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니오 나카무라
1. 개요
쿠니오 나카무라는 1943년 팔라우에서 태어나, 1993년부터 2001년까지 팔라우의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그는 팔라우의 독립과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1994년 팔라우의 독립과 국제 연합 가입을 이끌었다. 또한 미국과의 자유 연합 협약을 체결하고, 인프라 정비, 부채 해결, 일본과의 외교 관계 강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1980년 팔라우 상원에 당선되었으며,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부통령을 지냈다.
| 본명 | 나카무라 쿠니오 |
|---|---|
| 출생 | 1943년 11월 24일 |
| 출생지 | 팔라우, 펠렐리우 |
| 사망 | 2020년 10월 14일 |
| 사망지 | 팔라우, 코로르 |
| 배우자 | 엘롱 나카무라 |
| 소속 정당 | (정보 없음) |
|---|---|
| 대통령 재임 기간 | 1993년 1월 1일 – 2001년 1월 1일 |
| 대통령 직전 직책 | 응에라켈 에티피손 |
| 대통령 승계자 | 토미 레멩게사우 |
| 부통령 재임 기간 | 1989년 1월 1일 – 1993년 1월 1일 |
| 부통령 직전 직책 | 토머스 레멩게사우 시니어 |
| 부통령 승계자 | 토미 레멩게사우 |
| 법무부 장관 재임 기간 | 1992년 – 1993년 1월 1일 |
| 법무부 장관 직전 직책 | 응에라켈 에티피손(공석 겸임) |
| 법무부 장관 승계자 | 살바도르 잉게레클리 |
| 행정부 장관 재임 기간 | 1989년 1월 – 1992년 |
| 행정부 장관 직전 직책 | 프란츠 렉시드 |
| 행정부 장관 승계자 | 산드라 피에란토치 |
| 존칭 | 각하 |
|---|---|
| 일본어 표기 | 나카무라 쿠니오 (中村 國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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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팔라우인 -
하루오 레멜리크
하루오 레멜리크는 팔라우의 초대 대통령으로, 독립에 기여하고 미국과의 자유 연합 협정을 추진했으나, 발전소 건설 계약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중 암살당했다. -
코로르주 출신 -
토머스 레멩게사우 주니어
토머스 레멩게사우 주니어는 팔라우의 정치인으로 대통령을 두 차례 역임하며 환경 보호와 기후 변화 대응에 힘썼고 팔라우의 지속 가능한 개발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
팔라우의 부통령 -
토머스 레멩게사우 주니어
토머스 레멩게사우 주니어는 팔라우의 정치인으로 대통령을 두 차례 역임하며 환경 보호와 기후 변화 대응에 힘썼고 팔라우의 지속 가능한 개발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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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오 나카무라(Kunio Nakamura영어, 1943년 11월 24일 ~ 2020년 10월 14일)는 팔라우의 정치인으로, 1993년부터 2001년까지 팔라우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나카무라는 일본 제국 남양 제도(당시 남양청 관할 하의 일본 위임 통치령)의 중심 도시인 코로르(팔라우 공화국의 구 수도)에서 펠렐리우 족장의 딸 아릴 베톡과 미에현 이세시 오미나토 정 출신의 선박 건조 기술자인 나카무라 젠시치 사이에서 8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로는 둘째 형 다이지로(전 팔라우 의원, 2006~2009년 주일 대사), 셋째 형 토시오(팔라우 입법 의회 의장, 헌법 비핵 조항 주도), 넷째 형 마모루(팔라우 최고 법원 초대 판사장)가 있었다.
나카무라는 전쟁 중 펠렐리우에서 팔라우 본섬 아이멜리키의 에우레이 마을로 강제 이주되었고, 2살 때 일본의 패전으로 팔라우는 미국의 신탁 통치령인 「태평양 제도 신탁 통치령」이 되었다.
나카무라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식량 부족과 차별로 인해 팔라우로 돌아왔다. 팔라우는 모계 사회이므로, 아이들의 귀향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젠시치의 팔라우 거주 허가를 얻기 위해 가족은 어려움을 겪었다(1955년에 영주 허가가 나왔다). 구니오는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펠렐리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침례 교회 목사의 집에 기숙하며 괌의 타몬 고등학교(현재의 존 F. 케네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하와이 대학교에 진학했다. 섬으로 돌아온 후에는 교사가 되었다.
