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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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티니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인도네시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한 자바 귀족 출신 여성이다. 그녀는 서구식 교육을 통해 여성의 자아 실현과 사회 참여를 강조했으며, 일부다처제에 반대하는 등 진보적인 사상을 펼쳤다. 카르티니는 네덜란드어로 쓴 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알렸고, 사후에 출판된 편지 모음집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녀는 인도네시아의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카르티니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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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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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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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라덴 아젱 |
이름 | 카르티니 |
다른 이름 | 라덴 아젱 카르티니 |
출생일 | 1879년 4월 21일 |
출생지 | 네덜란드령 동인도 주파라 |
사망일 | 1904년 9월 17일 |
사망지 | 네덜란드령 동인도 렘방 |
배우자 | 라덴 아디파티 조요디닝라트 (1903년 결혼) |
자녀 | 소에살릿 조요아디닝라트 |
알려진 이유 | 여성 해방; 국가적 영웅 |
서명 | Kartini signature 8-2.png |
2. 배경
카르티니가 살던 시대에 인도네시아는 고무, 석유와 같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담배 생산으로 인해 다른 어떤 네덜란드 식민지보다 많은 네덜란드 이민자를 끌어들인 중요한 네덜란드 식민지였다.[1] 네덜란드는 20세기가 되기 전에 인도네시아 군도 전체를 장악하려고 했다. 한편, 수에즈 운하 개통, 전신선 설치, 철도 건설과 같은 기술 발전으로 식민지는 현대화되었다.[1]
카르티니는 1879년 4월 21일 자바 섬 마용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자바 귀족(priyayi) 출신인 라덴 아디파티 소스로닝랏과 종교 학자의 딸인 응아시라였다. 아버지는 네덜란드 동인도의 네덜란드 식민 제국에서 자바 중북부의 행정 책임자로 일했으며, 1880년에는 제파라의 군수가 되었다.
인도네시아로 이주하는 네덜란드인이 늘어나면서 사기업이 설립되었고, 이민자들을 위한 네덜란드 학교가 세워지면서 인도네시아 귀족 계층에게 교육 기회가 열렸다. 네덜란드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지식이 전통적인 인도네시아 문화에 퍼지기 시작했다.[1] 인도네시아 귀족들 사이에서는 일부다처제가 흔했다. 무슬림 남성은 최대 네 명의 아내를 둘 수 있었다. 아내들은 남편의 집안에서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그들은 종종 스스로 생계를 유지했고 남편과 별도의 건물에서 살았다.[2]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남성의 사회적 지위는 아내의 수에 따라 결정되었다.[3]
3. 생애
카르티니의 어머니 응아시라는 소스로닝랏의 첫 번째 부인이었고, 그들 사이에는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다. 카르티니는 11명의 형제자매 중 다섯 번째 아이이자 두 번째 딸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프앙겐 아리오 촌드로네고로 4세는 25세에 군수가 되었고, 카르티니의 형인 소스로카르토노는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카르티니는 6세 때부터 네덜란드 학교에 다니면서 서구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녀는 네덜란드어에 능숙했고, 마리 오빙크-소어에게 바느질과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배웠다. 10대 시절에는 1891년부터 1895년까지 "은둔 생활"을 경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판디타 라마바이 사라스바티를 포함한 페미니스트 및 정치 출판물을 읽었다.
카르티니와 그녀의 자매들은 주기적으로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 마리 오빙크-소어를 방문하여 피아노와 수공예 훈련을 받았다. 카르티니는 여러 네덜란드어 필담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그중 한 명은 로사 아벤다논이었다.
카르티니는 교육이 여성에게 중요하다고 믿었고, 중매결혼과 일부다처제에 반대했다.
