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폭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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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로폭쿠르는 아이누 민족의 소인 전설에 등장하는 종족으로,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 열도 등지에 전승된다. 이들은 키가 작고 민첩하며 어업에 능숙하고, 머위 잎으로 지붕을 덮은 수혈 주거에서 생활했다는 묘사된다. 아이누족에게 우호적이었으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 밤에 물물교환을 했다고 전해진다. 코로폭쿠르는 아이누 청년의 무례함으로 인해 북쪽 바다로 떠났으며, 그들이 남긴 석기와 토기가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코로폭쿠르의 정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며, 고고학자 세가와 타쿠로는 북쿠릴 아이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츠보이 쇼고로는 코로폭쿠르가 일본 열도의 선주민이라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조몬인의 피가 아이누에게 가장 가깝다는 설이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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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인 - 소인 (전설)
소인 전설은 세계 각 문화권의 신화나 설화에서 작은 키로 묘사되는 존재를 통칭하며, 각 문화권마다 독특한 특징과 역할을 가지고 문학 작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해석되고, 실존 인류의 발견으로 인식이 변화하기도 했다. - 아이누 신화 - 유카르
유카르는 아이누족의 구전 서사시로, 인간의 이야기인 "인간의 유카르"와 신의 이야기인 "카무이 유카르"로 나뉘며 무역, 죽음, 자연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고, 아이누 문화 부흥 운동과 함께 새로운 화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 아이누 신화 - 에비스 (신화)
에비스는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어업, 상업, 행운의 신으로, 칠복신 중 하나이며, 바다와 관련된 기원을 가지며 상업 번영의 신으로도 숭배받는다.
코로폭쿠르 | |
---|---|
코로포ックル에 대한 정보 | |
이름 | 코로포ックル |
다른 이름 | 토이치세운쿠루 토이치세코챠카무이 통치 |
어원 | |
코로포ックル | 아이누어로 "칸나 잎 아래에 있는 사람"을 의미 |
설명 | |
특징 | 키가 작음 땅속이나 칸나 잎 아래에 산다고 함 아이누가 오기 전부터 살던 종족이라고 전해짐 아이누와 평화롭게 공존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자취를 감췄다고 함 |
전승 | 아이누의 전승에 등장하는 소인 홋카이도나 치시마 열도에 살았다고 전해짐 아이누에게 다양한 기술을 전수했다고 함 |
관련 유적 | 홋카이도 각지에서 코로포ックル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수혈 주거지 유적이 발견됨 |
논쟁 | 코로포ックル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있음 실존했다는 주장과 아이누의 전승 속에서만 존재하는 존재라는 주장이 대립 |
2. 전승
아이누의 소인 전설은 홋카이도, 남쿠릴열도, 사할린섬 등지에 퍼져 있다. 지역에 따라 이야기의 세부 내용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아이누가 이 땅에 오기 전부터 살았던 소인족 코로폭쿠르와의 교류 및 이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승에는 코로폭쿠르의 생활 모습, 아이누와의 관계, 그들이 갑자기 사라지게 된 경위 등이 묘사되며, 현재 발견되는 석기나 토기 등이 그들의 흔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지역별 변이 중에는 토카치 지방의 지명 유래와 관련된 전설도 있다.[1][2]
2. 1. 주요 내용
아이누의 소인 전설은 홋카이도, 남쿠릴열도, 사할린섬 등지에 퍼져 있으며,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코로폭쿠르는 아이누가 해당 지역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살았던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키가 매우 작고 움직임이 민첩했으며, 특히 고기잡이에 능숙했다고 전해진다. 코로폭쿠르는 머위 잎으로 지붕을 덮은 수혈에서 생활했다.코로폭쿠르는 아이누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사슴이나 물고기 같은 사냥감을 아이누에게 선물하거나 물물교환을 통해 교류했다. 하지만 코로폭쿠르는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에, 물물교환은 주로 밤에 창문을 통해 물건을 몰래 주고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날, 한 아이누 청년이 코로폭쿠르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노려 코로폭쿠르의 손을 잡아 실내로 끌어들였다. 그때 드러난 코로폭쿠르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으며, 손등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일부 전승에서는 아이누 여성들이 하는 문신이 이를 모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코로폭쿠르는 아이누 청년의 무례한 행동에 크게 분노하여 부족 전체가 북쪽 바다 건너편으로 떠나버렸고, 이후 아이누는 더 이상 코로폭쿠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각지에서 발견되는 석기와 토기는 코로폭쿠르가 남긴 흔적으로 여겨진다.
지역에 따라 전승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코로폭쿠르는 게으른 편이어서 아이누가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거나, "코로폭쿠르의 문신은 그들을 생포한 아이누가 탈환을 두려워하여 새긴 것이며, 문신은 원래 아이누의 풍습이었다"는 등의 변형된 이야기가 존재한다.
