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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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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림은 조위의 관료로, 어려서부터 종형 최염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조조 치하에서 기주주부, 기주별가 등을 역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위 문제 시기에는 상서, 유주자사를 거쳐 대홍려를 지냈다. 명제 때는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광록훈, 사례교위를 역임하며 치적을 쌓았다. 경초 원년에는 사공에 임명되었으며, 안양정후에 봉해졌다. 정시 5년에 사망했으며, 효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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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최림
원어 이름崔林
덕유(德儒)
작위안양향후(安陽鄉侯)
시호효후(孝侯)
출생지주성, 산둥성
사망일245년 1월 또는 2월
관직 경력
어사중승213년 - 220년
상서220년 - ?
유주자사220년 - ?
하간태수? - ?
대홍려? - 226년
광록훈227년 - 238년
사예교위227년 - 238년 11월 18일
사공238년 11월 18일 - 245년 1월 또는 2월
가족 관계
자녀최수
최수

2. 생애

최림은 젊어서 종형 최염에게만 높이 평가를 받았다. 조조기주를 평정한 후 그를 오(鄔長)으로 삼았는데, 가난하여 수레도 없이 걸어서 부임했다.[10] 200년 관도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는 현재의 산시성에 위치한 우현(鄔縣)의 현장으로 소환되었으나, 적은 봉급으로 말과 마차조차 살 수 없었다.[2]

건안 11년(206년), 고간의 반란을 진압하러 호관을 공격할 때 병주자사 장척(張陟)의 추천으로 기주주부(冀州注簿)가 되었고, 기주별가(冀州別駕)·승상연속(丞相掾屬)을 거쳐 위나라 건국 후에는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이르렀다.[10] 장척은 그를 가장 훌륭하게 통치하는 현령이라고 칭찬했고, 곧 기주 중앙 행정부와 조조의 관청으로 옮겨졌다.[2] 213년, 조조가 위공(魏公)이 되자 지방 자사 및 부하의 서신을 감독하는 어사중승으로 승진했다.[2]

조비가 황조를 수립한 후 최림은 상서(尙書)에 임명되었고, 220년에는 북동쪽 변경의 유주자사로 파견되었다.[10][2] 당시 북중랑장(北中郞將) 오질이 하북의 군사를 거느렸는데, 탁군태수 왕웅은 최림의 별가에게 그가 오질에게 문안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말했고, 별가가 이를 전했으나, 유주를 다스려 외인의 침탈을 막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 끝내 문안하지 않았다.[10] 결국 외인들의 유주 약탈은 그쳤으나, 상사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간태수로 좌천되었고,[10][12] 세간에서는 그를 위해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10] 그는 한 계절 동안 유주 자사직을 맡은 후 하간군(河閒郡)의 태수가 되었다.[2] 삼국지에는 오질이 북방 국경 군대를 통합하도록 유주 통제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고 기록되었으나,[2] 배송지는 상서령 환계가 그를 지방 자사로서 무능하다고 여겨 강등시켰다는 신비의 상소를 인용한다.[3]

중앙으로 돌아와 외국과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대홍려가 되었다.[10][2] 당시 구자국 왕의 아들이 황제를 모시게 하여 입조하였고 조위 조정의 환대를 받았으며, 다른 나라들도 아들을 조위 조정에 보냈다.[10] 최림은 지나친 비용과 호송을 염려하였고, 돈황군에 옛 제도를 참고하여 각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상시 제도를 만들게 하는 조서가 내려졌다.[10] 222년,[4] 대홍려 재임 시절, 구자 왕은 아들을 위(조위) 조정에 보내 교육받고 한화(漢化)하도록 했다. 위 조정은 아들을 멀리 보낸 왕에게 후한 보상을 했고, 다른 변경 국가들도 왕자를 위 조정에 보냈다. 최림은 왕자들의 몸값을 받으러 온 사절 중 일부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우려하여, 보상에 도장을 찍고 봉인했으며, 귀국 사절단에 재물을 지키는 상인 출신 변경 사람들을 붙여 안전하게 돌아오도록 했다.[5]

명제 즉위 후 관내후에 봉해졌고, 광록훈·사례교위로 전임되었다.[10] 사례교위부에서는 치적을 남겨, 임지에서 떠난 후에도 그를 사모하는 사람이 많았다.[10] 산기상시(散騎常侍) 유소가 《고과론》(考課論)을 짓자, 제도보다는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10]

