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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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라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또는 그 후손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어원은 불분명하며, 돼지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유대교를 버린 자를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14세기 말부터 시작된 반유대 정책과 강제 개종, 종교 재판을 거치면서 마라노는 비밀리에 유대교를 지키거나 새로운 정착지로 이주하는 등 다양한 삶을 살았다. 1492년 스페인 유대인 추방 이후, 마라노들은 유럽, 아메리카, 오스만 제국 등지로 흩어졌으며, 현대에는 스페인 정부의 시민권 부여 등 마라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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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의 반유대주의 - 알람브라 칙령
알람브라 칙령은 1492년 스페인 군주가 유대인에게 기독교 개종 또는 국외 추방을 명령한 것으로, 수만 명의 유대인이 추방되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으나, 이후 스페인 정부는 화해 정책으로 세파라드 유대인에게 국적 취득을 허용하고 있다.
마라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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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
설명 | 마라노(Marrano)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
관련 용어 | |
관련 용어 | 아누심(Anusim), 콘베르소(Converso) |
2. 어원
은폐 유대인에게 적용되는 "마라노(Marrano)"라는 용어의 어원은 돼지를 의미하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제기되어 명확하지 않다.
"마라노"라는 용어는 은폐 유대인을 지칭하며, 그 어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돼지를 의미하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메슈마드(Meshumad)(מְשֻׁמָּדhe)(문자 그대로 "자기 파괴적인" 또는 이단자)는 유대교 율법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유대인, 즉 유대교에 대한 이단자를 뜻한다.
민(Min), 메슈마드(Meshumad), 그리고 아누심(Anusim)의 주된 차이점은 유대교를 버리는 행위가 민(Min)과 메슈마드(Meshumad)에게는 자발적인 반면, 아누심(Anusim)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이 용어의 한 근원은 "금지된, 불법적인"을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2] مُحَرّمٌar 무하람(Muḥarram)에서 유래한다. 이 맥락에서 아랍어 단어는 "돼지" 또는 "돼지고기"를 의미하며, 개종자들이 이전에 이러한 의식적으로 부정한 고기에 대해 가졌던 것과 같은 혐오감을 표현한다.[2]
그러나 은폐 유대인에게 적용될 때, "마라노(Marrano)"라는 용어는 "실패하다", "잘못될 계획을 세우다", "벗어나다", "사취하다", "표적으로 삼다", "묶다", "삼가다", "벗어나다", "꽉 잡다", "정박하다"를 의미하는 스페인어 및 포르투갈어 동사 "marrar"와 "amarrar"에서 유래하며, 스페인 왕관에 의해 표적으로 삼아 강제된 사람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 왕국을 떠나면서 왕관은 그들의 재산과 돈을 압수했고 떠날 수 있도록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에 대한 완전한 충성심을 보이지 않았거나 스페인을 떠났다가 돌아와 스페인 왕관에 대한 반역자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살해당하기도 했다.[3][4]
또한 그들이 비밀리에 유대교를 계속 실천함으로써 새로 받아들인 신앙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벗어나다" 또는 "잘못하다"를 의미하는 아랍어 어원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 어원은 갈리시아-포르투갈어에서 "marrar"는 "강제하다"를 의미하고 "marrano"는 "강제된 자"를 의미하며, 종교적 개종의 강제적인 성격을 나타낸다.[1] 호세 메이르 에스트루고 하잔(José Meir Estrugo Hazán)은 그의 저서 ''Los Sefardíes''[5]에서 "마라노(marrano)"는 스페인 유대인들이 선호하는 용어라고 썼다.
3. 역사적 배경
유대교 율법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유대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מְשֻׁמָּדhe 메슈마드(문자 그대로 "자기 파괴적인" 또는 이단자)가 있다. 민(Min), 메슈마드, 그리고 아누심(Anusim)의 주된 차이점은 민과 메슈마드는 자발적으로 유대교를 버린 반면, 아누심은 강제로 개종했다는 점이다.
"마라노"라는 용어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은 다음과 같다.
호세 메이르 에스트루고 하잔(José Meir Estrugo Hazán)은 그의 저서 ''Los Sefardíes''[5]에서 "마라노"는 스페인 유대인들이 선호하는 용어라고 썼다.
3. 1. 강제 개종과 알람브라 칙령
14세기 후반과 15세기 초반, 국가의 압력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절반 이상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는 1492년 스페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알람브라 칙령을 피하기 위해서였다.[6]
역사가 세실 로스에 따르면, 스페인의 정치적 음모는 1391년에 절정에 달한 반유대 정책을 조장했다. 당시 섭정 여왕 레오노라 데 카스티야는 에시하의 대부제주교 페란드 마르티네스에게 상당한 권력을 부여했다. 마르티네스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적인 연설을 했고, 이는 1391년 6월 4일 세비야의 유대인 거주지 약탈로 이어졌다. 이 해 스페인 전역의 카르모나, 코르도바, 톨레도, 바르셀로나 등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 거주지가 파괴되고 주민들이 학살당했다.[18]
이러한 박해 이후 약 20만 명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추산된다. 다른 유대인들은 스페인을 떠났고, 약 10만 명의 유대인들이 공개적으로 유대교를 실천하며 남았다.[18]
1449년, ''콘베르소스''(conversos)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톨레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부유한 ''콘베르소''이자 세금 징수인 알론소 코타의 집이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또한 마그달레나 지구의 부유한 신기독교인들의 주택도 공격당했다. ''콘베르소''들은 군중에 대항했지만 격퇴당했고, 지도자와 함께 처형되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법령에 따라 여러 저명한 ''콘베르소'' 남성들이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1467년 7월, 톨레도에서 군중이 ''콘베르소스''를 공격하는 또 다른 폭동이 발생했다. 도시의 주요 치안판사는 ''콘베르소스''의 보호자였던 알바르 고메스 데 시브다드 레알이었다. 격렬한 갈등이 발생했고, 반대자들은 대성당 근처 신기독교인들의 집에 불을 질렀다. 화재는 너무 빨리 번져 1,600채의 집이 소실되었고, 구기독교인과 ''콘베르소스'' 모두 사망했다. 데 라 토레 형제는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코르도바에서는 구기독교인과 ''콘베르소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어 두 개의 적대적인 당파를 형성했다. 1473년 3월 14일, 봉헌 행렬 중 한 소녀가 우연히 가장 부유한 ''콘베르소'' 중 한 명의 집 창문에서 더러운 물을 던졌다. 그 물은 성모 마리아상에 튀었고, 한 지역 대장장이가 유대인들을 모욕의 원흉으로 몰아 군중을 선동했다. 군중은 ''콘베르소스''를 공격하여 이단자로 규탄하고 살해하고 집을 불태웠다.
폭동은 3일 동안 지속되었다. 탈출한 사람들은 성에 피신했다. 정부는 유대인과 ''콘베르소스''가 그들의 거주지에 남아 있거나 도시를 떠나도록 명령했다. 1473년, ''콘베르소스''에 대한 공격은 몬토로, 부할란세, 아다무스 등 많은 다른 도시에서 발생했다. 군중은 안두하르, 우베다, 바에사, 알모도바르 델 캄포에서도 ''콘베르소스''를 공격했다. 발라돌리드에서는 집단이 신기독교인들의 소지품을 약탈했다. 세고비아에서는 1474년 5월 16일에 학살이 발생했다. 카르모나에서는 단 한 명의 ''콘베르소''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보고되었다.
3. 2. 포르투갈의 상황
일부 포르투갈의 콘베르소(conversos) 또는 크리스탕-노보스(cristãos-novos)는 비밀리에 유대교를 계속 실천했다. 20세기 초, 역사학자 사무엘 슈워츠(Samuel Schwartz)는 포르투갈 북동부( 벨몬테, 브라간사, 미란다 두 도루, 샤베스)에서 발견된 비밀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 저술했다. 그는 구성원들이 4세기가 넘도록 구기독교인 인구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13] 벨몬테에 남아 있는 마지막 비밀 유대인 공동체는 1970년대에 공식적으로 유대교로 복귀하여 1996년에 시나고그를 열었다. 2003년, 미국 세파르디 연합(American Sephardi Federation)은 당시 160~180명이었던 벨몬테 공동체를 위해 유대교 교육 자료와 서비스를 얻기 위한 기금을 모으는 벨몬테 프로젝트(Belmonte Project)를 설립했다.
