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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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동군은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가 설치한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랴오닝 성 일대에 해당한다. 고조선과 관련된 지역으로, 한나라 시기에는 고구려 등 주변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공손탁, 위, 모용부 등을 거치며 5세기 초 광개토왕에 의해 소멸되었다. 요동군은 랴오허 동쪽 지역을 포괄하는 지명으로도 사용되었으며, 한국사에서 고조선, 고구려, 고려, 조선과 관련된 지역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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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군 | |
---|---|
지리 | |
개요 | |
위치 | 요동 지역 |
존속 기간 | 전국시대 ~ 당나라 |
주요 통치 시기 | 진나라, 한나라 |
폐지 시기 | 당나라 |
역사 | |
설치 시기 | 전국시대 |
주요 사건 | 요동 정벌 양평 전투 |
행정 | |
중심지 | 양평 |
속현 | 시대에 따라 변동 |
인구 | |
호구 (서한 평제 시기) | 55,972호 |
인구 (서한 평제 시기) | 272,533명 |
정치 | |
통치 | 요동태수 |
문화 | |
주요 문화 | 중국 문화, 요동 지역 문화 |
2. 역사
랴오닝 성 일대는 고대 고조선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독자적인 비파형 동검 문화가 발달했다.[8][9][10] 기원전 300년경 전국 시대 연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하여 고조선을 침공하고 이 지역을 점령한 뒤 요동군을 설치한 것으로 여겨진다.[11]
한나라 시기 요동군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 주변 세력에 대한 영향력 행사의 거점이었으나, 점차 성장한 고구려와 대립하는 최전선이 되기도 했다. 3세기에는 공손탁과 같은 군벌이 독자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다.
위나라가 공손씨 세력을 정벌한 뒤 요동군을 다시 편입했지만, 서진 시대에는 고구려와 선비족 모용부의 압박으로 약화되었다.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 속에 319년 모용부에게 정복되었고, 이후 모용씨의 전연, 후연 등이 요동을 차지했으나 고구려의 공세에 직면했다.
5세기 초 고구려 광개토왕이 요동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한나라 이래의 요동군은 소멸하였다. 이후 '요동'이라는 지명은 점차 만주나 한반도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도 사용되었으나, 청나라 이후 '만주' 지명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랴오둥반도 등 일부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축소되었다.
2. 1. 고조선과 한나라
요령 지방에 고조선이 존재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8] 이 지역 또는 그 일부는 고조선의 영토였음이 분명하다.[9] 랴오닝 성 일대에는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비파형 동검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랴오허 유역을 경계로 양식의 차이가 있어 일반적으로 랴오허 동쪽에 해당하는 요동 지역에는 고조선으로 비정되는 독자적인 문화권이 형성되었다고 본다.[10] 기원전 300년을 전후하여 전국 시대 연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하여 동호와 고조선을 침공하고 랴오닝 성 일대를 점령하였다.[11] 이때 연나라는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遼西)·요동(遼東)의 5개 군을 설치하였으며, 이 시기에 요동군이 처음 설치된 것으로 본다.[6]연나라는 요동 지역을 정복한 이후 장성을 쌓아 방어하려 했으며, 기원전 222년에 연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도 이 장성을 수리하여 경계로 삼았다. 이를 연진장성(燕秦長城)이라 부르는데, 대체로 요동군의 경계 지역을 대부분 아우른다고 여겨진다.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연진장성이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 하류까지 도달했다고 주장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고고학적 증거 부족을 이유로 압록강 이북의 연진장성만 인정하고 있다.[12]
한나라 시기의 요동군은 한나라가 고조선 및 부여, 고구려 등의 초기 국가들을 예속시키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때로는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 지역의 여러 초기 부족 집단들은 요동군 및 현도군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요동군으로부터 지배자의 위세품을 받아 권위를 세우고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고구려가 1세기 초 이후 강한 예속 관계에서 벗어나 한나라와 대립하면서 요동군은 그 최전선으로서 오랫동안 고구려와 전쟁을 치렀다. 반면 부여는 주로 한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공동으로 고구려에 맞섰다. 한편, 한나라의 중앙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던 요동군은 본국이 혼란에 빠지면 군벌이 형성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는데, 3세기에는 공손탁이 군벌화되어 수십 년 동안 요동 지역을 다스렸다.
