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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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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훌라구는 몽골 제국의 왕족이자 일 칸국의 초대 군주로,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의 아들이다. 그는 몽케 칸의 명을 받아 서방 원정군을 이끌고 이스마일파를 정복하고 바그다드를 함락하여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켰으며, 시리아를 정복했다. 훌라구는 일 칸국을 건국하고, 쿠빌라이 칸을 지지했으며, 나시르 앗딘 앗 투시의 마라가 천문대 연구를 후원하는 등 문화와 과학 발전에 기여했다. 훌라구는 1265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아들 아바카가 일 칸국의 지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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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라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훌라구 칸
훌라구 칸 (라시드알딘 하마다니 삽화, 14세기 초)
몽골어"" (훌레구 카안, 잉여)
페르시아어"" (훌라쿠 칸)
아랍어هولاكو خان (훌라쿠 칸)
중국어旭烈兀 (쉬례우)
출생1217년경
사망1265년 2월 8일
사망 장소자린네 강
매장 장소우르미아호, 샤히 섬
종교불교
통치 정보
작위일 칸
재위 기간1256년 – 1265년 2월 8일
전임자(신설)
후임자아바카 칸
가문
왕가보르지긴 가문
아버지톨루이
어머니소르칵타니 베키
배우자가유크 카툰
도쿠즈 카툰
예순친 카툰
쿠투이 카툰
외르제이 카툰
자녀참조
훌라구 탐가
탐가

2. 출생과 가계

훌라구는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인 톨루이와 케레이트 부족의 공주인 소르칵타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르칵타니는 자신의 모든 아들들을 몽골 제국의 지도자로 만든 매우 훌륭한 정치인이었다. 훌라구는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 훌라구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인 도쿠즈 카툰[64] 역시 기독교도였으며, 그녀는 훌라구의 종교 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65] 훌라구의 또 다른 아내인 투키티 카툰, (훌라구의) 친구이자 장군이었던 키트부카도 기독교도였다. 1264년 아르메니아 출신의 역사가 바르단 아레벨키에게 훌라구가 고백한 바에 의하면, 훌라구는 태어났을 때 기독교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도쿠즈 카툰의 의지와는 달리[66] 그는 죽는 순간까지 불교도였다.[67]

훌라구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전사(戰士)를 뜻한다. 자미 알-타와리크에 일부 소개된 것을 제외하고는 훌라구의 어린 시절은 알려진 것이 없다. 1224년쿠빌라이 칸과 함께 할아버지 칭기즈 칸을 만났다고 하며, 1230년 남송 정벌에 출정하여 안풍(安豊)을 점령했다.

훌레구는 1217년 징기스칸의 아들인 툴루이와 영향력 있는 케레이트 공주이자 토그룰의 조카인 소르가크타니 베키 사이에서 태어났다.[4]

2. 1. 가족 관계

훌라구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톨루이와 케레이트 부족 출신의 소르칵타니 베키 사이에서 태어났다.[4] 소르칵타니는 아들들을 몽골 제국의 지도자로 키워낸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훌라구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호의적이었으며, 가장 사랑했던 아내 도쿠즈 카툰[64] 역시 기독교도였다.[65] 그러나 훌라구는 도쿠즈 카툰의 의지와는 달리[66] 죽을 때까지 불교도였다.[67]

훌라구는 최소 14명의 아내와 측실을 통해 21명 이상의 자녀를 두었다.[30] 주요 아내와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부인자녀
귀욕 카툰 (오이라트 부족)
쿠투이 카툰 (콩기라드 부족)
예순친 카툰 (술두스 부족)
도쿠즈 카툰
울제이 카툰 (오이라트 부족)
노가친 아그치 (카타이 출신)
투크타니 에게치
보라크친 아가치
아리간 아가치
아주자 아가치 (중국 또는 키탄족 출신)
예시친 아가치 (퀴를뤼트 부족)
엘 아가치 (콩기라드 부족)
이르칸 아가치
망글리가치 아가치
쿠투이 카툰 진영 출신 측실



『집사(集史)』 「훌레구 칸기」에는 14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이 기록되어 있다.[30]

3. 생애

훌라구는 1217년 칭기즈 칸의 아들 툴루이와 케레이트 부족의 공주 소르가크타니 베키 사이에서 태어났다.[4]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1219년에 하남 지방의 장덕로에 영지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사』에 따르면 칭기즈 칸으로부터 “타포응방민호 7천여 호”를 분여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224년에는 할아버지 징기스칸과 쿠빌라이 칸을 만나기도 했다.

