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카사노 전투 (1705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카사노 전투는 1705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일어난 전투로, 프랑스 군과 오스트리아 군 사이에 벌어졌다. 전투는 프랑스 군의 루이 조제프 드 벙돔 공작과 오스트리아 군의 사보이 공자 외젠 간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으며, 아다 강을 따라 벌어졌다.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결정적인 승자는 없었다. 외젠 공자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이후 오스트리아로 돌아갔으며, 전투는 토리노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카사노 전투 (1705년)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분쟁카사노 전투
전체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날짜1705년 8월 16일
장소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카사노 단다
결과프랑스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왕국
교전국 2합스부르크 군주국
프로이센
사보이아 공국
지휘관
지휘관 1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필리프 드 방돔
아르망 생 틸레르
지휘관 2사보이 공자 외젠
안할트-데사우 공 레오폴트 1세
병력 규모
병력 122,000명에서 24,000명
병력 220,000명에서 24,000명
사상자 규모
사상자 12,728명에서 5,000명 전사 또는 부상
사상자 24,500명에서 6,050명 전사, 부상 또는 포로
관련 전투
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2. 배경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700년 11월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의 필리포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필리포는 1700년 11월 16일 스페인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스페인 제국은 본토 스페인 외에도 스페인령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상당 지역, 중앙 및 남아메리카의 상당 부분을 포함했다. 1701년 7월, 영토 및 상업적 권리를 둘러싼 분쟁으로 인해 부르봉 가문이 이끄는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 그리고 레오폴트 1세의 아들 카를을 후보로 내세운 대 동맹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스페인이 통제하는 밀라노만토바 공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레오폴트 1세는 이 지역이 오스트리아 남부 국경의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1701년 3월, 두 도시 모두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프랑스군은 사보이아의 통치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 대가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딸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는 필리포 5세와 결혼했다. 1703년 10월,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이 일련의 승리를 거둔 후,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동맹을 변경했다.

1704년, 라 푀이아드가 이끄는 프랑스 군은 빌프랑슈와 사보이 백작령에서 알프스 북쪽의 사보이아 영토를 점령했다. 1705년 5월,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니스, 수도 토리노, 남부 피에몬테 일부만 통제했다. 레오폴트 1세는 비토리오 아메데오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사보이아가 패배 직전에 이르자 사보이 공자 외젠을 이탈리아 사령관으로 파견하고 병력과 자금을 지원했다. 레오폴트 1세 사후 요제프 황제가 이 정책을 이어갔다. 제국군은 앙할트데사우의 레오폴트 휘하 8,000명 프로이센 군대로 강화되었고, 이들은 잉글랜드 왕국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자금 지원을 받았다.

1705년 초, 롬바르디아의 프랑스군은 벙돔 공작의 동생이자 "그랜드 프리어"로 알려진 필리프 드 벙돔의 지휘 아래 올리오 강을 따라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국군은 브레시아에 도달하여 프랑스군이 아다 강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벙돔은 루이 오보송 드 라 푀이아드에게 니스 점령을 완료하도록 남겨두고, 7월에 그의 형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크레센티노와 키바소에서 사보이아 요새를 점령했다. 토리노에 대한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외젠 공자는 아다 강 왼쪽 강둑을 따라 행진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가 밀라노를 위협할 수 있게 했다. 필리프와 10,000명의 병력이 카사노 다다에서 가장 적합한 횡단 지점을 막고 있자, 벙돔은 제국군을 추적하며 오른쪽 강둑을 따라 기동 예비대를 이끌었다. 제국군이 브리안차의 이베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포병 사격의 엄호 아래 부교를 건설했고 벙돔은 횡단을 방어할 준비를 했다. 이것은 기만책이었다. 횡단을 시도한 후, 외젠 공자는 다리를 불태우고 만토바로 향했다. 그런 다음 그는 방향을 바꿔, 카사노에 있는 부대가 본 프랑스 군대에 의해 강화되기 전에 그들을 기습하려는 희망으로 14일에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로마넨고에 도달했다.