2. 2. 삼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
3세기 무렵, 한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공손탁이 요동군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수십 년간 요동 지역을 지배했다. 이후 중국 북부의 혼란을 수습한 위나라는 238년에 사마의를 보내 공손연 세력을 정벌하고 요동군을 다시 직접 지배하에 두었다.서진(西晉)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와 선비족 모용부의 압박으로 요동군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서진이 멸망하고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이 시작되자 요동군은 더욱 쇠퇴하였고, 결국 319년 모용부에게 정복되었다.
모용부는 요서와 요동군을 기반으로 전연을 건국하여 한때 북중국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나, 370년 전진(前秦)에게 멸망당했다. 384년 모용수가 후연을 다시 세워 요동군을 차지했지만, 고구려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인해 후연의 요동 지배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마침내 5세기 초,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요동군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한나라 이래로 존속해 온 요동군은 사실상 소멸하였다. 이후 후연은 랴오닝 성 서부 지역에 요동군을 이름만 옮겨 설치(교치)하여 명맥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북제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로써 요동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로 확고히 편입되었다.
2. 3. 수나라와 당나라
612년(대업 8년), 수나라는 요양군을 설치했다. 이후 당나라 시기에는 영주에 편입되었다.2. 4. 고려와 조선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차지한 이후, 당나라 무렵부터는 '요동'이라는 지명이 확장되어 만주 전체와 한반도까지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라, 고려, 조선을 요동 또는 요좌(遼左)라고 칭한 사례도 다수 발견된다. 그러나 청나라 이후 만주족의 이름을 딴 '만주'가 중국 동북 지방의 지명으로 널리 사용되면서, '요동'이라는 명칭은 점차 랴오둥반도와 같은 일부 지명에 국한되어 사용되게 되었다.2. 5. 청나라
청나라 이후 만주족의 이름을 딴 '만주'가 중국 동북 지방의 지명으로 널리 사용되면서, '요동'이라는 명칭은 점차 그 사용 범위가 축소되었다. 오늘날 '요동'은 랴오둥반도와 같이 일부 지명에만 남아 사용되고 있다.3. 행정 구역
요동군은 시대에 따라 행정 구역이 변동되었으며 여러 현(縣)을 관할했다. 군의 중심지인 치소는 양평현(현재의 랴오양 시)에 두었다. 왕망 시기에는 양평현을 창평(昌平)으로 잠시 고쳤으며, 훗날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한 뒤 요동성으로 개칭했다.
한나라 시기에는 양평현 외에도 신창현, 무려현, 망평현, 험독현, 서안평현 등 다수의 현을 관할했다. 특히 험독현(현재의 타이안 현 부근)은 사마천의 사기 주석에서 과거 고조선의 수도였을 가능성이 언급되었고, 서안평현(현재의 단둥 시 부근)은 압록강 하구의 요충지이자 낙랑군, 대방군과 중국 대륙을 잇는 통로 역할을 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행정 구역에는 변화가 있었다. 후한 시기에는 일부 현(무려현, 험독현 등)이 요동속국으로 이관되거나, 다른 군(현도군)으로 소속이 변경(망평현, 후성현, 요양현, 고현현)되기도 했다. 위·진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현(방현, 요수현, 안시현, 무차현, 평곽현, 번한현, 답씨현 등)이 폐지되었으며, 낙취현이나 역성현과 같이 새로 설치된 현도 있었다.