1896년부터 카르티니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은둔 생활을 하던 방을 가끔 나와 여러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1898년, 즉위식 기념 무도회에 참석한 카르티니는 학생들에게 성격 교육 과정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르티니는 16세에 결혼해야 했지만, 1903년 11월 8일, 렘방의 군수 라덴 아디파티 조조 아디닝라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카르티니가 학교 운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카르티니는 1904년 9월 13일 아들 라덴 마스 싱기를 출산했지만,[1] 출산 4일 후인 1904년 9월 17일 사망했다. 그녀는 렘방의 불루 마을에 묻혔다.
3. 1. 유년 시절
1879년 4월 21일, 자와섬 마용(Mayong) 마을에서 자와 귀족(priyayi) 출신 아버지 라덴 아디파티 소스로닝랏(Raden Adipati Sosroningrat)과 종교 학자의 딸 응아시라(Ngasirah)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네덜란드 동인도에서 자바 중북부 행정 책임자로 일했고, 1880년 제파라의 군수가 되었다. 어머니 응아시라는 평민 출신으로 소스로닝랏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며, 둘 사이에는 8명의 자녀가 있었다. 카르티니는 11명의 형제자매 중 다섯 번째 아이이자 두 번째 딸이었다. 할아버지 프앙겐 아리오 촌드로네고로 4세(Pangeran Ario Tjondronegoro IV)는 25세에 군수가 되었고, 오빠 소스로카르토노(Sosrokartono)는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카르티니의 출생 및 가족 배경은 다음과 같다.
출생 | 1879년 4월 21일 (자와력 1808년 4월 28일) 자와섬 제파라 현 마욘 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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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라덴 마스 아디파티 소스로닝라트(Radèn Mas Adipati Sosroningrat) (제파라 현 마욘 군 군수) |
어머니 | 낭시라(Ngasirah) |
형제자매 | 11남매 중 5번째 자녀 |
가계 | 자와 프리야이(Priyayi) 귀족 가문 |
조부 | 아디파티 아리오 촌드로네고로 4세(Adipati Ario Tjondronegoro IV) (쿠두스(Kudus) 현과 드마크 현의 현감 역임) |
1880년 또는 1881년, 카르티니의 아버지는 제파라 현의 현감으로 승진했고, 카르티니는 제파라에 있는 현감 관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1885년, 카르티니는 제파라에 있는 유럽인 소학교(Europeesche Lagere School)에 입학했다. 당시 자바 여성이 네덜란드인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1892년, 카르티니가 13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카르티니에게 초경을 맞은 여성이 결혼할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는 자바 귀족의 관습인 핑기탄(pingitan, 혼전 칩거)을 명령했다. 카르티니는 진학을 희망했지만,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덜란드어 공부는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카르티니는 집에 갇혀 있는 동안, 네덜란드어 서적과 잡지를 읽고, 유럽인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16세 때, 집에 남은 형제 중 카르티니가 가장 나이가 많게 되었고, 동생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 하는 관습을 없앴다. 핑기탄이 시작된 지 5년 후, 아버지에 의해 핑기탄이 완화되었고, 점차 외출이 허락되기 시작했다.
