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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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 휘하의 장수로, 1189년 형제 쿠르토사와 함께 칭기즈 칸에게 귀순하여 타타르 토벌, 나이만족과의 전투 등 몽골 제국 통일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 칭기즈 칸의 몽골 고원 통일 전쟁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했으며, 1206년에는 공신 명단 8위에 올랐다. 그는 '네 마리 개의 개' 중 한 명으로 불렸으며, 칭기즈 칸 사후에는 서자 콜게의 왕부로 임명되어 후계자 교육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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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타이는 1175년 또는 1176년 몽골에서 태어나 칭기즈칸과 오고타이 칸 시대에 활약하며 금나라, 호라즘, 루스 등지에서 혁신적인 전술로 몽골 제국 영토 확장에 기여한 명장이다. - 역사에 관한 - 광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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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빌라이 (사구) | |
|---|---|
| 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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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이름 | 보르지긴 쿠빌라이 (Боржигин Хубилай, Borjigin Qubilai) |
| 칭호 | 세첸 칸 (Сэцэн хан, Sechen Khan) |
| 한국어 음역 | 쿠빌라이 칸 |
| 묘호 | 세조(世祖) |
| 시호 |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
| 존호 | 합단옹철철세첸황제(合丹옹哲哲世첸皇帝) |
| 칸 즉위 | 1260년 |
| 원나라 황제 즉위 | 1271년 |
| 개인 정보 | |
| 출생 | 1215년 9월 23일 |
| 사망 | 1294년 2월 18일 (78세) |
| 배우자 | 테굴룬 카툰 차브이 카툰 코코진 카툰 |
| 자녀 | 도로지 친킴 망갈라 노무간 코케추 투간 |
| 가문 | |
| 아버지 | 툴루이 |
| 어머니 | 소르칵타니 베키 |
| 형제자매 | 뭉케 훌라구 아리크 부카 |
| 기타 정보 | |
| 종교 | 티베트 불교 |
2. 생애
칭기즈칸이 자무카와 결별하자, 1189년에 형제 쿠르토사와 같이 칭기즈칸에게 귀순했으며 타타르 토벌, 코이덴 전투, 나이만족과의 전투, 서하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후일 칸이 된 쿠빌라이 칸과 그를 구별하고자, 그를 홀필내(忽必來) 또는 호필내(虎必來)라는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바르라스 부족 출신으로, 칭기즈 칸이 동맹자였던 자무카와 결별한 후 동생 쿠두스와 함께 그 휘하에 들어와 동료(노코르)가 되었다.[1] 칭기즈 칸의 건국을 그린 역사 이야기 《원조비사》는 쿠빌라이가 비범한 완력과 용맹함을 지녔다고 전한다.
칭기즈 칸의 몽골 고원 통일에 이르는 여러 전투에서 항상 선봉에 서서 싸웠고, "네 마리 개의 개"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다.[2] 특히 1204년에 벌어진 나이만부의 타양 칸과의 결전에서는 제베, 제르메, 수부타이와 함께 선봉을 맡아 전공을 세웠다.
1206년 칭기즈 칸의 2차 즉위 때 공신 명단에서 8위에 올랐고, 동생 쿠두스와 함께 천호장(밍간)에 임명되었다.[3] 몽골 제국을 구성하는 95개의 천호대 (천호) 유목민 집단 중 하나를 영유하는 귀족이 되었다. 또한 칭기즈 칸에 의해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군무를 통괄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칭기즈 칸의 중앙 아시아 정복에서는 칭기즈 칸의 원정에 앞서 북부의 카를루크 부족을 토벌하고, 오아시스 도시들을 복속시키는 전공을 세웠다.[4]
이후 칭기즈 칸이 노령이 된 후 낳은 서자 콜게의 왕부(王傅)에 임명되었고, 차카안 코아의 아들 토그릴 등과 함께 콜게에게 분봉된 사천호(4개 천호대) 중 한 명의 천호장이 되었다.[2] 쿠빌라이의 자손은 대원 울루스의 테무르를 섬겼다.[4]
2. 1. 칭기즈 칸과의 만남
1189년, 칭기즈 칸이 자무카와 결별한 후, 형제 쿠르토사(일본어 위키백과 문서에는 쿠두스로 표기됨)와 함께 칭기즈 칸에게 귀순했다.[1] 칭기즈 칸의 동료(노코르)가 되었다.[1] 《원조비사》는 쿠빌라이가 비범한 완력과 용맹함을 지녔다고 전한다. 칭기즈 칸의 몽골 고원 통일에 이르는 여러 전투에서 항상 선봉에 서서 싸웠고, "네 마리 개의 개"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다.[2]2. 2. 몽골 통일 전쟁에서의 활약
바르라스 부족 출신인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이 동맹자였던 자무카와 결별한 후, 1189년에 형제 쿠르토사와 같이 칭기즈칸에게 귀순했다.[1] 《원조비사》는 쿠빌라이가 비범한 완력과 용맹함을 지녔다고 전한다.칭기즈 칸의 몽골 고원 통일에 이르는 여러 전투에서 항상 선봉에 서서 싸웠고, "네 마리 개의 개"(제베, 제르메, 수부타이, 쿠빌라이)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다.[2] 타타르족 토벌, 코이덴 전투, 나이만족과의 전투, 서하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특히 1204년에 벌어진 나이만부의 타양 칸과의 결전에서는 제베, 제르메, 수부타이와 함께 선봉을 맡아 전공을 세웠다.