1256년 알라무트 공성전


훌레구의 알라무트 공성전을 묘사한 무굴 제국 회화


1253년, 형 몽케 칸의 명령에 따라 서방 원정을 떠났다. 이 원정에는 이란 남부의 루르족 정복,[4] 니자르파 이스마일리 국가(암살자)의 파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5] 몽케는 훌라구에게 항복하는 자는 친절하게 대하고, 저항하는 자는 완전히 파괴하라고 명령했으며, 훌라구는 이 명령을 철저히 따랐다. 1255년 트란스옥시아나에 도착한 훌라구는 루르족을 쉽게 격파했고, 1256년 초 암살자들은 저항 없이 알라무트 요새를 항복했다.[7] 그는 아제르바이잔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1257년 11월, 훌라구는 바그다드로 진군하여 항복을 요구했지만 알무스타심 칼리프는 이를 거절했다. 바그다드 공방전에서 몽골군은 제방을 무너뜨려 칼리프 군대를 포위했고, 대부분의 군대는 학살되거나 익사했다.[8] 1258년 1월 29일, 곽간이 이끄는 몽골군은 도시를 포위 공격하여[8] 2월 10일 바그다드를 함락시켰다. 몽골군은 2월 13일부터 1주일간 도시를 파괴했으며, 바그다드 대도서관을 포함한 수많은 건물들이 불에 탔다. 사망자는 9만 명에서[9] 최대 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10] 칼리프는 사로잡혀 시민들이 살해당하고 국고가 약탈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훌레구(왼쪽)가 그의 보물들 사이에 칼리프를 가두어 굶겨 죽이는 모습. 15세기 "르 리브르 데 메르베유"의 중세 묘사.


1260년, 몽골군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헤툼 1세와 보에몽 6세 등 기독교 세력과 연합하여 시리아를 정복했다. 알레포를 함락시키고, 키트부카의 지휘 아래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우마이야 모스크에서는 기독교 미사가 거행되었고, 수많은 모스크가 신성 모독을 당했다.[14]



이 침략으로 아이유브 왕조는 멸망했고, 이슬람 세력의 중심은 카이로로 이동했다. 훌라구는 팔레스타인을 통해 카이로로 진격하려 했으나, 몽케 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제르바이잔으로 돌아갔다.

1260년 가을, 훌라구는 일칸국을 건국하였다. 이 무렵 조치 울루스에서 파견된 장수와 왕후들이 반역하거나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벨케와 심각한 대립을 겪게 되었다. 1264년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자 훌라구는 쿠빌라이의 칸위를 지지하였다.

훌라구는 타브리즈를 수도로 정하고, 마라가에 대규모 천문대를 건설하여 나시르 앗딘 앗 투시에게 『일한 천문표』를 작성하게 하였다.

1265년 2월 8일, 훌라구는 마라가 주변에서 죽어 우르미아 호수의 샤후 산에 매장되었다. 같은 해 4월에 아바카가 후계자로 즉위하였다.

3. 1. 서방 원정 (1253년 ~ 1260년)

1251년 쿠릴타이에서 몽케가 대칸으로 선출되면서, 몽케는 아우 훌라구에게 페르시아 총독직을 부여했다. 또한 훌라구에게는 페르시아의 이스마일파 이맘들의 영지와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시리아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굴복시키는 임무가 주어졌다.[69] 몽케는 훌라구에게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친절을 베풀고, 저항하는 자들은 철저히 절멸시킬 것을 명했으며, 훌라구는 이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훌라구의 군대는 이전의 어떤 몽골 군대보다 규모가 컸는데, 이는 몽케가 전 제국에서 전투 가능한 남성 10명 중 2명을 징집했기 때문이다.[70]

1253년, 훌라구는 당시 몽골 제국 군대의 1/10에 해당하는 병력을 이끌고 서방 원정을 시작했다. 1256년 1월 2일 아무다리야 강을 건넜고, 같은 해 11월 11일 이스마일파의 수령 루큰 알딘 쿠르샤가 메이문디즈에서 항복했다. 12월 20일에는 알라무트의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12세기 무슬림 지도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이 종파는 소탕되었다.