3. 2. 교육
카르티니는 6세 때부터 네덜란드 학교에 다니면서 서구 세계를 처음 접했다. 이 학교는 네덜란드인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으며, 자바 여성이 입학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1] 카르티니는 네덜란드어에 능숙했는데,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소녀들은 말레이어를 사용했다.[2] 네덜란드 학교에서 카르티니는 마리 오빙크-소어와 함께 공부하며 바느질과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배웠다.10대 시절, 카르티니는 "젊은 귀족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푸르다와 같은 "은둔 생활"을 경험했다.[3] 1892년, 카르티니가 13세였을 때, 자바 귀족의 관습인 초경을 맞은 여성이 결혼할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는 핑기탄(혼전 폐거, pingitan)을 아버지로부터 명령받았다.[4] 카르티니는 진학을 희망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거절했다.[5]
은둔 생활 동안 카르티니는 판디타 라마바이 사라스바티를 포함한 페미니스트 및 정치 출판물을 읽으며 여성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생각을 키웠다.[6] 카르티니와 그녀의 자매들인 카르디나와 루크미니는 주기적으로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 마리 오빙크-소어를 방문하여 피아노와 수공예 훈련을 받았다.[7]
1898년 5월 2일, 카르티니는 핑기탄(pingitan)에서 해방되었고,[8][9] 같은 해, 네덜란드에서 발행되는 여성 잡지에 펜팔 친구를 찾는 편지를 보냈고, 암스테르담에 사는 네덜란드 여성이자, 사회민주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했던 에스텔레 제한데라르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10][11]
1900년경부터 카르티니는 네덜란드 유학 후 자바로 돌아와 귀족 여성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설립하거나, 바타비아 의학교에 다녀 의사가 되는 것을 희망했다. 1900년 8월, 주파라를 방문한 식민지 정부 교육부 장관인 아벤다논 부부를 만나면서 카르티니와 아벤다논 부인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1903년 6월, 카르티니는 주파라 현청 근처에 이웃 여자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다. 이것은 현청 뒤편에 칠판과 책상, 의자를 놓은 사숙과 같은 것이었지만, 네덜란드령 동인도 최초의 자바인 여자 학교였다. 학교는 주 4일,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열렸으며, 읽기, 쓰기, 바느질, 요리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커리큘럼은 학교 교육 과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카르티니만의 것이었다.
3. 3. 결혼과 죽음
카르티니는 16세에 결혼해야 했지만, 미혼 여성으로 소개되기를 원했다. 1903년 11월 8일, 카르티니는 렘방의 군수 라덴 아디파티 조조 아디닝라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카르티니가 학교 운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조조 아디닝라트는 카르티니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지만, 카르티니는 그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3] 카르티니는 아버지로부터 청혼을 전해 듣고 3일간의 숙고 기간을 거쳐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3]
조요아디닝라트는 이러한 조건들을 모두 수락했다.[4] 결혼 후 카르티니는 임신하여 학교 운영을 계속했으며, 1904년 9월 13일 아들 라덴 마스 싱기를 출산했다.[1] 그러나 출산 4일 후인 1904년 9월 17일, 카르티니는 산욕열로 사망했다.[6] 그녀는 렘방의 불루 마을에 묻혔다.
카르티니의 묘는 렘방에서 약 20.92km 떨어진 길가에 있으며, 묘비에는 카르티니의 형인 소스로카르토노가 자바 문자로 "칸젠 라덴 아유 아디파티 조요아디닝라트, 자바력 1808년 라비울아킬월 28일, 서력 1879년 4월 21일 출생, 자바력 1834년 라자브월 7일, 서력 1904년 9월 17일 서거"라고 적었다.[7]
4. 업적
라덴 아졉 카르티니는 예술, 정치, 교육, 공중보건, 경제적 복지,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특히 여성의 삶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카르티니는 네덜란드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1911년에 출판된 ''도르 뒤이스테르니스 토트 리히트''(어둠에서 빛으로)는 그녀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녀는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남학생들과 동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료 서비스 부족 문제를 지적하며 의과대학 진학을 고려하기도 했다.
1902년 8월, 카르티니는 국회의원 헨리 반 콜(Henri van Kol)을 만나 네덜란드에서 교직과 응급처치를 공부하겠다는 계획을 지원받았다. 그녀는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추고자 했다. 카르티니는 남편의 지원을 받아 렘방 군청 건물에 여성을 위한 학교를 열어 직접 운영했다. 이 학교는 여성들에게 학업뿐만 아니라 위생, 응급처치, 재정 관리 등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가르쳤다. 1903년에는 "지금 자바인들을 교육하라"라는 제목의 정부 보고서를 작성하여 양질의 교육의 중요성을 논의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방법을 제안했다.[1]
카르티니 사후, 네덜란드에는 그녀의 학교 설립 및 운영 비전을 이어갈 재단이 설립되었다. 인도네시아 여성들은 1913년부터 1930년대까지 자바에 카르티니 학교(Kartini Schools)를 설립했다.[1] 이 학교 출신 중에는 자바 최초의 여성 의과대학 졸업생과 최초의 여성 법학 졸업생이 있었다. 1945년, 여성의 평등권은 인도네시아 최초의 헌법에 명시되었다.[1]
카르티니는 동서 협회에서 인도네시아 예술가 그룹과 유럽인들 간의 협력을 조정하는 등 문화 교류에도 힘썼다.
