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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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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양청은 1922년 일본이 국제 연맹으로부터 위임 통치권을 얻어 설치한 태평양의 군도 행정 기구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령이었던 남양 군도를 일본이 위임 통치하게 되면서 설치되었으며, 사이판, 팔라우, 야프, 트루크, 폰페이, 잘루이트 등 6개 지청으로 시작하여 행정 구역 개편을 거쳐 3개 지청 체제로 운영되었다. 남양청은 일본의 지배 하에 교육, 의료,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식 행정을 펼쳤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의 점령으로 1945년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하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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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청
일반 정보
남양청 청사
정식 명칭남양청
공용어 명칭남양청 (구자체)
국가일본
위치남양 군도 코롤
정치
수장 직책장관
초대 장관데즈카 도시로
마지막 장관호소카와 시로시로
하위 조직 1내부 부국 1943년 기준
하위 조직 개요 1장관관방, 내정부, 경제부, 교통부
하위 조직 2시설 등 기관
하위 조직 개요 2동부지청, 북부지청, 서부지청, 법원 (재판소), 기상관측소
역사
설치일1922년
이전 명칭임시 남양 군도 방비대
기타

2. 역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식민지였던 남양 군도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국제 연맹에 의해 일본에 위임 통치되었다. 국제 연맹은 1920년 1월에 만들어졌으며 상임 이사국이었던 일본에게 남양 군도를 C식 위임 통치하는 것을 승인했다.[1]

C식 위임 통치는 위임 통치를 맡은 국가가 해당 지역을 자국 영토의 일부처럼 취급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원주민 통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약정을 따를 의무가 있었다.[1]


  • 지역 주민의 복지를 위한 행정을 해야 할 의무 (제2조)
  • 노예 매매와 강제 노동 금지 (제3조)
  • 원주민에게 술을 팔 수 없음 (제3조)
  • 원주민에 대한 군사 훈련 금지 (제4조)
  • 군사 기지 설치 금지 (제4조)
  • 종교의 자유 및 국제 연맹 회원국 성직자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제5조)
  • 매년, 통치에 관한 연례 보고서를 국제 연맹에 제출해야 할 의무 (제6조)


이러한 조항들은 원주민에게 위임 통치국의 국적을 부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위임 통치국의 완전한 병합을 어느 정도 막았다.[1] 그 때문에 일본인을 위한 학교와 원주민을 위한 학교가 따로 만들어지는 등 이중적인 제도가 존재하게 되었다.[1]

1922년 3월, 일본 정부는 총리부 산하에 "남양청"을 설치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임시 남양 군도 방비대(해군)가 점령 통치하던 것을 넘겨받았다.[1] 1942년에는 대동아성으로 재편되면서 대동아성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었다.

1933년 일본이 국제 연맹을 탈퇴하면서 위임 통치의 근거가 약해졌지만, 일본은 베르사유 조약에서의 비준 사항임을 이유로 계속 위임 통치를 했다.[1]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실효된 1936년 이후에는 각 섬을 군사 기지화, 요새화했다.[1]

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대동아성은 해체되었고, 남양청은 외무성으로 이관되었다.[11] 이후 남양청은 잔무 정리 사무소가 되어 1948년 3월까지 잔무 정리를 하고 소멸했다.[11]

2. 1. 제1차 세계 대전과 일본의 위임 통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20년 1월에 국제 연맹이 만들어졌다. 국제 연맹은 상임 이사국이었던 일본이 이전까지 독일식민지였던 남양 군도를 C식 위임 통치하는 것을 승인했다.[1]

C식 위임 통치는 위임 통치를 맡은 국가가 해당 지역을 자국 영토의 일부처럼 취급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원주민 통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약정을 따를 의무가 있었다.[1]

  • 지역 주민의 복지를 위한 행정을 해야 할 의무 (제2조)
  • 노예 매매와 강제 노동 금지 (제3조)
  • 원주민에게 술을 팔 수 없음 (제3조)
  • 원주민에 대한 군사 훈련 금지 (제4조)
  • 군사 기지 설치 금지 (제4조)
  • 종교의 자유 및 국제 연맹 회원국 성직자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제5조)
  • 매년, 통치에 관한 연례 보고서를 국제 연맹에 제출해야 할 의무 (제6조)


