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티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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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내전은 14세기 카스티야 왕국에서 일어난 왕위 계승 분쟁으로, 페드로 1세와 그의 이복 형제 엔리케 2세 사이의 권력 다툼이 주요 내용이다. 페드로 1세는 귀족들의 반발과 아라곤과의 전쟁을 겪었고, 엔리케 2세는 프랑스, 아라곤, 교황청의 지원을 받아 페드로 1세를 폐위시키려 했다. 엔리케 2세는 1366년 프랑스, 아라곤 군대의 지원을 받아 카스티야를 침공하여 페드로 1세를 잠시 몰아냈으나,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페드로 1세가 나헤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 이후 톨레도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지원을 다시 얻은 엔리케 2세는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페드로 1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트라스타마라 왕조를 열었다. 이 내전은 카스티야-프랑스 동맹을 강화하고, 왕위 계승 분쟁을 종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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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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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분쟁명 | 카스티야 내전 |
일부 | 백년 전쟁 |
기간 | 1366년 – 1369년 |
장소 | 카스티야 왕국,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
결과 |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카스티야 왕국 (페드로 1세 지지 세력), 잉글랜드 왕국 |
교전국 2 | 프랑스 왕국, 카스티야 반군 (엔리케 2세 지지 세력), 아라곤 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페드로 1세, 흑태자 에드워드, 곤트의 존 |
교전국 2 지휘관 | 엔리케 2세, 프랑스의 샤를 5세, 베르트랑 뒤 게클랭 |
관련 전투 | |
주요 전투 | 알헤시라스 공성전 아라비아나 전투 제1차 나헤라 전투 잉글레스멘디 전투 제2차 나헤라 전투 레온 공성전 톨레도 공성전 몬티엘 전투 세비야 공성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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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알폰소 11세와 그의 애첩 레오노르 데 구스만 사이에서 태어난 트라스타마라 백작 엔리케는 실질적인 장남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알폰소 11세가 사망한 후 왕위는 적자인 페드로 1세에게 돌아갔다.
2. 1. 부르고뉴 왕조에서 트라스타마라 왕조로
알폰소 11세 사후, 그의 적자 페드로 1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알폰소 11세의 애첩 레오노르 데 구스만 사이에서 태어난 엔리케 2세는 이에 불만을 품고 왕위를 주장했다.페드로는 지지자들에게 '정의왕'이라고 불렸지만, 적들에게는 '잔혹왕'이라고 불렸다. 고위 귀족들에게 페드로는 압제자였으며, 왕권에 대항하려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아라곤 왕국으로의 세력 확대를 꾀하며 아라곤을 침략했다(두 페드로의 전쟁).
페드로의 이복 형제 엔리케는 고위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아라곤, 그리고 교황청까지 끌어들였다. 1366년 그는 공식적으로 카스티야, 레온, 톨레도, 세비야에서 이복 동생 페드로를 폐위시키고, 라스 우엘가스 수도원에서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2. 2. 페드로 1세의 통치와 귀족들의 반발
페드로 1세는 지지자들에게는 '정의왕'으로 불렸으나, 반대파 귀족들에게는 '잔혹왕'으로 불렸다. 고위 귀족들에게 페드로 1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압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왕권 강화를 통해 아라곤 왕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며, 아라곤 왕관과 두 페드로의 전쟁을 벌였다.2. 3. 엔리케 2세의 지지 기반
페드로 1세는 지지자들에게 '정의왕'이라고 불렸지만, 적들에게는 '잔혹왕'이라고 불렸다. 고위 귀족들에게 페드로 1세는 압제자였으며, 왕권에 대항하려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아라곤 왕국으로의 세력 확대를 꾀하며 아라곤을 침략했다(두 페드로의 전쟁).페드로 1세의 이복 형제 엔리케 2세는 고위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아라곤, 그리고 교황청까지 끌어들였다. 1366년 그는 공식적으로 카스티야, 레온, 톨레도, 세비야에서 이복 동생 페드로 1세를 폐위시키고, 라스 우엘가스 수도원에서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3. 전개
1366년, 프랑스로 망명했던 엔리케는 프랑스-아라곤 연합군과 잉글랜드 용병으로 구성된 대군을 몽펠리에에 집결시키고, 샤를 5세와 페드로 4세의 지원을 받아 카스티야를 침공하여 페드로 1세를 패주시켰다.
