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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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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외는 269년에 태어나 333년에 사망한 인물로,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이었다. 285년 대인으로 추대된 그는 서진과 대립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307년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농업과 법률 정비 등을 통해 국력을 키웠으며, 동진과의 관계를 통해 평주자사, 요동공 등의 관직을 받았다. 333년 사망 후 아들 모용황이 연왕에 즉위하면서 무선왕으로 추존되었고, 손자 모용준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무선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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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
인물 정보
이름모용외
로마자 표기Murong Gui
중국어 간체慕容廆
중국어 정체慕容廆
생몰년269년 ~ 333년
시호무선왕(武宣王)
작위요동공(遼東公)
시대서진, 오호 십육국 시대
민족선비족
가족 관계
아버지모용섭귀
아들모용황
모용한
모용인
모용소
모용우
모용표
모용군
모용치
모용평
손자모용준
모용근
모용환
모용위
기타 정보
활동모용부 수령
전연의 기초를 다짐

2. 생애

285년 국인(國人)들이 모용내를 살해하자 모용외는 대인으로 추대되었다.[10] 모용외는 선비족의 우문부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공격하려 했으나 서진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서진과 적대하게 된 모용외는 유주 일대를 공격하여 노략질하였다. 서진 무제는 모용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또한 같은 해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의려를 자살하게 하였다. 서진은 부여에 원군을 파견하여 모용외를 격파하였으며, 289년에 서진에 복속하였다. 서진은 모용외를 선비도독(鮮卑都督)에 임명하였으며, 모용외는 우문부, 단부의 침입을 피해 도하청산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294년에는 다시 본거지를 극성으로 옮겼다.[14]

307년, 모용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였으며, 혼란에 빠진 서진에서 유민들이 모용외에게 귀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크게 키웠다. 318년 우문부, 단부, 고구려를 끌어들여 모용외를 협공하게 하였는데, 모용외는 삼국군사를 이간질시켜 위기를 벗어나고 우문부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319년에는 자신을 공격하려던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요동을 차지하게 되었다.[1] 이후 모용외는 고구려와 적대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320년 동진은 모용외를 안북장군·평주자사(安北將軍平州刺史)로 삼았으며, 이후 모용외는 동진에 충성하여 후조와 대립하였다. 321년 동진에서 모용외에게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거기장군·평주목·요동공(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公)을 제수하였다. 325년 후조에 복속하였던 우문부가 석륵의 명령에 따라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오히려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333년 모용외는 사망하였다.[14]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승계

269년 모용부의 대인(大人)인 모용섭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0] 283년모용섭귀가 죽자 그의 동생 모용내가 정권을 장악하고 모용외를 죽이려 하였으나 모용외가 요동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10] 285년에 모용내가 국인(國人)에 의해 살해되자 모용외가 대인으로 추대되었다.[10]

모용외는 선비족의 우문부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공격하려 하였으나 서진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서진과 적대하게 된 모용외는 유주 일대를 공격하여 노략질하였다. 서진 무제는 모용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2. 2. 서진과의 관계

모용외는 285년 선비족의 우문부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서진이 허락하지 않아, 서진과 적대 관계가 되었다. 모용외는 유주 일대를 공격하여 노략질하였고, 서진 무제는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같은 해,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의려를 자살하게 하였다. 서진은 부여에 원군을 파견하여 모용외를 격파하였고, 289년 모용외는 서진에 복속하였다. 서진은 모용외를 선비도독(鮮卑都督)에 임명하였다.[1]

307년 모용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며 혼란에 빠진 서진에서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키웠다. 318년 고구려, 우문부, 단부의 협공을 받았으나 이간책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319년에는 자신을 공격하려던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요동을 차지하게 되었다.[1]

320년 동진은 모용외를 안북장군·평주자사(安北將軍平州刺史)로 삼았으며, 321년에는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거기장군·평주목·요동공(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公)을 제수하였다. 이후 모용외는 동진에 충성하며 후조와 대립하였다.[1]

2. 3. 세력 확장과 통치 체제 확립

285년 모용내가 국인(國人)에 의해 살해되자 모용외가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289년 서진에 복속한 모용외는 선비도독(鮮卑都督)에 임명되었으며, 도하(徒河)의 청산(靑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294년에는 다시 본거지를 극성(棘城)으로 옮겼다.[14]

307년 모용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였으며, 혼란에 빠진 서진에서 유민들이 모용외에게 귀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크게 키웠다. 319년 요동을 차지한 이후, 모용외는 고구려와 적대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320년 동진(東晉)은 모용외를 안북장군·평주자사(安北將軍平州刺史)로 삼았으며, 이후 모용외는 동진에 충성하여 후조(後趙)와 대립하였다. 321년 동진에서 모용외에게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거기장군·평주목·요동공(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公)을 제수하였다.