1258년 2월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칼리프조를 멸망시킨 후, 몽골 군대는 시리아의 프랑크인들과 연합했다. 안티오크 공국과 트리폴리 백작령의 보에문트 6세는 장인인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 헤툼 1세를 따라 몽골 동맹군에 합류했다. 이들은 아이유브 왕조의 시리아 영토를 정복했고, 1260년 2월에는 알레포를, 3월 1일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교도인 키트부카의 지휘 아래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73][74][75] 그리스도인들은 우마이야 모스크(옛 세례 요한 대성당)에서 이를 축복했고,[76] 수많은 모스크들이 더럽혀졌다. 많은 역사가들은 세 기독교 군주(헤툼, 보에문트, 키트부카)가 함께 다마스쿠스에 입성했다고 묘사하지만,[75][77] 데이비드 모건과 같은 근대 사학자들은 이 주장의 출처가 의심스럽다고 평가한다.[78]

이 침공으로 레반트, 이집트, 아라비아의 강력한 지배자였던 아이유브 왕조는 멸망했다. 마지막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안-나시르 유수프는 1260년에 훌라구에게 살해되었다.[79] 이로써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였던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는 약화되었고, 무슬림들의 권력은 카이로의 맘루크들에게 넘어갔다.

훌라구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하여 카이로로 진격하려 했으나, 1259년 8월 11일 뭉케가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알레포 포위를 중단했다. 이후 사루즈와 아흘라트를 거쳐 아제르바이잔으로 동진했는데, 이는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간의 계승 분쟁 소식을 듣고 쿠릴타이 참석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방의 상황에 대한 정보 수집은 게을리하지 않았다.[80][81]

훌라구는 점령지에 1만 명 정도의 군대를 키트부카에게 맡겼다. 키트부카의 군대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아스칼론과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1000여 명의 몽골 분견대 2개가 가자[82][83][84]나블루스를 점령했다.[85]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군대는 약화된 키트부카의 군대보다 유리했다. 십자군은 전통적인 적인 맘루크보다 몽골군을 더 위험하게 여겼다. 무슬림과 기독교도들 사이의 논의 결과, 기독교도들은 몽골군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으나, 무슬림들은 이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크레의 프랑크인들은 맘루크들이 자국 영토를 통과하고 아크레 부근에서 보급하는 것을 허용했다.[86] 맘루크들은 시리아에 남은 몽골군에 집중하여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키트부카는 처형되었으며, 몽골 제국의 정복은 정점에 이르렀다. 이전의 전투들에서 몽골 제국은 실패를 회복했지만,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의 패배는 영원한 것이었다. 이후 몽골인들은 시리아를 여러 차례 침공하여 영토를 확보하기도 했지만, 이는 몇 달을 넘기지 못했다. 일 칸국의 서쪽 영토 경계는 훌라구 왕조가 끝날 때까지 티그리스 강으로 유지되었다.

3. 1. 1. 이스마일파 정복

몽케는 훌레구에게 대규모 몽골 군대를 이끌고 남서 아시아에 남아 있는 이슬람 국가들을 정복하거나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훌레구의 원정에는 이란 남부 루르족의 정복,[4] 니자르파 이스마일리 국가(암살자)의 파괴가 포함되어 있었다.[5] 몽케는 훌레구에게 항복하는 자들은 친절하게 대하고, 항복하지 않는 자들은 완전히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훌레구는 이 명령을 강력하게 실행했다.