4. 1. 편지
라덴 아졉 카르티니는 예술, 정치, 교육, 공중보건, 경제적 복지,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폭넓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들은 네덜란드 친구들, 특히 동인도 제도(East Indies)의 문화, 종교, 산업부 장관인 J.H. 아벤다논과 그의 가족에게 보내졌다.[1]카르티니는 1900년 ''데일리 릴리''에 실린 펜팔 광고에 답장을 보낸 에스텔 제한델라르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카르티니는 이 편지에서 결혼, 일부다처제, 전통적 관습, 교육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1] 또한 아버지와의 관계와 자신을 발전시키려는 계획에 대해서도 썼다.[1] 그녀는 아벤다논 부인과도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 편지들은 그녀의 삶과 식민지 시대 인도네시아의 삶의 변화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1]
카르티니가 사망하고 7년 후, 아벤다논은 그녀의 편지를 모아 편집하여 ''도르 뒤이스테르니스 토트 리히트''(''어둠에서 빛으로'')라는 제목으로 1911년에 출판했다.[1] 이 책은 네덜란드어로 의견이 출판된 최초의 인도네시아인이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인도네시아인과 유럽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1] 이 책은 아그네스 L. 시머스에 의해 ''자바 공주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1920년에 출판되었다.[1] 1922년에는 말레이어 버전이, 1951년에는 아르민 판에 의해 또 다른 말레이어 버전이 출판되었다.[1] 1960년, 유네스코는 카르티니의 편지 19편을 프랑스어로 출판했다.[1] 이 편지들은 라이덴 대학교 도서관에서 볼 수 있으며 디지털로도 열람할 수 있다.[2] 2014년 요스트 코테는 카르티니의 모든 편지에 대한 완전한 영어 번역본을 ''카르티니: 완전 저작 1898-1904''에서 그녀의 기사와 다른 저술과 함께 출판했다.[3]
1911년 네덜란드에서 아벤다논의 편집으로 출판된 카르티니의 서간집 『Door Duisternis tot Licht』 (『어둠을 넘어 빛으로』)에는 104통의 편지가 수록되었다.[4][5] 연도별로는 1899년 4통, 1900년 11통, 1901년 19통, 1902년 37통, 1903년 25통, 1904년 8통이었다.[4] 수록된 편지는 모두 아벤다논 부부, 판 콜, 제한델라르 등 네덜란드인 친구들에게 보낸 것이며, 인도네시아인에게 보낸 편지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5] 특히 아벤다논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49통으로 가장 많았다.[4]
『Door Duisternis tot Licht』라는 제목은 카르티니의 편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제목은 어둠 속에 있는 자바에서 서양 교육을 통해 빛이 가득한 서양 문명의 세계로 이끌린다는 이해를 보여주며, 서간집에는 뒤처진 아시아를 문명화된 서양인이 인도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5]
4. 2. 동서 협력
카르티니는 동서 협회에서 인도네시아 예술가 그룹과 유럽인들 간의 협력을 조정했다. 유럽인들은 조각된 목재 제품을 만드는 예술품 가게에 자금을 지원했다.