3. 정치 경력
쿠니오 나카무라는 28세에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미크로네시아 의회에 선출된 최연소 인물이 되었다. 1967년 미크로네시아 의회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팔라우 정계의 거물 로만 메추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이후 유엔 신탁 통치령의 경제 어드바이저와 야프 지구의 경제 개발 직원을 역임했다. 1970년, 아이메리크의 유력 부족의 딸과 결혼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1978년 헌법 제정 회의에 형 토시오와 함께 참여(쿠니오는 코로르 주, 토시오는 펠렐리우 주 선출)하여 비핵 조항을 포함한 헌법 제정에 기여했다. 1980년 팔라우 상원에 당선되었으며, 1981년 팔라우 자치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89년 1월부터 1993년 1월까지 부통령을 역임했으며, 1989년부터 1992년까지 행정부 장관을 겸임했다. 응이라트켈 에티슨 대통령이 다른 내각 구성원을 임명하면서 나카무라는 법무부 장관을 추가로 맡게 되었다.
1992년 선거에서 처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재선을 노리던 응이라트켈 에티슨과 경쟁자 존슨 토리비옹을 꺾고 당선되었으며, 결선 투표에서 토리비옹을 꺾었다. 1996년 선거에서 이베둘 유타카 기번스를 64%-36%의 격차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2000년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부통령 토미 렘게세사우를 지지했고, 렘게세사우는 상원의원 피터 수기야마를 53%-47%의 격차로 꺾고 승리했다.
일본과의 외교·무역 관계를 매우 중시하여 여러 번 방일하여 양국 관계 발전에 힘썼으며, 2001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퇴임 후에도 방일을 반복하여 와세다 대학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국가원수로는 유일하게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지지자였으나, 현재는 삭제되었다. 새역모는 창설 초기에 본인의 동의 없이 지지자 명을 올린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한편 나카무라의 대리인 자격의 인물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3.1. 팔라우 독립과 비핵 헌법
1981년 팔라우의 독립을 위한 첫걸음으로 자치 정부와 헌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헌법 조항 중 비핵 조항이 문제가 되어 1992년 주민 투표에 의해 삭제되게 되었다. 1982년 미국과 체결된 50년간의 자유 연합 협약(Compact)은 1983년 이후 일곱 차례의 주민 투표에서 75% 이상의 찬성표를 얻지 못해 승인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대통령 암살과 자살, 파업 및 폭파 사건 등 정정 불안이 계속되었다. 쿠니오 나카무라는 지속적으로 독립을 주장했고, 1993년 대통령에 취임하여 자유 연합 협약 조건을 협상했다. 결국 1992년 헌법의 비핵 조항이 "미국과의 자유 연합 협약에 관한 부분만 주민 투표에서 50% 이상의 승인"으로 수정되었다. 그 결과, 미국과의 자유 연합 협약이 주민 투표에서 승인되었다. 1994년 팔라우는 독립과 국제 연합 가입을 달성했다.
3.2. 대통령 재임 기간 업적
나카무라는 자유 연합 협약에 따른 경제 원조와 여러 외국으로부터의 정부 개발 원조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인프라 정비에 착수했다. 컴팩트 로드 건설과 헌법에 명기되어 있던 바벨다오브 섬으로의 천도 사업도 이때 시작되었다. 또한 팔라우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던 IPSECO사에 대한 부채도 20로 깎는 데 성공하여, 5년에 걸쳐 완제했다. 이 덕분에 팔라우의 국내 총생산은 2배 가까이 상승했고, 세수도 두 배로 증가했다.
4. 일본과의 관계
나카무라는 미국을 제외하고 일본과의 외교, 무역 관계를 매우 중시하여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 양국 관계 발전에 힘썼다. 퇴임 후에도 와세다 대학교 등에서 강연하며 일본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지지자로 이름이 올랐으나, 이는 본인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비판받았다. 한편 나카무라의 대리인 자격의 인물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