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비
1. 개요
최비는 4세기 인물로, 동진 시대에 활동하며 요동에서 자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그는 고구려에서 국가 발전에 기여했으며, 조선 최씨의 시조로 여겨진다. 최비는 평주 자사로 임명되었으나, 모용외와의 대립에서 패하여 고구려로 망명했다. 고구려에서 선진 문물을 전파하고 국정 정비, 군비 확장, 외교 정책 추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이름 | 최비 |
|---|---|
| 원어명 | 崔毖 |
| 본관 | 청하 |
| 직책 | 서진의 동이교위 |
|---|---|
| 임기 | 311년~316년 |
| 군주 | 서진 민제 |
| 전임 | 봉석(封釋) |
| 직책2 | 동진의 평주자사 |
| 임기2 | 317년~? |
| 군주2 | 동진 원제 |
| 출생일 | 미상 |
|---|---|
| 출생지 | 미상 |
| 사망일 | 미상 |
| 사망지 | 미상 |
| 매장지 | 미상 |
| 국적 | 서진→동진→고구려 |
| 성별 | 남성 |
| 부모 | 미상 |
| 형제 | 미상 |
| 배우자 | 미상 |
| 자녀 | 미상 |
| 직업 | 미상 |
| 별명 | 미상 |
| 서훈 | 미상 |
| 웹사이트 | 미상 |
-
청하 최씨 -
최림
최림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로 조조에 의해 등용되어 요직을 거쳐 사공에까지 오른 인물이며, 삼공 임명 후 열후에 봉해진 첫 사례이자 외교, 제도 운용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
청하 최씨 -
최염
최염은 후한 말, 조위 시대의 인물로 학문과 검술에 능했고, 원소와 조조를 섬기며 강직한 면모를 보였으나, 조조의 미움을 사 옥사했다. -
동진 사람 -
장중화
장중화는 오호십육국시대 전량의 제5대 군주로, 장준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후조의 침공을 막아냈으나 유흥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사후 동진으로부터 경렬공, 장조로부터 명왕으로 추존되었다. -
동진 사람 -
위삭
위삭은 중국 서진 시대의 여성 서예가로, 왕희지에게 서예를 가르쳤으며, 자연의 형태를 모방한 서예 스타일을 개발하고 『필진도』를 저술했다. -
4세기 한국 사람 -
장수왕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즉위 후 연호를 사용하고 광개토대왕릉비 등을 건립하여 고구려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 정책을 추진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반도 중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다가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4세기 한국 사람 -
전지왕
전지왕은 백제의 제18대 국왕으로, 아신왕의 장남이었으나 왕위 계승 과정에서 내분을 겪고 왜의 지원을 받아 즉위하여 해씨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 강화에 힘썼으며 왜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2. 생애
영가 5년(311년) 12월, 최비는 자매의 남편인 유주자사 왕준의 추천으로 동이교위에 임명되었고, 이후 평주 자사도 겸임하게 되었다.
당시 북방은 이민족의 유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최비는 유망한 백성을 모아 평주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다. 안정에서 도망쳐 온 황보급을 장사로 삼으려 했으나, 황보급은 응하지 않고 동생 황보진과 함께 모용외에게 귀순했다.
건무 원년(317년) 6월, 예주목 순조, 기주 자사 소속, 청주 자사 조억, 영주 자사 왕손과 함께 상소를 올려, 진왕 사마예에게 제위에 즉위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흥 2년(319년), 모용외와의 갈등이 심화되어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고, 결국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최비는 고구려에서 4세기 이후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고구려에 신문화를 가져왔으며, 국정 정비, 군비 확장,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조선 최씨의 시조이다.
2.1. 동이교위 및 평주 자사 임명
영가 5년(311년) 12월, 최비는 자매의 남편인 유주자사 왕준의 추천으로 동이교위에 임명되었고, 이후 평주 자사도 겸임하게 되었다.
당시 북방은 이민족의 유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최비는 유망한 백성을 모아 평주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다. 안정에서 도망쳐 온 황보급을 장사로 삼으려 했으나, 황보급은 응하지 않고 동생 황보진과 함께 모용외에게 귀순했다.