훌레구는 몽케의 명령에 따라 제국 전투원의 2/10을 훌레구의 군대로 모았으며,[6] 역사상 가장 큰 몽골 군대를 이끌고 1253년에 출정했다. 1255년 트란스옥시아나에 도착했다. 그는 루르족을 쉽게 격파했고, 암살자들은 1256년 초에 백성들의 목숨을 보존하는 협상을 받아들이면서 저항 없이 알라무트의 난공불락 요새 알라무트를 항복했다.[7]

3. 1. 2. 바그다드 함락 (1258년)

훌레구의 몽골군은 1257년 11월 바그다드로 진군했다. 바그다드에 가까워지자 그는 군대를 티그리스 강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도시를 위협하도록 나누었다. 훌레구는 항복을 요구했지만 칼리프 알무스타심은 거절했다. 알무스타심의 고문인 아부 알쿠마의 배신으로 바그다드 군대 내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바그다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공격하는 몽골군은 제방을 무너뜨리고 칼리프 군대 뒤편 땅을 침수시켜 그들을 포위했다. 군대의 대부분은 학살당하거나 익사했다.[8]

중국 장군 곽간이 이끄는 몽골군은 1258년 1월 29일 도시를 포위 공격하여[8] 울타리와 해자를 구축하고 공성 무기와 투석기를 배치했다. 공성전 기준으로 전투는 짧았다. 2월 5일까지 몽골군은 성벽의 일부를 장악했다. 칼리프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 2월 10일 바그다드는 함락되었다. 몽골군은 2월 13일 도시로 진입하여 1주일간의 파괴를 시작했다. 의학에서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귀중한 역사적 문서와 책을 보관하고 있던 바그다드 대도서관이 파괴되었다. 시민들은 도망치려 했지만 몽골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사망자 수는 매우 다양하며 쉽게 입증할 수 없다. 최저 추정치는 약 90,000명이다.[9] 더 높은 추정치는 200,000명에서 100만 명에 이른다.[10] 몽골군은 약탈한 후 건물을 파괴했다. 모스크, 궁전, 도서관, 병원과 같이 수많은 세대의 노력으로 건설된 위대한 건물들이 불에 탔다. 칼리프는 사로잡혀 시민들이 살해당하고 그의 국고가 약탈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일 밀리오네는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의 여행에 관한 책으로, 훌레구가 칼리프를 굶겨 죽였다고 말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몽골과 무슬림 기록을 믿고 있으며, 칼리프가 양탄자에 말려 몽골군이 말을 타고 짓눌렀다고 믿는다. 왕족의 피가 땅에 닿으면 땅이 불쾌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바그다드는 수세기 동안 인구가 감소하고 폐허가 된 도시였다.

3. 1. 3. 시리아 정복 (1260년)

1258년 2월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칼리프조를 멸망시킨 뒤, 몽골 군대는 시리아의 프랑크인들과 연합했다. 안티오크 공국과 트리폴리 백작령의 보헤문트 6세는 자신의 장인인 실리시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 헤툼 1세를 따라 몽골 동맹군에 가담하였다.[73][74] 이 군대는 아이유브 왕조의 시리아 영토를 정복했다. 1260년 2월에 그들은 알레포를 함락했고, 그 해 3월 1일에는 네스토리우스 교도인 키트부카의 지휘 아래 다마스쿠스에 입성했다.[75][76] 그리스도교도들은 우마이야 모스크 (옛 세례 요한의 대성당)에서 이를 축복했으며,[76] 수많은 모스크들이 더럽혀졌다. 많은 역사가들이 묘사한 바에 의하면 세 기독교도 군주(헤툼, 보헤문트, 키트부카)는 함께 다마스쿠스에 입성했다고 한다.[75][77] 이에 대하여 데이비드 모건과 같은 근세의 사학자들은 출처가 의심스럽다고 하였다.[78]

이 침공의 여파는 거의 모든 레반트, 이집트, 아라비아 반도의 강력한 지배자였던 아이유브 왕조를 파멸로 이끌었다. 마지막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안-나시르 유수프는 1260년에 훌라구에 의해 죽었다.[79] 이와 함께 이슬람 문명의 중심부였던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는 약화되었으며, 무슬림들의 권력은 카이로의 맘루크들에게 넘어 가버렸다.