현대 마라노(marranos)의 후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인터뷰한 포르투갈 북동부에서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었다. 1974년, 「포르투갈의 마라노들(The Marranos of Portugal)」을 위해 이스라엘 방송국(IBA)은 론 벤-이샤이(Ron Ben-Yishai) 기자를 파견하여 가족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실천에 대해 인터뷰했다. 이야기하기 전에 히브리어를 안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은 후, 그는 여전히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그들의 유대인 관습, 기도 및 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얻었다. 이 영화는 1976년 예루살렘 유대인 영화 및 TV 페스티벌에서 칭찬을 받았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 「마지막 마라노들(The Last Marranos)」은 1997년 뉴욕 유대인 미디어 펀드(New York Jewish Media Fund)에 의해 제작되었다.
스페인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추방한 후(1492년) 그리고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 국왕에 의한 포르투갈의 강제 개종(1497년) 이후, 콘베르소는 사회적으로 긴장된 시대에 계속 의심을 받았다. 1506년 리스본에서 몇 달 동안 지속된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았다. 일부는 콘베르소가 유대교를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1506년 4월 17일, "유대인 관습에 따라 준비된 어린 양과 가금류, 또한 유월절 규정에 따른 무교병과 쓴 나물"을 소지한 몇몇 콘베르소가 발견되었다. 그들은 밤늦도록 축제를 지켰다. 당국은 여러 명을 체포했지만 며칠 후 석방했다.
콘베르소가 풀려난 같은 날, 도미니크 수도회는 여러 신기독교인이 있던 그들의 교회 측면 예배당에서 특이한 빛이 나오는 유리로 된 십자가와 성물함(reliquary)을 전시했다. 자연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기적을 설명하려던 신기독교인은 교회에서 끌어내어 격분한 여성에게 살해당했다. 도미니크 수도사는 대중을 더욱 자극했다. 호아우 모슈(João Mocho) 수사와 아라곤(Aragon) 수사 베르나르두(Bernardo)는 십자가를 들고 거리를 다니며 "이단!"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콘베르소를 파괴하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항의 소리에 이끌려 리스본 항구에 있는 배에서 온 네덜란드(Holland), 제일란드(Zeeland)의 선원들과 다른 사람들이 도미니크 수도회에 합류하여 현지 남성들과 함께 콘베르소를 추격하는 폭도를 형성했다.
폭도는 콘베르소 희생자들을 집에서 끌어내 살해했다. 신기독교인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 구기독교인들도 공격을 받았다. 폭도는 신기독교인인 세금 징수인(tax-farmer) 주앙 로드리고 마스카레냐스(João Rodrigo Mascarenhas)를 공격했다. 그는 부유하고 저명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은 그의 집을 파괴했다. 48시간 이내에 많은 "콘베르소"가 살해되었고, 셋째 날에는 다른 포르투갈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도망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도망쳤다. 이 학살은 리스본 학살로 알려지게 된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지속되었다.
마누엘 1세 국왕은 살인에 가담한 사람들을 심하게 처벌했다. 폭동을 부추긴 주모자들과 도미니크 수도회원들도 처형되었다. 살인이나 약탈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지역 주민들은 체벌을 받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국왕은 보상의 일환으로 모든 콘베르소에게 20년 동안 종교적 자유를 부여했다. 리스본은 포랄(Foral)(지방 자치) 특권을 잃었다. 가담했던 외국인들은 대부분 배를 타고 도망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신기독교인들은 고베이아(Gouveia, Portugal), 아렌테주(Alentejo), 올리벤사(Olivenza), 산타렘(Santarém, Portugal) 및 기타 지역에서 공격을 받았다.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섬에서 폭도들은 전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잔혹 행위 때문에 국왕은 포르투갈 종교 재판이 이러한 폭발을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콘베르소는 그러한 행동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쿠리아(Curia)(가톨릭 교회)와 가장 영향력 있는 추기경들을 설득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썼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콘베르소는 재정적 희생을 치렀다. 알폰소 구티에레스(Alfonso Gutierrez), 가르시아 알바레스 "엘 리코"(가르시아 알바레스 "엘 리코"(the rich)), 그리고 톨레도 출신의 콘베르소인 사파타스(Zapatas)는 종교 재판의 가혹함을 완화한다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를 제공했다.[14]
리스본과 플랑드르(Flanders)의 멘데스(Mendes)도 도움을 주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1547년 7월 16일 포르투갈 종교 재판(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교황령 메디타시오 코르디스(Meditatio Cordis)를 막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 교황령은 여전히 "몰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많은 포르투갈 마라노는 로마 교황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오랜 협상을 통해 이 "몰수 권한"에 반대하여 32년간 지연시켰지만, 마침내 1579년에 이 "치명적인 무기"를 허용했다. 포르투갈 종교 재판은 1478년 11월 1일 스페인 종교 재판 이후 101년 만에 스페인 원형과 같은 엄격함을 갖추게 되었다. 콘베르소는 폭도의 폭력과 종교 재판의 심문과 시험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트란코소(Trancoso, Portugal), 라메구(Lamego), 미란다(Miranda), 비세우(Viseu), 과르다(Guarda, Portugal), 브라가(Braga)에서 공격과 살인이 기록되었다.
코빌량(Covilhã)에서는 사람들이 하루 만에 모든 신기독교인을 학살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1562년, 고위 성직자들은 코르테스(Cortes)에 콘베르소가 특별한 배지를 착용하도록 요구하고, 유대인 후손들에게 개종 전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시와 마을에서 게토(ghetto)(judiarias)에 살도록 명령할 것을 청원했다.
1641년, 포르투갈의 주앙 4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관의 대리인으로 일했던 마라노 가문인 쿠리엘 가문(Curiel family)을 귀족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18세기 후반까지 유럽 전역에서 외교적 직책을 맡았다.[15]
1970년대에 벨몬테의 마라노는 공식적으로 유대교에 다시 합류하고 이스라엘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재건했다.[16] 벨몬테 유대인 박물관은 2005년 벨몬테에 개관했으며, 포르투갈 최초의 유대인 박물관이다.[17]
4. 종교 재판과 박해
"마라노(Marrano)"라는 용어는 은폐 유대인에게 적용되었는데, 그 어원은 명확하지 않다. 이 용어는 아랍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 다양한 언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 아랍어 어원: "금지된, 불법적인"을 의미하는 مُحَرّمٌar 무하람(Muḥarram)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2] 이는 "돼지" 또는 "돼지고기"를 의미하며, 개종자들이 가졌던 혐오감을 표현한다.[2]
- 스페인어 및 포르투갈어 어원: "실패하다", "잘못될 계획을 세우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 "marrar", "amarrar"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강제 개종된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보여준다.[3][4]
- 갈리시아-포르투갈어 어원: "marrar"는 "강제하다", "marrano"는 "강제된 자"를 의미하며, 종교적 개종의 강제성을 나타낸다.[1]
민(Min), 메슈마드(Meshumad), 아누심(Anusim)의 주된 차이점은 유대교를 버리는 행위가 민과 메슈마드에게는 자발적인 반면, 아누심에게는 강요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종교 재판과 폭력 사태를 통해 콘베르소(개종자)들에 대한 박해가 지속되었다.