이러한 조항들은 원주민에게 위임 통치국의 국적을 부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위임 통치국의 완전한 병합을 어느 정도 막았다.[1] 그 때문에 일본인을 위한 학교와 원주민을 위한 학교가 따로 만들어지는 등 이중적인 제도가 존재하게 되었다.[1]

1922년 3월, 일본 정부는 총리부 산하에 "남양청"을 설치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임시 남양 군도 방비대(해군)가 점령 통치하던 것을 넘겨받았다.[1] 남양청은 1924년에 외무성으로, 1929년에는 척무성으로 이관되어 감독을 받았다.[1]

남양 군도는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령이었기 때문에, 남양청은 일본 법령 외에도 국제 연맹 이사회가 제정한 "위임 통치 조항"을 따라야 했다.[1]

1933년, 일본이 국제 연맹을 탈퇴하면서 위임 통치의 근거가 약해졌지만, 일본은 베르사유 조약에서의 비준 사항임을 이유로 계속 위임 통치를 했다.[1] 한편으로는 국제 연맹 탈퇴로 "위임 통치 조항"이 무효라는 견해를 보이며,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실효된 1936년 이후에는 각 섬을 군사 기지화, 요새화했다.[1] 국제 연맹에 대한 통치 보고는 1938년까지 이루어졌다.[1]

2. 2. 남양청 설치와 통치

1922년 3월 일본 정부는 총리부 산하에 "남양청"을 설치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임시 남양 군도 방비대(해군)로부터 시정을 이어받았다. 초대 장관은 테즈카 토시로였다. 1924년 남양청은 외무성으로 이관되었고, 1929년 척무성 발족 후에는 척무성의 감독을 받았다. 일반 행정은 척무 대신, 우편, 사법, 관세 등은 소관 대신의 감독을 받았다.

설립 당시 남양청에는 6개 지청이 설치되었다.

지청관할 구역
사이판 지청북마리아나 제도(사이판섬, 티니언섬, 로타섬)
팔라우 지청팔라우(바벨다오브섬, 코로르섬, 앙가우르섬)
야프 지청야프섬
트루크 지청추크 제도
포나페 지청폰페이섬, 코스라에섬
잴루잇 지청마셜 제도(잴루잇 환초)



1943년에는 3개 지청으로 개편되었다.

지청관할 구역
북부 지청북마리아나 제도(옛 사이판 지청)
동부 지청추크 제도, 폰페이섬, 코스라에섬, 마셜 제도(옛 트루크 지청, 포나페 지청, 잴루잇 지청)
서부 지청팔라우, 야프섬(옛 팔라우 지청, 야프 지청)



국제 연맹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이전까지 독일식민지였던 남양 군도를 C식 위임통치령으로 지정하여 일본에 위임했다. 미국은 반대했지만, 국제 연맹 이사회는 1920년 12월 17일 이를 재승인했고, 미국도 동의했다. C식 통치는 수임국이 위임 통치령을 자국 일부로 취급할 수 있지만, 원주민 통치에 대한 약정에 따를 의무가 있었다.[1]

; 위임 통치 조항의 내용[1]


  • 지역 주민의 복지를 위한 시정을 행할 의무 (제2조)
  • 노예 매매・강제 노동의 금지 (제3조)
  • 토착민에 대한 주류 공급의 금지 (제3조)
  • 토착민에 대한 군사 훈련의 금지 (제4조)
  • 군사 기지 설치의 금지 (제4조)
  • 신앙의 자유 및 국제 연맹 가맹 국민에 의한 성직자의 행동의 자유 (제5조)
  • 매년, 시정 연보를 국제 연맹에 제출할 의무 (제6조)


주민에게 수임국의 국적을 부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일본인 대상 학교와 원주민 대상 학교가 나뉘는 등 이중 제도가 존재했다.

1933년 일본이 국제 연맹을 탈퇴하면서 위임 통치의 근거가 희박해졌지만, 일본은 베르사유 조약 비준 사항임을 핑계로 통치를 계속했다. 국제 연맹 탈퇴로 "위임 통치 조항"은 무효라는 견해를 보이며,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실효된 1936년 이후 각 섬의 기지화, 요새화를 추진했다. 국제 연맹에 대한 통치 연차 보고는 1938년까지 이루어졌다.

