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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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목민은 농업보다 늦게 나타난 생활 방식으로, 가축을 기르며 이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유목 생활은 신석기 혁명과 농업의 발달로 시작되었으며, 가축을 이용해 육류, 가죽, 양모 등의 부산물을 얻어 도시와 교역하며 공생했다. 기원전 500년경 유라시아 지역에 유목민이 존재했으며, 중앙아시아 유목민은 비단길을 통해 곡물의 전파에 기여하고, 기마술과 궁술을 활용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했다. 몽골 제국과 같은 유목 국가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총포 화기의 발달로 군사적 우위는 쇠퇴했다. 유목민은 정기적인 계절 이동, 가축을 통한 생존, 교역의 중요성, 그리고 실력주의, 여성의 높은 지위, 뛰어난 군사력 등의 특징을 가진다. 유목민의 분포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광범위하며, 국경을 넘는 유목은 식량 안보와 지역 통합에 기여하지만, 질병 확산과 같은 위험도 존재한다. 몽골의 유목민들은 고기, 유제품, 쿠미스를 주식으로 하며, 2024년 몽골의 유목과 관련된 관습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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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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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정의 | 가축을 기르며 정기적으로 이동하는 목축 형태 |
다른 이름 | 유목 유목민 유목 생활 유목 목축 |
관련 분야 | 목축업, 농업, 인류학 |
특징 | |
목적 | 가축을 위한 신선한 목초지 찾기 |
이동 | 계절적 또는 정기적인 이동 |
가축 종류 | 소 양 염소 낙타 말 야크 순록 |
이동 범위 | 단거리 이동 장거리 이동 |
사회 구조 | 부족 사회 친족 중심 사회 |
환경 적응 | 건조 지역, 반건조 지역, 산악 지역 등 |
역사 | |
기원 | 농경 발달 이전 또는 초기 농경 사회 |
발전 | 신석기 시대 이후 고대 문명 사회 |
현대의 도전 | 기후 변화 토지 이용 변화 정부 정책 |
영향 | |
환경 | 목초지 관리 토양 침식 사막화 |
경제 | 식량 공급 가축 제품 생산 지역 경제 활동 |
사회 문화 | 전통 문화 보존 고유 생활 방식 |
주요 지역 | |
아프리카 | 사하라 사막 주변 동아프리카 |
아시아 | 중앙아시아 티베트 고원 몽골 중국 북부 |
유럽 | 북부 스칸디나비아 러시아 일부 지역 |
기타 | 중동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
관련 용어 | |
유목민 | 유목 생활을 하는 사람 |
반유목 | 정착 생활과 유목 생활을 병행 |
목축 | 가축을 기르는 행위 |
방목 | 가축을 풀어 기르는 행위 |
목초지 | 가축이 풀을 뜯는 장소 |
참고 문헌 | |
주요 출처 | Roger Blench, "Pastoralists in the new millennium" (FAO, 2001) Elizabeth Pollard, Clifford Rosenberg, and Robert Tignor, "Worlds Together Worlds Apart" (W.W. Norton & Company, 2015) |
추가 출처 | Peter Ho & Hossein Azadi, "Rangeland degradation in North China: Perceptions of pastoralists" (Environmental Research, 2010) P. Ho, "Rangeland Degradation in North China Revisited? A Preliminary Statistical Analysis to Validate Non-Equilibrium Range Ecology" (The Journal of Development Studies, 2001) |
2. 유목의 기원과 역사
유목은 신석기 혁명과 농업의 발흥으로 인한 결과였다. 신석기 혁명 동안 인류는 식량을 위해 가축과 식물을 길들이기 시작했고 도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유목민은 일반적으로 정착 문화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가축 제품(고기, 가죽, 양모, 치즈 및 기타 가축 제품)을 유목민이 생산하지 않는 제조품과 교환해왔다. 앙리 플레슈는 레바논의 목축 신석기 산업이 후기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베카 계곡의 최초의 유목민 목자 문화 중 하나에 의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험적으로 제시했다.[5][6] 앤드류 셰랫은 "초기 농업 인구는 주로 고기를 위해 가축을 사용했으며, 특히 반건조 지역에서 농업인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함에 따라 다른 용도가 탐구되었다"고 설명한다.[7]
유리스 자린스는 기원전 6200년 기후 위기 이후 시나이 반도의 하리피안 토기 제작 수렵 채집인과 선토기 신석기 B 농업인이 융합하여 무나타[10] 문화를 만들어내면서, 가축 가축화를 기반으로 한 유목 생활 방식이 시작되어 야르무키안[11]으로 발전하고, 그 후 '''아라비아 주변 유목 목축 복합체'''로 확산되어 원셈어를 퍼뜨렸다고 제안했다.[12]
가축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이동시키면서 식생, 물, 광물 등의 자연자원을 이용하는 생활과 생산 방식이다. --
유목민은 정주와 이동을 반복하며, 1년 동안 거주지를 여러 번 이동하면서 주로 목축을 통해 생활한다. 대부분 1가족 또는 수가족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확대가족 단위로 가축 무리를 이끌고, 가축이 목초지의 풀을 다 먹어 없애지 않도록 초지 회복을 기다리며 정기적으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유목민은 정주민들에게는 마치 아무렇게나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는 확대가족별로 고유한 하계 목장, 동계 목장 등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점유 목장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매년 기후 변화와 가축 상황에 맞춰 하계 목장과 동계 목장을 어느 정도 정해진 경로로 순회한다.[31]
유목민이 생활하는 지역은 건조지대, 툰드라 등 대체로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은 혹독한 기후이기 때문에, 가장 혹독한 겨울을 나는 동계 목장에서는 수십에서 수백 가족 단위로 집단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유목민의 또 다른 특징은 생활에 교역 활동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유목 생활에서는 우유, 모피, 고기 등을 얻는 것은 용이하지만, 곡류나 정주를 필요로 하는 고도의 공예품을 안정적으로 얻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대부분 유목민의 목장 근처에는 정주민, 특히 농민의 거주가 필수적이다. 유목민은 이동성을 이용하여 암염이나 모피, 먼 곳의 정주지에서 유목민 사이를 거쳐 전달된 원거리 교역품 등을 대상을 조직하여 운반하고, 정주민과 교역하여 이러한 생활 필수품을 얻어왔다. 언뜻 소박한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목민의 목축도, 염소나 양, 말 등 상품 가치가 높은 가축의 매매에 의해 성립된 부분이 크다.
