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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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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부타이는 1175년 또는 1176년 몽골에서 태어난 몽골 제국의 명장으로, 칭기즈칸 시대부터 오고타이 칸 시대까지 활약했다. 평민 출신이었으나 칭기즈칸의 인정을 받아 장군으로 발탁되었으며, 금나라, 호라즘, 루스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혁신적인 전술과 전략을 구사하며 몽골 제국의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유럽 원정에서 바투의 부관으로 활약하며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하는 등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후대 군사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군사 전략에도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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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타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수부타이
본명수베게데이
로마자 표기Sübedei
별칭오를록 바가투르
출생1175년경, 부르칸 칼둔, 카마그 몽골
사망1248년, 투울 강, 몽골 제국
국적몽골 제국
가족
형제젤메
손자아주
군사 경력
소속몽골 제국
복무 기간불명
계급밍간 노얀 (천호장)
주요 참전몽골의 금나라 정복
몽골의 서하 정복
몽골 제국
몽골의 유럽 원정
주요 전투
중국야흘령 전투
삼봉산 전투
개봉 공방전
호라즘 제국이르기즈 강 전투
사마르칸트 공방전
조지아 및 루스후난 전투
칼카 강 전투
보로네시 강 전투
코젤스크 공방전
유럽모히 전투
에스테르곰 공방전

2. 생애

1176년에 태어난 수부타이는 1189년부터 형 젤메를 따라 칭기즈칸의 장수로 활동했다. 1196년 자무카와의 전쟁, 1200년 타이치우드족과의 전쟁, 1202년 타타르족과의 전쟁, 1203년 케레이트족과의 전쟁, 1204년 나이만족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1205년에는 메르키트족 소탕 작전과 금나라 정벌에 참여했다.[68][69]

1219년, 칭기즈칸은 호라즘을 침략하여 몽골 사절 처형에 대한 보복을 가했다. 칭기즈칸은 수부타이와 제베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어 호라즘 샤 무함마드를 추격하게 했다. 무함마드는 중앙 페르시아로 도망쳤지만, 끈질긴 추격으로 군대를 결집하지 못하고 1221년 초 카스피해 섬에서 병사했다.[20][21] 이후 수부타이와 제베는 조지아를 공격하여 후난 전투에서 승리하고, 칼카 강 전투에서 키예프 루스'와 쿠만 연합군을 격파했다.[23][25]

1226년, 수부타이는 서하의 당항족(탕구트)에 대한 원정에서 측면 군대를 지휘하여 후방을 공격했다. 1227년에는 금나라 위수 상류 지역을 정복하고, 티베트 왕국을 약탈했다.[28] 1231년~1232년, 수부타이는 송나라를 침략하여 금나라의 방어선을 우회하려 했다.[32] 1232년 삼봉산 전투에서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36] 개봉을 포위했다.[86] 1234년, 금나라의 마지막 거점인 채주가 함락되었다.

Сүбээдэйmn는 바투의 동유럽 원정에서 부사령관으로 활약했다.[38] 1236년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부족장들을 복속시켰고,[92] 1237년부터 1238년까지 랴잔(옛 랴잔), 블라디미르(블라디미르), 수즈달, 트베리 등 루스의 여러 도시를 함락시켰다. 1240년에는 키예프를 파괴했다.[67]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 국왕 벨라 4세의 군대를 격파했으나,[67] 오고타이가 죽자 유럽 원정은 중단되고 수부타이는 귀환했다.[51]

1241년 러시아에서 쿠만족의 반란을 진압한 후 몽골로 돌아갔다.[58] 귀국 후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바투를 지지, 귀위크 칸 옹립에 기여했다. 1246년부터 1247년까지 송나라 원정을 지휘했다.[58] 1248년 송나라 원정에서 몽골로 돌아와 투울 강(현재 울란바토르 부근)에서 여생을 보내다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8]