4. 1. 스페인 종교 재판
역사가 세실 로스(Cecil Roth)에 따르면, 스페인의 정치적 음모는 1391년에 절정에 달한 반유대 정책을 조장했다. 당시 섭정 여왕 레오노라 데 카스티야(Eleanor of Castile, Queen of Navarre)는 에시하(Écija)의 대부제주교 페란드 마르티네스(Ferrand Martinez)에게 상당한 권력을 부여했고, 마르티네스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 연설을 했다. 이러한 영향력은 1391년 6월 4일 세비야(Seville)의 유대인 거주지 약탈로 절정에 달했다. 이 해 스페인 전역에서 에시하, 카르모나(Carmona, Spain), 코르도바(Córdoba, Spain), 톨레도(Toledo, Spain), 바르셀로나(Barcelona) 등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 거주지가 파괴되고 주민들이 학살당했다.이러한 박해 이후 약 20만 명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추산된다.[18] 다른 유대인들은 완전히 스페인을 떠났고, 공개적으로 유대교를 실천하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들이 남았다.
1449년, ''콘베르소스''(conversos)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톨레도(Toledo, Spain)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후안 알폰소와 페드로 로페스 갈베스 두 명의 대성당 참사회원이 선동한 군중은 부유한 ''콘베르소''이자 세금 징수인 알론소 코타의 집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또한 마그달레나 지구의 부유한 신기독교인들의 주택도 공격했다. ''콘베르소''들은 후안 데 라 시브다드의 지휘 아래 군중에 대항했지만 격퇴당했고, 지도자와 함께 처형되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법령에 따라 여러 저명한 ''콘베르소'' 남성들이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약 20년 후인 1467년 7월, 톨레도에서 군중이 ''콘베르소스''를 공격하는 또 다른 폭동이 발생했다. 도시의 주요 치안판사(Alcalde mayor)는 엔리케 4세(Henry IV of Castile) 국왕의 비서였던 알바르 고메스 데 시브다드 레알이었는데, 그는 ''콘베르소스''의 보호자였다. 저명한 ''콘베르소''인 페르난도와 알바로 데 라 토레와 함께 알바르는 구기독교인들의 지도자인 푸엔살리다 백작들의 모욕에 대한 복수를 원했다. 그의 의도는 도시를 장악하는 것이었지만 격렬한 갈등이 발생했다. 반대자들은 대성당 근처 신기독교인들의 집에 불을 질렀다. 화재는 너무 빨리 번져 1,600채의 집이 소실되었고, 구기독교인과 ''콘베르소스'' 모두 사망했다. 데 라 토레 형제는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코르도바에서는 구기독교인과 ''콘베르소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어 두 개의 적대적인 당파를 형성했다. 1473년 3월 14일, 봉헌 행렬 중 한 소녀가 우연히 가장 부유한 ''콘베르소'' 중 한 명의 집 창문에서 더러운 물을 던졌을 때(당시 일반적인 처리 방식이었다), 그 물은 새로운 사회(주교 D. 페드로가 ''콘베르소스''를 배제한 사회)를 기념하여 행렬 중에 운반되던 성모 마리아상에 튀었다. 한 지역 대장장이가 유대인들을 모욕의 원흉으로 몰아 군중을 선동했고, 군중은 즉시 격렬한 복수의 함성을 질렀다.
군중은 ''콘베르소스''를 공격하여 이단자로 규탄하고 살해하고 집을 불태웠다. 과도한 폭력을 막기 위해, 아내가 파체코 ''콘베르소'' 가문의 일원이었던 존경받는 D. 알론소 페르난데스 데 아길라르는 그의 형제인 D. 곤잘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엘 그란 카피탄")(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와 군인들과 함께 서둘러 신기독교인들을 보호했다. D. 알론소는 군중에게 물러날 것을 촉구했고, 군중 지도자는 백작을 모욕했고, 백작은 즉시 창으로 그를 쓰러뜨렸다. 격분한 사람들은 그를 순교자로 여겼다. 알론소 데 아길라르의 적에게 선동된 그들은 다시 ''콘베르소스''를 공격했다. 폭동은 3일 동안 지속되었다. 탈출한 사람들은 보호자들도 피신한 성에 피신했다. 정부는 유대인과 ''콘베르소스''가 그들의 거주지에 남아 있거나 도시를 떠나도록 명령했다.
1473년, ''콘베르소스''에 대한 공격은 몬토로(Montoro), 부할란세(Bujalance), 아다무스(Adamuz), 라 람블라(La Rambla, Córdoba), 산타엘라(Santaella) 등 많은 다른 도시에서 발생했다. 군중은 안두하르(Andújar), 우베다(Úbeda), 바에사(Baeza, Spain), 알모도바르 델 캄포(Almodóvar del Campo)에서도 ''콘베르소스''를 공격했다. 발라돌리드(Valladolid)에서는 집단이 신기독교인들의 소지품을 약탈했다. 세고비아(Segovia)에서는 학살이 발생했다(1474년 5월 16일). ''콘베르소''인 D. 후안 파체코가 공격을 주도했다. 알칼데인 안드레스 데 카브레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모든 신기독교인들이 죽었을 것이다. 카르모나(Carmona, Spain)에서는 단 한 명의 ''콘베르소''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보고되었다.

추방 마감 시한 3개월 전, 수만 명의 유대인이 세례를 받았다. 카멘(Kamen)이 제시한 수치를 받아들인다면 약 4만 명에 달한다. 이들 대부분은 진심으로 신앙을 바꾼 것이라기보다는 추방을 피하기 위해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콘베르소스(conversos)''는 종교재판의 주요 관심 대상이었다. 유대교를 계속해서 실천한다는 의심을 받으면 고발과 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1492년 아라곤의 탄압으로 약 1만 2천 명의 ''콘베르소스''가 나바라(Navarre)로 들어왔고, 그곳에서는 그대로 남아 있도록 허용되었다. 나바라의 투델라(Tudela, Navarre)는 ''콘베르소스''의 피난처가 되었다. 투델라 시민들은 이미 1486년에 "종교재판관이 우리 도시에 들어오면 에브로(Ebro) 강에 던져 버릴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나중에 종교재판관에 대한 저항이 너무 강해져서 투델라의 시의원들은 1510년에 종교재판의 권한을 제한해 줄 것을 가톨릭 군주(Catholic Monarchs)에게 요청하는 위원과 변호사를 파견했다.[19][20][21]
''콘베르소스''에 대한 가장 강렬한 박해 기간은 1530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531년부터 1560년까지 종교재판 재판 가운데 ''콘베르소스''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3%로 떨어졌다. 1588년 킨타나르 데 라 오르덴(Quintanar de la Orden)에서 암암리에 유대교를 믿는 집단이 발견되면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고, 16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콘베르소스''에 대한 고발이 증가했다. 17세기 초, 포르투갈로 도망쳤던 일부 ''콘베르소스''가 1536년에 설립된 포르투갈 종교재판의 박해를 피해 스페인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암암리에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급증했고, 그중에는 많은 중요한 금융가도 포함되었다. 1691년 마요르카(Majorca)에서 여러 차례의 ''오토다페(autos-da-fé)''가 열리는 동안, 37명의 ''추에타스(chuetas)'' 즉 마요르카의 ''콘베르소스''가 화형당했다.[22]
18세기에는 종교재판에 의해 고발된 ''콘베르소스''의 수가 크게 감소했다. 1818년 코르도바(Córdoba)에서 재판을 받은 마누엘 산티아고 비바르(Manuel Santiago Vivar)는 암암리에 유대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은 마지막 사람이었다.[23]
세비야와 카스티야의 다른 도시들, 특히 아라곤의 ''콘베르소스''(conversos)들은 1478년에 설립된 스페인 종교재판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왕에게 상당한 봉사를 제공했고, 고위 법률, 재정 및 군사직을 맡았다. 정부는 전통적인 유대인들에게 게토 내에서 살고 ''콘베르소스''와 분리될 것을 지시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법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기독교인 형제들과 계속 소통했다.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정부는 유대인들이 "그들을 가톨릭에서 이탈시키고 유대교로 되돌리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마라노(Marranos)들에게 유대교의 교리와 의식을 가르쳤고, 그들이 모세 율법에 따라 믿고 준수해야 할 것을 가르친 회합을 열었으며, 그들이 자신과 자녀들을 할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그들에게 기도서를 제공했고, 금식일을 설명했으며, 그들과 함께 그들의 백성과 그들의 율법의 역사를 읽었고, 그들에게 유월절의 도래를 알렸고, 그 축제를 위한 무교병과 마찬가지로 일년 내내 코셔 고기를 구해 주었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을 격려했으며, 유대교를 제외하고는 법도 진리도 없다고 설득했다."라고 주장했다. 이것들은 1492년 그들의 추방과 유배의 근거를 구성했으므로, 그들은 ''콘베르소스''를 전복시킬 수 없었다. 스페인을 떠나고 싶지 않은 유대인들은 개종의 표시로 세례를 받아야 했다.