3. 1. 진나라
기원전 222년, 진나라는 연나라를 멸망시킨 후, 연나라의 옛 영토에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과 함께 요동군을 그대로 설치했다.[6] 진나라는 또한 연나라가 축조했던 장성(연진장성)을 수리하여 국경 방어에 활용했으며, 이 장성은 대체로 요동군의 경계 지역을 대부분 아우른다고 본다.[12] 진나라가 멸망한 기원전 206년 이후에는 잠시 요동국이 세워지기도 하였다.3. 2. 한나라
한나라 시기 요동군은 고조선 멸망 이후 만주 지역에 대한 중국 왕조의 영향력 행사를 위한 주요 거점이었다. 한나라는 요동군을 통해 부여, 고구려 등 주변의 초기 국가들을 통제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며, 때로는 이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만주 지역의 여러 부족 집단들은 요동군 및 현도군에 일정 부분 예속되어 있었고, 이들 군현을 통해 지배자의 위세품을 하사받아 권위를 세우거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그러나 고구려가 1세기 초 이후 점차 성장하여 한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하면서, 요동군은 고구려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최전선 지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요동군은 오랫동안 고구려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반면, 부여는 대체로 한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고구려를 견제하는 데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한 말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변방인 요동군에서는 독자적인 세력이 등장하기도 했다. 3세기에는 공손탁이 요동 태수로 부임하여 사실상 독립적인 군벌 세력을 구축하고 그의 후계자들이 수십 년간 요동 지역을 지배했다. 이후 중국 북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건국된 위나라는 238년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연(공손탁의 손자) 세력을 정벌하고 요동군을 다시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서진 시대에 들어서는 고구려와 선비족 모용부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요동군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한나라 시기 요동군에 속했던 주요 현은 다음과 같다.
현명 | 한자 | 현재 위치 | 연혁 |
---|---|---|---|
양평현 | 襄平縣 | 랴오양 시 한대 유지(遺址) | 요동군의 치소. 왕망 시기에는 창평(昌平)이라 불렸다. 고구려가 요동군을 점령한 뒤 양평현의 현성이었던 양평성을 요동성으로 개칭했다. |
신창현 | 新昌縣 | 안산 시 남쪽 구보촌 한대 유지(遺址) | - |
무려현 | 無慮縣 | 베이전 시 대량갑 한성 유지 | 전한 시기 요동군 서부도위가 설치되었다. 왕망 시기에는 장설(長說)이라 불렸다. 후한 시기 요동속국으로 이관되었고, 위·진 시기에 폐지되었다. |
망평현 | 望平縣 | 톄링 현 신대자진 고성 | 서진 시기에는 현도군으로 이관되었다. |
방현 | 房縣 | 다와 현 소렴탄촌 유지 | 후한 시기 이후 폐지되었다. |
후성현 | 候城縣 | 선양시 상백관둔 고성 유지 | 전한 시기 요동군 중부도위가 설치되었다. 후한 시기에는 현도군으로 이관되었으며 위·진 시기에는 폐지되었다. |
요수현 | 遼隊縣[13]·遼隧縣 | 하이청 시 서쪽 서방대 | 왕망 시기에는 순목(順睦)이라 불렸다. 후한 시기 이후 폐지되었다. |
요양현 | 遼陽縣 | 랴오중 현 편보자 | 후한 시기에는 현도군으로 이관되었으며 위·진 시기에는 폐지되었다. |
험독현 | 險瀆縣 | 타이안 현 신개하진 이가요촌 손성자 고성 유지 | 사마천의 사기에 후한의 응소가 주석하여 이곳이 과거 고조선의 수도였다고 기록했다. 후한대에 요동속국으로 이관되었고, 위·진 시기에는 폐지되었다. |
거취현 | 居就縣 | 랴오양 시 양갑산 한대 성지 | 후한 시기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서진 시기에는 요동군에 속했다. |
고현현 | 高顯縣 | 선양시 남쪽 위가루자촌 | 후한 시기에 현도군으로 이관되어 서진 시기까지 존속했다. |
안시현 | 安市縣 | 잉커우 시 북쪽 영수구 한성 | 위·진 시기에는 폐지되었다. 1980년대 중국 학자 담기양은 고구려의 안시성과 같은 곳으로 보았으나, 현재는 다른 곳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
무차현 | 武次縣 | 펑청 시 봉산향 유가보촌 남쪽 한성 | 전한 시기 요동군 동부도위가 설치되었다. 후한 시기 이후 폐지되었다. |
평곽현 | 平郭縣 | 가이저우 시 현성 아래 한성 | 위·진 시기에는 폐지되었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뒤 폐지된 평곽현 자리에 건안성을 쌓았다. |
서안평현 | 西安平縣 | 단둥 시 동북쪽 애하첨촌 서안평 고성 | 압록강 하구와 그 이남 해안 지역을 관할했던 현으로, 압록강 하구 방어의 요충지이자 낙랑군, 대방군과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후한 초기부터 고구려의 침공이 잦았다. |
문현 | 文縣, 汶縣 | 하이청 시 석목 한성 | - |