대흥 2년(319년) 12월, 최비는 중원 백성들의 바람을 명분으로 요동을 지배하며 사실상 자립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성들은 최비에게 호응하지 않고 모용외에게 귀순했고, 최비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모용외가 백성들을 억지로 억류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단부, 우문부에게 사자를 보내 협력하여 모용부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나눌 것을 제안했다. 측근인 발해 출신 고첨이 반대했지만, 최비는 듣지 않았다.
2.2. 요동에서의 자립 시도
대흥 2년(319년) 12월, 최비는 중원(中原) 백성들의 바람이라고 칭하며 요동을 지배하여 사실상 자립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유민(流民) 대부분은 최비에게 호응하지 않고 모용외에게 귀순했기에, 최비는 불만을 품었다. 그는 모용외가 유민을 강제로 억류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단부, 우문부에 사자를 보내 모용부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분할할 것을 제안했다. 최비의 측근 발해 출신 고첨은 이를 강하게 만류했지만, 최비는 듣지 않았다.
2.3. 모용부 공격 시도와 실패
대흥 2년(319년) 12월, 최비는 중원 백성들의 바람을 명분으로 요동을 지배하며 사실상 자립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유민 대부분이 최비에게 호응하지 않고 모용외에게 귀순하자, 최비는 불만을 품었다. 그는 모용외가 유민들을 강제로 억류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고구려, 단부, 우문부에게 사자를 보내 협력하여 모용부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분할할 것을 제안했다.
최비의 측근인 발해 출신 고첨은 이러한 계획에 반대하였으나, 최비는 듣지 않았다. 고구려, 단부, 우문부는 연합에 동의하여 군사를 움직였지만,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농성하며 우문부에게만 쇠고기와 술을 후하게 보내는 사자를 보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최비가 어제 사자를 보냈소"라고 말하여 주변 병사들에게 알렸다. 이를 전해 들은 고구려와 단부는 우문부와 모용외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군사를 철수시켰다.
우문부는 홀로 포위를 계속했지만, 모용황과 배억 등이 성에서 나와 교전하는 중에 배후에서 모용한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철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비는 모용외에게 토벌될 것을 두려워하여 형의 아들 최도를 모용부의 본거지인 극성(棘城)으로 보내 전승을 축하하게 했다. 그러나 삼국의 사자가 먼저 극성에 도착하여 이번 전역이 최비의 계략임을 알리고 화평을 청했다. 모용외는 최도에게 그 서찰을 보이며 "네 숙부는 삼국에게 우리를 멸망시키라고 해놓고, 이제 너를 거짓 축하에 가게 하다니"라고 위협했고, 최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모용외는 최도에게 "항복하는 것이 상책. 도망가는 것은 하책이다"라는 전언을 남기고 최비에게 돌려보냈다. 모용외 또한 병사를 이끌고 최비에게 향하자, 최비는 가족을 버리고 수십 기와 함께 고구려로 망명했다.
2.4. 고구려 망명과 역할
319년 12월, 최비는 중원 백성들의 바람을 명분으로 요동을 지배하며 사실상 자립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성들은 최비에게 호응하지 않고 모용외에게 귀순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최비는 모용외가 백성들을 강제로 억류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단부, 우문부에게 사자를 보내 동맹을 제안하고 모용부를 멸망시킨 후 영토를 분할할 것을 제의했다.
모용외는 고구려, 단부, 우문부의 연합군에 맞서 성문을 닫고 농성하며, 우문부에게만 사자를 보내 쇠고기와 술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리고 큰 소리로 "최비가 어제 사자를 보냈소"라고 말하여 주변 병사들에게 알렸다. 이를 전해 들은 고구려와 단부는 우문부와 모용외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군사를 철수시켰다. 우문부만이 공격을 계속했지만, 모용황과 배억에게 패배하고, 모용한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퇴각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비는 모용외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형의 아들 최도를 모용부의 본거지인 극성으로 보내 승리를 축하하게 했다. 그러나 삼국의 사자가 먼저 극성에 도착하여 최비의 계략을 알리고 화평을 청했다. 모용외는 최도에게 서찰을 보이며 위협했고, 최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모용외는 최도에게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도망치는 것은 하책이다"라는 말을 전하고 병사를 이끌고 최비를 공격했다. 최비는 가족을 버리고 수십 기와 함께 고구려로 망명했다.
최비는 고구려 망명 후, 4세기 고구려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고구려에 신문화를 전파하고, 국정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장하였으며,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