역사가 헨리 카멘(Henry Kamen)의 ''16세기와 17세기 스페인의 종교재판과 사회''(Inquisition and Society in Spain in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는 ''콘베르소스''와 유대인 공동체 사이에 그러한 강력한 유대가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츠하크 바어(Yitzhak Baer)와 같은 역사가들은 "콘베르소스와 유대인들은 한 민족이었다"고 말하지만,[24] 카멘은 "그러나 콘베르소스가 기독교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면, 유대인들은 그들을 더 좋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24] 그는 "종교재판이 마침내 설립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그들[콘베르소스]에 대해 거짓 증언을 했다"고 기록했다.[24] 이 문제는 역사가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다.
4. 2. 포르투갈 종교 재판
일부 포르투갈의 콘베르소(conversos) 또는 크리스탕-노보스(cristãos-novos)는 비밀리에 유대교를 계속 실천했다. 20세기 초, 역사학자 사무엘 슈워츠(Samuel Schwartz)는 포르투갈 북동부(벨몬테(Belmonte, Portugal), 브라간사(Bragança, Portugal), 미란다 두 도루(Miranda do Douro), 샤베스(Chaves, Portugal))에서 발견된 비밀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 저술했다. 그는 구성원들이 4세기가 넘도록 구 기독교인 인구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13] 벨몬테에 남아 있는 마지막 비밀 유대인 공동체는 1970년대에 공식적으로 유대교로 복귀하여 1996년에 시나고그(synagogue)를 열었다. 2003년, 미국 세파르디 연합(American Sephardi Federation)은 당시 160~180명이었던 벨몬테 공동체를 위해 유대교 교육 자료와 서비스를 얻기 위한 기금을 모으는 벨몬테 프로젝트(Belmonte Project)를 설립했다.현대 마라노(marranos)의 후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인터뷰한 포르투갈 북동부에서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었다. 1974년, 「포르투갈의 마라노들(The Marranos of Portugal)」을 위해 이스라엘 방송국(IBA)은 론 벤-이샤이(Ron Ben-Yishai) 기자를 파견하여 가족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실천에 대해 인터뷰했다. 이야기하기 전에 히브리어를 안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은 후, 그는 여전히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그들의 유대인 관습, 기도 및 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얻었다. 이 영화는 1976년 예루살렘 유대인 영화 및 TV 페스티벌에서 칭찬을 받았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 「마지막 마라노들(The Last Marranos)」은 1997년 뉴욕 유대인 미디어 펀드(New York Jewish Media Fund)에 의해 제작되었다.
스페인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추방한 후(1492년) 그리고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Manuel I of Portugal) 국왕에 의한 포르투갈의 강제 개종(1497년) 이후, 콘베르소(conversos)는 사회적으로 긴장된 시대에 계속 의심을 받았다. 1506년 리스본에서 몇 달 동안 지속된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았다. 일부는 콘베르소(conversos)가 유대교를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1506년 4월 17일, "유대인 관습에 따라 준비된 어린 양과 가금류; 또한 유월절(Passover) 규정에 따른 무교병과 쓴 나물"을 소지한 몇몇 콘베르소(conversos)가 발견되었다. 그들은 밤늦도록 축제를 지켰다. 당국은 여러 명을 체포했지만 며칠 후 석방했다.
콘베르소(conversos)가 풀려난 같은 날, 도미니코 수도회(Dominican Order)는 여러 신기독교인이 있던 그들의 교회 측면 예배당에서 특이한 빛이 나오는 유리로 된 십자가와 성물함(reliquary)을 전시했다. 자연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기적을 설명하려던 신기독교인은 교회에서 끌어내어 격분한 여성에게 살해당했다. 도미니크 수도사는 대중을 더욱 자극했다. 호아우 모슈(João Mocho) 수사와 아라곤(Aragon) 수사 베르나르두(Bernardo)는 십자가를 들고 거리를 다니며 "이단!"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콘베르소(conversos)를 파괴하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항의 소리에 이끌려 리스본 항구에 있는 배에서 온 네덜란드(Holland), 제일란트(Zeeland)의 선원들과 다른 사람들이 도미니크 수도회에 합류하여 현지 남성들과 함께 콘베르소(conversos)를 추격하는 폭도를 형성했다.
폭도는 콘베르소(converso) 희생자들을 집에서 끌어내 살해했다. 신기독교인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 구기독교인들도 공격을 받았다. 폭도는 신기독교인인 세금 징수인(tax-farmer) 주앙 로드리고 마스카레냐스(João Rodrigo Mascarenhas)를 공격했다. 그는 부유하고 저명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은 그의 집을 파괴했다. 48시간 이내에 많은 "콘베르소(conversos)"가 살해되었고, 셋째 날에는 다른 포르투갈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도망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도망쳤다. 이 학살은 리스본 학살(Lisbon massacre)로 알려지게 된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지속되었다.
마누엘 1세(Manuel I of Portugal) 국왕은 살인에 가담한 사람들을 심하게 처벌했다. 폭동을 부추긴 주모자들과 도미니크 수도회원들도 처형되었다. 살인이나 약탈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지역 주민들은 체벌을 받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국왕은 보상의 일환으로 모든 콘베르소(conversos)에게 20년 동안 종교적 자유를 부여했다. 리스본은 포랄(Foral)(지방 자치) 특권을 잃었다. 가담했던 외국인들은 대부분 배를 타고 도망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신기독교인들은 고베이아(Gouveia, Portugal), 알렌테주(Alentejo), 올리벤사(Olivenza), 산타렘(Santarém, Portugal) 및 기타 지역에서 공격을 받았다. 아조레스 제도(Azores)와 마데이라 섬(Madeira)에서 폭도들은 전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잔혹 행위 때문에 국왕은 포르투갈 종교 재판(Portuguese Inquisition)이 이러한 폭발을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콘베르소(conversos)는 그러한 행동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쿠리아(Curia)(가톨릭 교회)와 가장 영향력 있는 추기경들을 설득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썼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콘베르소(conversos)는 재정적 희생을 치렀다. 알폰소 구티에레스(Alfonso Gutierrez), 가르시아 알바레스 "엘 리코"(가르시아 알바레스 "엘 리코"(the rich)), 그리고 톨레도 출신의 콘베르소(conversos)인 사파타스(Zapatas)는 종교 재판의 가혹함을 완화한다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Charles V, Holy Roman Emperor)에게 8만 금관을 제공했다.[14]
리스본과 플랑드르(Flanders)의 멘데스(Mendes)도 도움을 주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1547년 7월 16일 포르투갈 종교 재판(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교황령 메디타시오 코르디스(Meditatio Cordis)를 막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 교황령은 여전히 "몰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많은 포르투갈 마라노(Marranos)는 로마 교황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오랜 협상을 통해 이 "몰수 권한"에 반대하여 32년간 지연시켰지만, 마침내 1579년에 이 "치명적인 무기"를 허용했다. 포르투갈 종교 재판은 1478년 11월 1일 스페인 종교 재판 이후 101년 만에 스페인 원형과 같은 엄격함을 갖추게 되었다. 콘베르소(conversos)는 폭도의 폭력과 종교 재판의 심문과 시험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트란코소(Trancoso, Portugal), 라메구(Lamego), 미란다(Miranda), 비제우(Viseu), 과르다(Guarda, Portugal), 브라가(Braga)에서 공격과 살인이 기록되었다.