2024년, 몽골의 유목민의 이주와 관련 관습은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32]
유목민족과 농업민족은 생활 습관으로 구분되는 개념일 뿐, 인종적으로 다른 민족을 나타내는 표현은 아니다. 2차 세계 대전 이전 동아시아에는 유목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한족이 거주하는 지역의 북쪽과 동북쪽에 거주하는 민족을 한족과 문화적·언어적으로 다른 민족이라 하여 이민족이라고 불렀지만, 현대 중국은 이민족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그들이 모두 유목 생활을 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몽골의 주요 생활 습관인 유목도 병행한 민족이라는 점에서 유목민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만주족이나 선비족 등 유목보다 농업을 주로 하게 된 이민족이 더 많았다. 일본 역시 이동하며 수렵 채집을 하던 민족이 일본 환경에 적합한 농업을 하게 되었다. 유목민족도 대부분 농업을 병행한 민족이다. 현재 몽골에서는 환경에 따라 유목이 주를 이루지만, 현재 중국 학계에서 유목민족이라고 불리는 북쪽과 동북쪽의 이민족은 농업도 병행해왔다. 유목은 농업보다 뒤에 나타난 생활 습관이며, 농업을 해오던 민족이 환경에 따라 유목을 하게 된 것이다.[30]
기마유목민은 총포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매우 큰 군사력을 발휘했다. 맨몸의 인간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압도적인 속도와 중량을 겸비한 기병의 일제 돌격은 보병의 진형을 쉽게 흩뜨릴 수 있었다. 당연히 기마궁술에도 뛰어났으며(파르티안샷), 이를 이용한 일격이탈전법은 그들의 가장 뛰어난 전법이었다.
세계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은 북아시아의 몽골 고원에서 중앙아시아, 이란 고원, 아제르바이잔, 카프카스, 킵차크 초원, 아나톨리아를 거쳐 동유럽의 발칸 반도까지 이르는 Y자 형태의 띠 모양으로 펼쳐진 스텝 지대에 있던 기마유목민들이다. 그들은 중국인과 달리 북쪽과 동북쪽에 거주하는 민족으로 유목과 농업을 병행했지만, 중국인보다 유목 생활 습관이 많았기 때문에, 유목민족이라고 불린다. 현재 중국에는 농업민족인 한족의 인구가 많지만, 옛날에는 동북 기마민족(유목민족)과 농업민족의 인구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들은 흉노, 사카, 스키타이 시대부터 파르티아, 선비, 돌궐, 위구르, 셀주크 투르크, 몽골 제국 등을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역의 역사에 관여하며, 유목 생활을 통해 함양된 말의 육성 기술과 기마궁술 기술, 탁월한 이동력과 기병 전술에 뒷받침된 군사력으로 역사를 움직여왔다. 중세 이후에는 경장기병이 기마궁술로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중장기병이 접전에서 적군을 격파하는 전법이 사용되었다. 유목민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가 실크로드 등을 이용하여 교류했고, 중국에서 발명된 것으로 여겨지는 화약 등의 기술이 서쪽으로 전파되었다.
기원전 8세기경 킨메리아인이 남러시아 평원에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문헌 자료에 처음 나타난다. 이어서 스키타이인이 남러시아 평원에 나타난다. 헤로도토스의 저서에 스키타이인에 대한 기록이 유명하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또한 유목민을 지배층으로 한 국가이며, 이후 광역 국가의 원류가 되었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흉노가 중국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3세기에는 이후 유목 국가의 원류가 되는 광역 국가를 형성했다. 서력기원 전후로 이란·이라크를 지배한 유목민계 국가 파르티아는 뛰어난 기마궁술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4세기경 유목민족 훈족이 일으킨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큰 요인이라고 여겨진다. 이후에도 유목민족 유연, 돌궐, 회골, 거란이 강대한 군사력으로 몽골 고원에서 킵차크 초원에 이르는 스텝 지역을 장악했다.
중세 중앙아시아 서부와 동유럽에서는 유목민족 튀르크, 몽골, 아바르, 불가르, 카자르, 킵차크, 페체네그, 마자르 등 여러 세력·부족이 패권을 다투었다.
13세기경 몽골 제국은 몽골 고원, 중국, 중앙아시아, 이란, 이라크, 아나톨리아, 동유럽을 지배하는 등 강대한 군사력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했다. 몽골 고원에 분할되어 있던 유목민 부족은 "몽골", "메르키트", "나이만", "케레이트", "타이치우트" 등이다.
몽골 제국은 결국 분열·붕괴되었지만 14세기 후반에는 그 계승을 자처하는 티무르 제국이 투란, 마와라안나흐르, 호라산, 힌두스탄, 이란, 이라크를 지배했고, 16세기에는 그 계승 정권으로 무굴 제국이 인도에 건국되었다.
14세기에는 아나톨리아에 오스만 제국이 일어나 동유럽, 흑해 연안,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등을 지배했다.