2. 1. 초기 생애와 배경

1176년에 태어난 수부타이는 1189년부터 형인 젤메를 따라 칭기즈칸의 장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5] 역사학자들은 수부타이가 현재 몽골의 오논강 상류 서쪽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있다. 일부 역사 기록에는 그가 우량카이(Uriankhai) 족 출신이라고 전해진다.[6]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이러한 초기 서술을 부정하고 있다. 스티븐 파우(Stephen Pow)와 징징 리아오(Jingjing Liao)는 수부타이의 가족이 여러 세대에 걸쳐 칭기즈칸(Temujin)의 가족과 연관되어 있었다고 지적한다.[7] 수부타이의 증조부인 네르비(Nerbi)는 몽골 칸 툼비나 세첸(Tumbina Sechen)의 동맹이었다고 한다. 수부타이의 아버지 자르치우다이는 발주나(Baljuna) 호수에서 궁핍했던 칭기즈칸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했다고 하며, 형인 젤메는 몽골군 장군으로 칭기즈칸의 측근이었다. 젤메는 몽골 고원 통일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칭기즈칸을 구출하기도 했다. 또 다른 형제인 차우르칸(Chaurkhan, Ca'urqan으로도 로마자 표기됨)은 《몽골비사》에 언급되어 있다.[8]

이러한 가까운 가족 관계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수부타이의 경력이 몽골 제국이 실력주의 사회였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평민 출신이었고, 아버지 자르치우다이는 대장장이였다고 한다. 14세에 칭기즈칸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자신의 씨족을 떠났는데, 17세에 합류한 형 젤메의 뒤를 따랐으며, 칭기즈칸의 혈족이 아닌 사람에게 가능한 최고 지휘권에 올랐다.[10]

수부타이의 출신인 울량카이부(兀良哈部)는 원래 중국 동북부 북부에서 시베리아 남부에 걸친 삼림 지대에 거주하는 수렵민의 총칭으로 여겨진다. 그중 12세기경 몽골 고원으로 진출한 일파가 몽골 여러 부족의 예속 집단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이며, 《원조비사》의 전승에 따르면 불칸산 주변에 선주하여 몽골 부족의 시조 보돈찰 뭉칵 시대에 정복되어 이에 예속되었다고 한다. 또한 《원사》 「속불대전(速不台伝)」에 따르면 칭기스칸의 5대 조상인 톤비나이 세첸 시대에 종속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2. 2. 칭기즈칸 시대의 활약

1196년 자무카와의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1200년 타이치우드족, 1202년 타타르족, 1203년 케레이트족, 1204년 나이만족과의 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하였다. 1205년에는 메르키트족 소탕 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고, 금나라 정벌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68][69] 1206년 칭기즈칸의 두 번째 즉위식 당시 공신 명단에서 51위에 올랐으며, 천인대장 지위를 받았다.[70]

1216년[71]/17년 알타이산맥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메르키트족 토벌을 명령받고, 추이강에서 승리했다.[69][72][73] 야생 킵차크 지역에서 메르키트족과 쿠만-킵차크 연합을 격파했다. 1219년 쳄 강 전투 이전에 수부타이는 선봉대에게 어린이 장난감을 가지고 가서 마치 메르키트족에게서 도망치는 가족 무리인 것처럼 버려두게 했다. 이러한 기만 작전으로 수부타이 군대는 메르키트족/킵차크족 지도부를 기습, 포위하여 사로잡을 수 있었다.[18]

무함마드 2세는 호라즘의 수부타이를 이르기즈 강에서 공격했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정복했던 술탄의 정예군보다 3배나 적은 수였음에도, 수부타이는 치열한 전투 끝에 그를 저지하고 밤에 후퇴했다.[19] 킵차크 초원에서 메르키트 잔당을 추격하던 수부타이는 캉크리족이 사는 땅 카라쿰에서 알라우딘이 이끄는 호라즘군과 조우했다. "카라쿰 전투"에서 수부타이는 일개 분견대였음에도 국왕이 직접 이끄는 호라즘 정예군과 호각으로 싸워 무승부를 기록했다.[74][75] 이 전투를 통해 몽골 측은 호라즘군의 실력을 가늠하여 자신감을 키웠고, 반대로 호라즘 측은 야전에서 몽골군의 무서움을 깨달아 이후 양국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76]