4. 3. 학교
카르티니는 인도네시아 남녀의 삶을 개선하는데 여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남학생들과 같은 학업 및 인성 교육뿐만 아니라 위생, 응급처치, 재정 관리를 포함하는 여학생 교육 계획을 세웠다.[1] 특히 인도네시아인, 그중에서도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의과대학 진학까지 고려했다.[1]1902년 8월, 카르티니는 국회의원 헨리 반 콜(Henri van Kol)을 만났다. 그는 카르티니가 네덜란드에서 교직과 응급처치를 공부하려는 계획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카르티니의 목표는 학교를 설립하고, 가르치고, 교장이 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추는 것이었다. 그는 카르티니를 대신해 주 의회에 연락했고, 카르티니는 장학금을 받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자바를 떠나는 것을 걱정했다.[1]
카르티니는 남편의 지원을 받아 렘방 군청 건물에 여성을 위한 학교를 열었다. 그녀는 혼자 학교를 운영하며 일주일에 나흘 동안 10명의 여학생을 가르쳤다.[1] 1903년에는 "지금 자바인들을 교육하라"라는 제목의 정부 보고서를 작성하여 양질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논의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1]
카르티니가 세상을 떠난 후, 네덜란드에는 그녀의 학교 설립 및 운영에 대한 비전을 이어갈 재단이 설립되었다. 인도네시아 여성들 또한 1913년부터 1930년대까지 자바에 카르티니 학교(Kartini Schools)를 설립했다.[1] 이 학교 출신 중에는 자바 최초의 여성 의과대학 졸업생과 최초의 여성 법학 졸업생이 있었다. 여성들은 스스로 생산적인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 여성의 평등권은 인도네시아 최초의 헌법에 명시되었다.[1]
1913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자바 각지에 카르티니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카르티니 기금" 위원회가 설립되었다.[4] "카르티니 기금"을 통해 자바에는 카르티니 학교라는 이름의 사립 여자 학교가 설립되었다.[5] 1920년 카르티니 학교를 방문한 일본의 문학자 가토 아사토리에 따르면, 그곳에서는 프리야이라고 불리는 귀족을 대상으로 관료의 아내가 될 여성을 양성하기 위한 요리와 재봉 등의 수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5][6]
5. 유산과 기념
- 보고르, 자카르타, 말랑에 카르티니 학교가 설립되었고, 네덜란드에도 그녀의 이름을 딴 단체가 설립되었다.
- 카르티니는 인도네시아의 국가 영웅이다.
- 카르티니는 인도네시아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한 지식인이자 민족주의자로서, 독립을 위한 민족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인도네시아 루피아 지폐 5루피아(1952년 발행, 1953년 유통)와 10,000루피아(1985년 발행)에 두 차례 등장했다.[4][5]
- 수카르노 정부는 1963년 4월 21일을 카르티니의 날로 선포했다. 수하르토의 신질서 정부는 카르티니의 이미지를 공손한 아내이자 착한 딸의 이미지로 재구성했다. 카르티니 어머니의 날(Hari Ibu Kartini)에는 "젊은 여성들이 몸에 꼭 맞는 재킷, 바틱 셔츠, 화려한 헤어스타일, 장식적인 보석을 착용하고 학교에 갔다."[7]
- W. R. 수프라트만이 작곡한 "이부 키타 카르티니"(우리 어머니 카르티니)라는 노래가 있다.[8]
- 2016년 4월 21일, 구글은 그녀의 137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구글 두들을 선보였다.[9]
- 1963년 일본 아키타현 지사 등이 인도네시아에 카르티니 동상을 기증했다. 이 동상은 자카르타의 메르데카 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 1964년 5월 2일 대통령령 제108호에 의해 국가 독립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녀의 생일인 4월 21일은 "카르티니의 날"(Hari Kartini)이라 불리며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 카르티니 사후 1913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자바 각지에 카르티니 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카르티니 기금"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카르티니 기금"에 의해 자바에는 카르티니 학교라는 이름의 사립 여자학교가 설립되었다.
