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케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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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리케 2세는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국왕으로, 알폰소 11세의 서자이자 레오노르 데 구스만의 아들이다. 그는 이복 동생 페드로 1세와 왕위 계승을 두고 대립했으며, 프랑스와 아라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카스티야 내전 끝에 페드로 1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하고 아라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스페인 왕국 탄생의 기반을 다졌다. 엔리케 2세는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으며, 1379년 랑고반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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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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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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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 |
통치 기간 | 1366년 3월 13일 – 1367년 4월 3일 |
대관식 | 1366년 3월 29일,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후에르가스 |
선임자 | 페드로 |
후임자 | 페드로 |
통치 기간 2 | 1369년 3월 23일 – 1379년 5월 29일 |
선임자 2 | 페드로 |
후임자 2 | 후안 1세 |
자녀 | 후안 1세, 카스티야 왕 레오노르, 나바라 여왕 인판타 후아나 그 외... |
가문 | 이브레아 (출생 시) 트라스타마라 (창시자) |
아버지 | 알폰소 11세 |
어머니 | 레오노르 데 구스만 |
출생일 | 1334년 1월 13일 |
출생지 | 세비야 |
사망일 | 1379년 5월 29일 (45세) |
사망지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
매장지 | 톨레도 대성당 |
2. 생애
알폰소 11세의 서장자로 태어난 엔리케 2세는 이복 동생 페드로 1세와 평생 동안 정적 관계였다. 1351년 부왕 알폰소 11세가 사망한 후, 왕태후 마리아의 계략으로 생모 레오노르가 처형당하고 엔리케 2세 역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1352년 프랑스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도움으로 페드로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페드로 1세는 에드워드 흑태자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려 하여 카스티야 내전이 발발했다. 기나긴 내전 끝에 엔리케는 패사한 페드로 1세의 왕위를 탈취하여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엔리케 2세는 백년 전쟁 시기에 자신을 도와준 프랑스 왕국에 보답하여 군대를 파견했으며, 아라곤 왕국과도 혼인 관계를 맺어 훗날 아라곤 왕국이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왕국으로 편입되는데 일조하였다.
1366년, 대군을 이끌고 칼라오라에 도착하여 국왕으로 즉위할 것을 선언하였다. 귀족과 승려에게 막대한 금전과 영토를 하사하며 국내 세력을 차례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이는 "'''엔리케의 은총'''"이라고 불린다. 나헤라 전투에서 페드로 1세와 잉글랜드 군에게 패배하는 등, 한때 흑태자에게 몰리기도 했지만,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페드로 1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드로 1세를 살해하고 (일설에는 자신의 손으로 찔러 죽였다고도 한다), 왕으로 정식 즉위하였다.
1379년 5월 29일, 엔리케 2세는 페드로 1세를 흠모하던 랑고반이라는 기사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그의 목은 랑고반의 동료에게 잘려나가 행방불명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알폰소 11세의 서장자로, 어머니는 카스티야 귀족 레오노르 데 구스만이다. 엔리케는 정부 소생이었기에 적통 자격이 없었다. 엔리케가 태어난 지 몇 달 후, 알폰소 11세의 정실 마리아가 이복동생 페드로를 낳았다. 이후 엔리케와 페드로는 평생 정적으로 지내게 된다.엔리케 2세는 알폰소 11세와 레오노르 데 구스만 사이의 10명의 사생아 중 넷째이자, 레온의 알폰소 9세의 증손이었다. 파드레 알폰소, 하로 영주와 쌍둥이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첫 아들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로드리고 알바레스 데 라스 아스투리아스에게 입양되었으나, 로드리고는 이듬해 사망했고 엔리케는 노레냐 영지를 상속받았다. 이후 아버지 알폰소 11세는 엔리케를 트라스타마라 백작으로 임명하고, 갈리시아의 레모스와 사리아, 카브레라와 리베라 마을의 영주로 만들었다. 이로써 엔리케는 부르고뉴-이브레아 가문의 주요 지파에서 갈라져 나온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1351년, 아버지 알폰소 11세가 사망하고 이복동생이자 적자인 페드로 1세가 즉위했다. 페드로 1세와 그의 생모는 엔리케가 왕위를 위협할 것을 우려하여 엔리케의 생모를 살해하고, 엔리케의 목숨까지 위협했다.