1219년 말, 칭기즈칸은 몽골군을 서쪽으로 이끌고 호라즘을 침략하여 몽골 사절 처형에 대한 보복을 가했다. 약 10만 명의 무장 병력으로 몽골군은 호라즘 제국 군대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기만과 신속한 기동을 통해 고립된 호라즘 군대를 상세하게 격파했다. 칭기즈칸의 참모장인 수부타이는 칸의 군대와 함께 치명적인 키질쿰 사막을 통과하여 부하라에서 호라즘 방어망 후방에 나타났다.[20] 사마르칸트를 신속하게 점령한 후, 칭기즈칸은 수부타이와 제베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어 호라즘 샤를 추격하고 다른 호라즘 군대가 결집하는 것을 막게 했다. 샤 무함마드는 중앙 페르시아로 도망쳐 스스로를 구하려 했지만, 체포는 피했어도 끈질긴 추격 때문에 군대를 결집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예비대로 있던 수십만 명의 호라즘 군대는 분산된 채로 칭기즈칸의 주력군에 의해 쉽게 분쇄되었다.[21] 격렬한 추격에 지친 무함마드는 1221년 초 카스피해 섬의 어촌에서 병들어 죽었는데, '제2의 알렉산더'라 자칭했던 그에게는 수치스러운 최후였다.

2. 3. 호라즘, 루스 원정 (1220-1223)

1219년 말, 칭기즈칸은 호라즘을 침략하여 몽골 사절 처형에 대한 보복을 가했다. 약 10만 명의 몽골군은 호라즘 제국의 군대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기만과 신속한 기동을 통해 고립된 호라즘 군대를 상세하게 격파했다. 칭기즈칸의 참모장에 해당하는 수부타이는 칸의 군대와 함께 치명적인 키질쿰 사막을 통과하여 부하라에서 호라즘 방어망의 후방에 나타났다.[20] 호라즘 방어의 중심지인 사마르칸트를 신속하게 점령한 후, 칭기즈칸은 수부타이와 제베를 3만 명의 병력과 함께 파견하여 호라즘 샤를 추격하고 다른 호라즘 군대가 결집하는 것을 막게 했다. 샤 무함마드는 중앙 페르시아로 도망쳐 스스로를 구하려고 했지만, 체포를 피했음에도 끈질긴 추격 때문에 군대를 결집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예비대로 있던 수십만 명의 호라즘 군대는 분산된 채로 칭기즈칸의 주력군에 의해 쉽게 분쇄되었다.[21] 격렬한 추격에 지친 무함마드는 1221년 초 카스피해의 섬에 있는 어촌에서 병들어 죽었는데, '제2의 알렉산더'라고 자칭했던 그에게는 수치스러운 최후였다.

몽골 침략자들의 이동 경로


수부타이와 제베는 1219년 겨울의 일부를 아제르바이잔이란에서 보냈으며, 동쪽의 제국의 나머지 부분을 지원하는 서부 호라즘군을 저지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여기서 그는 역사상 가장 대담한 정찰 공격 작전을 구상했는데, 이는 에드워드 기번에 의해 "시도된 적도 없고, 반복된 적도 없는 원정"으로 묘사되었다.[22]

호라즘 샤 왕조 원정에서 수부타이는 제베와 함께 호라즘 샤 알라우딘 무함마드의 추격을 명령받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수부타이는 호라산 지방으로 진출하여 호라산에서 쿠미스(샤흐레자, Shahreza)에 이르는 지역에 산재한 도시들을 약탈했고, 몽골군의 약탈과 파괴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군인들과 도적들이 수부타이의 군대에 합류했다.[77] 수부타이는 레이에서 별도로 활동하던 제베와 합류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알라우딘이 도주한 마잔다란으로 진입했다. 수부타이 일행은 곰을 약탈했고, 가즈빈에서는 점령 후 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약 4만 명의 주민을 살해했다.[78]