코빌량(Covilhã)에서는 사람들이 하루 만에 모든 신기독교인을 학살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1562년, 고위 성직자들은 코르테스(Cortes)에 콘베르소(conversos)가 특별한 배지를 착용하도록 요구하고, 유대인 후손들에게 개종 전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시와 마을에서 게토(ghetto)(judiarias)에 살도록 명령할 것을 청원했다.
1641년, 포르투갈의 주앙 4세(João IV of Portugal)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관의 대리인으로 일했던 마라노(Marrano) 가문인 쿠리엘 가문(Curiel family)을 귀족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18세기 후반까지 유럽 전역에서 외교적 직책을 맡았다.[15]
1970년대에 벨몬테(Belmonte, Portugal)의 마라노(Marranos)는 공식적으로 유대교(Judaism)에 다시 합류하고 이스라엘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재건했다.[16] 벨몬테 유대인 박물관(Museu Judaico de Belmonte)은 2005년 벨몬테에 개관했으며, 포르투갈 최초의 유대인 박물관이다.[17]
4. 3. 리스본 학살 (1506년)
1506년 리스본에서 몇 달 동안 전염병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일부 사람들은 콘베르소(개종자)들이 비밀리에 유대교를 실천하고 있어서 전염병의 원인일 수 있다고 의심했다.1506년 4월 17일, 몇몇 콘베르소들이 유월절(Passover) 규정에 따른 무교병과 쓴 나물 등 유대인 관습에 따라 준비된 음식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당국은 이들을 체포했지만 며칠 후 석방했다.
콘베르소들이 풀려난 같은 날, 도미니크 수도회 교회에서는 특이한 빛이 나오는 십자가와 성물함(reliquary)이 전시되었다. 한 신기독교인이 이를 자연 현상으로 설명하려 하자, 격분한 군중에게 살해당했다. 주앙 모슈 수사와 베르나르두 수사는 십자가를 들고 거리를 다니며 "이단!"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콘베르소들을 파괴하라고 부추겼다. 리스본 항구에 정박해 있던 네덜란드, 젤란트 선원들과 다른 외국인들도 폭동에 합류하여 콘베르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폭도들은 콘베르소들을 집에서 끌어내 살해했고, 신기독교인과 관련된 구기독교인들도 공격했다. 부유하고 저명한 세금 징수인이었던 조아웅 호드리구 마스카레냐스도 폭도들에게 공격받아 집이 파괴되었다.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지속된 이 학살은 리스본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마누엘 1세 국왕은 폭동 가담자들을 엄벌했다. 폭동 주모자들과 도미니크 수도회원들은 처형되었고, 살인이나 약탈에 가담한 지역 주민들은 체벌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국왕은 콘베르소들에게 20년 동안 종교적 자유를 부여하고, 리스본의 포랄(Foral)(지방 자치) 특권을 박탈했다. 폭동에 가담한 외국인들은 대부분 배를 타고 도망쳐 처벌을 피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신기독교인들은 고베이아, 알렝테주, 올리벤사, 산타렝 등 여러 지역에서 공격받았다.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에서도 폭도들이 전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잔혹 행위는 국왕이 포르투갈 종교 재판을 통해 폭동을 통제해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5. 마라노의 확산과 이주
마라노(Marrano)라는 용어의 어원은 불분명하며, 돼지를 의미하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히브리어로는 유대교 율법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유대인을 뜻하는 מְשֻׁמָּדhe 메슈마드(Meshumad)(문자 그대로 "자기 파괴적인" 또는 이단자)가 있다. 민(Min), 메슈마드(Meshumad), 그리고 아누심(Anusim)의 주된 차이점은 유대교를 버리는 행위가 민과 메슈마드에게는 자발적인 반면, 아누심에게는 강제적이라는 점이다.
"마라노"라는 용어는 아랍어 مُحَرّمٌar 무하람(Muḥarram)(금지된, 불법적인)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2] 이 맥락에서 이 단어는 "돼지" 또는 "돼지고기"를 의미하며, 개종자들이 이전에 가졌던 혐오감을 표현한다.[2]
스페인어 및 포르투갈어 동사 "marrar"와 "amarrar"( "실패하다", "잘못될 계획을 세우다", "벗어나다", "사취하다" 등)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이는 스페인 왕정에 의해 강제로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들의 상황을 반영한다.[3][4] 또한, 비밀리에 유대교를 계속 실천함으로써 새로 받아들인 신앙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도 있다. 갈리시아-포르투갈어에서 "marrar"는 "강제하다"를 의미하고 "marrano"는 "강제된 자"를 의미하여 종교적 개종의 강제성을 나타낸다는 설도 있다.[1] 호세 메이르 에스트루고 하잔(José Meir Estrugo Hazán)은 ''Los Sefardíes''[5]에서 "마라노(marrano)"가 스페인 유대인들이 선호하는 용어라고 썼다.
1492년 알람브라 칙령에 따른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추방과 1497년 포르투갈의 강제 개종 이후, 콘베르소(conversos)는 사회적 긴장 속에서 의심을 받았다. 1506년 리스본 학살(Lisbon massacre)은 콘베르소에 대한 불신과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마누엘 1세 국왕은 폭동 가담자들을 처벌하고 콘베르소에게 20년간 종교적 자유를 부여했지만, 이후 포르투갈 종교 재판이 설립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포르투갈 콘베르소는 종교 재판의 가혹함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579년 "몰수 권한"이 허용되면서 더욱 큰 고통을 겪었다. 코빌량 등 여러 지역에서 신기독교인에 대한 공격과 학살이 발생했으며, 주앙 4세가 마라노 가문인 쿠리엘 가문을 귀족으로 임명하기도 했지만,[15] 전반적인 억압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마라노들이 오스만 제국, 플랑드르, 아메리카 대륙 등지로 이주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에서는 그라시아 멘데스 나시와 같은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필리페 3세는 1601년 법령을 통해 신기독교인들에게 출국 자유를 허용했지만, 몇 년 후 이 특권은 폐지되었다.
일부 마라노들은 인도로 이주하여 코친 유대인 공동체에 합류하거나 향신료 및 보석 무역에 종사했다. 그러나 고아 종교재판이 설립되면서 이들 역시 탄압을 받았다.
5. 1. 이탈리아
일부 포르투갈의 콘베르소(conversos) 또는 크리스탕-노보스(cristãos-novos)는 비밀리에 유대교를 계속 실천했다. 20세기 초, 역사학자 사무엘 슈워츠(Samuel Schwartz)는 포르투갈 북동부(벨몬테(Belmonte, Portugal), 브라간사(Bragança, Portugal), 미란다 두 도루(Miranda do Douro), 샤베스(Chaves, Portugal))에서 발견된 비밀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 저술했다.[13] 그는 구성원들이 4세기가 넘도록 구 기독교인 인구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13] 벨몬테에 남아 있는 마지막 비밀 유대인 공동체는 1970년대에 공식적으로 유대교로 복귀하여 1996년에 시나고그(synagogue)를 열었다. 2003년, 미국 세파르디 연합(American Sephardi Federation)은 당시 160~180명이었던 벨몬테 공동체를 위해 유대교 교육 자료와 서비스를 얻기 위한 기금을 모으는 벨몬테 프로젝트(Belmonte Project)를 설립했다.현대 마라노(marranos)의 후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인터뷰한 포르투갈 북동부에서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었다. 1974년, 「포르투갈의 마라노들(The Marranos of Portugal)」을 위해 이스라엘 방송국(IBA)은 론 벤-이샤이(Ron Ben-Yishai) 기자를 파견하여 가족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실천에 대해 인터뷰했다. 히브리어를 안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은 후, 그는 여전히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그들의 유대인 관습, 기도 및 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얻었다. 이 영화는 1976년 예루살렘 유대인 영화 및 TV 페스티벌에서 칭찬을 받았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 「마지막 마라노들(The Last Marranos)」은 1997년 뉴욕 유대인 미디어 펀드(New York Jewish Media Fund)에 의해 제작되었다.