훌라구는 계속하여 팔레스타인을 정복하여 카이로로 향하려고 하였으나, 1259년 8월 11일에 대칸 뭉케가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훌라구는 당시 알레포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후 그가 사루즈와 아흘라트를 거쳐 아제르바이잔으로 동진한 것은 이 때문으로 추측된다.[80] 그러나 몽골로는 가지 않았는데, 이는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사이의 계승 분쟁의 소식을 접하고 쿠릴타이 참석의 무의미함을 인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러면서도 동방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81]

훌라구는 남은 점령지에 1만 명 정도의 군대와 함께 키트부카에게 맡겼다. 키트부카의 군대는 여전히 남쪽의 카이로를 향해 진격하여 아스칼론과 예루살렘에 다다르고 있었고, 1000여 명의 몽골 분견대 2개가 가자[82][83][84]나블루스를 점령했다.[85]

투르크인 맘루크들의 군대는 약화된 키트부카의 군대보다 유리했다. 십자군은 전통적인 적인 맘루크보다 몽골군을 더 위험하게 생각했다. 무슬림과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토의는 (기독교도들이) 몽골군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지어졌으나, 무슬림들은 이 행동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되든 아크레의 프랑크인들은 맘루크들이 자기네 영토를 통과하고, 아크레 부근에서 보급하는 것을 용인하였다.[86] 덕분에 맘루크들은 시리아에 남은 몽골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맘루크들은 중대한 승리를 거머쥐었고, 키트부카는 처형 당했으며 몽골 제국의 정복은 정점에 이르렀다. 이 이전의 전투들에서의 (몽골 제국의) 실패는 언제나 회복되었으나,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한 것들은 영원한 것이었다. 남은 13세기 동안 몽골인들은 시리아에 대해서 여러 차례 침공을 시도하여 영토를 확보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는 몇 달 가지 못 했다. 일 칸국의 서쪽 영토의 경계는 훌라구의 왕조가 끝나는 순간까지 티그리스 강까지였다.

1260년, 몽골군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헤툼 1세의 군대와 보에몽 6세의 프랑크 기사단을 포함한 지역 내 그리스도교 봉신들의 군대와 합세하였다. 이 연합군은 아유브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무슬림 시리아를 정복하였다. 그들은 알레포를 공성전으로 함락시켰고, 기독교 장군 키트부카의 지휘하에 1260년 3월 1일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였다. 우마이야 모스크에서 기독교 미사가 거행되었고 수많은 모스크가 신성 모독을 당했다. 많은 역사적 기록들은 세 명의 기독교 지도자 헤툼, 보에몽, 그리고 키트부카가 다마스쿠스에 함께 승리의 행진으로 입성했다고 묘사한다.[14] 그러나 데이비드 모건과 같은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위서로 의심하고 있다.

이 침략은 그 당시 레반트, 이집트,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던 강력한 왕조였던 아유브 왕조를 효과적으로 붕괴시켰다. 마지막 아유브 왕조의 왕인 안-나시르 유수프는 같은 해에 훌라구에게 살해당했다.[15] 바그다드가 황폐해지고 다마스쿠스가 약화되면서 이슬람 세력의 중심은 맘루크 술탄국의 수도인 카이로로 이동하였다.

훌라구는 팔레스타인을 통해 남쪽으로 카이로를 향해 군대를 파병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절을 통해 카이로에 있는 맘루크 술탄 쿠투즈에게 위협적인 편지를 보내 쿠투즈가 그의 도시를 열지 않으면 바그다드처럼 파괴될 것이라고 요구했다. 그런 다음 시리아의 식량과 사료가 그의 모든 군대를 공급하기에 불충분해졌고, 여름 동안 군대를 시원한 고지대로 이동시키는 것이 몽골의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에,[16] 훌라구는 주력 군대를 아제르바이잔 근처 이란으로 철수시켰고, 키트부카의 지휘하에 1만 명(혹은 그 이하)의 투멘(1만 명)과 아르메니아, 조지아, 프랑크 자원봉사자들을 남겨두었다. 훌라구는 이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훌라구는 그 후 8개월 전에 사망한 대칸 몽케의 죽음으로 인한 제국 계승 분쟁에서 그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몽골로 떠났다. 그러나 그 지역에 남아 있는 몽골인의 수가 얼마나 적은지 소식을 듣자, 쿠투즈는 급히 카이로에서 잘 훈련되고 장비가 잘 갖춰진 2만 명의 군대를 소집하여 팔레스타인을 침략하였다.[17] 그런 다음 그는 시리아의 동료 맘루크 지도자인 바이바르스와 동맹을 맺었는데, 바이바르스는 몽골로부터 자신의 미래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마스쿠스 점령, 바그다드 약탈, 시리아 정복에 대한 이슬람의 복수를 갈망했다.