1220년 12월, 알라우딘은 카스피해의 아바스크(Abaskun) 섬에서 죽었지만, 수부타이와 제베는 그의 죽음을 모른 채 진군을 계속했다.[79] 알라우딘의 도주처로 추정되는 북이란과 남 코카서스를 공격했다.[80] 아제르바이잔 지방으로 진군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는 일데니즈 왕조(일두그즈 왕조, 일데기즈 왕조, ıl-hanlı)를 복속시키고, 인접한 조지아 왕국을 공격했다.

페르시아의 저항을 분쇄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한 후, 몽골군은 조지아의 그리스도교 왕국을 침략했다. 조지아의 왕 조지 4세는 전투에 참여하기를 꺼렸지만, 수부타이와 제베는 시골을 황폐화하고 백성을 죽임으로써 그를 전투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 후 수부타이와 제베는 수천 명의 조지아 기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난 전투에서 기사들을 보병으로부터 유인하여 가짜 후퇴로 기사들을 포위하고 섬멸함으로써 조지아 군대를 패퇴시켰다. 그들을 섬멸한 후, 몽골군은 조지아 군대를 포위하고 격파했다. 조지아인들에 의해 지휘관으로 확인된 수부타이는 자신의 병사들을 십자가 앞에서 행진시키고, 몽골인들이 실제로 조지아인들을 돕기 위해 온 그리스도교 기적 행위자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스파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군대가 우호적인 동맹군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23]

조지아 공격은 1220년부터 1221년에 걸친 겨울에 이루어졌고, 봄이 되자 수부타이 일행은 아제르바이잔으로 돌아와 일데니즈 왕조로부터 물품을 징수했다.[81] 추격대는 마라가, 일빌, 하마단 등 이란-이라크 북부의 도시들과 아제르바이잔을 공격했지만, 타브리즈에서는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후퇴했다. 1221년 10월, 아란(Arran) 지방의 바이라칸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아란의 중심 도시인 간자로 다가갔으나, 간자 시민들이 전투에 능숙하다는 것을 알고 조공을 받고 후퇴하여 다시 조지아를 공격했다.[82]

조지아를 황폐화한 후, 몽골군은 겨울 동안 카프카스 산맥을 가로질러 데르벤트 고개를 우회했다. 몽골군은 안내자들에게 속아 위험한 길을 가게 되어 산에서 지쳐 나왔고, 훨씬 더 큰 스텝 연합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수부타이는 영리한 외교를 이용하여 알란인, 체르케스인, 돈 키프차크/쿠만인들을 각개격파했다.

1222년 후반에 수부타이 일행은 데르벤트를 넘어 코카서스 북쪽 기슭에 도달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오셋인, 레즈긴인(Lezgian people), 체르케스인, 킵차크인 연합군과 충돌했다. 몽골군은 킵차크인을 매수하여 연합군을 격파한 후, 남은 킵차크인을 공격하여 그들의 거주지인 킵차크 초원으로 진입했다.[83] 킵차크인들은 몽골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했고, 킵차크인의 족장 중 한 명인 코찬은 장인인 갈리치 공 므스티슬라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므스티슬라프는 코찬의 요청에 응하여 키예프에 루스 제후들을 모아 연합을 결성했다.

