 동상 워싱턴서 6일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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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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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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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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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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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인물사상사
나남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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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독립협회 강제 해산(1898.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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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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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논단]3·1절에 외치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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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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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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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독립신문
189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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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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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뿌리는 너무나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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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영 전학장의 "내가 살아온 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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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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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한국인 3: 송재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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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전 매국노 이완용의 영욕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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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알고 있나,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을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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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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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날'도 친일 논란 휩싸이나?>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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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189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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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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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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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비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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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비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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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서재필 박사―최병헌 목사…후손이 기념사업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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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선조들 발자취 좇아 기념사업 모색”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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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박보희씨 납치 서영수 서재필 박사와는 무관"
중앙일보
198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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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245]
뉴스
칼을 든 혁명투사에서 청진기 든 의사가 된 서재필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201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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