몽골인들은 한편으로는 아크레를 중심으로 남아 있던 십자군 왕국과 프랑크-몽골 동맹을 형성하려고 시도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복종을 요구했지만, 알렉산데르 4세는 그러한 동맹을 금지했다. 시돈의 줄리안이 키트부카의 손자 중 한 명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건을 일으키면서 프랑크족과 몽골족 간의 긴장도 고조되었다. 화가 난 키트부카는 시돈을 약탈했다. 몽골인들과 접촉한 아크레의 남작들은 또한 몽골인에 대항하여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맘루크족에게도 접근했다. 맘루크족은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적이었지만, 아크레의 남작들은 몽골인을 더 즉각적인 위협으로 인식했다. 십자군은 어느 편도 들지 않고 두 세력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례적인 행보로 이집트 맘루크족이 십자군 영토를 통과하여 북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고, 심지어 아크레 근처에 진을 치고 보급을 받도록 허용했다.

3. 2. 일 칸국 건설과 통치 (1260년 ~ 1265년)

1259년 몽케 칸이 사망하고,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사이에 계승 분쟁이 벌어졌다. 훌라구는 처음에는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87]

1260년 3월, 쿠빌라이는 베이징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임을 선포했다. 훌라구는 쿠빌라이를 지지하며, 주치 울루스 측 장군들을 참살했다. 이로 인해 훌라구 휘하의 주치 울루스 측 병사들 가운데 일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서북방, 카프카스 산맥 이북의 주치 울루스 령,[81] 또는 이집트의 맘룩들에게로 도망쳤다.[88]

훌라구는 주치 울루스에게 속한 서아시아 지역에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 이 때문에 1262년 주치 울루스의 베르케는 훌라구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벨케-훌라구 전쟁)

3. 2. 1. 킵차크 칸국과의 전쟁

1262년 주치 울루스의 베르케(바투의 동생이자 후계자)는 훌라구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남하를 시작했다.[89] 베르케의 조카 노가이가 이끄는 킵차크 군대는 훌라구의 영토를 약탈했다. 훌라구는 노가이를 격퇴하고, 그 해 11월에서 12월에는 카프카스 산맥을 넘었으나 그 이듬해에 테렉 부근에서 노가이의 기습을 받아 아제르바이잔으로 퇴각했다. 이 전쟁은 몽골의 칸국 사이에서 일어난 최초의 것이었다.

훌라구는 쿠빌라이 칸이 대칸으로 즉위하자, 1262년 자신의 영토로 돌아왔다. 그러나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고 아인잘루트 전투에서의 패배를 갚기 위해 군대를 집결했지만, 바투 칸의 형제 벨케와의 내전에 휘말렸다. 벨케 칸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칭기즈 칸의 손자였는데,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함락한 것에 분노하여 복수를 다짐했고 맘루크 왕조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노가이 칸이 이끄는 대규모의 훌라구 영토 침략을 시작했다. 훌라구는 1263년 카프카스 북부 침공 시도에서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이는 몽골인들 사이 최초의 공공연한 전쟁이었으며 통일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훌라구는 벨케의 오르토를 죽였고, 벨케도 마찬가지로 보복했다.[18]

벨케는 이슬람교도였지만, 몽골 형제애 때문에 처음에는 훌라구와 싸우는 것을 주저했다. 그는 "몽골인들은 몽골의 칼에 죽습니다. 만약 우리가 단결했다면, 우리는 전 세계를 정복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칸국의 행동으로 인한 골든 호드의 경제적 상황, 일칸국이 북부 이란의 부를 독차지하고 있었던 점, 골든 호드가 마멜루크 왕조에 노예를 팔지 말라는 일칸국의 요구 때문에 그는 지하드를 선포하게 되었다.[19]

3. 2. 2. 문화와 과학 후원

훌레구는 나시르 앗딘 투시와 그의 마라가 천문대 연구를 후원했다. 주바이니 형제인 아타 멀리크 주바이니와 샴스 앗딘 주바이니도 훌레구의 후원을 받았다. 일칸국의 통치자로서 그의 통치는 평화로웠고 다양성에 관용적이었다.[27] 훌레구 왕조 시대에 이란 역사가들은 아랍어 대신 페르시아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25]