대동아 전쟁 중인 1942년, 척무성이 대동아성으로 재편되면서 남양청은 대동아성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었다. 1943년 무렵부터 전황이 악화되어 일본인의 귀환이 시작되었고, 6개 지청이 3개 지청(트럭, 팔라우, 사이판)으로 간소화되었다.

1944년 콰잘린 전투, 에니웨토크 전투, 트럭 섬 공습, 팔라우 대공습 등으로 남양청 산하 각 섬은 격전지가 되었다. 본청이 있던 코로르섬 시가는 폭격으로 7할 정도 소실되었다. 같은 해 4월, 군인을 남양청 직원으로 특별 임용하고 남양청 직원을 군속으로 전환, 본청을 바벨다오브섬 정글 내로 이전하면서 남양청은 기능 정지했다.

1945년 종전 후 대동아성은 해체되고 남양청은 외무성으로 이관되었다. 종전 직후 팔라우 제도 등에서 관청 업무 기능을 회복, 일본인과 오키나와인의 귀환을 돕고 군대 철수부터 미국 주도 시정으로의 공백기 행정을 보충했다.

1946년 남양청 장관은 팔라우를 철수했고, 남양청 도쿄 출장소가 남양청 잔무 정리 사무소가 되어 1948년 3월까지 잔무 정리를 하고 소멸했다.

2. 3. 태평양 전쟁과 남양 군도

1933년 만주국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이 국제 연맹을 탈퇴하자, 위임 통치의 근거가 희박해졌다. 같은 해 3월 16일 "제국의 국제 연맹 탈퇴 후의 남양 위임 통치의 귀추에 관한 제국 정부의 방침 결정의 건"을 각의 결정하여, 위임 통치는 베르사유 조약에서의 비준 사항임을 핑계로 계속 위임 통치를 했다. 한편으로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는 것으로 "위임 통치 조항"은 무효라는 견해를 보였고,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실효된 1936년 이후에는 제4조에 반하여 다가올 대미 전쟁을 위해 각 섬의 기지화, 요새화를 추진해 나갔다. 국제 연맹에 대한 통치에 관한 연차 보고는 1938년까지 이루어졌다.

대동아 전쟁 중인 1942년, 외지가 광대해짐에 따라 척무성은 대동아성으로 재편되었고, 남양청은 대동아성의 지휘 감독하에 놓이게 되었다. 1943년 무렵부터 남방의 전황이 악화되어 일본인의 내지 귀환이 시작됨과 함께 종래의 6지청에서 3지청(트럭, 팔라우, 사이판)으로 간소화되었다.

1944년 2월에 마셜 제도에서 콰잘린 전투, 에니웨토크 전투 및 트럭 섬 공습이 발생했고, 남양청 산하의 각 섬은 격전지가 되었다. 3월에는 팔라우 대공습이 있었고, 본청이 위치했던 코롤 섬의 시가는 항공모함 탑재기에 의한 폭격으로 7할 정도 소실되었다. 같은 해 4월 14일 각의 결정 "남양 군도 전시 비상 조치 요강"에 따라 군인을 남양청 직원으로 특별 임용함과 동시에 남양청 직원은 군속이 되었으며, 코롤 섬 인접 섬이자 팔라우 제도에서 가장 큰 바벨다오브 섬의 정글 내로 퇴피한다. 이 시점에서 남양청은 기능이 정지되었다.

2. 4. 종전과 신탁 통치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과 함께 대동아성은 해체되었고, 남양청은 외무성으로 이관되었다.[11] 종전 직후 팔라우 제도 등에서는 남양청 또는 서부 지청으로서 관청 업무 기능을 회복, 바벨다오브 섬 내에 몇 곳의 출장소를 설치하여 식량 생산 등의 내정을 하면서 재류 일본인과 오키나와인의 귀환을 도왔다. 또한 군대 철수부터 미국 주도의 시정으로의 공백기 행정을 보충했다.[11]

1946년 2월 26일, 남양청 장관은 팔라우를 철수했다.[11] 이후 남양청 도쿄 출장소가 남양청 잔무 정리 사무소가 되어 1948년 3월까지 잔무 정리를 했으며,[11] 이를 끝으로 남양청은 소멸했다.[11]