2. 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700년 11월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의 필리포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필리포 5세는 1700년 11월 16일에 스페인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스페인 제국은 본토 스페인 외에도 스페인령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상당 지역, 중앙 및 남아메리카의 넓은 영토를 포함했다. 1701년 7월, 영토 및 상업적 권리를 둘러싼 분쟁으로 인해 부르봉 가문이 이끄는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 그리고 대 동맹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대 동맹의 후보는 레오폴트 1세의 아들인 카를이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스페인이 통제하는 밀라노만토바 공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레오폴트 1세는 이 지역이 오스트리아 남부 국경의 안보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701년 3월, 두 도시 모두 사보이아의 통치자인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동맹을 맺은 프랑스 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딸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는 필리포 5세와 결혼했다.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이 여러 차례 승리한 후,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1703년 10월에 동맹을 변경했다. 1704년 동안, 라 푀이아드가 이끄는 프랑스 군은 빌프랑슈와 사보이 백작령에서 알프스 북쪽의 사보이아 영토를 점령했다. 1705년 5월까지,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니스, 수도 토리노, 그리고 남부 피에몬테의 일부 지역만을 통제할 수 있었다.

레오폴트 1세는 비토리오 아메데오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사보이아가 패배 직전에 이르자, 자신의 최고 장군인 사보이 공자 외젠을 이탈리아 사령관으로 파견하고 병력과 자금을 지원했다. 레오폴트 1세가 5월에 사망한 후, 요제프 황제가 이 정책을 이어갔다. 이 제국군은 앙할트데사우의 레오폴트 휘하의 8,000명의 프로이센 군대로 강화되었으며, 이들은 잉글랜드 왕국네덜란드 공화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

1705년 초, 롬바르디아의 프랑스 군은 벙돔 공작의 남동생이자 "그랜드 프리어"로 알려진 필리프 드 벙돔의 지휘 아래 올리오 강을 따라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국군은 곧 브레시아에 도달하여 프랑스 군이 아다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벙돔은 루이 오보송 드 라 푀이아드에게 니스 점령을 완료하도록 남겨두고, 7월에 그의 형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크레센티노와 키바소에서 사보이아 요새를 점령했다. 토리노에 대한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외젠 공자는 아다 강 왼쪽 강둑을 따라 행진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가 밀라노를 위협할 수 있게 했다. 필리프와 10,000명의 병력이 카사노 다다에서 가장 적합한 횡단 지점을 막고 있자, 벙돔은 제국군을 추적하며 오른쪽 강둑을 따라 기동 예비대를 이끌었다.

제국군이 브리안차의 이베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포병 사격의 엄호 아래 부교를 건설했고 벙돔은 횡단을 방어할 준비를 했다. 이것은 기만책이었다. 횡단을 시도한 후, 외젠 공자는 다리를 불태우고 만토바로 향했다. 그런 다음 그는 방향을 바꿔, 카사노에 있는 부대가 본 프랑스 군대에 의해 강화되기 전에 그들을 기습하려는 희망으로 14일에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로마넨고에 도달했다.

2. 2. 이탈리아 전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700년 11월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의 필리포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필리포는 1700년 11월 16일 스페인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스페인 제국은 본토 스페인 외에도 스페인령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상당 지역, 중앙 및 남아메리카의 상당 부분을 포함했다. 1701년 7월, 영토 및 상업적 권리를 둘러싼 분쟁으로 인해 부르봉이 이끄는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 그리고 레오폴트 1세의 아들 카를을 후보로 내세운 대 동맹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스페인이 통제하는 밀라노만토바 공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레오폴트는 이 지역이 오스트리아 남부 국경의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1701년 3월, 두 도시 모두 사보이아의 통치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동맹을 맺은 프랑스 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그 대가로 그의 딸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는 필리포 5세와 결혼했다.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이 일련의 승리를 거둔 후,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1703년 10월에 편을 바꾸었다. 1704년 동안, 라 푀이아드가 이끄는 프랑스 군은 빌프랑슈와 사보이 백작령에서 알프스 북쪽의 사보이아 영토를 점령했다. 1705년 5월까지,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니스, 수도 토리노, 그리고 남부 피에몬테의 일부 지역만 통제했다.

레오폴트는 비토리오 아메데오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사보이아가 패배 직전에 이르자, 그는 최고의 장군인 사보이 공자 외젠을 이탈리아 사령관으로 파견하고 병력과 자금을 지원했다. 5월에 레오폴트가 사망한 후 요제프 황제가 이 정책을 이어갔다. 이 제국군은 앙할트데사우의 레오폴트 휘하의 8,000명의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이들은 잉글랜드 왕국네덜란드 공화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

1705년 초, 롬바르디아의 프랑스 군은 벙돔 공작의 남동생이자 "그랜드 프리어"로 알려진 필리프 드 벙돔의 지휘 아래 올리오 강을 따라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국군은 곧 브레시아에 도달하여, 프랑스군은 이 위치를 포기하고 아다로 후퇴해야 했다. 니스 점령을 완료하기 위해 부관 루이 오보송 드 라 푀이아드를 남겨두고, 7월 벙돔은 그의 형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크레센티노와 키바소에서 사보이아 요새를 점령했다. 토리노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외젠 공자는 아다 강 왼쪽 강둑을 따라 행진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가 밀라노를 위협할 수 있게 했다. 필리프와 10,000명의 병력이 카사노 다다에서 가장 적합한 횡단 지점을 막고 있자, 벙돔은 제국군을 추적하며 오른쪽 강둑을 따라 기동 예비대를 이끌었다.

