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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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군은 전한 시대에 유주에 설치된 군으로, 왕망 시대에 영하군으로 개칭되었다가 후한 시대에 다시 발해군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이후 진, 북위 시대를 거치며 창수군으로 개명되기도 했으나, 수나라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수나라가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다시 발해군으로 개칭되었다. 당나라에 의해 창주로 개명되면서 발해군이라는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한 시대에는 부양현, 양신현 등 20여 개의 현을 관할했으며, 후한 시대에는 기주에 속해 남피현 등을 관할했다. 조위와 서진 시대에는 관할 현의 변동이 있었으며, 북위 시대에는 창수군으로 개명되기도 했다. 수나라 시대에는 양신현, 낙릉현 등 10개의 현을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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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군은 전한부터 수나라까지 존속하며 현재 허베이성 중남부에 위치했던 중국의 옛 군으로, 시대에 따라 행정구역과 소속 현에 변화가 있었고, 후한 말 흑산적의 주요 거점, 조위와 서진 시대 제후국, 오호십육국 시대 여러 나라의 영역으로 편입, 북위 시대 정주 소속 등의 변화를 겪다가 수나라 때 폐지되었다. - 산둥성의 군 - 태산군
태산군은 중국의 행정 구역으로, 진나라의 제북군을 전신으로 하여 전한 시대에 설치되어 예주에 속했으며, 후한, 서진, 남조 송, 북위 시대를 거치며 관할 현의 변화와 명칭 변경을 겪다가 북제 시대에 동평군으로 개칭되었다. - 산둥성의 군 - 제북군
제북군은 진나라가 제나라를 멸망시킨 후 설치된 군으로, 전한 시대에는 제북나라로 바뀌었으며, 유흥거의 반란으로 폐지되었다가 제북군과 제남군으로 분리되기도 했다. - 오호 십육국 시대의 군 - 태산군
태산군은 중국의 행정 구역으로, 진나라의 제북군을 전신으로 하여 전한 시대에 설치되어 예주에 속했으며, 후한, 서진, 남조 송, 북위 시대를 거치며 관할 현의 변화와 명칭 변경을 겪다가 북제 시대에 동평군으로 개칭되었다. - 오호 십육국 시대의 군 - 하남군
하남군은 전국 시대 한나라에서 처음 설치되어 진나라를 거쳐 전한 시대에는 삼하로 불렸으며, 후한 시대에는 하남윤으로 개칭되어 낙양을 관할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위진 시대까지 존속한 군이다.
2. 역사
기원전 202년, 전한이 유주 아래에 '''발해군'''을 설치했다. 왕망 시대에 영하군으로 개칭되었다가[7], 후한 건국 후 발해군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후한 말, 원소가 이 지역 태수로 있으면서 세력을 다졌다. 원소 사후, 원상을 비롯한 그의 아들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며 내전을 일으켰다. 조조는 이 내분을 틈타 기주를 점령했고, 발해군은 조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서진 시대에는 10개 현을 관할했다.[9]
석륵이 하북을 점령하면서 발해군은 북방 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후조 → 전연 → 전진 → 후연 순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북위 도무제가 후연을 멸망시키면서 북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북위 태무제는 발해군을 '''창수군(滄水郡)'''으로 개명했다가, 북위 효문제는 487년(태화 11년)에 북부 지역에 부양군을 신설했고, 497년(태화 21년)에 원래 이름으로 되돌렸다.[10] 북위 멸망 이후에는 동위, 북제, 북주 순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수나라는 부양군과 낙릉군을 통폐합했고 군명을 勃海郡에서 渤海郡으로 바꿨다. 586년(개황 6년)에 주현제를 실시했을 때 발해군 지역에 '''체주(棣州)'''를 설치했으나 606년(대업 2년) '''창주(滄州)'''로 개명되었다. [11]
618년 (무덕 원년), 당나라에 의해 발해군은 창주로 개명되었고, 발해군이라는 명칭은 사라졌다.[12]