진 이후 장기간 중국에 있던 왕조, 전한, 신, 후한, 진(서진, 동진), 명 이외의 원, 청 등은 유목민(북쪽과 동북쪽에 거주하는 이민족)의 왕조 그 자체이거나, 그 지배층에 의해 성립되었다. 흉노는 1세기에 남북으로 분열하여, 남흉노는 후한에 복속하고, 북흉노는 후한, 오환, 선비에 압박받아 그 모습을 감추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이 북흉노의 잔당이라는 설은 유명하다. 서진은 남흉노계 유연, 유총에게 멸망당했다(영가의 난). 이 무렵 동아시아에서 등자가 발명되어 기병의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남북조 시대를 거쳐 북조의 각 왕조는 북위(동위, 서위), 북제, 북주 및 수를 세운 양견과 당을 세운 이연도 한화된 선비계라고 여겨진다.[33][34][35] 또 어떤 학자는 조광윤이 세운 송(북송, 남송) 한족 왕조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36] 원은 유목민의 제국인 몽골 제국 일부로, 군사력으로 많은 몽골 집단을 종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목민의 군사적 활약은 철포나 대포 등 총포 화기가 발달함에 따라 쇠퇴해 간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정거리, 연사 속도를 높인 철포의 일제 사격은 기병의 돌격을 기마궁술의 사정거리 밖에서도 반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또한 대포는 경량화, 고성능화되어 여러 장소에 배치할 수 있게 되어 유목민의 진지도 빠르게, 원거리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전술도 발전하여 삼군전술의 개념이 고안되었고, 기병에만 치우친 유목민의 전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또한 농민들은 경제, 과학력을 발전시켜 합리성에 따라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시의 행정 기구는 유목민의 약탈을 쉽게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2. 1. 고고학적 증거

유목은 신석기 혁명과 농업의 탄생의 결과였다. 신석기 혁명으로 인류는 동식물을 길들여 가축과 작물로 삼고 도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초기 유목민들은 자기들이 생산한 산물(고기, 가죽, 양모, 치즈 등의 동물 부산물)을 도시에서 생산되는 물건과 교환하며 공생하였다.
과거에는 유목민들이 고고학적으로 존재감이 미미하거나 빈약했다고 생각되었으나,[8] 근래 이러한 통념은 도전받고 있다. 특히 풍부한 쿠르간 매장유적지를 남긴 유라시아 유목민들은 이러한 통념에 들어맞지 않는다. 유목민 유적지는 농경지대 밖에 위치한 점, 곡물 가공장비가 부재하는 점, 건축의 특징이 제한적인 점, 양과 염소의 뼈가 많이 나오는 점, 현대 유목민족에 대한 민족지학적 유추 등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9]
청동기시대 중앙아시아 유목민은 향후 비단길의 중심이 되는 이 지역을 오가며 기장과 밀 곡물의 최초 전파에 관여했다.[50] 폰토스-카스피 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인도유럽 제족이 얌나야 스텝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유라시아 곳곳에 인도유럽어족이 확산되었다.[51][52] 중앙아시아 유목민 공동체는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단을 보여주며 복합적인 생존전략을 구가했다.
2. 2. 유목의 확산
유목은 신석기 혁명과 농업의 탄생으로 생겨났다. 신석기 혁명으로 인류는 동식물을 길들여 가축과 작물로 삼고 도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초기 유목민들은 고기, 가죽, 양모, 치즈 등의 동물 부산물을 생산하여 도시에서 생산되는 물건과 교환하며 공생하였다.과거에는 유목민들이 고고학적으로 존재감이 미미하거나 빈약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근래 이러한 통념은 도전받고 있으며, 특히 풍부한 쿠르간 매장 유적지를 남긴 유라시아 유목민들은 확실히 이러한 통념에 들어맞지 않는다. 유목민 유적지는 농경지대 밖에 위치한 점, 곡물 가공 장비가 부재하는 점, 건축의 특징이 제한적인 점, 양과 염소의 뼈가 많이 나오는 점, 현대 유목 민족에 대한 민족지학적 유추 등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9]
청동기시대 중앙아시아 유목민은 향후 비단길의 중심이 되는 이 지역을 오가며 기장과 밀 곡물의 최초 전파에 관여했다.[50] 폰토스-카스피 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인도유럽 제족이 얌나야 문화 스텝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유라시아 곳곳에 인도유럽어족이 확산되었다.[51][52] 중앙아시아 유목민 공동체는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단을 보여주며 복합적인 생존 전략을 구가했다.
3. 유목의 특징
유목은 가축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이동시키면서 식생, 물, 광물 등의 자연자원을 이용하는 생활 및 생산 방식이다.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유목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9] 농경민은 재배 식물로, 유목민은 사육 동물로 생활한다. 동물은 먹이 사슬에서 더 높은 위치에 있으므로 유목은 농업보다 적은 인구를 부양한다. 강우량이 적어 농업이 어려운 곳에서는 유목이 주를 이룬다. 완전한 유목은 동물을 고기뿐만 아니라 양모, 우유, 승마, 짐 운반에도 사용하기 시작한 제2차 생산물 혁명이 필요했다. 풀이 부족한 곳에서는 가축을 이동시켜야 하며, 이는 유목으로 이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유목 생활을 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겨울에는 안전한 캠프에서 살다가 여름에는 초원으로 가축을 몰고 간다. 일부 유목민들은 장거리를 이동하는데, 보통 여름에는 북쪽으로, 겨울에는 남쪽으로 이동한다. 산 근처에서는 여름에는 산으로, 겨울에는 산 아래로 가축을 이동시킨다(전이 유목). 유목민들은 종종 농업 사회의 이웃과 무역을 하거나 약탈을 한다.
