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최윤덕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1376년에 태어나 1444년에 사망했다. 그는 1394년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왜구 토벌과 여진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1419년 대마도 정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이만주를 정벌하여 평안도 지역의 안정을 가져왔다. 세종 시대에는 의정부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며 비변사 설치를 건의하는 등 정치에도 참여했다. 사후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정렬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의 병마사 - 이종무
이종무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태종을 도와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세종 원년에 삼군도체찰사로서 대마도 정벌을 지휘했으며, 사후 양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 조선의 병마사 - 조영무
조영무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이성계의 사병으로 시작하여 조선 건국에 기여하고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을 도와 공신이 되었으며, 태종 즉위 후 우정승에 이르렀고 사후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1376년 출생 - 노한
노한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여러 요직을 거치며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 1376년 출생 - 하연 (1376년)
하연(1376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정몽주의 제자이자 성리학자였으며, 태종, 세종, 문종 대에 걸쳐 요직을 두루 거치며 숭유억불 정책을 실천하고, 문종의 섭정을 맡아 단종의 즉위를 도왔다. - 1445년 사망 - 평원대군
평원대군은 조선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과 세조의 동생으로, 평원대군에 봉해지고 결혼하여 종학에 입학했으나 천연두로 사망했으며, 제안대군이 양자로 제사를 계승했다. - 1445년 사망 - 안토니오 2세 아차이올리
안토니오 2세 아차이올리는 아차이올리 가문 출신으로 마리아 파라토와 결혼하여 프란체스코 2세, 바르톨로메아, 도메니코 세 자녀를 두었다.
최윤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원어명 | 崔潤德 |
출생일 | 1376년 0월 0일 |
출생지 | 고려국 경상주도 창원 |
사망일 | 1445년 |
정당 | 무소속 |
직책 | 조선국 공조판서 (朝鮮國 工曹判書) |
군주 | 조선 세종대왕 이도 |
섭정 | 상왕 태종 이방원(前) 영의정 유정현(前) |
별명 | 자 여화(汝和),백수(伯修), 호 임곡(霖谷),호연정(浩然亭), 시호 정렬(貞烈) |
학력 | 1395년 무과 회시 장원 급제 |
경력 | 군인, 외교관, 정치가 |
임기 | 1421년 2월 1일 ~ 1423년 4월 30일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팔거도씨 |
자녀 | 최숙손(장남) |
부모 | 최운해(부) 창원 이씨 부인(모) 청주 양씨 부인(계모) 안동 권씨 부인(계모) |
친인척 | 최녹(조부) |
![]() 조선 세종대왕 어록 | |
형제 | 누이 3명 남동생 2명 |
2. 생애
최윤덕은 1376년(고려 우왕 2년) 창원시 북면 내곡리 무릉촌에서 조선 초 명장인 최운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 1382년 6세에 모친 창원이씨가 산후 후유증으로 별세하여 인근의 천민 양수척에게 위탁되어 자랐다.[2] 1389년 14세에 활을 쏘아 큰 호랑이를 잡았으며, 이후 아버지의 명에 따라 계모 안동권씨의 제종조인 양촌 권근에게 배웠다.
1394년(태조 3년) 19세에 무과 회시에 장원, 아버지의 군관으로 복무하였다. 1396년(태조 5년) 21세에 부친을 따라 영해전투에 처음 출전,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1401년(태종 즉위년) 태종이 직접 면담하고 인재를 얻었노라 기뻐하며 훈련관 부사직(종5품)에 임명하였다. 1402년(태종 2년) 무과 전시에 합격하여 호군에 올랐다.[3][4]
1404년(태종 4년) 부친 최운해가 별세하여 시묘살이를 하던 중 상중에 기복을 명받고 대호군에 올라 병무를 수행하였다. 1406년(태종 6년) 지태안군사가 되었다.
1410년(태종 10년) 다시 한번 무과에 급제,[5] 상호군에 올라 동북면 조전지병마사로 출전, 여진족을 정벌하고 경성병마사가 되었다. 1411년(태종 11년) 경성절제사 겸 우군동지총제가 되고, 곧이어 경성등처도병마사가 되어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를 복속시킴으로써 여진족의 준동을 막았다.
1412년(태종 12년) 중군절제사, 1413년(태종 13년) 우군절제사가 되었다. 1415년(태종 15년) 우군총제 겸 영길도도순문찰리사가 되었다. 1417년(태종 17년) 한양으로 돌아와 무과시험관을 맡았고, 1418년(태종 18년) 좌군총제 겸 도진무가 되었다.
