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해산
1. 개요
최해산은 조선 전기의 무관으로, 화약 병기 및 군 장비 개발에 기여한 인물이다. 영주 최씨 출신으로, 아버지로부터 화약수련법을 전수받았다. 1401년 군기시에 등용되어 군기감승, 군기판사, 군기감사 등을 역임하며 화차 개발 및 화포 발사 시험을 주관했다. 1431년에는 오랜 군기감 근무로 인한 비리 혐의로 신하들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종의 비호 아래 공조우참판으로 승진하고, 파저강 토벌 작전에서도 용서받았다. 이후 제주안무사, 중추원부사, 강계절제사 등을 지냈다.
-
영천 최씨 -
최무선
최무선은 고려 후기에 태어나 화약과 화포 개발에 힘썼으며 왜구 격퇴에 기여했고,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포를 제작하고 진포 해전에서 활약했으며, 그의 업적은 아들에게 이어졌다. -
최무선 -
최무선로
영천시 완산동 원제삼거리에서 호국로와 연결되는 최무선로는 금호로, 향군로 등 주요 도로와 교차하며 영천시평생학습관, 영변강원공원 등의 주요 시설이 위치한다. -
최무선 -
SS-063 최무선
SS-063 최무선함은 1993년에 진수되어 국내 기술로 건조된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으로, 1996년 해외 파견 훈련 성공 및 2016년 성능 개량을 통해 탐지 능력과 생존성을 향상시켰다. -
1443년 사망 -
제아미
제아미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활약하며 노 연극을 대성시킨 연극인이자 연출가이며, 예술론을 담은 저서를 통해 노의 이론을 정립하고, 많은 역작을 남겨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443년 사망 -
아시카가 요시카쓰
아시카가 요시카쓰는 1434년에 태어나 1442년 9세의 나이로 무로마치 막부의 7대 쇼군이 되었으나, 정치적 능력 부족으로 실권을 호소카와 모치유키 등이 장악했고, 1443년에 1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 관직 진출과 화약 무기 개발
1401년(조선 태종) 군기시(軍器寺)에 등용되어 주부(主簿)를 거쳐 경기우도 병선군기점고별감(京畿右道兵船軍器點考別監)이 되었다. 1409년 군기감승(軍器監丞)에 올랐고, 그해 10월에는 화차를 만들어 왕이 참석한 가운데 해온정(解慍亭)에서 발사 시험을 하였다. 1424년(조선 세종 6) 12월에는 군기판사로서 왕을 모시고 광연루(廣延樓)에 나아가 화포 발사 연습을 주관하였다. 1425년 군기감사를 지냈고, 1431년 6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그해 10월, 조정 신하들은 최해산이 오랜 군기감 근무로 옳지 못한 일이 많았다며 그의 체직(遞職)을 건의했지만, 조선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듬해 공조우참판으로 승진했다. 1개월 후 판경성군사(判鏡城郡事)로 전보되었을 때도 세종은 그가 외직으로 나갈 경우 군기감의 업무가 부실해진다 하여 중추원부사를 제수하였다.
1433년 좌군절제사로 도원수 최윤덕(崔潤德)과 함께 파저강(婆猪江) 토벌 작전에 참전했을 때 군기(軍機)를 이행하지 않아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지만, 조선 세종은 "20여 년 동안 오로지 화포를 맡았으니 어찌 공이 없다고 하겠는가"라며 벼슬만 거두도록 하여 용서하였다. 그 뒤에도 제주안무사, 중추원부사, 강계절제사 등을 지냈다. 그는 전수받은 화약수련비법과 타고난 재능으로 성과 열을 다하여 화약병기를 비롯한 군장비 보강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2.2. 군기감 비리와 세종의 비호
1431년 10월, 최해산이 오랜 군기감 근무로 옳지 못한 일이 많았다 하여 조정 신하들이 그의 체직(遞職)을 품신했지만, 조선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허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듬해 공조우참판으로 승진했다. 1개월 후 판경성군사(判鏡城郡事)로 전보되었을 때도 세종은 그가 외직으로 나갈 경우 군기감의 업무가 부실해진다 하여 중추원부사를 제수하였다.
1433년 좌군절제사로 도원수 최윤덕(崔潤德)과 함께 파저강(婆猪江) 토벌작전에 참전했을 때도 군기(軍機)를 이행하지 않은 관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지만, 조선 세종은 그가 20여 년 동안 오로지 화포를 맡았으니 어찌 공이 없다고 하겠는가 벼슬만 거두도록 하라고 하여 용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