크리스천은 극북 지역에 소수의 수렵 채집인들이 있는 유목 지역인 '내륙 유라시아'를 유럽에서 인도를 거쳐 중국까지 이어지는 농업 문명의 초승달 모양 지역인 '외곽 유라시아'와 구분했다. 고도의 문명은 농업에 기반을 두는데, 세금을 내는 농민들이 지주 귀족, 왕, 도시, 문자, 학자들을 부양한다. 유목 사회는 덜 발달했고, 그 결과 크리스천에 따르면 더 평등하다. 한 부족이 종종 이웃 부족을 지배하지만, 이러한 '제국'들은 보통 100년 정도 지나면 붕괴되었다. 유목의 중심지는 유라시아 대초원이다. 유라시아 중앙에서 유목은 이란까지 남쪽으로 확장되어 농업 오아시스 도시들을 둘러쌌다. 유목 사회와 농업 사회가 전쟁을 벌일 때, 말을 탄 기동성은 더 많은 수를 상쇄했다. 농업 문명이 대초원을 정복하려는 시도는 지난 수세기까지 대부분 실패했다. 유목민들은 빈번하게 농업 사회의 이웃을 약탈했고, 때로는 정기적으로 공물을 받기도 했다. 특히 중국 북부[20]와 이란에서는 농업 사회를 정복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왕조는 대개 수명이 짧았고, 유목민들이 '문명화'되어 호전적인 덕목을 잃으면 붕괴되었다.
유목민이 생활하는 지역은 건조지대, 툰드라 등 대체로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은 혹독한 기후이기 때문에, 가장 혹독한 겨울을 나는 동계 목장에서는 수십에서 수백 가족 단위로 집단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2024년, 몽골의 유목민의 이주와 관련 관습은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32]
3. 1. 이동 방식
전통적인 유목민 집단은 종종 정기적인 계절 이동 방식인 *전이주*를 따른다. 북반구의 일반적인 유목 순환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이동 거리는 약 180km~200km이다. 유목민은 매년 같은 장소에 야영지를 설치하며, 종종 이 이동 경로의 적어도 한 곳에 반영구적인 숙소를 건설한다.
유목민은 정주와 이동을 반복하며, 1년 동안 거주지를 여러 번 이동하면서 주로 목축을 통해 생활한다. 대부분 1가족 또는 수가족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확대가족 단위로 가축 무리를 이끌고, 가축이 목초지의 풀을 다 먹어 없애지 않도록 초지 회복을 기다리며 정기적으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유목민은 정주민들에게는 마치 아무렇게나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는 확대가족별로 고유한 하계 목장, 동계 목장 등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점유 목장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매년 기후 변화와 가축 상황에 맞춰 하계 목장과 동계 목장을 어느 정도 정해진 경로로 순회한다.[31]
3. 2. 교역의 중요성
유목민은 생활에 교역 활동이 필수적이다. 유목 생활에서는 우유, 모피, 고기 등을 얻기는 쉽지만, 곡류나 정주를 필요로 하는 고도의 공예품을 안정적으로 얻기는 어렵다. 따라서 대부분 유목민의 목장 근처에는 정주민, 특히 농민의 거주가 필수적이다.[31]유목민은 이동성을 이용하여 암염, 모피, 먼 곳의 정주지에서 유목민 사이를 거쳐 전달된 원거리 교역품 등을 대상을 조직하여 운반하고, 정주민과 교역하여 이러한 생활 필수품을 얻어왔다. 언뜻 소박한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목민의 목축도, 염소, 양, 말 등 상품 가치가 높은 가축의 매매에 의해 성립된 부분이 크다.[31]
청동기시대 중앙아시아 유목민은 향후 비단길의 중심이 되는 이 지역을 오가며 기장과 밀 곡물의 최초 전파에 관여했다.[50]
4. 유목민의 분포
유목 목축은 역사적으로 지구의 비옥하지 않은 지역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베두인족이 거주하는 아라비아 반도와 같이 강우량이 적은 지역과 소말리아인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거주하는 동북아프리카(낙타, 소, 양, 염소 유목 목축이 특히 일반적임)에서 발견된다.[21] 사미족, 네네츠족, 추크치족과 같이 기후가 혹독한 북유럽과 러시아 지역에서도 유목 전이목축이 흔하다. 전 세계적으로 약 3천만~4천만 명의 유목민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22] 사우디아라비아(약 3% 미만), 이란(4%), 아프가니스탄(최대 10%)과 같은 국가에서 유목민과 반유목민 목축업자들은 상당하지만 감소하는 소수 민족을 형성한다. 리비아와 모리타니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인구의 2% 미만을 차지한다.[23]
4. 1. 아시아
유라시아 대초원은 선사 시대 후기부터 목축 유목민들이 주로 거주해 왔으며, 주변의 문자를 사용하는 정착 사회가 부여한 이름으로 알려진 여러 민족들이 이어졌다. 여기에는 청동기 시대의 원인도유럽인과 후대의 원인도이란인, 스키타이인, 사르마티아인, 킴메리아인, 마사게타이인, 알란인, 페체네그족, 쿠만족, 킵차크족, 카를루크족, 사카족, 흉노족, 월지, 오손, 저, 선비족, 거란족, 아바르족, 훈족, 몽골족, 준가르족 그리고 다양한 튀르크족이 포함된다.오늘날 몽골, 러시아, 중국에 있는 몽골족과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타타르족 또는 튀르크족은 혹독한 아시아 대초원에서 유목 전이목축을 실천했던 유목민이었다. 이들 인구의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몽골에서는 약 40%의 인구가 여전히 전통적인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24] 중국에서는 500만 명이 넘는 목축업자가 목축 카운티에 분산되어 있으며, 반목축 카운티에는 1,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반)유목 목축업자 인구의 총합이 1,60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외딴 곳에 흩어져 자원이 부족한 지역 사회에 거주한다.[25]