토카치 지방에는 코로폭쿠르가 아이누의 박해를 피해 땅을 떠났다는 전설이 있다. 떠나면서 코로폭쿠르는 아이누에게 "물이 마르고 물고기가 썩을 것"이라는 의미의 "토캅푸치(tokapuchi)"라는 저주를 남겼고, 이것이 '토카치'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1] 유사한 어원 설명은 나가타 호세이의 저서 『북해도에조어지명해』(1891년)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지명 연구가 야마다 히데조는 토카치 지역 아이누들이 자신들의 땅 이름에 자부심을 가졌을 텐데, 이것이 부정적인 의미의 저주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가타가 기록한 설화가 다른 지역 아이누의 민간어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반론했다.[2]
2. 2. 지역별 차이
코로폭쿠르 전설은 홋카이도, 남쿠릴열도, 사할린섬 등 넓은 지역에 걸쳐 전해지지만, 지역에 따라 이야기의 세부 내용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어떤 지역에서는 코로폭쿠르가 게을러서 아이누가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코로폭쿠르의 문신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전설에서는 아이누 여성이 코로폭쿠르 여성의 손등 문신을 보고 따라 했다고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코로폭쿠르를 붙잡은 아이누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표식을 새긴 것이 문신의 시작이며, 문신은 원래 아이누의 풍습이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토카치 지방에는 코로폭쿠르와 관련된 독특한 전설이 있다.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코로폭쿠르는 아이누의 박해를 피해 땅을 떠나면서 아이누에게 “물이 마르고 물고기가 썩을 것”이라는 의미의 “토캅푸치”라는 저주를 남겼고, 이것이 오늘날 ‘토카치’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1] 이러한 어원 설명은 나가타 호세이가 1891년에 쓴 『북해도에조어지명해』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지명 연구가인 야마다 히데조는 토카치 아이누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 이름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했을 리 없으며, 나가타가 기록한 이야기는 다른 지역 아이누의 민간어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반박했다.[2]
2. 3. 토카치 지방의 전설
토카치 지방에는 코로폭쿠르가 아이누에게 박해를 받아 그 땅을 떠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전설에 따르면, 코로폭쿠르는 떠나는 순간 아이누에게 “물이 마른다, 물고기가 썩는다”는 뜻의 “토캅푸치”라는 저주의 말을 남겼고, 이것이 토카치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1] 이와 비슷한 어원설은 나가타 호세이가 1891년에 쓴 『북해도에조어지명해』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명 연구가 야마다 히데조는 토카치 아이누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부르던 지명이 나쁜 뜻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그는 나가타가 기록한 설이 다른 지방 아이누들의 민간어원일 것이라고 반박했다.[2]3. 코로폭쿠르의 정체
코로폭쿠르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어 왔다. 그중 고고학자 세가와 타쿠로는 코로폭쿠르의 특징으로 알려진 침묵교역, 수혈주거, 토기 제작 및 사용 등이 북쿠릴에 거주하던 루루톰운쿠르(쿠릴 아이누)의 생활 방식과 공통된다는 점, 그리고 코로폭쿠르 전설이 유독 북쿠릴 지역에서는 전승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코로폭쿠르가 바로 북쿠릴 아이누였다는 주장을 펼쳤다.[3] 코로폭쿠르가 흔히 작은 소인으로 묘사되는 것은 전승의 특정 부분이나 이미지에 의한 오해라는 지적도 있다.[4]
3. 1. 북쿠릴 아이누설

고고학자 세가와 타쿠로는 코로폭쿠르의 특징으로 언급되는 침묵교역, 수혈주거, 토기의 제조 및 사용, 토기 재료를 찾아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등의 행동이 북쪽 쿠릴에 사는 루루톰운쿠르(쿠릴 아이누)의 생활 방식과 공통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북해도, 사할린, 남쿠릴에는 널리 퍼져 있는 코로폭쿠르 전설이 북쿠릴에서는 전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코로폭쿠르의 정체는 북쿠릴 아이누였다'''는 주장을 제기했다.[3]
북쿠릴의 아이누는 북해도 아이누나 야마토인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체격 차이가 크지 않다. 도리이 류조가 파라사마렉(パラサマレック)이라는 이름의 서른네다섯 살 된 쿠릴 아이누에게 신세를 지면서 코로폭쿠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의 일화가 있다. 파라사마렉은 북해도 아이누와 신장 차이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쿠릴 아이누)을 난쟁이 취급하며 모욕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여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4]
또한, "머위잎 아래에 산다"는 전승 때문에 많은 매체에서 코로폭쿠르를 손바닥만 한 소인으로 묘사하지만, 북해도에는 키가 2m 이상 자라는 라만머위가 자생한다. 원래 아이누 신화에 등장하는 코로폭쿠르는 아이누보다 키가 조금 작은 정도이지, 난쟁이는 아니다.