제국군이 브리안차의 이베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포병 사격의 엄호 아래 부교를 건설했고 벙돔은 횡단을 방어할 준비를 했다. 이것은 기만책이었다. 횡단을 시도한 후, 외젠 공자는 다리를 불태우고 만토바로 향했다. 그런 다음 그는 방향을 바꿔, 카사노에 있는 부대가 본 프랑스 군대에 의해 강화되기 전에 그들을 기습하려는 희망으로 14일에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로마넨고에 도달했다.

3. 전투

1705년 방돔의 군대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그의 새로운 오스트리아 동맹군을 압박하기 위해 교전을 벌였다. 외젠은 병사들에게 방돔의 동생 필리프 휘하의 병력과 맞서라고 했다. 필리프는 아다강 전선에서 외젠의 공격에 허를 찔렸다. 그러나 다음날 방돔이 적시에 도착해 과감한 돌격을 감행하자 전세가 역전되어 오스트리아군은 강을 건너지 못했다.

오후 2시경, 제국 근위대는 ''레토르토'' 주변 진지를 공격하여 처음에는 다리를 점령했지만, 생틸레르의 대포와 프랑스 반격에 격퇴되었다. 방돔은 아일랜드 여단의 4개 연대를 증원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제국군은 수문을 점령, 운하의 수위를 낮춰 사람들이 건널 수 있게 했다. 외젠은 레오폴트와 그의 프로이센 군인들에게 프랑스 좌익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반대편 강둑을 점령했지만, 큰 피해를 보았다. 전투는 강을 오가며 격렬하게 벌어졌고, 방돔은 타고 있던 말이 죽었고, 외젠은 두 번 부상을 입어 전장을 떠나야 했다. 전투는 3시간에서 5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대치하던 군대가 원래 위치로 돌아가면서 극심한 피로로 인해 종료되었다.

3. 1. 초기 상황

깊고 빠르게 흐르는 아다강은 특히 대규모 병력에게는 건널 수 있는 지점이 제한적이었다. 카사노 마을은 오른쪽 강둑에 있었고, 작은 요새나 보루로 보호되는 돌다리가 있었다. 이 지역은 또한 수많은 작은 개울과 관개수로로 나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다 강과 평행하게 흐르는 관개수로인 ''레토르토''였다. 이곳은 또 다른 요새로 보호되는 또 다른 다리를 통해 왼쪽 강둑과 연결되었다.

1810년경 카사노 다다 다리 조각


오이겐 공이 만토바를 향하고 있다고 추측한 방돔은 동생에게 카사노를 떠나 아다 강 왼쪽 강둑에 있는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리볼타 다다에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결정은 사실 오스트리아 첩자였던 프랑스 군 복무 스페인 장교의 고의적인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로마넹고에서 밤새 행군한 후, 제국군은 다음날 아침 일찍 프랑스 기병 순찰대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 이미 건널 지점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의 의도를 깨달은 방돔은 약 2,000명의 기병과 함께 카사노로 급히 향했고, 나머지 군대에게 가능한 한 빨리 따르라고 명령했다.

약 1725년경, 장 바티스트 마틴의 카사노 다리


방돔이 도착했을 때 필리프의 군대는 이동하는 과정에 있었고, 병력의 대부분이 레토르토 운하와 아다 강 사이에 갇히고, 주요 다리가 수송 수단에 의해 막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방돔은 짐을 강에 던지라고 명령하고, 왼쪽의 ''레토르토''에서 시작하여 주요 다리 주변에 중심을 두고 그의 형제가 4개의 여단과 함께 배치된 리볼타 다다로 이어지는 도로에 오른쪽 끝을 두는 방어선을 형성했다. 프랑스 포병 사령관 아르망 생틸레르는 다리 바로 위로 발사할 수 있도록 마을 안에 대포를 배치했다.