스페인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추방한 후(1492년) 그리고 마누엘 1세(Manuel I of Portugal) 국왕에 의한 포르투갈의 강제 개종(1497년) 이후, 콘베르소(conversos)는 사회적으로 긴장된 시대에 계속 의심을 받았다. 1506년 리스본에서 몇 달 동안 지속된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았다. 일부는 콘베르소(conversos)가 유대교를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1506년 4월 17일, "유대인 관습에 따라 준비된 어린 양과 가금류, 유월절(Passover) 규정에 따른 무교병과 쓴 나물"을 소지한 몇몇 콘베르소(conversos)가 발견되었다. 그들은 밤늦도록 축제를 지켰다. 당국은 여러 명을 체포했지만 며칠 후 석방했다.
콘베르소(conversos)가 풀려난 같은 날,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 Order)는 여러 신기독교인이 있던 그들의 교회 측면 예배당에서 특이한 빛이 나오는 유리로 된 십자가와 성물함(reliquary)을 전시했다. 자연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기적을 설명하려던 신기독교인은 교회에서 끌어내어져 격분한 여성에게 살해당했다. 도미니크 수도사는 대중을 더욱 자극했다. 호아우 모슈(João Mocho) 수사와 아라곤(Aragon) 수사 베르나르두(Bernardo)는 십자가를 들고 거리를 다니며 "이단!"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콘베르소(conversos)를 파괴하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항의 소리에 이끌려 리스본 항구에 있는 배에서 온 네덜란드(Holland), 제일란드(Zeeland)의 선원들과 다른 사람들이 도미니크 수도회에 합류하여 현지 남성들과 함께 콘베르소(conversos)를 추격하는 폭도를 형성했다.
폭도는 콘베르소(converso) 희생자들을 집에서 끌어내 살해했다. 신기독교인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 구 기독교인들도 공격을 받았다. 폭도는 신기독교인인 세금 징수인(tax-farmer) 주앙 로드리고 마스카레냐스(João Rodrigo Mascarenhas)를 공격했다. 그는 부유하고 저명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은 그의 집을 파괴했다. 48시간 이내에 많은 "콘베르소(conversos)"가 살해되었고, 셋째 날에는 다른 포르투갈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도망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도망쳤다. 이 학살은 리스본 학살(Lisbon massacre)로 알려지게 된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지속되었다.
마누엘 1세(Manuel I of Portugal) 국왕은 살인에 가담한 사람들을 심하게 처벌했다. 폭동을 부추긴 주모자들과 도미니크 수도회원들도 처형되었다. 살인이나 약탈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지역 주민들은 체벌을 받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국왕은 보상의 일환으로 모든 콘베르소(conversos)에게 20년 동안 종교적 자유를 부여했다. 리스본은 포랄(Foral)(지방 자치) 특권을 잃었다. 가담했던 외국인들은 대부분 배를 타고 도망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신기독교인들은 고베이아(Gouveia, Portugal), 아렌테주(Alentejo), 올리벤사(Olivenza), 산타렘(Santarém, Portugal) 및 기타 지역에서 공격을 받았다. 아조레스 제도(Azores)와 마데이라 섬(Madeira)에서 폭도들은 전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잔혹 행위 때문에 국왕은 포르투갈 종교 재판(Portuguese Inquisition)이 이러한 폭발을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콘베르소(conversos)는 그러한 행동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쿠리아(Curia)(가톨릭 교회)와 가장 영향력 있는 추기경들을 설득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썼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콘베르소(conversos)는 재정적 희생을 치렀다. 알폰소 구티에레스(Alfonso Gutierrez), 가르시아 알바레스 "엘 리코"(가르시아 알바레스 "엘 리코"(the rich)), 그리고 톨레도 출신의 콘베르소(conversos)인 사파타스(Zapatas)는 종교 재판의 가혹함을 완화한다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Charles V, Holy Roman Emperor)에게 을 제공했다.[14]
리스본과 플랑드르(Flanders)의 멘데스(Mendes)도 도움을 주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1547년 7월 16일 포르투갈 종교 재판(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교황령 메디타시오 코르디스(Meditatio Cordis)를 막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 교황령은 여전히 "몰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많은 포르투갈 마라노(Marranos)는 로마 교황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오랜 협상을 통해 이 "몰수 권한"에 반대하여 32년간 지연시켰지만, 마침내 1579년에 이 "치명적인 무기"를 허용했다. 포르투갈 종교 재판은 1478년 11월 1일 스페인 종교 재판 이후 101년 만에 스페인 원형과 같은 엄격함을 갖추게 되었다. 콘베르소(conversos)는 폭도의 폭력과 종교 재판의 심문과 시험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트란코소(Trancoso, Portugal), 라메구(Lamego), 미란다(Miranda), 비세우(Viseu), 과르다(Guarda, Portugal), 브라가(Braga)에서 공격과 살인이 기록되었다.
코빌량(Covilhã)에서는 사람들이 하루 만에 모든 신기독교인을 학살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1562년, 고위 성직자들은 코르테스(Cortes)에 콘베르소(conversos)가 특별한 배지를 착용하도록 요구하고, 유대인 후손들에게 개종 전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시와 마을에서 게토(ghetto)(judiarias)에 살도록 명령할 것을 청원했다.
1641년, 포르투갈의 주앙 4세(João IV of Portugal)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관의 대리인으로 일했던 마라노(Marrano) 가문인 쿠리엘 가문(Curiel family)을 귀족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18세기 후반까지 유럽 전역에서 외교적 직책을 맡았다.[15]
1970년대에 벨몬테(Belmonte, Portugal)의 마라노(Marranos)는 공식적으로 유대교(Judaism)에 다시 합류하고 이스라엘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재건했다.[16] 벨몬테 유대인 박물관(Museu Judaico de Belmonte)은 2005년 벨몬테에 개관했으며, 포르투갈 최초의 유대인 박물관이다.[17]
5. 2. 오스만 제국
"마라노(Marrano)"라는 용어의 어원은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어 명확하지 않다. 이 용어는 "금지된, 불법적인"을 의미하는 아랍어 مُحَرّمٌar 무하람(Muḥarram)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2] 이 맥락에서 아랍어 단어는 "돼지" 또는 "돼지고기"를 의미하며, 개종자들이 이전에 이러한 의식적으로 부정한 고기에 대해 가졌던 것과 같은 혐오감을 표현한다.[2]그러나 은폐 유대인에게 적용될 때, "마라노(Marrano)"라는 용어는 "실패하다", "잘못될 계획을 세우다" 등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및 포르투갈어 동사 "marrar"와 "amarrar"에서 유래하며, 스페인 왕정에 의해 강제 개종된 사람들의 상황을 보여준다.[3][4]
오스만 제국 시기, 자신의 신앙을 자유롭게 실천하고자 하는 암암리에 유대교를 믿는 마라노들은 더 자유로운 환경으로 꾸준히 이주하였다. 리스본 출신의 국제적인 은행가인 그라시아 멘데스 나시는 이러한 이주를 도운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필리페 3세는 1601년 4월 4일 법령으로 신기독교인들에게 부동산의 무제한 판매와 자신들, 가족, 재산에 대한 국가 출국 자유를 허용했고, 많은 이들이 이 허가를 이용하여 북아프리카와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이 특권은 폐지되었고, 종교 재판은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마라노들은 콘스탄티노플과 테살로니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빈, 티미쇼아라로도 이주를 계속하였다.