네팔의 중부 산악 지대와 히말라야에서는 해발 약 2,000m 이상의 사람들이 가파른 경사, 서늘한 기온, 제한적인 관개 가능성으로 인해 정착 농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전이목축과 유목 목축을 실천한다. 여름 목초지와 겨울 목초지 사이의 거리는 짧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포카라 근처에서는 해발 약 800m의 계곡이 안나푸르나 히말라야 바로 아래의 고산 목초지에서 20km도 채 되지 않는다. 또는 거리가 100km 이상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포카라에서 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랍티 지대에서 캄 마가르족은 인도 북쪽의 겨울 목초지와 다울라기리 히말라야 남쪽 사면의 여름 목초지 사이에서 가축을 이동한다. 네팔 서부 극지방에서는 고히말라야 사이의 돌포(Dolpo)와 다른 계곡에 사는 티베트인들은 1950~51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후 이 관행이 금지될 때까지 브라마푸트라 분지 상류 평야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가축을 북쪽으로 이동했다.[26]
2024년, 몽골의 유목민의 이주와 관련 관습은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32]
4. 2. 아프리카

유목 목축은 역사적으로 지구의 비옥하지 않은 지역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베두인족이 거주하는 아라비아 반도와 같이 강우량이 적은 지역과 소말리아인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거주하는 동북아프리카(낙타, 소, 양, 염소 유목 목축이 특히 일반적임)에서 발견된다.[21]

차드에서는 자가와족, 투부족, 미미족 등이 유목 목축을 한다. 이집트와 리비아 북쪽에서는 베두인도 목축을 한다.[28]
4. 3. 유럽
유라시아 대초원은 선사 시대 후기부터 목축 유목민들이 주로 거주해 왔으며, 주변의 문자를 사용하는 정착 사회가 부여한 이름으로 알려진 여러 민족들이 이어졌다. 여기에는 청동기 시대의 원인도유럽인과 후대의 원인도이란인, 스키타이인, 사르마티아인, 킴메리아인, 마사게타이인, 알란인, 페체네그족, 쿠만족, 킵차크족, 카를루크족, 사카족, 흉노족, 유목민(Yuezhi), 우손족, 저(Jie people), 선비족, 거란족, 아바르족, 훈족, 몽골족, 준가르족 그리고 다양한 튀르크족이 포함된다.오늘날 몽골, 러시아, 중국에 있는 몽골족과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타타르족 또는 튀르크족은 혹독한 아시아 대초원에서 유목 전이목축을 실천했던 유목민이었다. 이들 인구의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몽골에서는 약 40%의 인구가 여전히 전통적인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24]
북유럽과 러시아의 사미족, 네네츠족, 추크치족과 같이 기후가 혹독한 지역에서도 유목 전이목축은 흔하다.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북부와 러시아의 콜라 반도 원주민인 유목 사미족은 순록을 기반으로 한 유목 전이목축의 한 형태를 실천한다. 14세기와 15세기 순록 개체 수가 충분히 줄어 사미족이 사냥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가족 단위로 조직된 일부 사미족은 순록 목축업자가 되었다. 각 가족은 계절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도착하는 전통적인 영토를 가지고 있다. 지난 세기 동안 순록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한 사미족은 소수에 불과하며, 인구 중 가장 다채로운 부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럽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이목축은 사라지고 있다.[26]
메스타는 양주인(스페인 귀족과 종교 단체)들의 협회였으며, 중세 카스티야에서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메스타는 그들의 유목 가축의 통행권을 보존하기 위해 소작농에 대항하여 행동했다.[27]
5. 국경을 넘는 유목
유목민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거나 무역을 위해 가축 떼를 이끌고 국경을 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활동은 종종 비공식적이어서 국가의 통제 및 규제를 벗어나기 때문에 정부와 긴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동아프리카처럼 국경을 넘는 무역은 식량 가격을 낮추고 식량 안보를 강화하며, 국경 긴장을 완화하고 지역 통합을 촉진하기도 하지만,[29] 질병 확산 위험과 정부의 세수 및 외환 수입 감소 같은 문제점도 있다.[29]
5. 1. 동아프리카의 사례
동아프리카의 유목민들은 가축 떼를 이끌고 새로운 목초지를 찾거나 무역을 위해 국경을 넘나든다. 이러한 활동은 종종 비공식적이어서 국가의 통제와 규제를 벗어나기 때문에 정부와 긴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동아프리카에서는 국경을 넘는 무역의 95% 이상이 비공식적인 경로로 이루어진다. 에티오피아에서 소말리아, 케냐, 지부티로 판매되는 소, 낙타, 양, 염소 등의 가축은 연간 2.5억달러에서 3억달러 사이의 가치를 창출하는데, 이는 공식 수치보다 100배나 더 큰 규모이다.[29]이러한 무역은 식량 가격을 낮추고 식량 안보를 강화하며, 국경 긴장을 완화하고 지역 통합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29] 그러나 규제되지 않고 문서화되지 않은 무역의 특성상 질병이 국경을 넘어 쉽게 확산될 위험이 있으며, 정부는 세수 및 외환 수입 감소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29]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 성장과 식량 안보를 촉진하며 가축의 효과적인 예방 접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무역을 촉진하고 문서화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29] 여기에는 동아프리카의 지역 목축 지역 생계 개선 프로그램(RELPA)의 일환인 가뭄에 대한 지역 회복력 강화(RREAD), 만데라 삼각지대/에티오피아 남부의 생계 개선(ELMT/ELSE), 그리고 유럽연합 인도적 지원 사무소(ECHO)가 자금을 지원하는 지역 생계 옹호 프로젝트(REGLAP)가 포함된다.[29]
6. 유목 사회의 특징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관점)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유목민에 대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설명했다.[19]
- 생계 방식: 농경민은 재배 식물을 통해, 유목민은 사육 동물을 통해 생활한다. 동물은 먹이 사슬에서 더 높은 위치에 있으므로 유목은 농업보다 적은 인구를 부양한다.
- 지리적 조건: 강우량이 적어 농업이 어려운 곳에서 유목이 주로 이루어진다.