3. 행정

설립 당시에는 사이판, 팔라우 제도, 야프, 트루크, 포나페, 잴루잇에 6개 지청이 설치되었다.[2]

지청명관할 구역
사이판 지청북마리아나 제도(사이판섬, 티니언섬, 로타섬)
팔라우 지청팔라우(바벨다오브섬, 코로르섬, 앙가우르섬)
야프 지청야프섬
트루크 지청추크 제도
포나페 지청폰페이섬, 코스라에섬
잴루잇 지청마셜 제도(잴루잇 환초)



1943년에는 3개 지청으로 개편되었다. 북부 지청은 옛 사이판 지청, 동부 지청은 옛 트루크 지청, 포나페 지청, 잴루잇 지청, 서부 지청은 옛 팔라우 지청, 야프 지청을 각각 관할했다.

3. 1. 중앙 행정 조직

남양청 발족 당시에는 장관 관방, 내무부, 재무부, 척식부가 설치되었다.[1] 각 부서의 하부 조직은 다음과 같다.

부서하부 조직
장관 관방비서과, 문서과, 고사과
내무부지방과, 경무과
재무부예산과, 회계과, 토목과, 작업소
척식부산업과, 토지조사과, 통신과



1924년에는 행정 및 재정 정리를 위해 부제를 폐지하고 조직을 대폭 간소화했다.


  • 장관 관방, 총무과, 척식과, 경무과, 통신과


이후 총무과를 서무과와 재무과로 분할했다.

1936년에는 부제가 부활했다.

부서하부 조직
장관 관방비서과, 문서과, 조사과 (1937년 신설)
내무부지방과, 재무과, 경무과, 토목과, 세무과 (1938년 신설)
척식부척식과 (1937년부터 상공과와 농림과), 수산과, 교통과 (1937년부터 교통과와 체신과)



1942년에는 교통부를 신설했다.

부서하부 조직
장관 관방비서과, 문서과
내무부기획과, 지방과, 재무과, 세무과, 경무과
척식부총무과, 농림과, 상공과, 수산과
교통부교통과, 체신과, 토목과



1943년에는 조직을 간소화했다.

부서하부 조직
장관 관방
내정부행정과, 재정과, 경무과
경제부기획과, 상공수산과, 농림과
교통부교통과, 체신과, 토목과


3. 2. 지방 행정 조직

설립 당시에는 6개 지청이 설치되었다.[2]

지청명관할 구역
사이판 지청사이판섬, 티니언섬, 로타섬
팔라우 지청바벨다오브섬, 코로르섬, 앙가우르섬
야프 지청야프섬
트루크 지청추크 제도
포나페 지청폰페이섬, 코스라에섬
잴루잇 지청마셜 제도(잴루잇 환초)



1943년 11월 5일, 기존의 6개 지청은 3개 지청으로 통합되었고, 5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각 지청에는 총무과, 경제과, 경무과가 설치되었다.

지청명관할 구역출장소
북부 지청사이판섬, 로타섬, 티니언섬 (옛 사이판 지청)테니안 출장소, 로타 출장소
동부 지청추크 제도, 폰페이섬, 코스라에섬, 마셜 제도 (옛 트루크 지청, 포나페 지청, 잴루잇 지청)포나페 출장소, 잴루잇 출장소 (1943년 폐지)
서부 지청팔라우, 야프섬 (옛 팔라우 지청, 야프 지청)야프 출장소


3. 3. 사법 제도

남양청에는 제1심 법원인 지방법원과 제2심 법원인 고등법원의 2심 제도가 있었다.[3] 고등법원은 코롤섬에 설치되었고, 팔라우, 사이판, 폰페에 각각 지방법원이 설치되었다. 각 법원에는 검사국이 부속되었다.

3. 4. 기상 관측


  • - 1922년 10월, 코롤 섬에 남양청 관측소가 설치되었다. 일반 기상 관측 외에 상층 기류 관측, 해양 기상 관측, 지자기 관측, 지진 관측이 이루어졌다.


1927년에는 사이판과 포나페에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34년에는 트루크, 1935년에는 잘루이트, 1936년에는 야프에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38년 남양청 기상대 관제(쇼와 13년 칙령 제504호)가 공포되어 남양청 기상대로서 남양청 본청에서 독립되었다. 토코페, 야프, 오레아이, 사이판, 포나페, 잘루트, 에니우에탁, 로타, 모우그, 쿠츠루, 엔더비, 핑겔라프에 측후소가 설치되었다.