번한현 | 番汗縣 | 위치 미상 | 위·진 시기에는 폐지되었다. 중국에서는 평안북도 박천군의 박릉성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단둥 시 둥강 대양하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
답씨현 | 沓氏縣 | 푸란뎬 시 장점 한성 | 위·진 시기에는 폐지되었다. |
낙취현 | 樂就縣 | 위치 미상 | 위·진 시기에 설치되었던 현으로 위치는 알 수 없다. |
역성현 | 力城縣 | 위치 미상 | 위·진 시기에 설치되었던 현으로 위치는 알 수 없다. |
3. 3. 위진 시대
3세기에는 공손탁이 군벌화되어 수십 년 동안 요동 지역을 다스렸으나, 위나라가 238년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연을 정벌하고 요동군을 다시 편입하였다. 서진(西晉)이 성립된 후 고구려 및 모용부의 압박으로 요동군은 크게 약화되었다.서진이 멸망하고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이 시작되자 요동군은 더욱 쇠퇴하였으며, 319년에 모용부에게 정복되었다. 모용부는 전연을 건국하여 요서 및 요동군을 배후지로 삼아 북중국 일부를 정복하였으나 370년에 전진(前秦)에 의해 멸망하였다. 384년에 모용수가 다시 후연을 건국하여 요동군을 차지하였으나, 고구려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요동군은 더욱 쇠퇴하였다. 결국 5세기 초 광개토왕이 요동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요동군은 소멸되었다. 후연은 랴오닝 성 서부에 요동군을 교치(僑置)하여 명맥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북제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위진 시기를 거치면서 요동군의 행정 구역에도 변화가 있었다. 무려현, 방현, 후성현, 요수현, 요양현, 험독현, 안시현, 무차현, 평곽현, 번한현, 답씨현 등 많은 현들이 폐지되거나 다른 군으로 소속이 변경되었으며, 낙취현과 역성현 같은 새로운 현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서진 시대에는 요동국(遼東國)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4. 요동군의 위치와 영역
요동 지역은 본래 고조선의 중심지였으며 그 영토의 일부였다.[8][9] 랴오닝 성 일대에서는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비파형 동검 문화가 발달했는데, 특히 랴오허 동쪽의 요동 지역은 고조선으로 비정되는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10]
기원전 300년 무렵, 전국 시대의 연나라가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동호와 고조선을 공격하여 랴오닝 성 일대를 점령하였다.[11] 이때 연나라는 북방 민족을 방어하고 점령지를 통치하기 위해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과 함께 '''요동군'''(遼東郡)을 처음 설치하였다.[6]
연나라는 요동 지역을 확보한 뒤 장성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기원전 222년 연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 역시 이 장성을 수리하여 국경으로 삼았다. 이 장성을 연진장성(燕秦長城)이라 부르는데, 대체로 초기 요동군의 경계와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학계에서는 연진장성이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 하류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하지만, 한국 학계에서는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압록강 이북 지역까지만 연진장성의 범위로 인정하고 있다.[12]
진나라 멸망 후(기원전 206년) 한때 요동국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이후 한나라 시기를 거치며 요동군은 만주 지역의 여러 세력에 대한 영향력 행사의 거점이 되었다. 3세기에는 공손탁 세력이 요동 지역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기도 했으며, 위나라와 서진 시대를 거치며 고구려 및 선비족 모용부의 압박으로 점차 약화되었다. 319년에는 모용부에게 정복되었고, 이후 전연, 전진, 후연의 지배를 받다가 5세기 초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요동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요동군은 소멸하였다. 후연은 랴오닝 성 서부에 요동군을 교치(僑置, 임시로 설치)하여 명맥을 유지하려 했으나 북제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요동군이 설치된 이후 '요동'이라는 지명은 시대에 따라 그 범위가 변화하였다. 처음에는 요동군의 행정 구역, 즉 오늘날의 랴오닝 성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고구려의 영토 전체를 요동이라 부르기도 했다. 당나라 시기 이후에는 만주 전체와 한반도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여, 신라, 고려, 조선을 요동 또는 요좌(遼左)라고 칭한 기록도 남아있다. 청나라 이후 만주족의 이름을 딴 '만주'가 중국 동북 지방의 지명으로 널리 쓰이게 되면서, '요동'은 현재 랴오둥반도와 같은 일부 지명에만 남아 사용되고 있다.