- 2차 생산물 혁명: 완전한 유목은 동물을 고기뿐만 아니라 양모, 우유, 승마, 짐 운반에도 사용하기 시작한 제2차 생산물 혁명 이후에 가능해졌다.
- 이동: 풀이 부족한 곳에서는 가축을 이동시켜야 하며, 이는 유목 생활 방식으로 이어진다. 일부 유목민은 계절에 따라 장거리를 이동하기도 한다. (전이 유목)
- 농경 사회와의 관계: 유목민들은 종종 농업 사회와 무역을 하거나 약탈을 하기도 한다.
크리스천은 '내륙 유라시아'(극북 지역에 소수의 수렵 채집인들이 있는 유목 지역)와 '외곽 유라시아'(유럽에서 인도를 거쳐 중국까지 이어지는 농업 문명의 초승달 모양 지역)를 구분했다. 그는 농업에 기반을 둔 문명은 세금을 내는 농민들이 지주 귀족, 왕, 도시, 문자, 학자들을 부양하는 구조인 반면, 유목 사회는 덜 발달했고, 그 결과 더 평등하다고 보았다.
유목 사회는 부족 단위로 구성되며, 한 부족이 종종 이웃 부족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제국'들은 보통 100년 정도 지나면 붕괴되는 경향을 보였다. 유라시아 대초원은 유목의 중심지이며, 유라시아 중앙에서 이란까지 남쪽으로 확장되어 농업 오아시스 도시들을 둘러쌌다. 유목 사회와 농업 사회 간의 전쟁에서, 말을 탄 기동성은 더 많은 수를 상쇄하는 역할을 했다. 지난 수세기까지 농업 문명이 대초원을 정복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유목민들은 농업 사회를 약탈하고, 공물을 받기도 했다. 특히 중국 북부[20]와 이란에서는 농업 사회를 정복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왕조는 대개 수명이 짧았고, 유목민들이 '문명화'되어 호전적인 특징을 잃으면 붕괴되었다.
6. 1. 군사적 특징
기마유목민은 총포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매우 큰 군사력을 발휘했다. 맨몸의 인간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압도적인 속도와 중량을 겸비한 기병의 일제 돌격은 보병의 진형을 쉽게 흩뜨릴 수 있었다. 당연히 기마궁술에도 뛰어났으며(파르티안샷), 이를 이용한 일격이탈전법은 그들의 가장 뛰어난 전법이었다.[30]세계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은 북아시아의 몽골 고원에서 중앙아시아, 이란 고원, 아제르바이잔, 카프카스, 킵차크 초원, 아나톨리아를 거쳐 동유럽의 발칸반도까지 이르는 Y자 형태의 띠 모양으로 펼쳐진 스텝 지대에 있던 기마유목민들이다. 그들은 흉노, 사카, 스키타이 시대부터 파르티아, 선비, 돌궐, 위구르, 셀주크 투르크, 몽골 제국 등을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역의 역사에 관여하며, 유목 생활을 통해 함양된 말의 육성 기술과 기마궁술 기술, 탁월한 이동력과 기병 전술에 뒷받침된 군사력으로 역사를 움직여왔다. 중세 이후에는 경장기병이 기마궁술로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중장기병이 접전에서 적군을 격파하는 전법이 사용되었다. 유목민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가 실크로드 등을 이용하여 교류했고, 중국에서 발명된 것으로 여겨지는 화약 등의 기술이 서쪽으로 전파되었다.[30]
서력기원 전후로 이란·이라크를 지배한 유목민계 국가 파르티아는 뛰어난 기마궁술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4세기경 유목민족 훈족이 일으킨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큰 요인이라고 여겨진다. 이후에도 유목민족 유연, 돌궐, 회골, 거란이 강대한 군사력으로 몽골 고원에서 킵차크 초원에 이르는 스텝 지역을 장악했다.[30]
중세 중앙아시아 서부와 동유럽에서는 유목민족 튀르크, 몽골, 아바르, 불가르, 카자르, 킵차크, 페체네그, 마자르 등 여러 세력·부족이 패권을 다투었다.[30]
13세기경 몽골 제국은 몽골 고원, 중국, 중앙아시아, 이란, 이라크, 아나톨리아, 동유럽을 지배하는 등 강대한 군사력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했다. 몽골 고원에 분할되어 있던 유목민 부족은 "몽골", "메르키트", "나이만", "케레이트", "타이치우트" 등이다.[30]
몽골 제국은 결국 분열·붕괴되었지만 14세기 후반에는 그 계승을 자처하는 티무르 제국이 투란, 마웨라안나흐르, 호라산, 힌두스탄, 이란, 이라크를 지배했고, 16세기에는 그 계승 정권으로 무굴 제국이 인도에 건국되었다.[30]
14세기에는 아나톨리아에 오스만 제국이 일어나 동유럽, 흑해 연안,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등을 지배했다.[30]
진 이후 장기간 중국에 있던 왕조, 전한, 신, 후한, 진(서진, 동진), 명 이외의 원, 청 등은 유목민(북쪽과 동북쪽에 거주하는 이민족)의 왕조 그 자체이거나, 그 지배층에 의해 성립되었다. 흉노는 1세기에 남북으로 분열하여, 남흉노는 후한에 복속하고, 북흉노는 후한, 오환, 선비에 압박받아 그 모습을 감추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이 북흉노의 잔당이라는 설은 유명하다. 서진은 남흉노계 유연, 유총에게 멸망당했다(영가의 난). 이 무렵 동아시아에서 등자가 발명되어 기병의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남북조 시대를 거쳐 북조의 각 왕조는 북위(동위, 서위), 북제, 북주 및 수를 세운 양견과 당을 세운 이연도 한화된 선비계라고 여겨진다.[33][34][35] 또 어떤 학자는 조광윤이 세운 송(북송, 남송) 한족 왕조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36] 원은 유목민의 제국인 몽골 제국 일부로, 군사력으로 많은 몽골 집단을 종속시키고 있다.[30]