4. 역대 남양청 장관

역대 남양청 장관
성명재임 기간전직퇴관 후 직위
1데즈카 토시로1922년 4월 1일 ~ 1923년 4월 4일임시 남양군도 방비대 민정부장휴직 후 사직
2요코타 쿄스케1923년 4월 4일 ~ 1931년 10월 11일상훈국 서기관재직 중 사망[4]
3호리구치 만정1931년 10월 12일 ~ 11월 21일남양청 서기관·서무과장사직
4다하라 화남1931년 11월 21일 ~ 1932년 2월 5일척무성 식산국장사직
5송전정지1932년 2월 5일 ~ 1933년 8월 4일전 척무 서기관조선총독부 전매국장
6림수부1933년 8월 4일 ~ 1936년 9월 19일관동청 경무국장사직
7북도겸차랑1936년 9월 19일 ~ 1940년 4월 9일척무성 식산국장사직
8근등준개1940년 4월 9일 ~ 1943년 11월 5일구마모토현 지사사직
9세선무자랑1943년 11월 5일 ~ 1946년 3월 12일해군 중장·군령부 출사사직 후 공직 추방


5. 경제

남양청의 재정은 남양청 특별회계법(다이쇼 11년 법률 제25호)에 따라 예산을 집행했다.

임시 남양군도 방비대 시절부터 세입의 대부분을 정부 보조금에 의존했지만[42], 남양흥발의 사업 확대(주로 마리아나 제도의 제당 사업, 세수원은 출항세)로 인해, 남양흥발의 납세액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여(남양청 세수의 약 60%를 차지) 1932년(쇼와 7년)에는 보조금 의존에서 벗어나 재정적 자립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는 대만총독부 다음으로 재정 흑자화를 실현한 것이며, 남양청 설립 10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 내에 이룩한 성과였다.

6. 사회

남양청 통치 시기에는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있었다. 특히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두드러진 발전이 이루어졌다.

남양에서 학도 (1939년)


트루크 섬의 일본인 초등학생 (1930년경)


트럭 섬의 공학교(1930년경)


목공자제양성소

6. 1. 교육



남양청에서는 일본인과 원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기관에 차이를 두었다. 일본인 학생들을 위해서는 중학교, 고등여학교, 실업학교를 설치하고, 원주민 학생들을 위해서는 공학교와 목공자제양성소를 운영하였다.

일본인 남학생은 수료 연한 5년의 남양청립 팔라우 중학교(1942년 설치)[45]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일본인 여학생은 수료 연한 4년의 사이판 고등여학교(1939년 설치)와 팔라우 고등여학교(1941년 설치)에 진학하였다. 사이판 고등여학교는 남양사 주지 아오야기 간코가 개교한 남양가정여학교를 전신으로 하며[46][47], 교장은 모토노 히사코였다.[48]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되었고 1976년에 호텔이 세워졌지만, 부지 내에 절의 문주가 남아 있다.[46]

사이판에는 수업 연한 3년의 실업학교(1933년 설립)도 있었는데, 농업과와 상업과가 설치되었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치한 소학교는 1941년부터 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1922년에 설치된 학교는 다음과 같다.

지청학교
팔라우 지청팔라우 제1, 팔라우 제2 (1940년 설치), 앙가울 (1936년 설치), 시미즈 (구칭 가르독, 1936년 설치, 1939년 개칭), 미즈호 (구칭 아이라이, 1937년 설치, 1939년 개칭), 아사히 (구칭 가르미스칸, 1937년 설치, 1939년 개칭), 펠릴류 (1938년 설치), 가라스마오 (1940년 설치), 야마토 (1940년 설치), 마르쿄크 (1941년 설치), 가스판 (1941년 설치)
사이판 지청사이판 제1, 사이판 제2 (1940년 설치), 마탄샤 (구칭 타나파코, 1939년 개칭), 애슬리트 (구칭 라우라우, 1924년 설치, 1931년 개칭), 찻차 (1929년 설치), 차란카노아 (1932년 설치), 타로호호 (1941년 설치), 파간 (1941년 설치), 테니안 (1929년 설치), 카히 (1930년 설치), 말포 (1930년 설치), 하고이 (구칭 츄로, 1934년 설치, 1941년 개칭), 로타 (1933년 설치), 타르가 (1936년 설치), 시나파르 (1937년 설치)
트루크 지청트루크 (구칭 남양군도 제1심상소학교, 1919년 설치), 수요일 (1939년 설치), 아키시마 (1941년 설치)
포나페 지청포나페(1926년 설치), 마타라니움 (1936년 설치), 춘래 (구칭 파르키르, 1933년 설치, 1939년 개칭)
잘루이트 지청잘루이트 (1936년 설치)
야프 지청야프 (1926년 설치)


