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치나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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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칼치나토 전투는 1706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북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당시 프랑스는 북부 이탈리아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칼치나토에 주둔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방돔 원수의 지휘하에 칼치나토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했다. 이 전투로 오스트리아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외젠 공자가 돌아와 병력을 재집결시켰다. 이후 라미예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프랑스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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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 이탈리아 - 토리노 전투
1706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토리노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사보이아 공국의 수도를 포위 공격했으나, 외젠 공자가 이끄는 오스트리아-사보이아 연합군에 의해 격퇴당하며 이탈리아 전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오스트리아의 패권이 강화되었다.
칼치나토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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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전투 정보 | |
개요 | |
전투명 | 칼치나토 전투 |
부분전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날짜 | 1706년 4월 19일 |
장소 | 현재의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칼치나토 근처 |
결과 |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파일:Pavillon royal de France.svg|22px]]프랑스 왕국 [[파일:Flag of Spain (1701–1760).svg|22px]]스페인 왕국 |
교전국 2 | [[파일: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after 1400).svg|22px]]합스부르크 군주국 [[파일:Flag of Prussia (1701-1718).svg|22px]]프로이센 왕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
지휘관 2 | 크리스티안 데틀레프 레벤틀로프 |
병력 규모 | |
병력 1 | 23,000명 |
병력 2 | 10,000–12,000명 |
피해 규모 | |
피해 1 | 사상자 500명 |
피해 2 | 사상자 8,000명, 포 6문, 깃발 및 군기 16개 |
추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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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706년 당시 북부 이탈리아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주요 전장이었다. 프랑스와 그 동맹국들은 북부 이탈리아 대부분과 사보이 공국의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2. 1. 이탈리아 전역의 상황
1706년 이탈리아 전역은 피에몬테를 둘러싼 전역과 롬바르디에 있는 프랑스군과 사보이 공국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및 슈타렘베르크와 합류하려는 오스트리아군 간의 교전으로 나뉘었다. 카사노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오스트리아군은 가르다 호와 브레시아로 퇴각했고, 프랑스군은 카스틸리오네와 만토바에서 겨울을 보냈다.[1]1706년까지 프랑스와 동맹국들은 북부 이탈리아 대부분과 빌프랑슈쉬르메르, 사보이 백국을 장악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수도 토리노만을 지키고 있었으나, 프랑스군은 토리노를 포위할 병력이 부족하여 겨울 동안 주둔하며 전력을 보강했다.[1]
1706년 초, 외젠 공은 빈으로 가 병력과 자금을 확보하고, 폰 레벤틀로 백작이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몬티키아리와 칼치나토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상호 지원에는 불리한 위치였다.[1] 칼치나토에는 12,000명의 독일군이 몬티키아리의 병력과 11km 떨어져 주둔하고 있었다.[1]
프랑스군은 카스틸리오네 델레 스티비에레와 만토바 주변에서 겨울을 보냈고, 4월에 라 푀이아드 원수는 4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토리노를 포위했다. 방돔은 병력 부족을 위장하고 4월 18일 밤, 보병 18,000명과 기병 5,000명을 이끌고 칼치나토로 진군하여 4월 19일 해 뜰 무렵 로나토 운하에 도착했다.[2]
2. 2. 프랑스군의 전략
1706년 4월, 외젠 공작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방돔 원수는 몬테키아리-칼치나토의 황제군 진영을 공격했다. 방돔은 황제군 최좌익에 위치한 폰트 산 마르코(Ponte San Marco)의 수비대를 기습하기 위해 야간 행군을 계획했다. 그러나 날이 밝자 방돔은 몬티키아리에 있는 적의 우익이 방해하기 전에 적의 좌익을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방돔의 기습은 적의 방어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그는 산으로 물러난 분산된 황제군을 격파했다. 외젠 공작은 이 산에서 황제군을 재집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3. 전투 경과