5. 3. 라틴 아메리카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일부 콘베르소(conversos)는 아메리카 대륙의 카스티야 영토인 뉴스페인, 페루,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으로 이주했다. 신세계로의 합법적인 이민은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3대에 걸친 기독교 조상의 증거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콘베르소들이 이러한 제한을 피하고 신세계에서 합법적인 신분을 증명하는 "엔코미엔다(encomiendas)" 문서를 얻는 데 성공했다.5. 4. 기타 지역
일부 포르투갈의 콘베르소(conversos) 또는 크리스탕-노보스(cristãos-novos)는 비밀리에 유대교를 계속 실천했다. 20세기 초, 역사학자 사무엘 슈워츠(Samuel Schwartz)는 포르투갈 북동부(벨몬테, 브라간사, 미란다 두 도루, 샤베스)에서 발견된 비밀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 저술했다. 그는 구성원들이 4세기가 넘도록 구기독교인 인구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13] 벨몬테에 남아 있는 마지막 비밀 유대인 공동체는 1970년대에 공식적으로 유대교로 복귀하여 1996년에 시나고그를 열었다. 2003년, 미국 세파르디 연합(American Sephardi Federation)은 당시 160~180명이었던 벨몬테 공동체를 위해 유대교 교육 자료와 서비스를 얻기 위한 기금을 모으는 벨몬테 프로젝트(Belmonte Project)를 설립했다.현대 마라노(marranos)의 후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인터뷰한 포르투갈 북동부에서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었다. 1974년, 「포르투갈의 마라노들(The Marranos of Portugal)」을 위해 이스라엘 방송국(IBA)은 론 벤-이샤이(Ron Ben-Yishai) 기자를 파견하여 가족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실천에 대해 인터뷰했다. 이야기하기 전에 히브리어를 안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은 후, 그는 여전히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그들의 유대인 관습, 기도 및 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얻었다. 이 영화는 1976년 예루살렘 유대인 영화 및 TV 페스티벌에서 칭찬을 받았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 「마지막 마라노들(The Last Marranos)」은 1997년 뉴욕 유대인 미디어 펀드(New York Jewish Media Fund)에 의해 제작되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추방한 후, 그리고 마누엘 1세 국왕에 의한 포르투갈의 강제 개종(1497년) 이후, 콘베르소(conversos)는 사회적으로 긴장된 시대에 계속 의심을 받았다. 1506년 리스본에서 몇 달 동안 지속된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았다. 일부는 콘베르소(conversos)가 유대교를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1506년 4월 17일, "유대인 관습에 따라 준비된 어린 양과 가금류; 또한 유월절 규정에 따른 무교병과 쓴 나물"을 소지한 몇몇 콘베르소(conversos)가 발견되었다. 그들은 밤늦도록 축제를 지켰다. 당국은 여러 명을 체포했지만 며칠 후 석방했다.
콘베르소(conversos)가 풀려난 같은 날, 도미니크 수도회는 여러 신기독교인이 있던 그들의 교회 측면 예배당에서 특이한 빛이 나오는 유리로 된 십자가와 성물함을 전시했다. 자연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기적을 설명하려던 신기독교인은 교회에서 끌어내어 격분한 여성에게 살해당했다. 도미니크 수도사는 대중을 더욱 자극했다. 호아우 모슈(João Mocho) 수사와 아라곤(Aragon) 수사 베르나르두(Bernardo)는 십자가를 들고 거리를 다니며 "이단!"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콘베르소(conversos)를 파괴하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항의 소리에 이끌려 리스본 항구에 있는 배에서 온 네덜란드, 제일란드의 선원들과 다른 사람들이 도미니크 수도회에 합류하여 현지 남성들과 함께 콘베르소(conversos)를 추격하는 폭도를 형성했다.
폭도는 콘베르소(converso) 희생자들을 집에서 끌어내 살해했다. 신기독교인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 구기독교인들도 공격을 받았다. 폭도는 신기독교인인 세금 징수인 주앙 로드리고 마스카레냐스(João Rodrigo Mascarenhas)를 공격했다. 그는 부유하고 저명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은 그의 집을 파괴했다. 48시간 이내에 많은 "콘베르소(conversos)"가 살해되었고, 셋째 날에는 다른 포르투갈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도망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도망쳤다. 이 학살은 리스본 학살로 알려지게 된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지속되었다.
마누엘 1세 국왕은 살인에 가담한 사람들을 심하게 처벌했다. 폭동을 부추긴 주모자들과 도미니크 수도회원들도 처형되었다. 살인이나 약탈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지역 주민들은 체벌을 받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국왕은 보상의 일환으로 모든 콘베르소(conversos)에게 20년 동안 종교적 자유를 부여했다. 리스본은 포랄(지방 자치) 특권을 잃었다. 가담했던 외국인들은 대부분 배를 타고 도망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신기독교인들은 고베이아, 아렌테주, 올리벤사, 산타렘 및 기타 지역에서 공격을 받았다.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섬에서 폭도들은 전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잔혹 행위 때문에 국왕은 포르투갈 종교 재판이 이러한 폭발을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콘베르소(conversos)는 그러한 행동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교황청과 가장 영향력 있는 추기경들을 설득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썼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콘베르소(conversos)는 재정적 희생을 치렀다. 알폰소 구티에레스(Alfonso Gutierrez), 가르시아 알바레스 "엘 리코"(가르시아 알바레스 "엘 리코"(the rich)), 그리고 톨레도 출신의 콘베르소(conversos)인 사파타스(Zapatas)는 종교 재판의 가혹함을 완화한다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을 제공했다.[14]
리스본과 플랑드르의 멘데스(Mendes)도 도움을 주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1547년 7월 16일 포르투갈 종교 재판 교황령 메디타시오 코르디스(Meditatio Cordis)를 막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 교황령은 여전히 "몰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많은 포르투갈 마라노(Marranos)는 로마 교황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오랜 협상을 통해 이 "몰수 권한"에 반대하여 32년간 지연시켰지만, 마침내 1579년에 이 "치명적인 무기"를 허용했다. 포르투갈 종교 재판은 1478년 11월 1일 스페인 종교 재판 이후 101년 만에 스페인 원형과 같은 엄격함을 갖추게 되었다. conversoses는 폭도의 폭력과 종교 재판의 심문과 시험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트란코소, 라메구, 미란다, 비세우, 과르다, 브라가에서 공격과 살인이 기록되었다.
코빌량에서는 사람들이 하루 만에 모든 신기독교인을 학살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1562년, 고위 성직자들은 코르테스(Cortes)에 콘베르소(conversos)가 특별한 배지를 착용하도록 요구하고, 유대인 후손들에게 개종 전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시와 마을에서 게토(judiarias)에 살도록 명령할 것을 청원했다.
1641년, 포르투갈의 주앙 4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관의 대리인으로 일했던 마라노(Marrano) 가문인 쿠리엘 가문(Curiel family)을 귀족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18세기 후반까지 유럽 전역에서 외교적 직책을 맡았다.[15]
1970년대에 벨몬테의 마라노(Marranos)는 공식적으로 유대교에 다시 합류하고 이스라엘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재건했다.[16] 벨몬테 유대인 박물관은 2005년 벨몬테에 개관했으며, 포르투갈 최초의 유대인 박물관이다.[17]
이지도르 뢰브의 『유대 연구지』(14권, 162-183쪽)에 실린 특별 연구에 따르면, 1492년 그라나다 칙령에 의해 스페인에서 추방된 약 3,000명의 유대인들이 프로방스로 이주했다.