3. 2. 전투 경과

방돔의 군대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그의 동맹군을 압박하기 위해 교전을 벌였다. 외젠은 방돔의 동생 필리프 휘하의 병력과 맞서 싸웠다. 필리프는 아다강 전선에서 외젠의 공격에 허를 찔렸다. 그러나 다음날 방돔이 적시에 도착하여 과감한 돌격을 감행하자 전세는 역전되고, 오스트리아군은 강을 건너지 못했다.

깊고 빠르게 흐르는 아다 강은 특히 대규모 병력에게는 건널 수 있는 지점이 제한적이었다. 카사노 마을은 오른쪽 강둑에 있었고, 작은 요새나 보루로 보호되는 돌다리가 있었다. 이 지역은 수많은 작은 개울과 관개수로로 나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다 강과 평행하게 흐르는 관개수로인 ''레토르토''였다. 이곳은 또 다른 요새로 보호되는 또 다른 다리를 통해 왼쪽 강둑과 연결되었다.

외젠 공이 만토바를 향하고 있다고 추측한 방돔은 동생에게 카사노를 떠나 아다 강 왼쪽 강둑에 있는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리볼타 다다에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결정은 사실 오스트리아 첩자였던 프랑스 군 복무 스페인 장교의 고의적인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제국군은 밤새 행군한 후, 다음날 아침 일찍 프랑스 기병 순찰대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 이미 건널 지점에 접근하고 있었다. 방돔은 약 2,000명의 기병과 함께 카사노로 급히 향했고, 나머지 군대에게 가능한 한 빨리 따르라고 명령했다.

방돔은 도착하자 필리프의 군대가 이동하는 과정에 있었고, 병력의 대부분이 레토르토 운하와 아다 강 사이에 갇히고, 주요 다리가 수송 수단에 의해 막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돔은 짐을 강에 던지라고 명령하고, 왼쪽의 ''레토르토''에서 시작하여 주요 다리 주변에 중심을 두고 그의 형제가 4개의 여단과 함께 배치된 리볼타 다다로 이어지는 도로에 오른쪽 끝을 두는 방어선을 형성했다. 프랑스 포병 사령관 아르망 생틸레르는 다리 바로 위로 발사할 수 있도록 마을 안에 대포를 배치했다.

오후 2시경, 제국 근위대는 ''레토르토'' 주변의 진지를 공격하여 처음에는 다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생틸레르의 대포와 프랑스 반격에 의해 격퇴되었다. 방돔은 아일랜드 여단의 4개 연대를 왼쪽으로 증원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제국군은 수문을 점령했고, 이를 닫아 운하의 수위를 낮춰 사람들이 건널 수 있게 했다. 외젠 공은 레오폴트와 그의 프로이센 군인들에게 프랑스 좌익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반대편 강둑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는 강을 오가며 격렬하게 벌어졌고, 방돔은 타고 있던 말이 죽었고, 외젠 공은 두 번 부상을 입어 전장을 떠나야 했다. 전투는 3시간에서 5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대치하던 군대가 원래 위치로 돌아가면서 극심한 피로로 인해 종료되었다.

3. 3. 격전과 피해

방돔은 동생 필리프의 군대가 이동하는 과정에 있었고, 병력 대부분이 레토르토 운하와 아다강 사이에 갇혀 주요 다리가 수송 수단에 의해 막혀 매우 위험한 상황임을 발견했다. 방돔은 짐을 강에 던지라고 명령하고, 왼쪽에 있는 ''레토르토''에서 시작하여 주요 다리 주변에 중심을 두고 그의 형제가 4개의 여단과 함께 배치된 리볼타 다다로 이어지는 도로에 오른쪽 끝을 두는 방어선을 형성했다. 프랑스 포병 사령관 아르망 생틸레르는 다리 바로 위로 발사할 수 있도록 마을 안에 대포를 배치했다.

오후 2시경, 제국 근위대는 ''레토르토'' 주변의 진지를 공격하여 처음에는 다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생틸레르의 대포와 프랑스 반격에 의해 격퇴되었다. 방돔은 아일랜드 여단의 4개 연대를 왼쪽으로 증원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제국군은 수문을 점령했고, 이를 닫아 운하의 수위를 낮춰 사람들이 건널 수 있게 했다. 오이겐 공은 레오폴트와 그의 프로이센 군인들에게 프랑스 좌익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반대편 강둑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는 강을 오가며 격렬하게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방돔은 타고 있던 말이 죽었고, 오이겐 공은 두 번 부상을 입어 전장을 떠나야 했다. 전투는 3시간에서 5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대치하던 군대가 원래 위치로 돌아가면서 극심한 피로로 인해 종료되었다.