1706년 4월, 외젠 공작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방돔 원수는 몬테치아로-칼치나토(Montechiaro–Calcinato)의 황제군 진영을 공격했다. 방돔은 황제군 최좌익에 위치한 폰트 산 마르코(Ponte San Marco)를 급습하기 위해 야간행군을 했으나, 날이 밝자 몬티키아리에 있는 적의 우익이 방해하기 전에 적의 좌익을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방돔의 급습은 적의 방어를 완벽히 격파했고, 외젠 공작은 산으로 물러난 분산된 황제군을 재집결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3]
방돔의 기습은 성공적이었으나, 프랑스군은 제국군을 공격하기 위해 언덕으로 이동하기 전 운하를 건너야 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방어 태세를 갖출 시간을 벌었다.[3]
3. 1. 오스트리아군의 방어
1706년 4월, 외젠 공작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돔 원수는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 대부분이 가바르도에 있어 포병 전력에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몬테치아로-칼치나토(Montechiaro–Calcinato)의 황제군 진영을 공격했다. 폰 레벤틀로는 방어 태세를 갖추고 프랑스군에 맞섰다. 프랑스군은 총검을 사용하여 제국군 좌익을 공격하여 밀어냈지만, 폰 레벤틀로와 그의 기병대가 이들을 다시 집결시켰다. 그러나 폰 레벤틀로의 우익이 무너지면서 살로로부터 고립될 위험에 처했고, 결국 철수 명령을 내렸지만, 질서 정연한 후퇴는 곧 궤멸로 변질되었다.[3]3. 2. 프랑스군의 공격
방돔 원수는 포병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개시했다. 프랑스군 우익은 총검으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공격하여 밀어냈다. 폰 레벤틀로는 기병대를 다시 집결시켰지만, 오스트리아군 우익은 무너졌다. 폰 레벤틀로의 진지와 몬티키아리 진지 사이의 간격으로 인해, 그는 살로로부터 고립될 위험에 처했다. 폰 레벤틀로는 철수 명령을 내렸으나, 질서 정연한 후퇴는 곧 궤멸로 변질되었다.[3]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3,000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고, 대부분의 짐과 최대 3,000명의 포로가 발생했다.[4]3. 3. 전투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3,000명 이상의 사상자와 포로를 냈고, 대부분의 짐을 잃는 큰 피해를 보았다.[4] 폰 레벤틀로는 철수 명령을 내렸지만, 질서 정연한 후퇴는 곧 궤멸로 변했다.[3]4. 전투의 영향
라미예 전투 이후, 방돔은 플랑드르 군단을 보냈고, 1706년 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결과를 낳았다.[5] 방돔이 가바르도와 살로를 점령하고 황제군을 트렌티노 계곡으로 몰아냈지만, 오이겐 공자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재규합하여 가르다 호를 돌아 베로나 현으로 진군하면서,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스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5]
4. 1. 전황의 변화
라미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하면서, 이탈리아 전황은 프랑스에 불리하게 돌아섰다. 1706년 말, 이탈리아 내 프랑스군은 모두 철수했다. 방돔은 가바르도와 살로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군을 트렌티노 계곡으로 몰아냈지만, 오이겐 공자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제때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하고 가르다 호를 돌아 베로나 현베로나 현|Veronait으로 진군했다.[5]1706년 5월, 라미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하면서 방돔과 병력이 북부 프랑스로 이동해야 했다. 이탈리아 주둔 오스트리아군은 대폭 증강되었고,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2만 명의 독일 용병을 추가 지원하고 프로이센과의 기존 협정을 갱신했다.[5]
4. 2. 프랑스군의 철수
라미예 전투의 패배 이후, 방돔은 플랑드르 군단을 보냈다. 1706년 말, 라미예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입지가 최악으로 치닫게 되자, 모든 프랑스 군은 이탈리아에서 퇴각한다.[5]방돔이 가바르도와 살로를 점령하고 황제군을 트렌티노 계곡으로 몰아냈지만, 오이겐 공자가 제때 돌아와 그들을 다시 규합했고, 그 후 가르다 호를 돌아 베로나 현(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로, 기술적으로는 중립이었지만 실제로는 황제군에 의해 무시되었다)으로 이끌었다. 이제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 5월의 라미예 전투에서의 패배는 방돔과 모든 가용 병력이 북부 프랑스로 이동해야 함을 의미했다. 동시에, 이탈리아의 황제군은 대폭 증강되었고, 해양 열강(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2만 명의 독일 용병을 추가로 지불하는 한편, 프로이센과의 기존 협정을 갱신했다.[5]
참조
[1]
서적
A complete history of the wars in Italy [spurious Mémoires] tr. by J. Sparrow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1734
[2]
서적
The field of Mars: being an alphabetical digestion of the principal naval and military engagements, in Europe, Asia, Africa, and America, particularly ... century to the present period Volume 2
https://books.google[...]
Gale ECCO
1781
[3]
서적
The history of Francis-Eugene Prince of Savoy
Gale ECCO
1745
[4]
서적
The History of Great Britain During the Reign of Queen Anne
https://books.google[...]
Forgotten Books
1795
[5]
서적
German Armies: War and German Society, 1648-1806
Routledge
1998
[6]
문서
Lynn, p.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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