1419년(세종 1년)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고, 3군도절제사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1433년(세종 15년) 평안도 도절제사 겸 3군도통사로 훈강(파저강) 유역의 여진족 이만주를 정벌,.[1] 이 공으로 의정부 우의정에 특진되어 무신으로 드물게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1] 여러 번 무인으로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않았고, 평안도 도안무찰리사를 겸하였다.[1] 1434년(세종 16년) 우의정을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다시 윤허하지 않았다.[1]
1435년(세종 17년) 좌의정이 되었는데, 비변사의 24조를 건의하고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436년(세종 18년) 사직 상소를 올리는 최윤덕을 위해 무관직인 중추원에 영중추를 신설, 최초로 영중추원사에 올랐다.[6] 1438년(세종 20년) 어가 수행의 특명을 받았다.
2. 1. 유년기
崔閏德|최윤덕중국어은 1376년(고려 우왕 2년) 창원시 북면 내곡리 무릉촌에서 조선 초 명장인 양장공 최운해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2] 1382년 6세에 모친 창원이씨가 산후 후유증으로 별세하여 인근의 천민 양수척에게 위탁되어 키워졌다.[2] 1389년 14세에 활을 쏘아 능히 큰 호랑이를 잡았으며, 이후 아버지의 명에 따라 계모 안동권씨의 제종조인 양촌 권근 선생에게 사사하였다.2. 2. 입조
1394년(태조 3년) 19세에 무과 회시에 장원하였고, 아버지의 군관으로 복무하였다. 1396년(태조 5년) 21세에 부친을 따라 영해전투에 처음 출전하여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1401년(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직접 면담하고 인재를 얻었노라 기뻐하고 바로 훈련관 부사직(종5품)에 임명되었다. 1402년(태종 2년)에는 무과 전시에 합격하여 호군에 올랐다.[3][4]1404년(태종 4년)에 부친 양장공 최운해가 별세하여 시묘살이를 하던 중 상중에 기복을 명받고 대호군에 올라 병무를 수행하였다. 1406년(태종 6년)에는 지태안군사가 되었다.
1410년(태종 10년) 다시 한번 무과에 급제하여[5] 상호군에 올라 동북면 조전지병마사로 출전하여 여진족을 정벌하고, 경성병마사가 되었고 1411년(태종 11년)에는 경성절제사 겸 우군동지총제가 되고, 곧이어 경성등처도병마사가 되어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를 복속시킴으로써 여진족의 준동을 막았다.
1412년(태종 12년)에는 중군절제사, 1413년(태종 13년)에는 우군절제사가 되었다. 1415년(태종 15년)에는 우군총제 겸 영길도도순문찰리사가 되었다. 1417년(태종 17년) 한양으로 돌아와서 무과시험관을 맡았고, 1418년(태종 18년) 좌군총제 겸 도진무가 되었다.
2. 3. 성군 세종과의 만남
2. 3. 1. 대마도 정벌
1419년(세종 1년)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고, 3군도절제사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2. 3. 2. 이만주 정벌 이후 우의정으로 특진
1433년(세종 15년) 평안도 도절제사 겸 3군도통사로 훈강(파저강) 유역의 여진족 이만주를 정벌하였다.[1] 이 공으로 의정부 우의정에 특진되어 무신으로 드물게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1] 여러 번 무인으로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않았고, 평안도 도안무찰리사를 겸하였다.[1] 1434년(세종 16년)에는 우의정을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다시 윤허하지 않았다.[1]2. 3. 3. 좌의정 그리고 최초의 영중추원사로 임명
1435년(세종 17년) 좌의정이 되었는데, 비변사의 24조를 건의하고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436년(세종 18년) 사직 상소를 올리는 최윤덕을 위해 무관직인 중추원에 영중추를 신설하여 최초로 영중추원사에 올랐다.[6] 1438년(세종 20년) 어가 수행의 특명을 받았다.3. 업적
1419년(세종 1년),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자 조선은 이종무를 중심으로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최윤덕은 3군도절제사로서 1만 7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벌에 참여하여 왜구를 소탕하고, 잡혀갔던 조선인과 명나라 사람을 구출했다.[1] 정벌 이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키는 대신 삼포를 개항하여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했고, 이는 오랜 기간 왜구의 침입을 막는 효과를 가져왔다.[1]
