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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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콜로-콜로는 1925년 다비드 아레야노가 창단한 칠레의 축구 클럽이다.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34회, 코파 칠레에서 14회, 수페르코파 데 칠레에서 4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1회, 레코파 수다메리카나와 코파 인터아메리카나에서 각 1회 우승을 차지하는 등 칠레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91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은 칠레 클럽 최초의 우승 기록이며, 1990년대에는 국내외 대회에서 많은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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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콜로-콜로는 1925년 4월 19일에 창단되었다.[14] 1991년 6월 5일, 에스타디오 모누멘탈에서 올림피아를 3-0으로 꺾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차지하며 남미 축구 정상에 올랐다.[58] 이는 칠레 클럽 최초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이었다.
1991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는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에 0-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58]
콜로-콜로의 역사는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 창단과 초기 (1925-1933): 다비드 아레야노를 중심으로 창단, 메트로폴리탄 명예 리그 무패 우승, 유럽 순회 경기 중 아레야노 사망, 중앙 축구 리그 우승 등.
- 프로 축구 초창기 (1933-1973): 칠레 프로 축구 리그 창설, 첫 리그 우승(1937), 프란시스코 플라트코 감독 체제에서 2회 우승, 남미 클럽 챔피언십 개최, 조지 로블레도 영입, 에스타디오 모뉴멘탈 건설 시작 등.
- 1973년과 1980년대의 전성기: 루이스 아라모스 감독 체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 진출, 에스타디오 모누멘탈 완공, 페드로 가르시아 바로스 및 아르투로 살라 감독 체제에서 리그 우승, 알리안사 리마 항공기 추락 사고 지원 등.
- 국제적인 성공 (1991-1999): 미르코 요지치 감독 체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대륙간컵 준우승,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및 코파 인터아메리카나 우승, 구스타보 베니테스 감독 체제에서 리그 3회 우승 등.
- 파산과 회복 (1999-현재): 재정 위기, 파산 선고, 하이메 피사로 감독 체제, 토르네오 데 클라우수라 우승, 블랑코 이 네그로 경영권 인수, 클라우디오 보르히 감독 체제, 코파 수다메리카나 준우승, 4연속 리그 우승, 마르셀로 바르티치오토 및 우고 토칼리 감독 체제, 토르네오 데 클라우수라 우승 등.
2007년부터 2013-2014년까지 콜로-콜로의 시즌별 기록은 다음과 같다.
2. 1. 창단과 초기 (1925-1933)

콜로-콜로는 1925년 초 C.D. 마갈라네스의 축구 선수였던 다비드 아레야노가 기관 문제로 팀을 떠난 젊은 선수들을 이끌면서 설립되었다.[12][13] 1925년 4월 19일, 아레야노와 다른 젊은이들은 공식적으로 클럽을 창단했고, 루이스 콩트레라스는 16세기 아라우코 전쟁에서 스페인 식민지군과 싸운 전설적인 추장 콜로 콜로를 기려 "콜로-콜로"라는 이름을 제안했다.[14]
콜로-콜로는 초기에 친선 경기를 치렀으나, 1926년 메트로폴리탄 명예 리그에 참가하여 무패 우승을 달성하며 "무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5] 1927년 콜로-콜로는 칠레 축구팀 최초로 유럽 순회 경기를 가졌다. 그러나 5월 2일, 레알 발라돌리드와의 발라돌리드에서 열린 친선 경기 도중 팀 창립자이자 주장인 다비드 아레야노가 상대 선수와 충돌하여 복막염으로 이어지는 중상을 입었다.[16] 그는 다음 날 사망했다.[17] 아레야노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콜로-콜로는 1928년,[18] 1929년,[19] 1930년[20] 시즌 중앙 축구 리그(이후 산티아고 축구 협회로 개명됨)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31-32 시즌, 콜로-콜로는 재정 문제로 인해 첫 번째 기관 위기를 겪었다. 이는 1군 선수와 이사회 구성원의 급여 감소와 그에 따른 저항으로 이어졌다.[21] 그 시즌 콜로-콜로는 아우닥스 이탈리아노와 결승전을 치렀으나, 에스타디오 이탈리아노에서 관중석 붕괴 사고와 팬들 간의 소동으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었다. 중단 당시 콜로-콜로는 2-1로 앞서고 있었다. 이 사고로 130명이 부상을 입고 3명이 사망했다.[22] 경기는 취소되었고, 해당 연도 우승은 공석으로 남았다.[22] 다만, 다른 자료에서는 아우닥스 이탈리아노와 콜로-콜로 모두 우승자로 선언되었다고 주장한다.[23][24]