2. 2. 왕위 찬탈 과정
알폰소 11세의 서장자로 태어난 엔리케 2세는 이복 동생 페드로 1세와 평생 동안 정적 관계였다. 1351년 부왕 알폰소 11세가 사망한 후, 왕태후 마리아의 계략으로 생모 레오노르가 처형당하고 엔리케 2세 역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1352년, 엔리케 2세는 프랑스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지원을 받아 페드로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페드로 1세는 에드워드 흑태자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의 지원을 받아 반란 진압을 시도하면서 내전(카스티야 내전)은 장기화되었다.
1366년, 엔리케 2세는 대군을 이끌고 칼라오라에 도착하여 국왕 즉위를 선언하고, 귀족과 승려에게 막대한 금전과 영토를 하사하며 국내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이를 "엔리케의 은총"이라고 불렀다.
나헤라 전투(1367년)에서 페드로 1세와 잉글랜드 군에게 패배하여 프랑스로 망명하기도 했지만,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페드로 1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살해함으로써 왕위를 차지했다.
2. 3. 재위 기간
엔리케 2세는 알폰소 11세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카스티야 내전 끝에 1369년 몽티엘 전투에서 페드로 1세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1] 즉위 과정에서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에게 칭호와 부를 주어야 했고, 이로 인해 "엘 데 라스 메르세데스" (자비로운 왕)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1] 1366년 칼라오라에서 왕으로 선포되었다.[1]
엔리케 2세는 왕위에 오른 후, 카스티야 왕국을 재건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크게 내정과 대외 관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2. 3. 1. 대외 관계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 왕국을 지원하여 1372년 라 로셸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했다.[1] 아라곤 왕국과 혼인 관계를 맺어 친목을 다지는 등, 훗날 스페인 왕국 탄생의 기초를 다졌다.[2]국가 | 관계 | 내용 |
---|---|---|
프랑스 왕국 | 동맹 |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 라 로셸 해전 승리 |
아라곤 왕국 | 혼인 동맹 | 아라곤 왕국과 혼인 관계를 맺어 친목 강화 |
잉글랜드 왕국 | 적대 |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와 대립, 라 로셸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 격파 |
2. 3. 2. 국내 정책
엔리케 2세는 국내 정책에서 왕국을 재건하고 왕실 행정의 변화를 추진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법정을 열어 사법 제도를 정비했고, 형제 텔로가 사망한 후 비스케이 영주를 영구적으로 설립하여 중앙 집권화를 강화했다.[1]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은 귀족 세력의 성장과 유대인에 대한 차별 정책이라는 두 가지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엔리케 2세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카스티야 내전을 치르면서 많은 귀족과 동맹을 맺었고, 그 대가로 칭호와 부를 보상해야 했다.[1] 이 때문에 귀족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고,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는 "엘 데 라스 메르세데스"(스페인어로 "자비"를 의미)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많은 특권을 부여해야 했다.[1]
또한 엔리케 2세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진보적 가치에 어긋나는 행위로 비판받을 수 있다.