남부 러시아 스텝을 약탈한 후, 러시아 공국들은 후퇴하는 쿠만 연합과 연합하여 8만 명의 군대로 몽골군을 격파했다. 수부타이는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후위병 1,000명을 희생하여 연합군이 무모하게 추격하여 분산되도록 유도했다. 계획은 성공했지만, 전략적 이점은 큰 대가를 치렀다. 아마도 1,000명의 병사들은 제베가 이끌었을 것이며, 그는 일부 키프차크들에게 살해당했다.[25] 예상대로 연합군은 몽골군을 추격했고, 9일 동안 후퇴한 후 수부타이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키예프 루스'와 쿠만 연합군을 칼카 강 전투(1223년 5월 31일)에서 격파했다.

칼카 강 전투는 몽골과 유럽 세계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군사적 접촉이었고, 이후 몽골의 유럽 침공(Mongol invasion of Europe)의 동기가 되었다.[85] 칼카 강 전투 후 크림반도에 진입하여 무역 도시로 번영했던 수다크를 공격했다. 곧 수부타이 일행은 볼가 강을 북상하여 불가리아 지방에 도달했다(몽골의 볼가 불가리아 침공). 볼가 불가리아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자, 수부타이 일행은 동쪽으로 귀환하여 이르티시 강 유역에서 원정 귀환 중이던 칭기스칸과 합류했다.[79] 수부타이와 제베가 이끈 몽골군의 정보와 소문은 루스를 거쳐 유럽에 전해졌다.[79]

2. 4. 오고타이 칸 시대의 활약

1226년 서하의 당항족(탕구트)에 대한 원정에서 수부타이는 측면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당항족의 후방을 공격했다. 칭기즈 칸이 북쪽 루트로 서하를 침략하는 동안, 수부타이는 투르키스탄의 산악과 사막을 넘어 서쪽에서 공격하여 당항족의 저항을 무너뜨렸다. 징기스칸이 서쪽으로의 증원을 막는 동안 수부타이는 서쪽의 저항을 진압하고 징기스칸의 주력 군대와 합류하여 동쪽을 정복했다. 1227년에는 금나라의 위수 상류 지역을 정복했고, 티베트 왕국을 약탈하기도 했다.[28]

몽골의 금나라 및 중국 내 다른 정권 정복


1230년~1231년 금나라에 패배한 뒤, 외곽대(Ögedei)는 몽골군 주력을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했으며, 수부타이에게 상황 수습을 명령했다. 수부타이는 금나라 장군들이 산시에서 후퇴하여 요새화된 통관을 사수하고 금나라의 근거지인 허난으로의 접근을 차단한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초토화 작전으로 몽골군이 장기간 포위 공격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들고, 방어선과 험준한 지형으로 몽골군의 우회 공격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

1231년~1232년 수부타이는 1219년 화라자즘(Khwarezm)과 1226년 서하(Xi Xia)에서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대담한 접근 방식으로 금나라의 요새화된 방어선을 다시 우회하려 했다. 몽골군은 세 개의 군대로 나뉘어, 하나는 황하 중심부의 북쪽에서 허난을 공격하고, 다른 하나는 동쪽 산둥에서 황하를 건너려 하고, 마지막으로 수부타이와 툴루이(Tolui)가 이끄는 군대는 송나라를 침략하여 더 노출된 남쪽에서 허난을 공격했다.[32] 송나라는 처음에 험준한 칭링 산맥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수부타이는 그들의 군대를 피해 산성을 하나씩 고립시켰다.[33]

금나라 주력군은 즉시 유산(Mount Yu)에서 수부타이의 군대를 가로막기 위해 진격했다. 금나라 사령관 완옌허다(Wan Yen Heda)는 몽골군을 매복 공격하려 했지만, 매복은 발각되었다. 하루 종일 치열한 전투 끝에 교착 상태가 된 후, 몽골군은 어둠 속에서 후퇴하여 흔적을 감추고 금나라를 우회하려 했다. 수부타이는 금나라가 소모전에 취약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진로를 바꾸어 위장 공격으로 금나라군의 주의를 일시적으로 보급대에서 떨어뜨리고 숨겨둔 병력으로 즉시 보급품을 빼앗았다.[34]