경초 원년(237년), 사도사공에 결원이 생겼다(사도 동소는 작년 5월 13일, 사공 진군은 작년 12월 24일에 죽었다).[13][10] 산기시랑(散騎侍郞) 맹강(孟康)은 최림을 추천했고, 그때에는 사공이 되지 못했으나(6월 12일진교가 사도, 위진이 사공이 되었다),[13] 진교가 그 해에 죽고, 후임 사도 한기도 이듬해에 죽으면서[13] 이 해 11월 24일 결국 사공이 되어 사도로 전임된 위진의 빈 자리를 메웠으며,[10][13] 안양정후(安陽亭侯)로 봉해지고 식읍 600호를 받았다.[10] 삼공이 열후에 봉해진 것은 최림이 처음이었다.[10][14] 이 황제의 명으로 공자에 대한 제사를 드리기를 청하자, 이를 지지하는 박사(博士) 부지(傅祗)와 의론을 벌였다.[10][15]

정시 5년(244년)에 숨을 거두었다. 시호를 후(孝侯)라 하였고,[10] 아들 최술(崔述중국어)이 뒤를 이었다.[10]

2. 1. 초기 생애와 조조 휘하에서의 활동

최림은 젊어서 종형 최염에게만 높이 평가되었다.[10] 조조기주를 평정하고 최림을 불러 오(鄔長)으로 삼았는데, 가난하여 수레도 없어 걸어서 부임했다.[10] 건안 11년(206년), 조조가 고간의 반란을 진압하러 호관을 공격할 때 병주자사 장척(張陟)의 추천을 받아 기주주부(冀州注簿)가 되었고, 기주별가(冀州別駕)·승상연속(丞相掾屬)을 거쳐 위나라가 세워진 후에는 어사중승(御史中丞)에까지 이르렀다.[10]

최림은 명망 있는 청하 최씨 가문의 일원이었지만, 그의 방계 가족들은 그를 잘 알지 못했고, 친척인 최염만이 그를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200년, 조조가 관도 전투에서 기주를 정복한 후, 최림은 현재의 산시성에 위치한 우현(鄔縣)의 현장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이 직책에서 너무나 적은 봉급을 받아 말과 마차조차 살 수 없었다.[2]

병주 자사 장척(張陟)은 최림을 가장 훌륭하게 통치하는 현령이라고 조조에게 추천했다. 그 결과, 최림은 기주 중앙 행정부에서 더 높은 직책으로 승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의 관청으로 옮겨졌다.[2] 213년, 조조가 위공(魏公)으로 봉해지자, 최림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승진했는데, 이는 지방 자사 및 그들의 부하로부터 오는 서신을 감독하는 강력한 직책이었다.[2]

2. 2. 조비 시대의 활동: 유주자사와 대홍려

조비가 황조를 수립한 후 최림은 상서(尙書)에 임명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유주자사가 되었다.[10] 당시 북중랑장(北中郞將) 오질이 하북의 군사를 거느렸는데, 탁군태수 왕웅은 최림의 별가에게 최림이 오질에게 문안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말했고, 별가가 이를 최림에게 전했으나, 최림은 유주를 다스려 외인의 침탈을 막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 끝내 오질에게 문안하지 않았다.[10] 결국 외인들이 유주를 약탈하던 것은 그쳤으나, 상사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간태수로 좌천되었다.[10][12] 세간에서는 최림을 위해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10]

중앙으로 돌아와 대홍려가 되었다.[10] 당시 구자국에서는 왕의 아들을 황제를 모시게 하여 입조하였고, 조위 조정의 환대를 받았다. 다른 나라들도 아들을 조위 조정에 보내 내조하였다.[10] 최림은 이들에게 지나친 비용을 쓰고 지나친 호송을 제공할 것을 염려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돈황군에는 옛 제도를 참고하여 각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상시 제도를 만들게 하는 조서가 내려졌다.[10]

220년, 조비가 조위를 건국했을 때, 최림은 북동쪽 변경의 유주 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한 계절 동안 맡은 후 하간군(河閒郡)의 태수를 맡았다.[2] 삼국지의 본문에는 최림이 오질이 북방의 국경 군대를 통합하도록 하기 위해 유주에 대한 통제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최림은 이것이 비한족 국경 민족을 다루는 더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2] 그러나 배송지는 당시 상서령을 맡고 있던 환계가 최림을 지방 자사로서 무능하다고 느껴 그를 강등시켰다는 신비의 상소를 인용한다.[3] 하간군의 행정관에서 시작하여 최림은 외국과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대홍려(大鴻臚)의 자리에 올랐다.

222년,[4] 최림이 대홍려 직책을 맡고 있을 때, 구자 왕은 아들을 위(조위) 조정에 보내 교육받고 한화(漢化)하도록 했다. 위 조정은 아들을 멀리 보낸 왕에게 후한 보상을 했다. 기회를 감지한 다른 변경 국가들도 왕자를 위 조정에 보냈다. 최림은 왕자들의 몸값을 받으러 온 사절 중 일부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우려하여, 그들의 보상에 도장을 찍고 봉인했으며, 그들의 귀국 사절단에 재물을 지키는 상인 출신 변경 사람들을 붙여 안전하게 돌아오도록 했다.[5]