2. 2. 프로 축구 초창기 (1933-1973)
1933년, 콜로-콜로는 산티아고의 6개 클럽과 함께 칠레 프로 축구 리그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25] 7월 23일, 우니온 에스파뇰라를 2-1로 꺾고 카메오나토 데 아페르투라(코파 칠레 전신)에서 우승했다.[25] 그러나 첫 프리메라 디비시온 공식 경기에서 마갈라네스와 함께 1위를 차지하여 승부차기를 치렀으나 2-1로 패했다.[26] 1937년 무패를 기록[27]하며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28] 2시즌 후인 1939년, 헝가리 출신 감독 프란시스코 플라트코[29]의 지휘 아래, 알폰소 도밍게스가 24경기에서 20골을 넣으며[30] 두 번째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플라트코 감독 체제 하에 1941년 또 한 번 우승을 차지한[31] 후, 1944년[32]과 1947년에 우승을 추가했다.[33] 이듬해 산티아고에서 남미 클럽 챔피언십(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전신)을 개최했고,[34] 1947년 대륙 챔피언들이 참가했다. 1945년, 클럽은 역사상 최악의 시즌을 보내며 11위로 최하위에서 두 번째로 낮은 순위를 기록했는데, 약체 Badminton보다 한 단계 위였다.[35]1950년대 초, 클럽 회장 안토니오 라반은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스트라이커 조지 로블레도를 영입하면서 이적료로 25000GBP를 지불했다.[36] 로블레도의 활약에 힘입어 1953년[37]과 1956년에 우승을 차지했다.[38] 그 당시 마쿨에 부지를 매입하여 에스타디오 모뉴멘탈 건설을 시작했다.[39] 부지 매입 외에도 1953년 산티아고 센트로(시엔푸에고스 41번지)에 본사를 설립했다. 이후 10년 동안 1960년[40]과 1963년에 우승을 차지했다.[41] 1963년 팀은 두 가지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루이스 에르난 알바레스는 한 시즌에 37골을 기록[42](콜로-콜로 선수 한 시즌 최다 득점)[42]했고, 클럽은 한 시즌 최다 득점(130골) 기록도 세웠다.[43] 1970년에 10번째 우승을 차지했다.[44]
2. 3. 1973년과 1980년대의 전성기
1972년, 루이스 아라모스(Luis Álamos) 감독[45]의 지휘 아래 카를로스 카세리(Carlos Caszely), 프란시스코 발데스(Francisco Valdés)[46] 등의 선수들이 활약하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47] 이 시즌에 콜로-콜로는 한 시즌 동안 45,929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칠레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48] "콜로콜로 73"으로 불린 이 팀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 진출한 최초의 칠레 팀이 되었지만, 아르헨티나의 인데펜디엔테에게 패했다.[49] 이후 콜로-콜로는 경쟁력과 제도적 위기에 직면하여 1979년까지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50] 1979년 우승 팀에는 카세리가 다시 합류했고, 재능 있는 브라질 미드필더 세베리노 바스콩셀로스(Severino Vasconcelos)가 있었다.[51] 한편, 1975년 에스타디오 모누멘탈(Estadio Monumental) 건설이 완료되어 데포르테스 아비아시온(Deportes Aviación)과의 리그 경기에서 개장했지만, 기반 시설 및 기타 기본 서비스 문제로 인해 무기한 폐쇄되었다.1980년대에는 페드로 가르시아 감독 지휘 아래 1981년과 1983년[52]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아르투로 살라(Arturo Salah) 감독 체제에서 1986년[53]과 1989년[54] 우승을 달성했다. 1987년 알리안사 리마 항공기 추락 사고(Alianza Lima air disaster)로 16명의 선수가 사망했을 때, 콜로-콜로는 페루 팀에 4명의 선수를 임대해주며 가장 먼저 도움을 주었다.[55] 이 시기에 콜로-콜로는 코파 칠레에서도 4번 우승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가장 큰 실망은 대륙 대회 수준이었는데, 1988 코파 리베르타도레스(1988 Copa Libertadores)에서 1차 라운드를 넘지 못했다. 1989년 9월 30일, 페냐롤과의 친선 경기에서 에스타디오 모누멘탈이 재개장되었고, 콜로-콜로는 마르셀로 바르티치오토(Marcelo Barticciotto)와 1970년대 전설적인 수비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레오넬 에레라의 골로 2-1[3] 승리를 거두었다.