6. 사상
카르티니는 인도네시아 여성의 삶을 개선하는 데 여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으며, 여학생 교육 계획을 발전시켰다.[1] 특히 인도네시아 여성의 의료 서비스 부족에 대해 우려하여 의과대학 진학까지 고려할 정도였다.[1]
카르티니는 1902년 8월 국회의원인 헨리 반 콜(Henri van Kol)을 만나 네덜란드 유학을 지원받았다.[1]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자바를 떠나는 것을 걱정했다. 카르티니는 렘방의 군청 건물에 여성을 위한 학교를 열었다.[1] 1903년에는 "지금 자바인들을 교육하라"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양질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
카르티니는 식민지 정부가 손대지 않았던 여자 교육을 자바에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하며, 보건·위생학을 필수 과목으로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자바 등에서는 의료가 뒤처져 많은 임산부와 신생아가 목숨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6]
카르티니는 일부다처제에 반대했다. 1903년 주변의 압력으로 결혼하게 되었지만, 신랑에게 무릎을 꿇는 관습을 따르지 않고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부부가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6. 1. 여성 교육
카르티니는 인도네시아 여성의 삶을 개선하는 데 여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으며, 남학생들과 같은 학업 및 인성 교육뿐만 아니라 위생, 응급처치, 재정 관리를 포함하는 여학생 교육 계획을 개발했다.[1] 특히 인도네시아 여성의 의료 서비스 부족에 대해 우려하여 의과대학 진학까지 고려할 정도였다.[1]카르티니는 1902년 8월 국회의원인 헨리 반 콜(Henri van Kol)을 만났고, 그는 네덜란드에서 교직 및 응급처치를 공부하겠다는 카르티니의 계획을 지원했다.[1] 카르티니는 장학금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자바를 떠나는 것을 걱정했다.[1]
카르티니는 남편의 지원을 받아 렘방(Rembang)의 군청 건물에 여성을 위한 학교를 열었다. 그녀는 혼자서 학교를 운영하며 일주일에 나흘 동안 10명의 여학생들을 가르쳤다.[1] 1903년, 그녀는 "지금 자바인들을 교육하라"라는 제목의 정부 보고서를 작성하여 양질의 교육을 받는 것의 중요성을 논의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몇 가지 권장 방법을 제시했다.[2]
카르티니 사후, 네덜란드에 그녀의 학교 설립 및 운영에 대한 비전을 계속 이어갈 재단이 설립되었다. 인도네시아 여성들 또한 1913년부터 1930년대까지 자바에 카르티니 학교(Kartini Schools)를 설립했다.[3] 이 학교의 학생들 중에는 자바 최초의 여성 의과대학 졸업생과 최초의 여성 법학 졸업생이 있었다. 여성들은 스스로의 생산적인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 여성의 평등권은 인도네시아 최초의 헌법에 명시되었다.[4]
그녀의 자매들은 학교 운영이라는 유산을 계속 이어갔다. 카르디나(Kardinah)는 교과서를 집필하고 의과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수마트리(Soematri)는 여성을 위한 직업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5]
카르티니는 식민지 정부가 손대지 않고 있었음에도 자바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자 교육을 제시하며, 당시 자바 등에서는 의료가 뒤처져 많은 임산부와 신생아가 목숨을 잃고 있었던 점을 이유로 필수 과목으로 보건·위생학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이 외에도 간호와 응급 처치법을 중시했다. 그녀는 이러한 과목들을 직업 훈련과 관련된 코스로 학교에 설치하는 것을 구상했지만, 1904년 사망하여 실현하지 못했다.[6]