1433년(세종 15년), 최윤덕은 평안도 도절제사 겸 3군도통사로서 1만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훈강(파저강) 유역의 여진족 이만주를 정벌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이 공으로 우의정에 올랐다.[8] 이후 여연, 자성, 무창, 우예에 사군을 설치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최윤덕은 축성 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421년(세종 3년) 공조판서로서 도성 성곽 보수를 건의하여 도성수축도감을 설치하고 수축공사를 진행했다.[6] 1429년(세종 11년)에는 삼도도순무사로서 성터를 순회하고, 경상도 동래와 남해에 축성이 필요함을 주장하며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이의 10만 양병설보다 140여 년 앞선 것이었다.[7]
3. 1. 대마도 정벌
1419년(세종 1년) 조선의 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자, 5월 14일에 조정에서 대마도의 정벌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해 음력 6월 19일 장천군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 영의정 유정현을 3도도통사, 참찬 최윤덕을 3군도절제사로 삼아,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1]6월 20일에 선발대가 대마도에 상륙한 이후 본대가 뒤이어 상륙하여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수색하고 근거지를 소탕하자 왜구들이 산으로 달아나 방어를 하였다. 26일에 왜구와 결전을 위해 전진하던 중 좌군절제사 박실이 복병을 만나 후퇴하였다. 이 전투로 편장 박홍실, 박무양, 김해, 김희 등이 전사하고 병사들 백 수십 명이 다쳤다.[1]
이에 최윤덕이 중요 길목을 차단하니 보름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조선군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잡혀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항복을 받은 지 7일 만인 7월 3일 거제도로 개선하였다. 출병한 지 보름 만이었다.[1]
정벌 이후 대마도의 경상도 편입을 통고하는 대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여 삼포를 개항했다. 이러한 포용정책으로, 오랜 기간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1]
3. 2. 이만주 정벌
1433년(세종 15년) 평안도 도절제사 겸 3군도통사로 훈강(파저강) 유역의 여진족 이만주를 정벌하였다. 이 공으로 의정부 우의정에 특진되어 무신으로 드물게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여러 번 무인으로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않았고, 평안도 도안무찰리사를 겸하였다. 1434년(세종 16년)에는 우의정을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다시 윤허하지 않았다.[8] 훈강(파저강) 인근의 여진족 이만주를 정벌하고 평안도에 사군을 설치하는 공을 세웠다.1432년(세종 14년) 12월 9일에 평양감사의 보고에 야인 400여 기가 경계에 침입하여 사람과 물건들을 약탈해가니 강계절제사 박초가 추격하여 사람들을 구하고 약탈해가는 물건을 다시 빼앗아 왔다고 하였다. 이어 12월 21일에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가 침입하였는데, 이전부터 식량이 부족하여 4군 지역에 자주 침탈하였다.
1433년(세종 15년) 1월에 평안도 감사가 여연, 강계에서의 전투에서 전사자(48명)를 포함해서 75명의 피해를 보고했다. 같은 달 11일에 평안도 절제사로 최윤덕을 임명하였다. 처음에는 정벌에 신중해야 한다고 아뢰었으나 세종의 정벌 의지는 확고하였다. 그리고 최윤덕을 판중추원사 겸 영영변도호부사로 삼았다. 조정에서 처음 정벌군의 규모를 3천을 논하였으나 최윤덕이 아뢰어 1만 이상의 군사로 정하였다.
1433년(세종 15년) 4월에 모든 군사가 강계부에 집합하여,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 겸 3군 도통사로, 김효성을 도진무로 하여 황해도, 평안도 양도의 군병 15,000명을 편성하여 드디어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 유역으로 4월 19일에 출진한다. 휘하의 절제사들을 7개의 부대로 나누어 단숨에 여진족의 각 마을을 쳐들어가 점령함으로써 대승을 이끌었다. 이 전투의 공로로 5월에 최윤덕은 우의정에 오르게 된다. 이어 근정전에서 펼쳐진 출병 장수들의 위로연에서 세종은 세자의 술잔을 앉아서 받도록 하는 등 전적인 신뢰를 나타낸다.[8] 이후 그 뒤 여연·자성·무창·우예에 사군을 설치하였다.