일부 병력이 금나라 군대의 수색대를 괴롭히는 동안, 다른 부대들은 넓은 원호를 그리며 측면을 따라 행군하여 금나라군의 후퇴로를 따라 있는 마을의 보급품을 파괴하거나 약탈하려 했다. 금나라 군대가 완옌허다를 돕기 위해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외곽대 칸은 황하를 건널 수 있었다. 수부타이의 군대가 금나라 후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외곽대는 수부타이에게 증원군을 보낼 수 있었고, 몽골군의 총 병력은 5만 명에 달했다. 이 증원군이 도착하고 지난 3주 동안 금나라 군대의 식량이 심각하게 고갈된 후, 수부타이는 산봉산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완옌허다를 사로잡고 금나라 주력군을 섬멸했다. 그런 다음 속행군을 통해 양의(Yangyi, 1232년 2월 24일)와 철령(T’iehling, 1232년 3월 1일) 전투에서 다른 전선을 지키고 있던 금나라 군대를 제거했다.[36]

요새화된 개봉은 8개월 동안 포위 공격을 받았다. 수부타이는 포위선을 구축해야 했다. 또한 금나라는 "천둥 폭발 폭탄"이라는 최첨단 화약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몽골군은 더욱 집중적인 사격을 위해 충분히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개봉을 외부의 도움으로부터 차단한 후, 수부타이는 무슬림 투석기, 망고넬과 노획한 화약을 혼합하여 집중적인 포격과 휴식 및 주변 지역 약탈을 번갈아 가며 실시했다. 몽골군의 분산은 개봉을 황폐화시킨 전염병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극한에 달한 후 황제가 도망치고 도시가 함락되었다. 수부타이는 처음에 그들의 완강한 저항에 대한 처벌로 개봉의 모든 사람을 처형하려고 했다. 그러나 외곽대가 개입하여 수부타이에게 공정하게 대우하라고 명령했다.[37] 1234년 마지막 금나라의 거점인 채주가 함락되었다.

1232년 삼봉산 전투에서는 툴루이와 함께 완안합달, 완안진화상 등이 이끄는 금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같은 해 4월, 수부타이는 오고타이의 명령을 받아 황제 애종(完顔寧甲速)이 머물고 있던 개봉(汴京)을 포위했다. 오고타이로부터 항복을 권고받은 닝쟈스는 몽골에 인질을 보내 화약을 맺으려 했지만, 수부타이는 평화 협정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며 공격을 계속했다.[86]

1232년 8월, 금과의 평화 협상을 담당하던 몽골 사절단이 금나라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면서 강화는 결렬되었고, 수부타이는 다시 개봉 공격에 나섰다. 1233년 수부타이는 닝쟈스가 탈출한 후 개봉에 두 번째 포위를 했다.[88] 성내는 식량과 물자가 부족했고, 금나라 장군 최립에 의해 개봉은 몽골군에게 함락되었다.

2. 5. 바투의 유럽 원정 (1236-1242)

Сүбээдэйmn는 바투의 동유럽 원정에서 부사령관으로 큰 공을 세웠다.[38] 1236년 봄, 불가리아 지역을 공격하여 불가리아 부족장들을 복속시켰다.[92] 1237년부터 1238년까지 랴잔(옛 랴잔), 블라디미르(블라디미르), 수즈달, 트베리 등 루스의 여러 도시를 함락시켰다. 수부타이는 약탈을 통해 식량을 확보하며 남하하여 돈 강에서 군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했다. 카프카스의 여러 민족들이 몽골의 지배를 거부하자 이들을 제압한 후, 1240년에 키예프를 파괴했다.[67]