  • 타나파코와 라우라우는 1928년까지 사이판 심상고등소학교의 분교였다.
  • 카히와 말포는 1932년까지 테니안 심상고등소학교의 분교였다.
  • 파르키르는 1936년까지 포나페 심상소학교의 분교였다.


섬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학교는 본과(3년)와 보습과(2년)를 설치했으며, 1922년에 설치되었다. 본과는 의무 교육 과정으로 8세 전후에 입학했고, 주요 교사는 기본적으로 일본인이었다. 본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은 보습과로 진학했는데, 비율은 본과 과정 수료자의 30~50% 정도였다. 본과에서는 남양청 공학교 규칙에 따라 남양청이 발행한 교과서 "남양군도 국어 독본"을 사용하여 국어 교육에 힘쓰면서 학교 교육을 실시했다.

지청학교
팔라우 지청코로르, 마르키오크, 가랄드, 펠릴루, 앙가울
야프 지청야프, 니프, 마키(1926년 설치)
사이판 지청사이판, 로타
트럭 지청나쓰시마, 수요일 섬, 춘도(1927년 설치), 동도(1928년 설치), 월요일 섬(1930년 설치), 모트록(1931년 설치), 추도(1937년 설치)
포나페 지청콜로니, 쿠사이, 키치, 마타라니움, 우(1926년 설치)
자루에트 지청지야보르, 우오츠지에, 콰잘린(1934년 설치), 에본(1938년 설치)


  • 보습과는 코로르, 야프, 사이판, 나쓰시마, 콜로니, 지야보르 각 공학교에만 설치되었다.


1926년에는 코로르에 도민을 대상으로 하는 목공자제양성소가 개소되었다. 보습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은 목공자제양성소에 진학했다. 남양군도 전역에서 17~23세 정도의 우수한 학생(대부분 팔라우인)을 모아 제복과 약간의 용돈을 지급하며 건축과 일본어 교육을 실시했다.

독일 식민지 시절에는 현지 주민에 대한 고등 교육이 소홀히 취급되었으나, 남양청 통치 시기에는 도민 공원 양성소를 통해 대장장이, 자동차 기계공, 전기공 등도 양성했다. 이는 현재의 팔라우 지역 단기 대학의 전신이기도 하다.

유치원의 경우, 다음과 같은 시설들이 있었다.

  • 팔라우 지청 - 팔라우 유치원(1928년 개원, 1937년 9월 코로르 정립으로 이관), 쌍엽 유치원(도민 유아 대상, 1938년에는 폐원 상태)
  • 사이판 지청 - 채범(1931년 설치), 사이판 제당소 부속(1931년 설치), 테니안(1933년 설치)
  • 야프 지청 - 야프(1932년 설치)
  • 트루크 지청 - 트루크(1936년 인가)
  • 폰페이 지청 - 폰페이(1937년 설치)

6. 2. 의료

1922년(다이쇼 11년) 남양청 발족과 동시에 7곳에 남양청 병원이 설치되어, 의장, 의관, 의원, 약제원, 간호사 및 산파가 배치되어 현지인과 일본인의 진료를 담당했다. 1939년 시점에서 각 병원별 의사 수는 다음과 같다.[1]

1939년 병원별 의사 수
병원명의사 수
사이판 병원5명
팔라우 병원6명
야프 병원2명
트루크 병원3명
포나페 병원3명
야루이토 병원3명
앙가우르 병원2명