1206년 칭기즈 칸의 2차 즉위 때 공신 명단에서 8위에 올랐고, 동생 쿠두스와 함께 천호장(밍간)에 임명되었다.[3]
2. 3. 몽골 제국 건국 이후
1206년 칭기즈 칸의 2차 즉위 때 공신 명단에서 8위에 올랐고, 동생 쿠두스와 함께 천호장(밍간)에 임명되었다.[3] 몽골 제국을 구성하는 95개의 천호대 (천호) 유목민 집단 중 하나를 영유하는 귀족이 되었다. 또한 칭기즈 칸에 의해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군무를 통괄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칭기즈 칸의 중앙 아시아 정복에서는 칭기즈 칸의 원정에 앞서 북부의 카를루크 부족을 토벌하고, 오아시스 도시들을 복속시키는 전공을 세웠다.[4]이후 칭기즈 칸이 노령이 된 후 낳은 서자 콜게의 왕부(王傅)에 임명되었고, 차카안 코아의 아들 토그릴 등과 함께 콜게에게 분봉된 사천호(4개 천호대) 중 한 명의 천호장이 되었다.[2] 쿠빌라이의 자손은 대원 울루스의 테무르를 섬겼다.[4]
2. 4. 후계자 양성
칭기즈칸이 노령이 된 후 얻은 서자 콜게의 왕부(王傅)에 임명되었다.[2] 차카안 코아의 아들 토그릴 등과 함께 콜게에게 분봉된 사천호(4개 천호대) 중 한 명의 천호장이 되었다.[2] 쿠빌라이의 자손은 대원 울루스의 테무르를 섬겼다.[4]3. 평가
쿠빌라이는 바르라스 부족 출신으로, 칭기즈 칸의 가장 신뢰받는 장수 중 한 명이었다.[1] 원조비사는 쿠빌라이가 비범한 완력과 용맹함을 지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칭기즈 칸의 몽골 고원 통일에 이르는 여러 전투에서 항상 선봉에 서서 싸웠고, "네 마리 개의 개"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다.[2]
1204년에 벌어진 나이만부의 타양 칸과의 결전에서는 제베, 제르메, 수부타이와 함께 선봉을 맡아 큰 공을 세웠다. 1206년 칭기즈 칸의 2차 즉위 때 공신 명단에서 8위에 올랐고, 동생 쿠두스와 함께 천호장(밍간)에 임명되었다.[3] 몽골 제국을 구성하는 95개의 천호대 (천호) 유목민 집단 중 하나를 영유하는 귀족이 된 것이다. 또한 칭기즈 칸에 의해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군무를 통괄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4]
칭기즈 칸의 중앙 아시아 정복에서는 칭기즈 칸의 원정에 앞서 북부의 카를루크 부족을 토벌하고, 오아시스 도시들을 복속시키는 전공을 세웠다.[4] 이후 칭기즈 칸이 노령이 된 후 낳은 서자 콜게의 왕부(王傅)에 임명되었고, 차카안 코아의 아들 토그릴 등과 함께 콜게에게 분봉된 사천호(4개 천호대) 중 한 명의 천호장이 되었다.[2] 쿠빌라이의 자손은 대원 울루스의 테무르를 섬겼다.[4]
참조
[1]
서적
『元朝秘史』上巻
岩波書店
1997-07
[2]
서적
『モンゴル秘史 1 チンギス・カン物語』
[3]
서적
『元朝秘史』下巻
岩波書店
1997-08
[4]
서적
『モンゴル帝国史研究正篇』
東京大学出版会
20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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