모용외는 농업과 양잠에 힘쓰는 동시에 중국과 같은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여 그 세력 기반을 다져나갔다. 영녕 원년(301년)부터 영녕 2년(302년)경, 연의 지방(유주 일대)에서 대홍수가 발생했을 때 모용외는 창고를 개방하여 유주의 인민에게 식량을 지급하고 구호에 힘썼다.[15]

이 시기, 모용외는 뛰어난 성격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았던 모여구와 모여하를 발탁하여, 모여구에게는 부고[17] 관리를 맡기고, 모여하에게는 소송의 재결을 맡겼다.[16]

서진(西晋)에 종속하기로 결정한 이후, 모용외(慕容廆)는 주변의 우문부(宇文部)와 단부(段部)와 대립을 피하기 위해, 사신과 교류할 때 예의 바르고 겸손하게 행동했으며, 후한 선물을 하여 관계 개선에 힘썼다.

서진의 통치 체제가 붕괴된 이후, 많은 백성들이 모용외의 정사에 귀순하였는데, 모용외는 그중에서 준재들을 발탁하여, 그 재능에 적합한 직무를 부여했다. 이 시기 전후로 모용외의 산하에 들어온 대표적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출신비고
봉혁50년 이상 전연에 봉사, 오랫동안 관료의 수장으로서 정권 운영
봉준봉혁의 아버지
봉추봉혁의 아버지
배의하동모용외의 참모
배개하동배의의 조카
유수광평
황홍위군
방선북해
송석서하
송해평원
유상평원
양탐우북평서진요서군 태수
황보급안정
황보진안정전연의 명장, 황보급의 동생
장통요동낙랑과 대방 2군에서 독자적인 세력 구축
왕준낙랑장통을 설득하여 모용외에게 귀순
왕탄대방군 태수
주좌거회계
공찬노국
호무익태산
국팽동래군용양참군사
정림북해



모용외는 배의, 양탐, 황홍, 노창을 모주(외교·내정·군략에 관련된 직책)로, 유수, 방선, 송석, 서방건, 봉추, 배개를 고굉(모주 다음가는 측근)으로 임명했으며, 송해, 황보급, 황보진, 묘개, 유빈, 봉혁, 봉유를 추요(국가 기밀을 다루는 직책)로 임명했다. 이렇게 한족 명사들을 많이 받아들여 통치 체제를 더욱 굳건하게 했다.

이 시기, 각지의 혼란의 영향으로 모용외에게 귀순하는 유민은 수만 가구를 넘어섰고, 모용외는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기양군을 설치하여 기주에서 온 유민들을 거주하게 했고, 성주군을 설치하여 예주에서 온 유민들을 거주하게 했으며, 영구군을 설치하여 청주에서 온 유민들을 거주하게 했고, 당국군을 설치하여 병주에서 온 유민들을 거주하게 했다.

2. 4. 동진과의 관계와 최후

318년 고구려, 우문부, 단부가 연합하여 모용외를 공격하자, 모용외는 이들 국가의 군대를 이간질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고, 우문부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비는 모용외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319년 고구려로 망명하였고, 모용외는 요동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11][12][13][14] 이후 모용외는 고구려와 적대 관계가 되어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320년 동진은 모용외를 안북장군·평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모용외는 동진에 충성하며 후조와 대립하였다. 321년 동진으로부터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거기장군·평주목·요동공(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公) 직책을 받았다.[15][16][17][19] 325년 후조에 복속하였던 우문부가 석륵의 명령에 따라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오히려 모용외의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331년 모용외는 동진에 자신을 연왕으로 봉하고 대장군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조정에서 의결되지 않아 연왕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24][25][26]

333년 모용외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5세였다. 동진의 성제는 그에게 대장군·개부의동삼사를 추증하고, '''양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4]

3. 가계

배우자단씨
자녀


3. 1. 처


  • 단부인 - 아들인 모용황이 왕위에 오르자 무선왕후(武宣王后)로 추시되었고, 손자인 모용준이 황제에 즉위하자 무선황후(武宣皇后)로 추시되었다.