5. 요동군의 역할과 중요성
한나라 시기 요동군은 한나라가 고조선 및 부여, 고구려 등의 초기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때로는 견제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만주 지역의 여러 초기 부족 집단들은 요동군 및 현도군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요동군을 통해 지배자의 위세를 나타내는 물품을 받아 권위를 세우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했다.[8][9][10][11]
고구려는 1세기 초 이후 점차 한나라의 강한 예속 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한나라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요동군은 고구려와의 군사적 충돌이 잦은 최전선 지역이 되었다. 반면, 부여는 대체로 한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공동으로 고구려에 맞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요동군은 한나라의 중앙 정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기 때문에, 중국 본토가 혼란에 빠지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군벌이 등장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3세기에는 공손탁이 요동 지역에서 군벌화되어 수십 년간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이후 북중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성립된 위나라는 238년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연을 정벌하고 요동군을 다시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서진(西晉)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와 선비족 모용부의 압박으로 요동군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서진이 멸망하고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이 시작되자 요동군은 더욱 쇠퇴하였고, 결국 319년 모용부에게 정복되었다. 모용부는 전연을 건국하여 요동군을 포함한 요서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나, 370년 전진(前秦)에 의해 멸망했다. 384년 모용수가 다시 후연을 건국하여 요동군 지역을 차지했지만, 고구려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요동군의 실질적인 영역은 계속 축소되었다. 마침내 5세기 초,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요동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요동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요동군이 설치된 이후, '요동'이라는 지명은 단순히 행정 구역 명칭을 넘어 랴오허 동쪽 지역을 통칭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고구려 시기에는 고구려 영토 전체를 요동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당나라 시대 이후에는 만주 전체와 한반도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신라, 고려, 조선을 요동 또는 요좌(遼左, 랴오허의 동쪽)라고 칭한 기록도 다수 발견된다. 청나라 이후 만주족의 이름을 딴 '만주'가 중국 동북 지방의 지명으로 널리 사용되면서, '요동'은 랴오둥반도와 같은 일부 지명에만 남게 되었다.
6. 한국 역사에서의 요동
요동 지역은 고대 한국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랴오닝성 일대에는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비파형 동검 문화가 발달했으며, 특히 랴오허 동쪽의 요동 지역은 고조선의 중심지 또는 영토였던 것으로 여겨진다.[8][9][10]
기원전 300년 무렵, 중국 전국 시대의 연이 동쪽으로 진출하여 고조선을 공격하고 랴오닝성 일대를 차지한 뒤, 북방 민족 방어 및 점령지 통치를 위해 요서군 등과 함께 '''요동군'''을 처음 설치했다.[11][6] 연나라는 요동 지역에 장성(연진장성)을 쌓았는데, 그 범위에 대해서는 압록강 이남까지 이르렀다는 중국 측 주장과 고고학적 증거 부족으로 압록강 이북까지만 인정하는 한국 학계의 입장이 대립한다.[12]
한나라 시대 요동군은 고조선 멸망 이후 부여, 고구려 등 만주 지역 세력에 대한 통제와 교류의 거점이었으나, 점차 강성해진 고구려와는 오랜 기간 군사적 충돌을 겪는 최전선이 되었다. 3세기에는 공손탁 세력이 요동에서 독자적인 힘을 키우기도 했으나, 위나라에 의해 정벌되었다. 이후 서진 시대에는 고구려와 선비족 모용부의 압박으로 요동군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319년 모용부에게 정복되었다.