2. 3. 조예 시대와 말년

젊어서는 종형 최염에게만 높이 평가되었다.[10] 조조기주를 평정하고 최림을 불러 오(鄔長)으로 삼았는데, 가난하여 수레도 없어 걸어서 부임했다.[10] 건안 11년(206년), 조조가 고간의 반란을 진압하러 호관(壺關)을 공격할 때 병주자사 장척(張陟)의 추거를 받아 기주주부(冀州注簿)가 되었고, 기주별가(冀州別駕)·승상연속(丞相掾屬)을 거쳐 위나라가 세워진 후에는 어사중승(御史中丞)에까지 이르렀다.[10]

위 문제가 황조를 수립한 후 상서(尙書)를 제수받았고, 외직으로 나가 유주자사가 되었다.[10] 당시 북중랑장(北中郞將) 오질이 하북의 군사를 거느렸는데, 탁군태수 왕웅은 최림의 별가에게 최림이 오질에게 문안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말했고, 별가가 이를 최림에게 전했으나, 최림은 유주를 다스려 외인의 침탈을 막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 끝내 오질에게 문안하지 않았다.[10] 과연 외인들이 유주를 약탈하던 것은 그쳤으나, 상사를 존중하지 않았으므로 하간태수로 좌천되었고,[10][12] 세간에서는 최림을 위해 원망하는 것이 많았다.[10]

중앙으로 돌아와 대홍려가 되었다.[10] 당시 구자국에서는 왕의 아들을 황제에게 보내 조위 조정의 환대를 받았고, 다른 나라들도 아들을 조위 조정에 보내 내조하였다.[10] 최림은 이들에게 지나친 비용을 쓰고 지나친 호송을 제공할 것을 염려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돈황군에는 옛 제도를 참고하여 각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상시 제도를 만들게 하는 조서가 내려졌다.[10]

명제가 즉위한 후 관내후에 봉해졌고, 광록훈·사례교위로 전임되었다.[10] 사례교위부에서는 치적을 남겨, 임지에서 떠난 후에도 그를 사모하는 사람이 많았다.[10] 산기상시(散騎常侍) 유소가 《고과론》(考課論)을 짓자, 최림은 제도 자체보다는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펼쳤다.[10]

경초 원년(237년), 사도사공에 결원이 생겼다(사도 동소는 작년 5월 13일, 사공 진군은 작년 12월 24일에 죽었다).[13][10] 산기시랑(散騎侍郞) 맹강(孟康)은 최림을 추천했고, 그때에는 사공이 되지 못했으나(6월 12일진교가 사도, 위진이 사공이 되었다),[13] 진교가 그 해에 죽고, 후임 사도 한기도 이듬해에 죽으면서[13] 최림은 이 해 11월 24일 결국 사공이 되어 사도로 전임된 위진의 빈 자리를 메웠으며,[10][13] 안양정후(安陽亭侯)로 봉해지고 식읍 600호를 받았다.[10] 삼공이 열후에 봉해진 것은 최림이 시초였다.[10][14] 이 상주하여 황제의 명으로 공자에 대한 제사를 드리기를 구하자, 최림은 이를 지지하는 박사(博士) 부지(傅祗)와 의론을 벌였다.[10][15]

정시 5년(244년)에 숨을 거두었다. 시호를 후(孝侯)라 하였고,[10] 아들 최술(崔述중국어)이 뒤를 이었다.[10]

3. 가계

청하 최씨 가계도

4. 일화

최림은 젊었을 때 명성이 없어 친족들에게 가벼이 여겨졌으나, 최염은 항상 최림을 두고 "이른바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니[此所謂大器晚成者也], 끝내 반드시 심원한 데까지 이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11] 이 최염의 평에서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나왔다.

최림이 대홍려였을 때, 상림소부였는데, 깨끗하고 엄한 성격이었다. 당시 소부와 홍려는 문을 마주 보고 있었고, 최림은 활달하여 상림과 다른 기질이었으므로, 상림이 매일 관리들을 매질하는 소리를 듣고 이를 곤란하게 여겼다. 상림은 밤에 관리들을 매질했고, 관리들은 아픔을 못 이겨 울부짖었다. 다음 날, 최림은 문을 나서다 상림을 만났고, 조롱했다. "경께서는 정위가 되었다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상림은 왜 묻는지 모르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러자 최림이 답했다. "당신은 정위도 아니면서 밤마다 죄수를 고문합니까?" 상림은 매우 부끄러워했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16]

같은 군 사람으로, 평민인 왕경을 발탁하였고, 왕경은 이후 명사가 되어 이 일로 인해 세간의 칭찬을 받았다.[18]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3]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4]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5]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6] 기타
[7]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8]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9] 서적 삼국지
[10] 서적 삼국지
[11] 서적 삼국지
[12] 기타
[13] 서적 삼국지
[14] 기타
[15] 기타
[16] 서적 위략
[17] 서적 진서
[18] 서적 진제공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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