3. 2. 아들


  • 모용한 - 장남
  • 모용인 - 차남
  • 모용황 - 3남
  • 모용소 - 모용황의 동복동생
  • 모용유 - 모용황의 이복동생
  • 모용치 - 모용황의 이복동생
  • 모용군 - 모용황의 이복동생
  • 모용한 - 모용황의 이복동생
  • 모용평 - 모용황의 이복동생
  • 모용표 - 모용황의 이복동생

3. 3. 딸

4. 평가 및 의의

모용외는 어린 시절부터 체격이 크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성장하여 신장이 8척에 달했다. 그는 용감하고 도량이 넓은 성격이었다.[22]

그의 정치는 공정했고 인재를 중시하여, 중원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던 소란을 피해 많은 선비와 백성들이 모용외에게 의탁했다. 모용외는 그들 중 현인을 골라 재능에 맞는 직책을 부여했고, 이로 인해 국가는 크게 발전했다.[22]

참조

[1] 문서 The character "廆" has multiple pronunciations: "guī", "huì" and "wěi".
[2] 인용 Zizhi Tongjian, vol.95. ([咸和]八年,廆卒,乃止。时年六十五,在位四十九年。) Jin Shu, vol.108
[3] 인용 (廆幼而魁岸,美姿貌,身长八尺,雄杰有大度。) Jin Shu, vol.108
[4] 서적 Book of Jin
[5] 서적 Shiliuguo Chunqiu
[6] 문서 different character from his nephew Murong Jun
[7] 인용 『十六国春秋』によるならば、父の慕容渉帰が遼東の北に移って以降、初めて漢人の風習に倣って姓という概念を持つようになり、慕容という姓を名乗ったという。これが正しいならば、慕容廆が出生時から慕容という姓を持っていたかは不明であり、元々は'''弈洛瓌'''と呼ばれていたのを、父に倣って姓を'''慕容'''とし、名を'''廆'''に改めたという可能性もある。
[8] 인용 『魏書』吐谷渾伝・『宋書』鮮卑吐谷渾伝では、'''弈洛瓌'''を字ではなく別名とする。
[9] 인용 '''弈洛瓌'''としているのは『晋書』と『魏書』徒何慕容廆伝である。『十六国春秋』では'''弈落瓌'''、『太平御覧』では'''弈洛環'''、『魏書』吐谷渾伝・『宋書』鮮卑吐谷渾伝では'''若洛廆'''とする。
[10] 인용 『資治通鑑』では285年だが、『十六国春秋』では太康5年(284年)の出来事とする。
[11] 인용 慕容廆が帰順を決断したとき、側近へ向けて「我が先公は代々、中華(ここでは魏王朝・晋王朝を指す)を奉じてきた。その上、華夷の理(漢民族と異民族の風俗や礼儀)は同一では無く、その強弱は比べるまでもなく明らかだ。どうして晋国と競い合う事など出来るであろうか。どうして不和となって我が百姓に害を及ぼすことが出来ようか!」と宣言したという。
[12] 인용 『資治通鑑』には鮮卑大都督ともある
[13] 인용 『資治通鑑』では289年だが、『十六国春秋』では元康4年(294年)の出来事とする。
[14] 인용 『大棘城』とも記載される場合がある。[[五帝]]の一人である[[顓頊]]の墳墓があるという。
[15] 인용 『晋書』・『十六国春秋』には永寧年間の出来事とある
[16] 문서 慕輿句は勤勉で謙恭な性格であると評判であり、慕輿河は言葉に出さないで物事の道理を容易く悟る才能があると称されていたという。
[17] 문서 文書や武具・財物などを収蔵する蔵を指す
[18] 인용 『資治通鑑』・『十六国春秋』には宇文素怒延とも
[19] 문서 「遼左」とは遼東を指し、「雑夷」とは諸々の異民族を指し、「流人」とは難民を指す。
[20] 인용 『十六国春秋』には1千戸、『晋書』には2千戸とある
[21] 인용 『十六国春秋』によれば侍中の位についてもこれまで通りとされているが、これは散騎常侍の事を指すと思われる(散騎常侍は侍中府に属する)。