모용부가 세운 전연과 후연이 잠시 요동 지역을 차지했으나, 5세기 초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요동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한나라 이래 존속해 온 요동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요동'이라는 명칭은 시대에 따라 만주 지역 전체나 한반도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6. 1. 고조선
요령 지방에는 고조선이 존재하고 발전했으며,[8] 이 지역 또는 그 일부는 고조선의 영토였던 것으로 보인다.[9] 랴오닝성 일대에는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비파형 동검 문화가 발달했는데, 랴오허를 경계로 동쪽의 요동 지역에는 고조선으로 추정되는 독자적인 문화권이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10]기원전 300년 무렵, 중국 전국 시대의 연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동호와 고조선을 침공하여 랴오닝성 일대를 점령하였다.[11] 이때 연나라는 북방 민족을 방어하고 점령지를 통치하기 위해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과 함께 '''요동군'''을 처음 설치한 것으로 본다.[6] 연나라는 요동 지역을 정복한 뒤 장성을 쌓아 방어했으며, 기원전 222년 연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 역시 이 장성을 수리하여 국경으로 삼았다. 이 장성을 연진장성(燕秦長城)이라 부르는데, 대체로 요동군의 경계 지역을 따라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학계에서는 연진장성이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 하류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하지만, 한국 학계에서는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압록강 이북 지역의 장성만 인정하고 있다.[12]
6. 2. 고구려
한나라 시기 요동군은 고구려 및 부여 등 만주 지역의 초기 국가들을 통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초기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부족 집단은 요동군 및 현도군에 어느 정도 예속되어 있었으며, 요동군을 통해 지배자의 위세품을 하사받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1세기 초 이후 고구려가 점차 강성해지며 한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나 대립하기 시작하자, 요동군은 고구려와의 오랜 전쟁을 치르는 최전선이 되었다. 반면 부여는 주로 한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공동으로 고구려에 맞서는 입장을 취했다.한편, 한나라의 중앙 권력이 약화될 때마다 요동군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이 되기도 했다. 3세기에는 공손탁이 군벌 세력을 이루어 수십 년간 요동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이후 중국 북부의 혼란을 수습한 위나라는 238년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연 세력을 정벌하고 요동군을 다시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서진(西晉) 시대에 들어서면서는 고구려와 선비족 모용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요동군은 크게 약화되었다. 서진이 멸망하고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이 시작되자 요동군은 더욱 쇠퇴하였고, 결국 319년 모용부에게 정복되었다. 모용부는 전연을 세우고 요동군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나, 370년 전진(前秦)에게 멸망당했다. 384년 모용수가 다시 후연을 건국하여 요동군을 차지했지만, 이미 고구려의 강력한 압박으로 요동군은 이름만 남은 상태에 가까웠다.
마침내 5세기 초,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요동 지역으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요동군을 완전히 정복하여 고구려 영토로 편입시키면서, 한나라 이래로 존속해 온 요동군은 소멸하였다. 이후 후연은 랴오닝 성 서부 지역에 요동군을 임시로 설치(교치)하여 명맥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북제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6. 3. 고려와 조선
당나라 무렵부터 만주 전체와 한반도까지 요동이라는 지명으로 통칭하기도 하였으며, 신라, 고려, 조선을 요동(遼東) 또는 요좌(遼左)라 칭한 사례도 다수 발견된다. 청나라 이후 만주족의 이름을 딴 만주가 중국 동북 지방의 지명으로 널리 사용되면서 요동은 랴오둥반도 같은 일부 지명에만 사용되게 되었다.참조
[1]
서적
Book of Han
[2]
서적
Book of Later Han
[3]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4]
서적
Book of Jin
[5]
서적
Book of Sui
[6]
서적
史記
[7]
서적
後漢書
[8]
백과사전
고조선
두산백과
[9]
백과사전
고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서적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11]
백과사전
고조선
두산백과
[12]
문서
만리장성
[13]
문서
흔히 요대라고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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