1236~1242년 몽골의 유럽 침입


수부타이는 유럽 공격을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유럽에서 승리를 거두며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여러 러시아 공국들을 황폐화시킨 후, 유럽 중심부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로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까지 정찰병을 보냈다. 유럽 왕국들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 바투 칸과 다른 두 명의 왕족이 명목상 지휘하는 공격을 준비했다. 조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전체 지휘관이었지만, 수부타이는 실제 현장 지휘관이었으며, 키예프 루스에 대한 북부와 남부 원정 모두에 참여했다. 그는 헝가리 왕국을 공격한 중앙 부대를 직접 지휘했으며, 부하들에게 자세한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43]

수부타이는 몽골군이 가장 예상치 못할 겨울에 침략했다. 몽골의 유럽 침략은 5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카이두와 오르다 칸은 폴란드 북부를, 바이달은 폴란드 남부를 황폐화시켰고, 시반은 헝가리 북동부의 험준한 지형을 통해 공격했으며, 수부타이와 바투는 헝가리 중부를 침략했고, 귈류크는 트란실바니아를 통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몽골군은 유럽인들이 최종 목표를 혼란스럽게 하고, 유럽군이 중앙군으로 집결하기 전에 분산시켜 각개격파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켰다. 바이달과 카단은 북부 병력을 재편성하여 보헤미아 군대가 하루 거리에 있기 직전에 주요 폴란드 군대를 레그니차 전투에서 패배시켰다. 귈류크의 군대가 트란실바니아에서 레그니차 전투 하루 후 승리하는 동안, 수부타이는 헝가리 평원에서 헝가리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44]

폴란드의 소규모 몽골군이 레그니차 전투에서 승리한 바로 다음 날, 수부타이는 공격을 개시하여 1241년 4월 10일 밤 모히 전투를 시작했다. 모히에서 몽골군은 유일한 다리를 공격하고 북쪽으로 그리고 다리 주변으로 건너려고 시도함으로써 헝가리군의 주의를 중앙에 고정시켰다. 주력 부대는 모히의 다리를 통해 사요 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다음 날에도 계속 공격했다. 한편, 수부타이는 은밀히 강이 너무 깊어 건널 수 없는 남쪽에 폰툰교를 건설하여 대규모 병력으로 강을 은밀히 건넜다. 강을 건너는 것이 완료되자, 제2의 부대가 남쪽에서 공격했고, 제3의 부대가 북쪽에서 공격했다. 헝가리군은 마차 진영으로 후퇴했지만 몽골군은 요새화된 헝가리 진영을 포위하고, 트레뷰셋, 화약 무기 및 불화살로 공격했다.[45] 헝가리 기병대의 돌격은 진영에서 더 멀리 유인되어 포위되었다. 몽골군은 포위망에 명백한 틈을 남겨 헝가리군이 도망쳐 개별적으로 학살되도록 하였다.[46]

수부타이의 군대는 몰다비아를 통과하여 1241년에 헝가리로 진입한 바투의 본대와 합류했다. 모히 전투에서 수부타이는 헝가리 국왕 벨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을 격파했다.[67] 같은 해 오고타이가 죽자 유럽 원정은 중단되었고, 수부타이는 동쪽으로 귀환했다.[51]

2. 6. 말년

1241년 러시아 지역에서 쿠만족의 반란을 진압한 후, 수부타이는 몽골로 돌아갔다.[58] 귀국 후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바투를 지지해 귀위크 칸을 옹립하는데 기여했다. 1246년부터 1247년까지 송나라 원정을 지휘했다.[58] 1248년 송나라 원정에서 몽골로 돌아와 투울 강(현재 울란바토르 부근)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72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사망했다.[58]

3. 혁신적인 전술과 전략

수부타이는 전쟁 기술의 주요 혁신가였다. 그는 넓은 거리에 걸쳐 분산된 대규모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용했다. 수부타이의 작전은 적을 속여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공격하도록 설계되었다. 1232년 금나라 침략에서 그는 유리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군대를 분산시켰다. 금나라는 어떤 몽골군이 기만 전술이고 어떤 것이 진짜 위협인지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력군이 고립되어 굶주림에 시달렸다. 강력하게 요새화된 지역은 조직적인 저항이 모두 파괴될 때까지 우회하거나 무시되었다. 포위 공격은 중요하거나 취약한 위치에 국한되었고, 다른 상황에서는 몽골군은 봉쇄군을 남겨두거나 요새화된 성채를 무시하고 주변 농업을 파괴하여(scorched earth) 남은 사람들이 요새 벽 안에 남아 있으면 굶주리게 했다.[15]