[22] 인용 『晋書』ではここで初めて侍中に任じられているが、『十六国春秋』では321年12月の時点で任じられていることになっている。
[23] 인용 『資治通鑑』では323年4月頃とする。『十六国春秋』では325年3月とする
[24] 인용 「明公使君轂下:振徳曜威,撫寧方夏,勞心文武,士馬無恙,欽高仰止,注情彌久。王途險遠,隔以燕越,毎瞻江湄,延首遐外。天降艱難,禍害屡臻,舊都不守,奄為虜庭,使皇輿遷幸,假勢呉、楚。大晋啓基、祚流萬節,天命未改,玄象著明,是以義烈之士深懐憤踴。猥以功薄,受國殊寵,上不能掃除群羯,下不能身赴國難,仍縱賊臣,屡逼京輦。王敦唱禍於前,蘇峻肆毒於後,凶暴過於董卓,悪逆甚於傕、汜,普天率土,誰不同忿!深怪文武之士,過荷朝榮,不能滅中原之寇,刷天下之恥。君侯植根江陽,發曜荊、衡,杖葉公之權,有包胥之志,而令白公、伍員殆得極其暴,竊為丘明恥之。區區楚國子重之徒,猶恥君弱、群臣不及先大夫,厲己戒衆,以服陳、鄭,越之種、蠡尚能弼佐勾踐,取威黄池,況今呉土英賢比肩,而不輔翼聖主,陵江北伐。以義聲之直,討逆暴之羯,檄命舊邦之士,招懐存本之人,豈不若因風振落,頓阪走輪哉!且孫氏之初,以長沙之衆摧破董卓,志匡漢室。雖中遇寇害,雅志不遂,原其心誠,乃忽身命。及權據揚、越,外杖周、張,内馮顧、陸,距魏赤壁,克取襄陽。自茲以降,世主相襲,咸能侵逼徐、豫,令魏朝旰食。不知今之江表為賢俊匿智,藏其勇略邪?將呂蒙、凌統高蹤曠世哉?況今凶羯虐暴,中州人士逼迫勢促,其顛沛之危,甚於累卵。假號之強,衆心所去,敵有釁矣,易可震盪。王郎、袁術雖自詐偽,皆基淺根微,禍不旋踵,此皆君侯之所聞見者矣。王司徒清虚寡欲,善於全己,昔曹参亦綜此道,著畫一之稱也。庾公居元舅之尊,處申伯之任,超然高蹈,明智之權。廆於寇難之際,受大晋累世之恩,自恨絶域,無益聖朝,徒系心萬里,望風懐憤。今海内之望,足為楚、漢輕重者,惟在君侯。若戮力盡心,悉五州之衆,據兗、豫之郊,使向義之士倒戈釋甲,則羯寇必滅,國恥必除。廆在一方,敢不竭命。孤軍輕進,不足使勒畏首畏尾,則懐舊之士欲為内應,無由自發故也。故遠陳寫,言不宣盡。」
[25] 인용 「自古有國有家,鮮不極盛而衰。自大晋龍興,克平岷、會,神武之略,邁蹤前史。惠皇之末,後黨構難,禍結京畿,釁成公族,遂使羯寇乘虚,傾覆諸夏,舊都淪滅,山陵毀掘,人神悲悼,幽明發憤。昔獫狁之強,匈奴之盛,未有如今日羯寇之暴,跨躡華裔,盜稱尊號者也。天祚有晋,挺授英傑。車騎將軍慕容廆自弱冠蒞國,忠於王室,明允恭粛,志在立勲。屬海内分崩,皇輿遷幸,元皇中興,初唱大業,粛祖継統,蕩平江外。廆雖限以山海,隔以羯寇,翹首引領,系心京師,常假寤寐,欲憂國忘身。貢篚相尋,連舟載路,戎不税駕,動成義舉。今羯寇滔天,怙其丑類,樹基趙、魏,跨略燕、斉。廆雖率義衆,誅討大逆,然管仲相斉,猶曰寵不足以御下,況廆輔翼王室,有匡霸之功,而位卑爵輕,九命未加,非所以寵異藩翰,敦獎殊勲者也。方今詔命隔絶,王路險遠,貢使往來,動彌年載。今燕之舊壤,北周沙漠,東盡樂浪,西曁代山,南極冀方,而悉為虜庭,非復國家之域。將佐等以為宜遠遵周室,近淮漢初,進封廆為燕王,行大將軍事,上以総統諸部,下以割損賊境。使冀州之人望風向化。廆得祗承詔命,率合諸國,奉辭夷逆,以成桓文之功,苟利社稷,專之可也。而廆固執謙光,守節彌高,毎詔所加,讓動積年,非將佐等所能敦逼。今區區所陳,不欲苟相崇重,而愚情至心,實為國計。」
[26] 인용 「車騎將軍憂國忘身,貢篚載路,羯賊求和,執使送之,西討段國,北伐塞外,遠綏索頭,荒服以献。惟北部未賓,屡遣征伐。又知東方官號,高下斉班,進無統攝之權,退無等差之降,欲進車騎為燕王,一二具之。夫功成進爵,古之成制也。車騎雖未能為官摧勒,然忠義竭誠。今騰箋上聽,可不遲速,當任天臺也。」
[27] 인용 『晋書』によると、この時張華は安北将軍の地位にあったという。
[28] 간행물 北魏における渤海高氏 https://koara.lib.ke[...] 慶應義塾大学附属研究所斯道文庫 196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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