여자 교육에 대해 카르티니는 네덜란드 사회민주노동당 당수였던 판 콜(Van Kol)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저는 여성이 사회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진심으로 확신하기 때문에, 언젠가 교사가 되어 이곳 고위 관료의 딸들을 교육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입니다. 그 아이들을 인도하고, 그 인격을 형성하고, 젊은 두뇌를 꽃피우고 싶습니다! 배운 모든 좋은 것을 후세에 전해 줄 미래의 여성을 기르고 싶습니다! 여성에게 좋은 교육을 베풀면, 우리 사회는 장래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7]
6. 2. 결혼관
카르티니는 일부다처제에 반대하여 결혼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1903년 주변의 압력에 굴복하는 형태로 이미 세 명의 부인이 있는 렘방의 지사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식에서 카르티니는 신부가 신랑에게 무릎을 꿇는 당시 관습을 따르지 않고,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는 카르티니에게 부부가 동등하다는 증거였다.카르티니는 펜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바 여성의 삶은… (중략) …남편은 평생 저에게 무엇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남편이 원한다면 저의 의견도 듣지 않고 다른 아내를 여러 명 더 취할 수도 있습니다."라며 일부다처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7. 평가
카르티니에 대한 평가는 국내와 국외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 국내 평가 ===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카르티니는 "여성 교육의 선구자"이자 "민족 의식 각성의 어머니"로 평가받는다. 수카르노 정권은 그를 인도네시아의 국가 영웅으로 추대하고, 그의 생일인 4월 21일을 '카르티니의 날'로 지정했다. 수하르토 정권은 카르티니를 가정과 사회 모두에서 활동하는 여성의 "모델"로 제시했다.
=== 국외 평가 ===
1911년 네덜란드에서는 아벤다논(Abendanon)이 편집한 카르티니의 편지 모음집 《어둠을 넘어 빛으로》(Door Duisternis tot Licht)가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4] 1912년 말까지 세 번 인쇄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5] 1939년 영국의 경제학자 J. S. 퍼니벌은 카르티니를 민족주의의 선구자로 평가했다.[6]
일본에서는 1920년 가토 아사토리(加藤朝鳥)가 『자와日報(자바 일보)』에서 카르티니를 "새로운 여성", "신사상가"로 소개하며 그의 삶에 동정을 표했다.[7] 일본 점령기에는 카르티니를 젊은 여성 투사이자 현모양처적인 여성으로 묘사하며 상반된 이미지를 선전했다.[8]
7. 1. 국내 평가
카르티니는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여성 교육의 선구자"이자 "민족 의식 각성의 어머니"로 평가받고 있다. 수카르노 정권은 카르티니를 인도네시아의 국가 영웅으로 추대하고, 그의 생일인 4월 21일을 '카르티니의 날'로 지정했다. 수하르토 정권은 카르티니를 여성의 "모델"로 제시하며, 가정과 사회 모두에서 활동하는 여성상을 강조했다.7. 2. 국외 평가
1911년 네덜란드에서 아벤다논(Abendanon)의 편집으로 카르티니의 편지를 모은 서간집 《어둠을 넘어 빛으로》(Door Duisternis tot Licht)가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4] 1912년 말까지 세 번 인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5] 영국의 경제학자 J. S. 퍼니벌은 1939년 출판된 저서에서 카르티니를 민족주의의 선구자로 평가했다.[6]일본에서는 1920년 가토 아사토리(加藤朝鳥)가 『자와日報(자바 일보)』에서 카르티니를 "새로운 여성", "신사상가"로 소개하며, 그의 삶에 대한 동정을 표했다.[7] 일본 점령기에는 카르티니를 젊은 여성 투사이자 현모양처적인 여성으로 묘사하며, 상반된 이미지를 선전했다.[8]
8. 가족
라덴 아젱 카르티니는 1879년 4월 21일 자바 섬 마용 마을에서 자바 귀족(priyayi) 출신의 아버지 라덴 아디파티 소스로닝랏과 종교 학자의 딸인 어머니 응아시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소스로닝랏은 네덜란드 동인도의 네덜란드 식민 제국에서 자바 중북부의 행정 책임자로 일했으며, 1880년에는 제파라의 군수가 되었다.