2. 4. 사망
1379년 5월 29일, 엔리케 2세는 페드로 1세를 흠모하던 랑고반이라는 기사에게 살해당했다.[1] 그의 목은 랑고반의 동료에게 잘려나가 행방불명되었다.[1]3. 정책
헨리 2세는 페테르 1세와 달리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펼쳤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지급할 급여를 마련하기 위해 톨레도 유대인 공동체에 막대한 전쟁 기금을 부과하고, 이를 거부하면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 문제로 유대인 금융가에게 의존해야 했으며, 일부 유대인을 세금 징수자로 임명하기도 했다.[3][4]
3. 1. 유대인 정책
페테르 1세와 달리 헨리 2세는 유대인에게 적대적이었다.[3] 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지급할 급여를 마련하기 위해 톨레도 유대인 공동체에 2만 금화(두블론)의 전쟁 기금을 부과했다. 이는 이미 심하게 억압받던 톨레도 유대인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는 모든 톨레도 유대인을 포로로 잡고 음식과 물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만약 그들이 이 막대한 금액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동산과 부동산을 경매에 부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 2세는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유대인 금융가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는 돈 호세프 피촌을 최고 세금 징수관(contador major)으로 임명하고, 여러 유대인을 세금 징수자로 임명했다.[4]헨리 2세의 반유대교 정책은 토로 의회(1369년)와 부르고스 의회(1374년 및 1377년)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그는 유대인에게 굴욕적인 표식을 착용하도록 명령했고, 기독교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단기 대출의 경우 기독교 채무자가 원금의 3분의 2만 상환하도록 했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에 유대인의 공직 임용을 금지하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4]
헨리 2세는 서고트 왕국의 왕 에르비그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반유대교 정책을 시행한 최초의 통치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4. 평가
엔리케 2세는 카스티야 내전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후, 왕국 재건과 왕실 행정 개혁을 추진하고 사법 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비스케이 영주를 영구적으로 설립하여 지역 통치를 강화했다.[1]
그러나 엔리케 2세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 대가로 많은 영지를 하사해야 했고, 이는 귀족 세력 강화로 이어졌다.[2] 또한 페드로 1세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기에 통치를 정당화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 때문에 당시 기록들은 엔리케 2세에게 유리하게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 1. 긍정적 평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샤를 5세와 동맹을 맺고 라 로셸 해전에서 카스티야 해군을 지원하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등 프랑스를 지원하였다.[1][2] 아라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등 외교적 성과도 거두었다.4. 2. 부정적 평가
엔리케 2세는 귀족들에게 많은 영지를 하사하여 귀족 세력이 증대되었다.[1] 그는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자신을 정당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페드로 1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 통치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이유로 동시대 기록에서 엔리케 2세가 유리하게 평가받았을 것으로 보인다.5. 가족 관계
1350년 7월 27일, 엔리케 2세는 후안 마누엘의 딸인 후아나 마누엘과 결혼했다. 슬하에 후안 1세, 엘레오노르, 후아나 등 세 자녀를 두었다. 엔리케 2세는 결혼 외에도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일부는 1374년 5월 29일자 유언장에 언급되어 있다.[8]
이름 | 출생-사망 | 배우자 및 비고 |
---|---|---|
후안 1세 | 1358년 - 1390년 | 카스티야 왕 |