4. 코로폭쿠르 논쟁
츠보이 쇼고로는 에드워드 실베스터 모스의 “프리(pre-)아이누설”을 계승하여, 일본열도의 석기시대에 아이누의 조상이 도래하기 이전의 선주민이 있었으며, 아이누 조상들이 이들을 북쪽으로 쫓아냈다는 인종교체설을 주장했다. 그는 아이누 전승에 등장하는 코로폭쿠르가 야마토인이나 아이누인과는 다른, 일본열도의 가장 오래된 선주민이라고 보았다.
1886년 와타세 쇼자부로가 삿포로 주변 움집터를 코로폭쿠르의 증거로 발표하고 츠보이가 이를 지지하면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시라이 미츠타로가 익명으로 츠보이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후 코가네이 요시키요, 하마다 코사쿠, 도리이 류조, 키타 사다키치, 사토 덴조 등 여러 연구자들이 논쟁에 참여하며 그 규모가 커졌다. 이 논쟁은 츠보이가 1919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아이누나 류큐인에게 조몬인의 유전적 영향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코로폭쿠르가 일본열도의 선주민이었다는 츠보이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4. 1. 츠보이 쇼고로의 주장
츠보이 쇼고로는 일본열도의 석기시대에 아이누의 조상이 도래하기 이전에 선주민이 존재했다는 에드워드 실베스터 모스의 “프리(pre-)아이누설”을 계승하였다. 그는 아이누의 조상들이 이 선주민을 북쪽으로 쫓아냈다는 인종교체설을 주장했다. 츠보이는 아이누의 전승에 주목하여, 전승에 등장하는 코로폭쿠르가 야마토인이나 아이누인과는 다른 민족이며 일본열도의 가장 오래된 선주민이라고 주장했다.1886년, 와타세 쇼자부로는 『인류학회보고』 창간호에서 삿포로 주변의 움집터들이 코로폭쿠르가 만든 것이며 아이누보다 먼저 살았다는 증거라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 같은 해, 츠보이는 『인류학회보고』 제9호에서 와타세의 주장에 대체로 찬성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그러나 같은 호에는 시라이 미츠타로가 익명으로 츠보이의 설을 비판하는 글 또한 게재되었다. 이후 이 문제는 코가네이 요시키요, 하마다 코사쿠, 도리이 류조, 키타 사다키치, 사토 덴조 등 다수의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논쟁으로 발전했다. 이 논쟁은 츠보이가 1919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객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현재는 아이누나 류큐인에게 조몬인의 피가 가장 짙게 남아 있다는 설이 유력하며, 코로폭쿠르 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4. 2. 논쟁의 전개
츠보이 쇼고로는 에드워드 실베스터 모스의 “프리(pre-)아이누설”을 이어받아, 일본 열도의 석기시대에는 아이누의 조상이 오기 전에 다른 선주민이 있었으며, 아이누 조상이 이들을 북쪽으로 몰아냈다는 인종교체설을 주장했다. 그는 아이누 전승에 나오는 코로폭쿠르가 야마토인이나 아이누인과는 다른 민족이며, 일본 열도의 최초 선주민이라고 보았다.1886년, 와타세 쇼자부로는 『인류학회보고』 창간호에 삿포로 주변의 움집터가 코로폭쿠르의 것이며, 아이누보다 먼저 살았다는 증거라고 발표했다. 츠보이는 같은 학회지 제9호에서 이에 대체로 동의하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같은 호에는 시라이 미츠타로가 익명으로 츠보이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이후 코가네이 요시키요, 하마다 코사쿠, 도리이 류조, 키타 사다키치, 사토 덴조 등 여러 연구자들이 논쟁에 참여하면서 논쟁은 더욱 커졌다. 이 논쟁은 1919년 츠보이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현재는 아이누나 류큐인에게 조몬인의 유전적 영향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으며, 코로폭쿠르 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4. 3. 현재의 학설
현재는 아이누나 류큐인에게 조몬인의 유전적 영향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과거 제기되었던 코로폭쿠르 설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5. 현대 매체에서의 코로폭쿠르
"머위잎 아래 있다"는 전승에서 비롯된 이미지 때문에 많은 현대 매체에서는 코로폭쿠르를 손바닥만한 크기의 소인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북해도에 사람 키보다 훨씬 크게, 2m 이상 자라는 라만머위가 자생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원래 아이누의 신화에 나오는 코로폭쿠르는 아이누보다 키가 조금 작은 정도였으며, 난쟁이와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4]
참조
[1]
서적
妖怪事典
毎日新聞社
[2]
웹사이트
アイヌ語地名リスト ツキサ~トヨコ P81-90
http://www.pref.hokk[...]
아이누政策推進局아이누政策課
2018-04-17
[3]
서적
コロポックルとはだれか―中世の千島列島とアイヌ伝説
新典社
[4]
서적
鳥居龍蔵伝 アジアを走破した人類学者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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