카르티니의 어머니 응아시라는 소스로닝랏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나 14세의 평민이었다. 응아시라의 부모는 메카로 순례를 갔던 하지 시티 아미나와 경건한 무슬림이었던 키아이 모디로노였다. 응아시라는 소스로닝랏과의 사이에서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당시 군수는 귀족과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소스로닝랏은 귀족 출신인 라덴 아유 소스로닝랏과 다시 결혼하여 세 명의 딸을 더 두었다. 카르티니는 친어머니가 아닌 계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카르티니는 이복형제를 포함하여 11명의 형제자매 중 다섯 번째 아이이자 두 번째 딸이었다. 그녀의 가문은 강한 지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인 프앙겐 아리오 촌드로네고로 4세는 25세에 군수가 되었고, 카르티니의 형인 소스로카르토노는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카르티니의 가계는 자와에서 프리야이라고 불리는 귀족 가문으로, 조부인 아디파티 아리오 촌드로네고로 4세는 쿠두스 현과 드마크 현의 현감(부파티, bupati)을 역임했다. 그는 네덜란드의 생활 방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네덜란드어 학교가 없던 시절에 네덜란드에서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자녀들에게 네덜란드어와 네덜란드 생활을 가르쳤다. 이후 카르티니의 아버지를 포함한 네 명의 자녀들은 모두 현감이 되었다.
8. 1. 남편
라덴 마스 아디파티 아리오 조요아디닝라트(Raden Mas Adipati Ario Djoyo Adiningrat)는 렘방현의 지사였다.[1] 그는 네덜란드식 교육을 받고 Wageningen|바헤닝언nl 농업고등학교에서 수학한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유능한 지사는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2] 1903년 11월 8일, 카르티니는 24세의 나이로 그와 결혼하여 그가 부지사로 있는 렘방으로 이주했다.[4] 조요아디닝라트는 카르티니와 결혼 당시 이미 본처를 잃고 세 명의 부인과 여섯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으며, 자녀들의 교육은 카르티니에게 맡겨졌다.[3] 조요아디닝라트는 1912년에 사망하였다.[5]부인 | 스카르밀라(Sukarmilah) (본처, 사망), 무지(Mudji), 무지라(Mudjira), 수지라(Sudji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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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6명 (카르티니가 교육 담당) |
8. 2. 자녀
카르티니는 조요아디닝랏과 사이에 아들 싱기(Singgih)를 낳았으며, 이후 수사릿(Susalit)으로 개명했다. 수사릿은 1929년부터 1942년까지 렘방에서 네덜란드 관리 밑에서 경찰로 근무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일본에 점령되자, 향토방위의용군 1기로 입대하여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일본 패망 후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군 소장으로 게릴라전을 지휘했다. 인도네시아 주권 승인 이후 군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다가 1962년 3월 17일 58세로 사망했다.참조
[1]
서적
Kartini : the complete writings 1898–1904
2014
[2]
웹사이트
Kartini Letters (KITLV)
https://digitalcolle[...]
[3]
서적
Appropriating Kartini: Colonial, National and Transnational Memories of an Indonesian Icon
ISEAS–Yusof Ishak Institute
2020
[4]
웹사이트
Mengenang Perjuangan Kartini Lewat Uang Kertas Rupiah Emisi 1952 dan 1985
https://www.liputan6[...]
2021-04-21
[5]
웹사이트
Pahlawan Kartini jadi gambar dalam uang kertas rupiah dua kali
https://jabar.antara[...]
[6]
서적
Sex, love and feminism in the Asia Pacific: a cross-cultural study of young people's attitudes
https://books.google[...]
Routledge
[7]
뉴스
Is celebrating Kartini's Day still relevant today?
http://www.thejakart[...]
2010-04-21
[8]
서적
A Space of Their Own
Routledge
2023-02-14
[9]
웹사이트
R.A. Kartini's 137th Birthday
https://doodles.goog[...]
2016-04-21
[10]
서적
중학교 역사 2
[11]
웹인용
[여성의 역사] 어둠에서 빛으로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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