엘레오노르 | 1361년 - 1425년 | 나바라의 카를로스 3세의 아내 |
후아나 | 1372년 - 1376년 | 요절 |
알폰소 엔리케스 | 1355년경 - 1400년경 | 엘비라 이니게스의 아들, 노레냐 및 히혼 백작, 비세우의 이사벨과 결혼[10] |
레오노르 데 카스티야 | ? | 레오노르 알바레스의 딸, 두에냐스, 팔렌시아 출신 |
후아나 데 카스티야 | 1367년 - ? | 엘비라 이니게스의 딸, 우루에냐 상속, 페드로 데 아라곤과 미혼[11] |
콘스탄사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생모 미상, 알바 데 토르메스 상속, 발렌시아 데 캄포스의 인판테 후안과 결혼 |
페르난도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1365년 - 1438년 | 베아트리스 페르난데스의 아들 |
마리아 데 카스티야 | 1375년 - 1393년경 | 베아트리스 페르난데스의 딸, 디에고 우르타도 데 멘도사 (카스티야의 제독)와 결혼 |
파드리케 데 카스티야 | 1360년 - 1394년 | 베아트리스 폰세 데 레온 이 헤리카의 아들, 베나벤테 공작, 알모도바르 델 리오 감옥에서 사망, 레오노르 산체스 데 카스티야와 결혼 |
베아트리스 데 카스티야 | ? - 1409년 | 베아트리스 폰세 데 레온 이 헤리카의 딸, 니에블라 영주, 후안 알론소 데 구스만과 결혼, 세비야의 산 클레멘테 수도원에 묻힘[12] |
엔리케 데 카스티야 | 1378년 - 1404년 | 후아나 데 소우사의 아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부인과 결혼, 코르도바 대성당에 묻힘[13] |
페드로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1366년 | 세고비아 대성당에 묻힘 |
이사벨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1419년경 | 후아나 데 카르카모의 딸, 곤잘로 누녜스 데 구스만과 결혼 무효, 톨레도 산타 클라라 라 레알 수도원 원장 |
이네스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1443년경 | 후아나 데 카르카모의 딸, 톨레도 산타 클라라 라 레알 수도원 원장 |
후아나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시푸엔테스 영주의 딸, 시푸엔테스의 인판테 데니스의 아내, 산타 마리아 데 과달루페에 묻힘 |
5. 1. 배우자와 자녀
1350년 7월 27일, 엔리케 2세는 후안 마누엘의 딸인 후아나 마누엘과 결혼했다.[8] 이들은 세 자녀를 두었다.이름 | 출생-사망 | 배우자 및 비고 |
---|---|---|
후안 1세 | 1358년 - 1390년 | 카스티야 왕 |
엘레오노르 | 1361년 - 1425년 | 나바라의 카를로스 3세의 아내 |
후아나 | 1372년 - 1376년 | 요절 |
엔리케 2세는 결혼 외에도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일부는 1374년 5월 29일자 유언장에 언급되었다.[9]
이름 | 출생-사망 | 생모 및 비고 |
---|---|---|
알폰소 엔리케스 | 1355년경 - 1400년경 | 엘비라 이니게스, 노레냐 및 히혼 백작, 비세우의 이사벨과 결혼[10] |
레오노르 데 카스티야 | ? | 레오노르 알바레스, 두에냐스, 팔렌시아 출신 |
후아나 데 카스티야 | 1367년 - ? | 엘비라 이니게스, 우루에냐 상속, 페드로 데 아라곤과 미혼[11] |
콘스탄사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생모 미상, 알바 데 토르메스 상속, 발렌시아 데 캄포스의 인판테 후안과 결혼 |
페르난도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1365년 - 1438년 | 베아트리스 페르난데스 |
마리아 데 카스티야 | 1375년 - 1393년경 | 베아트리스 페르난데스, 디에고 우르타도 데 멘도사 (카스티야의 제독)와 결혼 |
파드리케 데 카스티야 | 1360년 - 1394년 | 베아트리스 폰세 데 레온 이 헤리카, 베나벤테 공작, 알모도바르 델 리오 감옥에서 사망, 레오노르 산체스 데 카스티야와 결혼 |
베아트리스 데 카스티야 | ? - 1409년 | 베아트리스 폰세 데 레온 이 헤리카, 니에블라 영주, 후안 알론소 데 구스만과 결혼, 세비야의 산 클레멘테 수도원에 묻힘[12] |
엔리케 데 카스티야 | 1378년 - 1404년 | 후아나 데 소우사,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부인과 결혼, 코르도바 대성당에 묻힘[13] |
페드로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1366년 | 세고비아 대성당에 묻힘 |
이사벨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1419년경 | 후아나 데 카르카모, 곤잘로 누녜스 데 구스만과 결혼 무효, 톨레도 산타 클라라 라 레알 수도원 원장 |
이네스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1443년경 | 후아나 데 카르카모, 톨레도 산타 클라라 라 레알 수도원 원장 |
후아나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시푸엔테스 영주, 시푸엔테스의 인판테 데니스의 아내, 산타 마리아 데 과달루페에 묻힘 |
5. 2. 혼외 자녀