페드로 1세는 잉글랜드 왕가의 영지 가스코뉴의 바욘으로 망명하여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카스티야 영토 분할을 제안하여 수락받았다. 1367년 흑태자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과 함께 카스티야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고, 나헤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엔리케를 프랑스로 패주시켰다. 그러나 페드로 1세는 흑태자와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역병까지 겹쳐 흑태자는 카스티야를 떠났다. 이 무렵 페드로 1세로부터 "흑태자의 루비"가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건네졌고, 현재 대영 제국 왕관의 정면에 놓여 있다.
1368년, 엔리케 2세와 샤를 5세는 톨레도 조약을 체결하여 육상에서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비스케이 만에 카스티야 함대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1369년, 엔리케는 다시 카스티야를 침공하여 몬티엘 전투에서 페드로 1세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엔리케 2세로 즉위한 그는 곧 공직에서 유대인을 추방하고 자신의 지배를 굳건히 했다. 이 시기부터 카스티야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3. 1. 엔리케 2세의 1차 침공 (1366년)
1366년, 프랑스로 망명했던 엔리케는 몽펠리에에서 프랑스군, 아라곤군, 잉글랜드 용병으로 구성된 대군을 집결시켰다. 샤를 5세와 페드로 4세의 지원을 받아 카스티야를 침공하여 페드로 1세를 패주시켰다.3. 2. 페드로 1세의 반격과 나헤라 전투 (1367년)
페드로 1세는 잉글랜드 왕가의 소유 영지였던 가스코뉴의 바욘으로 망명했다. 그는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카스티야 영토 분할을 제안하여 지원을 받았다. 흑태자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함께 페드로 1세는 1367년에 카스티야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았고, 나헤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엔리케를 프랑스로 패주시켰다.그러나 페드로 1세는 흑태자와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역병까지 겹치면서 흑태자는 카스티야를 떠났다. 이 무렵 페드로 1세로부터 "흑태자의 루비"가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건네졌고, 현재 대영 제국 왕관의 정면에 놓여 있다.
3. 3. 톨레도 조약 (1368년)
1368년, 엔리케 2세와 샤를 5세는 톨레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엔리케 2세는 육상에서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비스케이 만에 카스티야 함대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3. 4. 엔리케 2세의 2차 침공과 몬티엘 전투 (1369년)
1369년, 엔리케 2세는 다시 카스티야를 침공하여 몬티엘 전투에서 페드로 1세를 살해했다. 그는 엔리케 2세로 즉위하여, 곧 공직에서 유대인을 추방하고 자신의 지배를 견고히 했다. 이때부터 카스티야는 전쟁에서 프랑스와 동맹을 유지하게 되었다.엔리케는 갈리시아로 진입하여 몇몇 도시를 점령한 후 4월에 레온 시를 점령했다. 이후 갈리시아의 모든 지역이 엔리케의 편을 들었다.
4. 결과 및 영향
페드로 1세 사후, 그의 차녀 콘스탄사가 카스티야 여왕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1388년 콘스탄사의 외동딸 카타리나(영: 캐서린)와 엔리케 2세의 손자 엔리케 3세의 약혼이 결정되었고, 1390년에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왕조가 통일되었고, 왕위 계승 분쟁은 종식되었다.
4. 1. 카스티야-프랑스 동맹 강화
엔리케 2세가 즉위하면서 카스티야는 프랑스의 강력한 동맹국이 되었으며, 이는 백년전쟁의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1368년, 엔리케와 프랑스의 샤를 5세는 톨레도 조약을 체결하여 카스티야가 육상 군사 지원을 받는 대가로 프랑스에 비스케이 만의 함대를 제공했다. 엔리케는 갈리시아로 진입하여 몇몇 도시를 점령한 후 1368년 4월 레온 시를 점령했고, 이후 갈리시아 전 지역이 엔리케의 편에 섰다.
1369년, 엔리케는 다시 카스티야로 들어와 몬티엘 전투에서 페드로를 살해했다. 그는 엔리케 2세로 추대되었고, 즉시 유대인을 고위직에서 몰아냄으로써 통치를 강화했다.
4. 2. 왕위 계승 분쟁 종식
페드로 1세 사후, 그의 차녀인 콘스탄사가 카스티야 여왕의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1388년, 콘스탄사의 외동딸 카타리나(영: 캐서린)와 엔리케 2세의 손자인 엔리케의 약혼이 결정되었고, 1390년에 결혼했다.페드로 1세와 엔리케 2세의 손자끼리의 결혼으로 왕조의 통일이 이루어졌고, 왕위 계승 분쟁은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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