또한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독일의 식민지 하에서 소홀히 여겨졌던 남양 제도의 역학 조사 및 지방병 조사 연구 등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남양청 경무과는 독자적으로 "남양 군도 지방병 조사 의학 논문집"(제1-5집)을 1933-1939년 사이에 간행했으며, 오카야 노보루, 나가사키 쿄조, 후지이 타모츠 및 각 섬 병원에 파견 근무했던 사메지마 무네오 의학 박사 등이 광의의 미크로네시아인, 협의의 마셜인 등 각 도서 지역 원주민에 대한 의학적, 역학적, 인류학적인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1] 이 연구는 해군 생체 해부 사건(트루크 섬 해군 제4병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7. 연표


: 독일의 식민지 포기(제118조)와 포기된 식민지를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로 하는 것(제22조) 등을 규정. 일본은 1919년 11월 7일 비준, 1920년 1월 10일 공포.

  • 1920년 12월 17일 - 「태평양 중 적도 이북에 위치하는 독일국 속지에 대한 위임 통치 조항」을 작성.

: 위임 통치의 형식은 C식으로, 남양 군도(내남양)는 일본의 영토의 구성 부분이 됨. 단, 영토적 야심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했다는 의혹에 배려하여, 조항에는 "일본 제국의 구성 부분"으로 기재(섬 주민에게는 일본 국적이 부여되지 않았다).

  • 1922년
  • * 2월 11일 - 「'야프' 섬 및 기타 적도 이북의 태평양 위임 통치 제도를 관한 미일 조약」에 조인.

: 국제 연맹에 가맹하지 않았던 미국이 위임 통치 지역에 대해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각 위임 통치국이 개별적으로 미국과 협정하도록 국제 연맹 이사회가 결정한 것에 의한 조치. 이 조약에 의해, 위임 통치가 가능하게 됨. 일본은 1922년 6월 23일 비준, 7월 13일 공포.

  • * 3월 30일 - 「남양청 관제」([49]) 제정. 남양청의 사무 분장에 대해 규정.
  • * 4월 1일 - 「남양청 관제」 시행. 남양 군도에 남양청을 설치.

: 사이판, 팔라우, 야프, 트루크, 폰페이, 잘루이트의 6개 지청을 설치.

  • 1929년 6월 8일 - 내무성의 설치에 따라, 남양청은 내무 대신의 지휘 감독 하에 놓임.
  • 1933년 5월 10일 - 테니안 섬에 사이판 지청 테니안 출장소가 설치.
  • 1937년 8월 4일 - 로타 섬에 사이판 지청 로타 출장소가 설치.
  • 1942년 11월 1일 - 대동아성의 설치에 따라, 남양청은 대동아 대신의 지휘 감독 하에 놓임.
  • 1943년 11월 4일 - 6개 지청을 폐지하고, 동부(트루크)·서부(팔라우)·북부(사이판)의 3개 지청으로 통합.
  • 1944년-1945년 - 남양 군도의 각지가 미군에 점령되어, 미군의 군정 하에 놓임.

: 남양청이 있는 코로르 섬(팔라우 제도)은 종전까지 점령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양청은 잔존.

  • 1945년 8월 14일 - 포츠담 선언 수락에 따라, 일본은 남양 군도의 영유권을 포기.
  • 1947년 7월 -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남양 군도는 미국의 신탁 통치령에 놓임.
  • 1952년 4월 28일 - 「일본국과의 평화 조약」(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발효에 따라, "남양청 관제" 효력 상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3-09-23
[5]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3-09-23
[6] 간행물 官報 1932年02月16日 https://doi.org/10.1[...] 日本マイクロ写真 1932-02-16
[7]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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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간행물 官報 1944年05月24日 https://doi.org/10.1[...] 日本マイクロ写真 1944-05-24
[41] 간행물 官報 1944年05月22日 https://doi.org/10.1[...] 日本マイクロ写真 1944-05-22
[42] 문서 大正11年([[1922年]])度予算の歳入650万円の内、政府からの補助金は520万円に達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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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문서 南洋群島地方病調査医学論文集. 第四輯 及び 第五輯
[45] 학술지 パラオ諸島の歴史と地質 https://doi.org/10.5[...] 東京地学協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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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웹사이트 孤高の僧 青柳貫孝の生涯 ― 民族の違い超え人間の平等貫く https://web.archive.[...] 2015-11-13
[48] NDLDC 南洋庁 https://dl.ndl.go.jp[...] 中等教科書協会 19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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