3. 3. 축성 사업
최윤덕은 1421년(세종 3년) 공조판서로 임명되었는데, 평소 상왕 태종과 세종에게 도성 성곽의 보수를 건의하였다. 그 후 도성수축도감을 설치하고 세종 4년 정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하였다.[6]1429년(세종 11년)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도도순무사가 되어 성터를 순회하면서 살펴보게 하였다. 이듬해 최윤덕을 판중군부사로 임명하고, 5월에 하삼도의 수축과 새 축성터를 보고하게 하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최윤덕의 말에 따를 것이라 하며 성보 수축의 임무를 맡겼다. 경상도의 동래와 남해에 축성의 필요성을 보고하면서 일본이 통일되면 반드시 조선에 쳐들어 올 것이니 방비를 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이는 이이의 10만 양병설보다 140여 년 앞서서 일본의 침략을 예언한 것이었다.[7]
4. 사상 및 평가
최윤덕은 맹자의 호연지기(공명정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용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1]
4. 1. 호연지기(浩然亭記)
내가 금계에 와서 정신이 소모되고 기력이 감축되어 아름다움을 찾아 뛰어나게 경치가 좋은 곳을 얻으니, 이는 곧 석각정(石角亭)이다.[1] 전에 정신이 소모되고 기력이 줄어든 것이 활연해지고 상쾌하게 되었으므로, 멀리 맹자의 호연지기(공명정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용기)를 잘 기르는 뜻으로 정자에 이름을 붙이니, 이 두 글자의 뜻은 오직 천지간에 꽉 찼을 뿐이다.[1] 이로써 나의 정자를 이름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후대 사람들이여 비웃기를 멈출지어다.[1]지극하도다, 추 나라 맹자는 천고에 나의 스승이로다.[1] 두 글자를 이 정자에 걸어놓고, 매양 앉으나 서나 본다.[1] 제나라와 양나라는 캄캄한 밤중이었으니, 뉘라서 이 어진 스승을 알아보랴.[1] 오직 이 호연지기는 응당 한때라도 끊어지면 아니 되리니.[1]
좋은 비는 사람을 만류하여 떠날 길을 늦추니, 창가에 종일토록 강물 소리 듣고 있네.[1]
5. 사후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통천의 상렬사(尙烈祠)와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1]
6. 일화
그는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하여 공무가 없을 때에는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호랑이를 잡아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해 준 일도 있다.[1]
태안군사로 있을 때 화살통의 쇠 장식이 낡아 부하가 새것으로 갈아 끼우자 크게 화를 내며 원래대로 돌려놓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평소 검소하고 청렴했다.[1]
세종 5년부터 평안도도절제사 겸 안주목사로 있을 때에도 20년 전 서산군 수령 시절과 다름없이 공무가 끝나면 빈 땅을 갈아 채소를 가꾸고 이웃 백성들에게 생업에 힘쓸 것을 가르쳤다. 하루는 송사하러 온 사람이 장군을 촌부로 알고 "대감께서는 어디 계신가?" 묻자, "송사장에 있으면 곧 오실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송사 판결에 임했다는 일화도 있다.[1]
세종 5년, 한 아낙네가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자, 호랑이 발자국을 쫓아 호랑이를 쏘아 죽이고 배를 갈라 유해를 수습해 장사지내 주었다.[1]
최윤덕은 조정에 출사한 후 통천군 벽양면에 벽산성을 축성하고 외직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검은 소를 타고 한양 대궐로 등청했다. 가는 길에 향천역 마을에서 소에게 물을 먹여 향천리라 불리게 되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회양군 안풍면 초원에서 소를 놓아 풀을 먹여 방목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1]
《청파극담》에 따르면, 최윤덕이 모친상(계모 안동 권씨)을 당해 말 한 필과 종 하나만 거느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 어느 개울가에서 술을 마시던 수령들이 그를 촌민으로 오해하고 무례하다며 벌하려 했다. 종이 최윤덕의 신분을 밝히자 수령들은 크게 놀라 사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를 통해 그의 청렴하고 소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1]
7.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최록 | |
조모 | 평창 이씨 | |
아버지 | 최운해 | |
어머니 | 창원 이씨 | |
계모 | 안동 권씨 | |
이복 동생 | 최윤복(崔閏福) | |
이복 동생 | 최윤온 | |
이복 동생 | 최윤례(崔閏禮) | |
부인 | 팔거 도씨 | |
아들 | 최숙손 | |
손자 | 최맹한(崔孟漢) | |
손자 | 최중한(崔仲漢) | |
아들 | 최경손(崔敬孫) | |
손녀 | 이국(李菊) | 출가 |
아들 | 최광손(崔廣孫) | |
손자 | 최계한(崔季漢) | |
손자 | 최종한(崔終漢) | |
아들 | 최영손 | |
딸 | 주세구(周世龜) | 출가 |
딸 | 이효검(李孝儉) | 출가 |
8. 관련 작품
9. 유적지
유적지명 | 설명 |
---|---|
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 | 창원시 북면 대산리 산8에 있는 정렬공 최윤덕 묘. 1992년 10월 21일 지정. |
경상남도 기념물 제145호 | 창원시 북면 내곡리에 있는 최윤덕 장군 생가지. 1995년 5월 2일 지정. |
최윤덕 정려각 | 경상남도 창원시 삼동동 소재. |
종묘 세종묘 | 서울특별시에 있으며, 최윤덕 배향. |
관곡서원 | 전라북도 임실군 소재. |
정렬공 최윤덕 부조묘 | 전라북도 장수군 소재. |
삼충사(통천최씨 사우)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군 대산리 소재. 양장공 최운해, 정렬공 최윤덕, 근제공 최윤온, 옥포공 최산정 배향. |
10. 연관 인물
참조
[1]
서적
모재집
[2]
웹사이트
한국명문 청주양씨 기록
http://thugjong1.caf[...]
[3]
실록
태종실록 2년(1402)4월 10일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4]
문서
[5]
문서
[6]
실록
세종실록 18년(1436) 7월 4일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7]
문서
[8]
실록
세종실록 15년(1433) 5월 26일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