그러나 이러한 유목민의 군사적 활약은 철포나 대포 등 총포 화기가 발달함에 따라 쇠퇴해 간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정거리, 연사 속도를 높인 철포의 일제 사격은 기병의 돌격을 기마궁술의 사정거리 밖에서도 반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또한 대포는 경량화, 고성능화되어 여러 장소에 배치할 수 있게 되어 유목민의 진지도 빠르게, 원거리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전술도 발전하여 삼군전술의 개념이 고안되었고, 기병에만 치우친 유목민의 전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30]
7. 중앙 유라시아 유목민의 문화
중앙 유라시아 유목 기마민족은 공통된 문화적 특징을 가지는데, 이는 인구가 적어 생기는 합리성에 기반한다.[37]
특징 | 내용 |
---|---|
실력주의 | |
전쟁에서 인명(인재) 존중 | |
비완결 사회 | 사회 유지를 위해 비유목 세계의 기술, 제품, 세금이 필요하므로 영역 내에 농경 도시를 병합한다. |
이러한 유목 문화는 현대 국가 사회, 산업 사회에서 그 관습이 말살되는 경향이 있다. 그 원인은 현대적인 민족관, 국가관과 유목민의 집단 편성 원리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37]
병합하는 농경 도시가 증가하고 지배하의 도시 간에 무역 등으로 문화적, 경제적으로 통합됨으로써 광역 국가가 발생한다.[37]
7. 1. 사회적 특징
유목민은 1년 동안 거주지를 여러 번 이동하면서 주로 목축을 통해 생활하며, 1가족 또는 수가족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확대가족 단위로 가축 무리를 이끈다. 이들은 가축이 목초지의 풀을 다 먹어 없애지 않도록 초지 회복을 기다리며 정기적으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31]유목민이 마치 아무렇게나 이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확대가족별로 고유한 하계 목장, 동계 목장 등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점유 목장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매년 기후 변화와 가축 상황에 맞춰 하계 목장과 동계 목장을 어느 정도 정해진 경로로 순회한다.[31] 유목민이 생활하는 지역은 건조지대, 툰드라 등 대체로 농경에 적합하지 않은 혹독한 기후이기 때문에, 가장 혹독한 겨울을 나는 동계 목장에서는 수십에서 수백 가족 단위로 집단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유목민의 생활에는 교역 활동이 필수적이다. 유목 생활에서는 우유, 모피, 고기 등을 얻기 쉽지만, 곡류나 정주를 필요로 하는 고도의 공예품을 안정적으로 얻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대부분 유목민의 목장 근처에는 정주민, 특히 농민의 거주가 필수적이다. 유목민은 이동성을 이용하여 암염, 모피, 먼 곳의 정주지에서 유목민 사이를 거쳐 전달된 원거리 교역품 등을 대상을 조직하여 운반하고, 정주민과 교역하여 이러한 생활 필수품을 얻어왔다. 언뜻 소박한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목민의 목축도, 염소, 양, 말 등 상품 가치가 높은 가축 매매에 의해 성립된 부분이 크다.
유목민 집단에서는 동맹 체결, 지도자 가계의 혼인을 통한 구성원 및 가축 무리의 지참금적 분할 합류, 또는 정치·군사적 이유로 다른 집단의 지배하에 통합되는 등 언어나 조상 계보를 달리하는 다른 집단과의 융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또한, 지도자 가계에서 새로운 세대의 독립 등에 의한 집단 분열도 일상적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조상, 언어, 문화를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근현대적 민족관과 유목민 집단의 통합 의식, 동족 의식에는 매우 이질적인 면이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중앙아시아에 분포하는 많은 튀르크계 “민족”( 우즈베크인, 타타르인 등)은 중세 몽골 제국에서 칭기스칸 일족이나 몽골 고원 출신 무장의 지휘 하에 재편성된 중앙아시아의 튀르크·몽골계 유목민 집단에 기원을 갖는다.
실제로 개별 유목 집단은 이동 생활 구성원 자체가 복합적인 종족 구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계(冬營地)에서 여름철 빈자리를 지키는 인력이나 농경 인력을 포함한다. 유목 국가급 대집단이 되면 지원 기지로 도시를 건설하여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관료 조직이나 수공업 조직을 배치하는 등 다종족 복합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유목 국가의 인공 도시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모뉴먼트적인 과시 도시로서의 의미가 강하며, 그 전형은 위구르의 오르도 발리크나 원의 대도이다.