2. 1. 전한
전한 고제가 설치했으며, 유주자사부에 속했다. 그러나 문제 2년(기원전 178년) 발해군과 조나라 내사 사이에 있는 하간국이 조나라에서 분할되었는데, 발해군이 당시 있었다면 조나라의 월경지가 되므로 주진학은 고제가 설치했다는 한서의 주석을 반박하고, 원래 발해군은 하간국의 일부였다가 하간국이 폐지된 후 하간군에서 분할된 것으로 추정했다.[13]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25만 6377호, 90만 5119명이 있었다.[14] 현재의 창저우 시 동부와 랑팡 시 중부와 남부, 그리고 헝수이 시 푸청 현과 빈저우 시 우디 현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발해군에는 다음 현들이 속해 있었다.[14]
[14][15]
기원전 202년, 전한이 유주 아래에 '''발해군'''을 설치했다. 왕망 시대에는 영하군으로 개칭되었다.[7]
2. 2. 신나라
2. 3. 후한
후한이 건국되자 발해군은 기주에 속하게 되었으며, 남피(南皮)·고성(高城)·중합(重合)·부양(浮陽)·동광(東光)·장무(章武)·양신(陽信)·수(脩) 8개 현을 관할했다.[8] 기주자사부로 이관되었고 하간군의 군역 확장, 안평국의 신설로 인해 8현으로 군역이 축소되었다. 32,389호 1,106,500명이 살았다.[16] 후한말 원소가 이 지역 태수로 있으면서 세력을 다졌다.
2. 4. 조위와 서진
원소 사후 원상을 비롯한 원소의 아들들이 세력 갈등을 일으키면서 내전을 일으켰다. 조조는 이 내란을 틈타 기주를 점령했는데, 발해군은 이 시기에 조위의 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양신현이 본군에서 낙릉군으로 이관되었고 안평국에서 본군으로 요안현이 이관되었다.
안평국에서 부성현이 이관되었다. 10현 40,000호를 거느렸다.[17]
2. 5. 북조
석륵이 하북을 점령하면서 발해군은 북방민족의 치하로 들어갔으며 후조, 전연, 전진, 후연의 지배하에 있었다. 북위 도무제가 후연을 멸망시키면서 북위의 치하로 들어왔다. 북위 태무제는 발해군을 '''창수군(滄水郡)'''으로 개명했다. 북위 효문제는 487년(태화 11년)에 북부지역인 부양현, 고성현, 요안현 일대에 부양군을 신설했고 497년(태화 21년)에 원래 이름으로 되돌렸다. 북위 시대에도 기주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4현 37,972호 140,482명을 거느렸다.[18] 북위 멸망 이후 동위, 북제, 북주 순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기원전 202년, 전한이 유주 아래에 발해군을 설치하였으나, 왕망 시대에 영하군으로 개칭되었다.[7] 후한 건국 후 발해군으로 환원되었으며, 기주에 속했고, 후한말 원소가 이 지역 태수로 세력을 다졌다.[8]
3. 행정 구역
진 시대 발해군은 10개 현을 관할했다.[9] 북위 태무제 초년에 '''창수군'''으로 개칭되었다가, 497년(태화 21년)에 발해군으로 환원되어 4개 현을 관할했다.[10]
583년 (개황 3년), 수나라가 군제를 폐지하면서 발해군은 창주에 편입되었다. 607년 (대업 3년)에 주(州)가 폐지되고 군(郡)이 설치되면서 창주는 '''발해군'''으로 개칭, 10개 현을 관할했다.[11] 618년 (무덕 원년), 당나라에 의해 창주로 개명되면서 발해군이라는 명칭은 사라졌다.[12]
3. 1. 전한
전한 고제가 설치했으며, 유주자사부에 속했다. 그러나 문제 2년(기원전 178년) 발해군과 조나라 내사 사이에 있는 하간국이 조나라에서 분할되었는데, 발해군이 당시 있었다면 조나라의 월경지가 되므로 주진학은 고제가 설치했다는 한서의 주석을 반박하고, 원래 발해군은 하간국의 일부였다가 하간국이 폐지된 후 하간군에서 분할된 것으로 추정했다.[13]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25만 6377호, 90만 5119명이 있었다.[14] 현재의 창저우 시 동부와 랑팡 시 중부와 남부, 그리고 헝수이 시 푸청 현과 빈저우 시 우디 현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14][15]
기원전 202년, 전한에 의해 유주 아래에 '''발해군'''이 설치되었다. 왕망 시대에 영하군으로 개칭되었다.[7]
3. 2. 후한
후한이 건국되자 발해군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발해군은 기주에 속했으며, 남피(南皮)·고성(高城)·중합(重合)·부양(浮陽)·동광(東光)·장무(章武)·양신(陽信)·수(脩) 8개 현을 관할했다.[8] 기주자사부로 이관되었고 하간군의 군역 확장, 안평국의 신설로 인해 8현으로 군역이 축소되었다. 32,389호 1,106,500명이 살았다.[16] 후한말에 원소가 이 지역에 태수로 있으면서 세력을 다졌다.