훌레구는 죽음이 가까워지자 불교로 개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도쿠즈 카툰의 의지와는 상반된다. 호이에 세워진 불교 사찰은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가졌음을 증명한다.[4] 최근 다양한 티베트 승려들이 훌레구에게 보낸 편지와 서한 번역을 통해 그가 평생 카규파 불교를 따랐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26]

또한, 훌레구는 아제르바이잔 지방의 고도인 마라가(麻拉格)에 대규모 천문대와 복합 시설을 건설하고, 당대의 대학자였던 나시르 앗딘 앗 투시(那西爾丁·圖西)에게 『일한 천문표(伊兒汗天文表)』를 작성하게 하였다.

3. 3. 죽음

1265년 2월 8일 훌라구는 마라가 부근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은 우르미아호의 카보우디 섬에 묻혔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인신 공양이 행해졌다고 한다.[91] 그의 서장자[92]인 아바카가 그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훌라구 칸은 1265년 1월 중병에 걸려 다음 달 자리네 강(당시 자가투 강이라 불림) 기슭에서 사망하였고, 우르미아 호의 샤히 섬에 매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킵차크 칸국 장례식 중 유일하게 인신 공양이 행해진 장례식이었다.[23] 그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24]

4. 유럽과의 교류

훌라구는 무슬림에 대항한 프랑크-몽골 동맹의 성립을 위해 여러 차례 유럽과 교류를 시도했다. 1262년 그는 "해외의 모든 왕과 왕자"에게 자신의 비서인 리칼두스를 사절로 파견했다. 그러나 사절들은 시칠리아의 왕 만프레드에게 붙잡혀 강제 송환 당했다. 만프레드는 당시 교황 우르바노 4세와 대립하고, 맘루크들과 동맹을 맺었다.[93]

1262년 4월 10일, 훌라구는 헝가리인 존을 통해 프랑스의 왕 루이 9세에게 동맹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다.[93] 그러나 이 편지가 파리의 루이 9세에게 전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사본만이 오스트리아 에 전해질 따름이다. 이 편지에서 훌라구는 교황의 이익을 위해서 예루살렘을 정복하겠다고 제안했으며, 루이 9세에게는 이집트에 대항해서 함대를 보낼 것을 제의했다.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훌라구와 그의 후계자들은 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13세기 서방에서는 몽골 문화가 유행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많은 신생아들이 몽골 지도자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칸 그란데(대칸), 알라오네(훌라구), 아르곤(아르군), 카사노(가잔) 등이 그 예이다.[94]

5. 유산

훌라구는 일칸국을 창조하였으며, 이는 후의 사파비 왕조와 현대 이란의 탄생을 용이하게 하였다. 훌라구의 정복은 페르시아 땅을 통해 유럽과 중국 간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했는데, 이는 이란 특유의 건축 양식을 더욱 발달시켰다. 훌라구 왕조 치하에서 페르시아인 역사가들은 이전과는 달리 아랍어가 아닌 페르시아어로 책을 쓰게 되었다.[95]

훌라구는 일칸국의 기반을 마련하여 후대의 사파비 왕조 국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현대 이란의 길을 열었다. 훌라구의 정복으로 이란은 서쪽의 유럽과 동쪽의 불교의 영향 모두에 개방되었다. 그의 후계자들의 후원과 결합되어 이란 건축의 독특한 탁월성이 발전하게 되었다. 훌라구 왕조 시대에 이란 역사가들은 아랍어 대신 페르시아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25] 그는 죽음이 가까워지자 불교로 개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도쿠즈 카툰의 의지와는 상반되었다. 호이에 세워진 불교 사찰은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가졌음을 증명한다.[4] 최근 다양한 티베트 승려들이 훌라구에게 보낸 편지와 서한의 번역을 통해 그가 평생 카규파 불교를 따랐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26]

훌라구는 또한 나시르 앗딘 투시와 그의 마라가 천문대 연구를 후원했다. 그의 다른 후원자로는 주바이니 형제인 아타 멀리크 주바이니와 샴스 앗딘 주바이니가 있었다. 일칸국의 통치자로서 그의 통치는 평화로웠고 다양성에 관용적이었다.[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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