1484년부터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 추방을 요구했지만, 샤를 8세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루이 12세는 1498년 즉위 직후 첫 조치 중 하나로 프로방스 유대인에 대한 전면 추방령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시행되지 않았지만, 1500년과 1501년에 다시 발효되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시행되었다. 프로방스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고, 일부는 개종을 선택했다. 그러나 잠시 후 – 유대인들의 이탈로 인한 세수 감소를 부분적으로라도 보상하기 위해 – 국왕은 "개종자 세금"이라는 특별 세금을 부과했다. 이러한 개종자들과 그 후손들은 곧 사회적 차별과 중상의 대상이 되었다.[25]
리스본 대학교의 안토니우 조제 사라이바(António José Saraiva) 교수는 저서 "마라노 공장: 포르투갈 종교재판과 신기독교인들 (1536-1765)"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마누엘 1세는 1507년 3월 1일 법령을 통해 구기독교인과 신기독교인 간의 차별을 이론적으로 폐지하고, 신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도록 허용하며, 그들이 "구기독교인들처럼 여겨지고, 우대받고, 모든 일에서 구기독교인들과 다르거나 분리되지 않도록" 선포했다. 그러나 이 법령과 명백히 모순되게도, 1519년 2월 18일 알메이림에서 보낸 편지에서 마누엘 1세는 고아에서 신기독교인을 판사, 시의원 또는 시청 등록관 직책에 임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도록 촉구했지만, 이미 임명된 사람들은 해임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이는 포르투갈 통치 초기 9년 동안에도 고아에 최근 개종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유대인들이 상당히 유입되었음을 보여준다." [26]
일부 신기독교인들은 인도의 유대인 공동체(특히 코친 유대인 공동체)에 다시 합류하려 했고, 다른 일부는 포르투갈과 인도 간의 향신료 무역과 보석 무역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활동은 가톨릭 성직자들의 분노를 샀다. 이 기간 동안 고아의 초대 주교인 가스파르 조르제 드 레옹 페레이라(Gaspar Jorge de Leão Pereira)는 반유대주의 저서 ""(유대인에 반대하는 논문)를 집필하고 고아 종교재판(1560년 설립)의 설립을 촉구했다.
스페인에서의 conversoses의 대규모 이주는 없었다. 대부분의 세파르디 유대인 공동체(솔로니카의 공동체 등)는 1492년 알람브라 칙령의 결과로 형성되었다.[27]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자유롭게 실천하고자 하는 암암리에 유대교를 믿는 마라노들이 더 자유로운 환경으로 꾸준히 이주하였다. 그들을 돕던 지도자 중 한 명은 리스본 출신의 국제적인 은행가인 그라시아 멘데스 나시였다. 그들은 또한 번영하는 도시인 앤트워프와 브뤼셀 등이 있는 플랑드르로 이주했다. 플랑드르 출신의 컨베르소스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직접 온 사람들은 1580년경 가톨릭 신자로 가장하여 함부르크와 알토나로 갔으며, 그곳에서 공동체를 설립하고 이전 거주지와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일부는 스코틀랜드까지 이주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는 1626년경 글뤼크슈타트에 일부 신기독교 가정이 정착하도록 초청하여 그들에게 특권을 부여했고, 1649년경 엠덴에 온 컨베르소스에게도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대다수 컨베르소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남아 있었고, 스페인 종교 재판에 의해 "마라니즘"이 의심되었다. 그들 중 부유한 사람들은 차별적인 순혈주의 법을 쉽게 피할 수 있었지만, 스페인 종교 재판에 의해 이단으로 처형된 3천 명이 넘는 사람들 중 상당수를 차지했다.[27] 리스본 대학교의 안토니오 호세 사라이바 교수는 "마라노 공장: 포르투갈 종교 재판과 신기독교인들 1536-1765"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531년 8월 포르투갈에 종교 재판이 설립될 예정이었고, 특히 1532년 6월 14일 포르투갈에서 신기독교인의 이민이 중범죄가 된 이후로 신기독교인에 대한 반감이 모든 면에서 급증했다. 신기독교인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합법적이든 비밀이든 이민자들은 플랑드르, 이탈리아, 오스만 제국, 인도의 포르투갈령, 북아프리카로 향했다. 세기 중반 이후 영국, 프랑스, 스페인령 아메리카, 브라질이 그 순서대로가 아니더라도 선호하는 목적지가 되었다."[26] 필리페 3세가 즉위했을 때 신기독교인들은 더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는 1601년 4월 4일 법령으로 그들에게 부동산의 무제한 판매와 자신들, 가족, 재산에 대한 국가 출국 자유를 허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허가를 이용하여 북아프리카와 터키에 있는 동종교인들을 따라갔다. 그러나 몇 년 후 그 특권은 폐지되었고, 종교 재판은 활동을 재개했다.
일부는 런던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그들의 가족들은 브라질(컨베르소스가 일찍 정착했던 곳)과 아메리카의 다른 식민지로 퍼져 나갔다. 스페인에서 추방된 후 유대인 난민들이 정착했던 콘스탄티노플과 테살로니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빈, 티미쇼아라로의 이주는 18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6. 현대의 마라노
20세기 후반, 스페인에서는 유대인과 무슬림의 문화적 기여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세파르드 유대인, 모리스코, 그리고 강제 개종 및 추방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학문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스페인 정부는 이러한 혈통을 가진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여러 도시와 지역에서 유대인 및 무어인의 과거 유산을 보존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정부는 스페인과 역사적으로 관련된 국가의 국민과 세파르드 유대인에게 시민권 취득을 위한 거주 요건을 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초기에는 거주 요건을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했고, 이후 2년으로 더 줄였다가 2012년 11월에는 거주 요건을 완전히 폐지했다.[28] 2006년 10월, 안달루시아 의회는 모리스코 후손들의 스페인 시민권 취득을 용이하게 하는 수정안을 지지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29]
2004년, 슐로모 모세 아마르 랍비는 리스본 시나고그 1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차 포르투갈을 방문하여 종교 재판으로 박해받으면서도 유대교 신앙을 지켜온 유대인 가족의 후손들을 만났다. 이는 수 세기 만에 이루어진 최고 랍비와 포르투갈 베네이 아누심(Bnei Anusim) 간의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아마르 랍비는 이 공동체의 할라카적(유대 율법적) 지위를 평가하기 위한 위원회 설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위원회 설립이 지연되자, 베네이 아누심은 유대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리스본에 '코무니다드 주다이카 마소르티 베이트 이스라엘(Comunidade Judaica Masorti Beit Israel)'이라는 두 번째 유대인 공동체를 설립했다.
6. 1. 벨몬테 공동체 (포르투갈)
20세기 초, 사무엘 슈워츠(Samuel Schwartz) 역사가는 포르투갈 북동부(벨몬테, 브라간사, 미란다 두 도루, 샤베스)에서 발견된 비밀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 저술했다. 그는 구성원들이 4세기가 넘도록 구기독교인 인구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13] 1970년대에 벨몬테의 마라노들은 공식적으로 유대교에 다시 합류하고 이스라엘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재건했다.[16] 벨몬테에 남아 있는 마지막 비밀 유대인 공동체는 1996년에 시나고그를 열었다. 2003년, 미국 세파르디 연합(American Sephardi Federation)은 당시 160~180명이었던 벨몬테 공동체를 위해 유대교 교육 자료와 서비스를 얻기 위한 기금을 모으는 벨몬테 프로젝트(Belmonte Project)를 설립했다. 2005년 벨몬테에는 포르투갈 최초의 유대인 박물관인 벨몬테 유대인 박물관(Museu Judaico de Belmonte)이 개관했다.[17]6. 2. 유전자 연구
2008년 1,150명의 자원자를 대상으로 한 Y 염색체 DNA 해플로그룹 계통지리학 연구 결과, 이베리아 인구의 20%가 세파르드 유대인 조상과 일치하는 해플로그룹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4세기와 15세기 대량 개종 당시 이베리아 인구 내 세파르디 유대인의 비율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시되었다.[6] 그러나 연구자들은 근동 지역 출신의 시리아인이나 페니키아인 등 다른 역사적 인구 이동 또한 이러한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인정했다.[7][8][9][10][11][12]7. 문화적 유산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마라노'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마라노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다룬 문학 작품들은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 리처드 짐러(Richard Zimler)의 소설:
- 리스본의 마지막 카발라 학자(The Last Kabbalist of Lisbon)
- 한밤의 사냥(Hunting Midnight)
- 새벽의 수호자(Guardian of the Dawn)
-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Antonio Muñoz Molina)의 소설 세파르드(Sepharad)
- 데이비드 리스(David Liss)의 소설 커피 상인(The Coffee Trader)
이 작품들은 마라노의 역사, 문화, 종교적 배경 등을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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