3. 3. 서진
진 시대 발해군은 남피, 동광, 부양, 요안, 고성, 중합, 동안릉, 조, 광천, 부성 10개 현을 관할했다.[9] 안평국에서 부성현이 이관되었으며, 10현 40,000호를 거느렸다.[17]
3. 4. 북조
석륵이 하북을 점령하면서 발해군은 북방민족의 치하로 들어갔으며 후조, 전연, 전진, 후연의 지배하에 있었다. 북위 도무제가 후연을 멸망시키면서 북위의 치하로 들어왔다. 북위 태무제는 발해군을 '''창수군(滄水郡)'''으로 개명했다. 북위 효문제는 487년(태화 11년)에 북부지역인 부양현, 고성현, 요안현 일대에 부양군을 신설했고 497년(태화 21년)에 원래 이름으로 되돌렸다. 북위 시대에도 기주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4현 37,972호 140,482명을 거느렸다.[18] 북위 멸망 이후 동위, 북제, 북주 순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3. 5. 수
수나라는 부양군과 낙릉군을 통폐합했고 군명을 발해군(勃海郡)에서 발해군(渤海郡)으로 바꿨다.[19] 586년(개황 6년)에 수나라가 주현제를 실시했을 때 발해군 지역에 '''체주(棣州)'''를 설치했으나 606년(대업 2년) '''창주(滄州)'''로 개명되었다. 10현 122,909호를 거느렸다.[19]
583년 (개황 3년), 수나라가 군제를 폐지하면서 발해군은 폐지되어 창주에 편입되었다. 607년 (대업 3년)에 주(州)가 폐지되고 군(郡)이 설치되면서 창주는 '''발해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발해군은 양신, 낙릉, 적하, 염차, 포태, 요안, 무체, 염산, 남피, 청지 10개 현을 관할했다.[11]
4. 태수
wiki
4. 1. 전한
4. 2. 후한
기주자사부로 이관되었고 하간군의 군역 확장, 안평국의 신설로 인해 8현으로 군역이 축소되었다. 32,389호 1,106,500명이 살았다.[16] 후한말에 원소가 이 지역 태수로 있으면서 세력을 다졌다.
발해군을 거쳐간 태수는 다음과 같다.
4. 3. 조위
원소 사후 원상을 비롯한 원소의 아들들이 세력 갈등을 일으키면서 내전을 일으켰다. 조조는 이 내란을 틈타 기주를 점령했는데, 발해군은 이 시기에 조위의 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양신현이 본군에서 낙릉군으로 이관되었고 안평국에서 본군으로 요안현이 이관되었다.[1]참조
[1]
서적
Book of Han
[2]
서적
Book of Later Han
[3]
서적
Book of Jin
[4]
서적
Book of Wei
[5]
서적
Book of Sui
[6]
서적
New Book of Tang
[7]
서적
漢書
[8]
서적
後漢書
[9]
서적
晋書
[10]
서적
魏書
[11]
서적
隋書
[12]
서적
旧唐書
[13]
서적
西汉政区地理
人民出版社
1987-08
[14]
서적
한서
[15]
서적
汉书地理志汇释
安徽教育出版社
2006-06
[16]
서적
후한서
https://zh.wikisourc[...]
[17]
서적
진서
https://zh.wikisourc[...]
[18]
서적
위서
https://zh.wikisourc[...]
[19]
서적
수서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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