2. 4. 국제적인 성공 (1991-1999)
1990년대는 콜로-콜로 역사상 국내외 대회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시기였다. 미르코 요지치 감독의 지휘 아래 콜로-콜로는 1991년 6월 5일, 산티아고의 모누멘탈 경기장에서 올림피아를 3-0으로 꺾고 칠레 구단 최초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차지했다.[58] 이 경기에서 루이스 페레스가 2골, 레오넬 에레라가 1골을 기록했다. 같은 해, 콜로-콜로는 도쿄에서 열린 대륙간컵 결승에서 레드 스타 벨그레이드에게 0-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58]국내 리그에서는 1991년 우승을 차지하며 3연패를 달성, 최초로 '트리캄페오나토'(Tricampeonato)를 이룩했다.[59] 1992년에는 레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크루제이루를 승부차기로 꺾고 우승했고, 코파 인터아메리카나에서는 푸에블라를 3-1로 꺾고 우승했다.[60] 요지치 감독은 1993년 리그 우승을 끝으로 콜로-콜로에서의 성공적인 시대를 마감했다.[60]
이후 구스타보 베니테스 감독이 부임하여 1996년,[61] 1997년,[62] 1998년[63]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96년과 1997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모두 크루제이루에 패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2. 5. 파산과 회복 (1999-현재)
1999년 베니테스 감독이 물러난 후, 클럽은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었다. 2002년 1월 23일, 페테르 드라기체비치 회장 시절 수년간의 경영 부실 끝에[64] 클럽은 파산 선고를 받았다. 사법부는 후안 카를로스 사피에를 클럽의 법적 지위 유지를 위한 책임자로 임명했다.[64] 파산에도 불구하고, 1991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의 주역인 하이메 피사로 감독[65] 지휘 아래, 로스 알보스는 거의 유소년 선수들로 구성된 팀으로 2002 토르네오 데 클라우수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65] 3년 후인 2005년, 합자회사 블랑코 이 네그로[66]가 경영권을 인수하여, 산티아고 증권거래소에서 개시 절차를 통해 모든 부채를 상환하는 대가로 30년간 클럽 자산 전체를 넘겨받았다.[64] 2006년 상반기, 법원은 파산 절차를 끝냈다.[64]
2006년부터 클라우디오 보르히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마티아스 페르난데스와 움베르토 수아소와 같은 선수들이 활약하면서, 콜로-콜로는 아페르투라[67]와 클라우수라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비캄페오나토'(Bicampeonato)를 달성했다.[68] 팀은 코파 수다메리카나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멕시코의 파추카에 2-1로 패했다. 이 시즌에 '엘 카시케'는 IFFHS로부터 세계 월간 최고 클럽으로 인정받았다.[69] 다음 시즌에도 콜로-콜로는 2개의 토너먼트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4연패를 달성한 최초의 칠레 팀이 되어 '테트라캄페오나토'(Tetracampeonato)를 달성했다.[70]
보르히 감독의 퇴임 후, 마르셀로 바르티치오토 감독 지휘 아래 팔레스티노를 꺾고 2008 토르네오 데 클라우수라 결승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28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주득점자인 루카스 바리오스는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루이스 에르난 알바레스와 동률인 37골로 마무리했다.[71] 다음 시즌, 클럽은 최초로 이스터 섬에서 경기를 치른 프로 팀이 되었다.[72] 실망스러운 2009 토르네오 데 아페르투라 시즌 – 최초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 이후 로스 알보스는 클라우수라에서 강등권 근처까지 추락했다. 하지만 팀은 결승전에서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를 만나 산타 라우라에서 4-2로 승리하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에스테반 파레데스, 맥넬리 토레스, 에세키엘 미랄레스 등이 활약했고, 우고 토칼리 감독이 지휘했다.[73] 콜로-콜로의 마지막 우승은 2014년 토르네오 데 클라우수라 우승으로, 30번째 칠레 리그 우승이었다.
콜로-콜로는 초기에 에스타디오 엘 야노에서 경기를 치렀지만, 1928년 1월에 누뇨아 스포츠 경기장으로 이전했다. 1939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는 국립경기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다. 1946년, 클럽은 칠레 카라비네로스로부터 '포르틴 마포초'라고 불리던 경기장을 매입했지만, 보안 문제로 폐쇄되었다. 3만 석 규모의 경기장 건설 계획이 있었으나, 시 조례에 의해 무산되었다. 콜로-콜로는 스타디오 모뉴멘탈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경기장을 매각했다.
콜로-콜로는 칠레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한 클럽으로, 2012년 8월 스페인 신문사 마르카(Marca)의 연구에 따르면 칠레 축구 팬 전체의 약 42%를 차지한다.[79] 이는 2006년 후투로 재단(Fundación Futuro)의 연구 결과(38%)보다 4% 증가한 수치이다.[80]
콜로-콜로의 선수단은 2022년 7월 17일[84]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3. 로고, 유니폼

구단의 로고 중앙에 있는 인물은 칠레 원주민 마푸체족의 전설적인 추장 콜로 콜로이다. 그는 스페인 제국 (1536-1818)과의 아라우호 전쟁에서 싸웠다.[74] 1925년 4월 19일 구단이 창단되었을 때, 창단 멤버 중 한 명인 루이스 콘트레라스가 칠레를 상징하는 인물로써 구단의 로고에 담았다.