4. 결과

사보이 공자 외젠은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이탈리아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갔다.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 역시 부상을 입었고, 그의 프로이센 여단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카사노 전투는 직접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전투 자체는 잊혀졌다.

카사노 전투 사상자
구분프랑스군오스트리아군
참전 병력22,000명24,000명
사망 및 부상약 5,000명4,500명 이상



전투 이후, 사보이 공자 외젠은 토리노 포위전을 거의 1년이나 지연시키는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카사노 전투를 승리로 주장했지만, 역사가 존 A. 린은 이를 '프랑스의 사소한 전술적 승리'로 간주하며, 본질적으로 결정적이지 않다고 평가했다.

4. 1. 전술적, 전략적 평가

카사노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사보이 공자 외젠은 부상에서 회복한 후 트레빌리오에 병영을 건설하여 겨울을 날 준비를 하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토리노 포위전을 1년 가까이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안할트데사우의 레오폴트 1세


프랑스군은 슈발리에 폴라르의 기록에 따르면 약 3,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벵돔이 리볼타 다다에 남겨둔 병력을 소집했다면 더 큰 승리를 거둘 수도 있었다고 한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약 5,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이 중에는 사보이 공자 외젠과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가 존 A. 린은 카사노 전투를 '프랑스의 사소한 전술적 승리'로 평가했지만, 본질적으로 결정적인 전투는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전투 이후 양측은 큰 충돌 없이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1706년 라미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면서 루이 14세는 벵돔을 이탈리아 전선에서 소환했고, 이후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전투는 1707년 3월 밀라노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4. 2. 이후 경과

사보이 공자 외젠은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이탈리아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갔다. 안할트데사우의 레오폴트 1세 역시 부상을 입었고, 그의 프로이센 여단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스트리아군은 겨울동안 티롤 근교에서 휴식을 취했다. 외젠의 활동은 피에몬테에 대한 압력을 완화해 주었고, 토리노가 격렬하게 저항하게 해 주었으며, 실제로 냉정한 성격의 외젠은 자신의 새 동맹자에게 충실했다. 프랑스 군은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피에몬테 복속을 다음 해까지 연기하였다.

카사노 전투는 직접적인 결과를 얻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만 발생시킨 채 잊혀졌다. 총 4,000명의 사람들이 죽고, 적어도 6,0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강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참전 병력의 거의 25%가 사상자가 되었으며, 벵돔은 22,000명 중 약 5,00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그의 상대는 24,000명 중 4,500명 이상이 사망, 부상 또는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 군사 역사가 드 페리니는 프랑스 사상자가 2,728명 사망 또는 부상, 제국군 사상자는 약 6,000명으로, 이 중 2,000명 가까이가 포로가 되었다고 언급한다. 프랑스 장교이자 전투에서 크게 부상을 입은 슈발리에 폴라르는 자신의 기록에서 비슷한 사상자 수치를 각각 3,000명과 5,000명으로 보고하며, 벵돔이 리볼타 다다에 남겨둔 병력을 소집했다면 상당한 승리를 거두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사보이 공자 외젠은 토리노 포위전을 거의 1년이나 지연시키는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카사노 전투를 승리로 주장했지만, 역사가 존 A. 린은 이를 '프랑스의 사소한 전술적 승리'로 간주하며, 본질적으로 결정적이지 않다고 평가했다. 양측은 그 후 몇 주 동안 서로를 감시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보이 공자 외젠은 부상에서 빠르게 회복했고, 10월 초에 트레빌리오에 병영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겨울 동안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벵돔은 라 푸이아드와 만나기 위해 남부 피에몬테로 돌아갔지만, 이미 10월이었고, 그들은 토리노를 공격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르 아메데우스의 입장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12월에 니스가 마침내 항복했고, 알프스 북쪽의 그의 영토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가 점령했다.

1706년 5월 라미예 전투에서의 패배로 루이 14세는 이탈리아에서 벵돔을 소환했고, 덜 유능한 라 푸이아드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 8월 15일, 사보이 공자 외젠은 토리노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고, 1704년 말버러의 더 유명한 도나우 강으로의 행군과 기술과 실행 면에서 비교할 만한 일련의 행군을 거쳐 29일에 토리노에 도착했다. 9월에 포위가 풀린 후,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프랑스군은 철수했고,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전투는 1707년 3월 밀라노 조약으로 끝났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