알폰소 11세와 레오노르 데 구스만 사이에서 태어난 엔리케 2세는 여러 명의 혼외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일부는 1374년 5월 29일자 유언장에 언급되었다.[8][9][10][11][12][13]이름 | 출생-사망 | 어머니 | 배우자 | 비고 |
---|---|---|---|---|
알폰소 엔리케스 | 1355년경-1400년경 | 엘비라 이니게스 | 비세우의 이사벨 | 노레냐 및 히혼 백작 |
레오노르 데 카스티야 | ? | 두에냐스, 팔렌시아 출신 레오노르 알바레스 | ||
후아나 데 카스티야 | 1367년-? | 엘비라 이니게스 | 페드로 데 아라곤 | 우루에냐 상속 (페드로 데 아라곤과 미혼 시) |
콘스탄사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미상 | 발렌시아 데 캄포스의 인판테 후안 | 알바 데 토르메스 상속 |
페르난도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1365년-1438년 | 베아트리스 페르난데스 | ||
마리아 데 카스티야 | 1375년경-1393년경 | 베아트리스 페르난데스 | 디에고 우르타도 데 멘도사 (카스티야의 제독) | |
파드리케 데 카스티야 | 1360년-1394년 | 베아트리스 폰세 데 레온 이 헤리카 | 레오노르 산체스 데 카스티야 | 베나벤테 공작, 알모도바르 델 리오 감옥에서 사망 |
베아트리스 데 카스티야 | ?-1409년 | 베아트리스 폰세 데 레온 이 헤리카 | 후안 알론소 데 구스만 | 니에블라 영주, 세비야 산 클레멘테 수도원 수녀 |
엔리케 데 카스티야 | 1378년-1404년 | 후아나 데 소우사 | 마리아 고메스 카리요 |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부인, 코르도바 대성당 안장 |
페드로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1366년 | 미상 | 세고비아 대성당 안장 | |
이사벨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1419년경 | 후아나 데 카르카모 | 곤잘로 누녜스 데 구스만 (결혼 무효) | 톨레도 산타 클라라 라 레알 수도원 원장 |
이네스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1443년경 | 후아나 데 카르카모 | 톨레도 산타 클라라 라 레알 수도원 원장 | |
후아나 엔리케스 데 카스티야 | ? | 시푸엔테스 영주 | 시푸엔테스의 인판테 데니스 | 산타 마리아 데 과달루페 안장 |
6. 매체에서의 묘사
아오이케 야스코의 만화 알카사르 -왕성-에서 페드로 1세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엔리케 2세는 질투심 많고 냉혹하며 이기적인, 왕위 찬탈을 노리는 철저한 악역으로 그려진다.[1]
6. 1. 알카사르 -왕성-
아오이케 야스코의 만화 《알카사르 -왕성-》에서 엔리케 2세는 질투심 많고 냉혹하며 이기적인 인물로, 왕위를 찬탈하려는 악역으로 그려진다. 이 만화는 페드로 1세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에 엔리케 2세는 더욱 부정적으로 묘사된다.[1]7. 묻힌 곳
엔리케 2세가 사망한 후 그의 시신은 부르고스를 거쳐 바야돌리드로 옮겨졌고, 마지막으로 톨레도로 옮겨져 톨레도 대성당의 카피야 데 로스 레이스 누에보스에 묻혔다.[5] 그의 유해는 오늘날까지 그곳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묘는 성당 한쪽의 성가대석에 있으며, 플라테레스크 양식이다.
묘의 상자는 카스티야와 레온의 방패로 장식되어 있으며, 하단 내부는 트로피로 장식된 세 개의 패널이 있다. 패널 위에는 두 명의 천사가 왕의 묘비명이 새겨진 카르투슈를 들고 있다. 묘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6]
:여기 가장 모험심 많고 고귀한 기사이자 왕, 달콤하게 기억되는 돈 엔리케, 故 고귀한 왕 돈 알폰소의 아들이 잠들어 있다. 그는 벤마린에서 왔으며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해인 MCCCLXXIX년 5월 30일에 영광스럽게 죽었다.
묘 위에는 채색된 설화석고로 만들어진 엔리케 2세의 횡와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왕이 왕실 복장을 착용하고, 왼손에는 칼을, 허리띠에는 카스티야의 사자를 새기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의 오른손은 홀을 들고 있으며, 홀의 윗부분은 군주의 머리를 받치는 세 개의 베개 위에 놓여 있다. 왕은 슬리퍼를 신고 있으며, 그의 발은 엎드린 사자 위에 놓여 있다.
왕의 내장은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대성당에 묻혔다.
8. 참고 문헌
- Arco y Garay, Ricardo del|아르코 이 가라이, 리카르도 델es (1954). ''Sepulcros de la Casa Real de Castilla'' [카스티야 왕가의 묘]. 마드리드. OCLC 11366237.
- Bartlett, Robert|바틀렛, 로버트영어 (2020). ''Blood Royal: Dynastic Politics in Medieval Europe'' [왕가의 혈통: 중세 유럽의 왕조 정치].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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