콜로콜로의 유니폼은 흰색 상의와 검은색 반바지로 구성되었다. 이 유니폼은 원래 다비드 아레야노의 제안으로 후안 키뇨네스가 디자인했다.
1927년, 아레야노가 레알 우니온 데포르티바(현재 레알 발라돌리드)와의 경기 중 사망한 후, 구단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유니폼 상의에 검은색 가로띠를 추가했다. 이 검은색 가로띠는 현재까지도 유니폼에 남아있다.
원정 유니폼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번 바뀌었다. 1927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녹색이었고, 1975년부터 1988년까지는 빨간색이었다.
4. 경기장
1956년, 클럽 회장 안토니오 라반은 마쿨에 28ha 규모의 부지를 매입했다. 새로운 경기장은 12만 명 수용 규모로 계획되었지만, 공사비 문제와 정부 지원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1960년, 1962년 FIFA 월드컵 개최 성공 후, 콜로-콜로 부지에 5만 2천 석 규모의 경기장 건설이 제안되었으나, 발디비아 대지진과 의회의 의지 부족으로 무산되었다.
1972년과 1973년 콜로-콜로의 활약으로 경기장 건설이 재개되었다. 1975년, 콜로-콜로는 데포르테스 아비아시온과의 경기에서 1대 0으로 승리하며 경기장을 개장했고, 후안 카를로스 오레야나가 첫 골을 기록했다.[75] 그러나, 서비스와 인프라 부족으로 경기장은 폐쇄되었다. 1989년, 우고 루비오의 볼로냐 이적으로 100만달러를 확보하면서 경기장은 재개장되었다. 경기장은 창립자 다비드 아레야노를 기려 '모뉴멘탈 다비드 아레야노'로 명명되었고, 페냐롤과의 경기에서 2대 1로 승리하며 최종 개장했다.[3]
개장 이후, 경기장에서는 1991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92 코파 인터아메리카나 우승 등 여러 리그 우승이 있었다.
모뉴멘탈의 최다 관중 기록은 1992년 칠레 대학교와의 더비 경기로, 약 7만 명이 입장했다.[76] 1993년 8월 레알 마드리드와의 친선 경기에서는 6만 7,543명이 입장했다.[77] 여러 차례 리모델링과 보안 강화로 수용 인원은 4만 7,347명으로 줄었다.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은 1997년부터 이 경기장을 주로 사용해 왔다.[78] 2015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사용되었다.
5. 서포터즈와 라이벌
1960년대 초부터 콜로-콜로는 조직적인 팬 그룹을 가지고 있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가라 블랑카(Garra Blanca)로 발전했다. 이들은 콜로-콜로 경기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만, 특히 더비 경기에서는 에스타디오 모뉴멘탈 다비드 아레야노(Estadio Monumental David Arellano) 주변을 칠레 카라비네로스(Carabineros de Chile)와의 전투장으로 만들 정도로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2000년에는 이 그룹이 바라 브라바(Barra brava)로 선포되기도 했다.
콜로-콜로의 전통적인 라이벌은 칠레 대학교이며, 이 팀과의 경기는 칠레 수페르클라시코라고 불린다. 두 클럽 간의 첫 대결은 1935년이었지만, 라이벌 관계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1959년 11월 11일, 칠레 대학교가 콜로-콜로를 2-1로 이긴 경기는 두 팀 간의 갈등을 심화시킨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 승리는 칠레 대학교가 콜로-콜로를 상대로 거둔 일련의 좋은 결과 중 첫 번째였으며, 칠레 대학교의 국내 선수권 대회 우세와 맞물려 라이벌 관계를 더욱 격화시켰다. 최근에는 콜로-콜로가 칠레 대학교보다 우세해지면서, 이 라이벌 관계는 "세계에서 가장 불균형적인 라이벌 관계"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콜로-콜로는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Club Deportivo Universidad Católica)와 "클라시코 알보-크루사도(Clásico Albo-Cruzado)"라는 라이벌 관계를, 데포르테스 마갈라네스(Deportes Magallanes)와는 "클라시코 데 라 칠레니다(Clásico de la Chilenidad)"라는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다.
6. 선수단
역대 주요 선수콜로-콜로는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উল্লেখযোগ্য 선수들을 배출했다. 포지션별 주요 선수는 다음과 같다.
'''GK'''
'''DF'''
'''MF'''
'''FW'''6. 1. 현역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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