일반적인 유목민 기마궁수 군대는 카르라이 전투나 만지케르트 전투에서처럼 화살로 적을 서서히 약화시키는 전술을 사용했지만, 수부타이는 훨씬 더 결정적이고 유동적인 방식으로 싸웠다. 그는 강력한 화력을 사용하여 깊은 대형으로 빠르게 기병 돌격을 위한 돌파구를 만들었다. 1223년 칼카 강 전투에서 수부타이의 2만 명 군대는 9일간 후퇴한 후, 즉시 방향을 돌려 장시간 미사일 폭격 없이 결정적인 돌격을 가하여 8만 명의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러시아군의 선봉대는 제2파가 전장에 도착하여 배치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궤멸되었다.[16]

수부타이는 칭기즈 칸과 함께 포위전에서 공병의 가치를 깨달은 최초의 몽골 장군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야전에서도 공성병기를 사용했다.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 석궁병들은 몽골군의 야간 도하를 격퇴하고 다음 날 강을 건너 싸우는 몽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수부타이는 거대한 투석기(Lithobolos)를 사용하여 헝가리 석궁병들을 제거하고 경기병이 더 이상의 손실 없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이러한 공성 무기 사용은 적군의 저항을 교란하면서 동시에 공격하기 위해 포격을 사용한 최초의 기록 중 하나였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크리핑 배리지(creeping barrage)와 유사하게 작동하여 공격 직전에 적의 전선을 약화시키고 교란시켰다.[17]

칭기즈 칸처럼 수부타이는 적진 내 분열을 조장하고 적을 기습하는 데 능숙했다. 몽골의 공포스러운 명성과 불화를 퍼뜨리는 매우 효과적인 스파이 네트워크, 그리고 주요 지역 지도자들에게 제공하는 인센티브는 적들이 효과적으로 연합하여 최대한의 능력으로 싸우는 것을 막았다.

4. 유산과 영향

수부타이의 군사적 업적은 몽골 제국의 팽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그의 전술과 전략은 후대의 군사 지도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는 32개의 나라를 정복하고 65번의 회전에서 승리했으며, 호라즘 제국, 키예프 루스,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 조지아, 아르메니아, 금나라, 송나라 등 다양한 국가와 부족의 군대를 격파했다.[59]

수부타이의 전술은 20세기 이후 재조명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격전과 현대 기동전 교리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B. H. 리델 하트, 에르빈 롬멜, 조지 S. 패튼 등은 수부타이의 전술을 연구하고 적용했다.[63] 몽골군은 3~5개의 접근축을 따라 500~1000km 거리를 두고 이동하며 동시에 여러 목표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작전했다. 수부타이는 넓은 전선에 병력을 분산시킨 후 결정적인 지점에서 신속하게 집결하여 적을 분쇄하는 전략을 사용했으며, 이는 적국의 투쟁 의지를 완전히 꺾는 데 목표를 두었다.[61]

러시아는 몽골 원정을 연구하여 심층전 이론을 개발했는데, 이는 몽골의 전략과 유사하게 전차, 기계화 수송대, 포병, 비행기를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적군은 병력 이동을 은폐하기 위해 연막을 사용하는 수부타이의 전술을 모방하기도 했다.[65] 20세기 후반에는 미국의 군사 이론가 존 보이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징기스칸과 수부타이의 원정을 기동전의 사례로 사용했다.[66]

수부타이의 후손인 우량카다이아주도 몽골 제국의 장군으로 활약하며, 남송 정복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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