7. 2. 군사적 특징
기마유목민은 총포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매우 큰 군사력을 발휘했다. 맨몸의 인간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압도적인 속도와 중량을 겸비한 기병의 일제 돌격은 보병의 진형을 쉽게 흩뜨릴 수 있었다. 당연히 기마궁술에도 뛰어났으며(파르티안샷), 이를 이용한 일격이탈전법은 그들의 가장 뛰어난 전법이었다.[30]세계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은 북아시아의 몽골 고원에서 중앙아시아, 이란 고원, 아제르바이잔, 카프카스, 킵차크 초원, 아나톨리아를 거쳐 동유럽의 발칸 반도까지 이르는 Y자 형태의 띠 모양으로 펼쳐진 스텝 지대에 있던 기마유목민들이다. 이들은 흉노, 사카, 스키타이 시대부터 파르티아, 선비, 돌궐, 위구르, 셀주크 투르크, 몽골 제국 등을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역의 역사에 관여하며, 유목 생활을 통해 함양된 말의 육성 기술과 기마궁술 기술, 탁월한 이동력과 기병 전술에 뒷받침된 군사력으로 역사를 움직여왔다. 중세 이후에는 경장기병이 기마궁술로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중장기병이 접전에서 적군을 격파하는 전법이 사용되었다. 유목민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가 실크로드 등을 이용하여 교류했고, 중국에서 발명된 것으로 여겨지는 화약 등의 기술이 서쪽으로 전파되었다.[30]
서력기원 전후로 이란·이라크를 지배한 유목민계 국가 파르티아는 뛰어난 기마궁술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4세기경 유목민족 훈족이 일으킨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큰 요인이라고 여겨진다. 이후에도 유목민족 유연, 돌궐, 회골, 거란이 강대한 군사력으로 몽골 고원에서 킵차크 초원에 이르는 스텝 지역을 장악했다.[30]
중세 중앙아시아 서부와 동유럽에서는 유목민족 튀르크, 몽골, 아바르, 불가르, 카자르, 킵차크, 페체네그, 마자르 등 여러 세력·부족이 패권을 다투었다.[30]
13세기경 몽골 제국은 몽골 고원, 중국, 중앙아시아, 이란, 이라크, 아나톨리아, 동유럽을 지배하는 등 강대한 군사력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했다. 몽골 고원에 분할되어 있던 유목민 부족은 "몽골", "메르키트", "나이만", "케레이트", "타이치우트" 등이다.[30]
몽골 제국은 결국 분열·붕괴되었지만 14세기 후반에는 그 계승을 자처하는 티무르 제국이 투란, 마웨라안나흐르, 호라산, 힌두스탄, 이란, 이라크를 지배했고, 16세기에는 그 계승 정권으로 무굴 제국이 인도에 건국되었다.[30]
14세기에는 아나톨리아에 오스만 제국이 일어나 동유럽, 흑해 연안,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등을 지배했다.[30]
진 이후 장기간 중국에 있던 왕조, 전한, 신, 후한, 진(서진, 동진), 명 이외의 원, 청 등은 유목민(북쪽과 동북쪽에 거주하는 이민족)의 왕조 그 자체이거나, 그 지배층에 의해 성립되었다. 흉노는 1세기에 남북으로 분열하여, 남흉노는 후한에 복속하고, 북흉노는 후한, 오환, 선비에 압박받아 그 모습을 감추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이 북흉노의 잔당이라는 설은 유명하다. 서진은 남흉노계 유연, 유총에게 멸망당했다(영가의 난). 이 무렵 동아시아에서 등자가 발명되어 기병의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남북조 시대를 거쳐 북조의 각 왕조는 북위(동위, 서위), 북제, 북주 및 수를 세운 양견과 당을 세운 이연도 한화된 선비계라고 여겨진다.[33][34][35] 또 어떤 학자는 조광윤이 세운 송(북송, 남송) 한족 왕조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36] 원은 유목민의 제국인 몽골 제국 일부로, 군사력으로 많은 몽골 집단을 종속시키고 있다.[30]
그러나 이러한 유목민의 군사적 활약은 철포나 대포 등 총포 화기가 발달함에 따라 쇠퇴해 간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정거리, 연사 속도를 높인 철포의 일제 사격은 기병의 돌격을 기마궁술의 사정거리 밖에서도 반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또한 대포는 경량화, 고성능화되어 여러 장소에 배치할 수 있게 되어 유목민의 진지도 빠르게, 원거리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전술도 발전하여 삼군전술의 개념이 고안되었고, 기병에만 치우친 유목민의 전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또한 농민들은 경제, 과학력을 발전시켜 합리성에 따라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시의 행정 기구는 유목민의 약탈을 쉽게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30]
7. 3. 유목 국가의 특징
유목민은 주로 목축을 하며 1년 동안 여러 번 거주지를 이동하며 생활한다. 이들은 확대가족 단위로 가축 무리를 이끌고 초지 회복을 위해 정기적으로 이동한다.[31] 유목민은 무작위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족별로 고유한 하계 및 동계 목장을 가지고 정해진 경로로 순회한다.[31]유목민이 생활하는 지역은 건조지대, 툰드라 등 농경에 부적합한 혹독한 기후이므로, 겨울에는 수십에서 수백 가족 단위로 집단 생활을 하기도 한다.
유목 생활에서는 우유, 모피, 고기 등은 얻기 쉽지만, 곡물이나 공예품은 얻기 어렵다. 따라서 유목민은 농민과 같은 정주민과의 교역이 필수적이다. 이들은 이동성을 활용하여 암염, 모피, 원거리 교역품 등을 운반하고 정주민과 교역하여 생활 필수품을 얻는다. 유목민의 목축도 염소, 양, 말 등 상품 가치가 높은 가축 매매를 통해 이루어지는 부분이 크다.
기마유목민은 총포 시대 이전까지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했다. 기병의 돌격은 보병 진형을 쉽게 무너뜨렸고, 기마궁술과 일격이탈전법은 뛰어난 전술이었다.
북아시아의 몽골 고원에서 동유럽의 발칸 반도까지 이르는 스텝 지대의 기마유목민들은 흉노, 스키타이 시대부터 몽골 제국 등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뛰어난 기마술과 기병 전술을 바탕으로 역사를 움직였다. 중세 이후에는 경장기병이 기마궁술로 적을 혼란시키고, 중장기병이 적을 격파하는 전법이 사용되었다. 유목민은 실크로드 등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교류하게 했고, 화약 등의 기술이 서쪽으로 전파되는데 기여했다.
서력기원 전후로 이란·이라크를 지배한 유목민계 국가 파르티아는 뛰어난 기마궁술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4세기경 유목민족 훈족이 일으킨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로마 제국 멸망의 큰 요인으로 여겨진다.
중세 중앙아시아 서부와 동유럽에서는 튀르크, 몽골 등 여러 유목 세력이 패권을 다투었다. 13세기경 몽골 제국은 강대한 군사력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했다. 몽골 제국은 분열되었지만, 14세기 후반에는 티무르 제국이, 16세기에는 무굴 제국이 등장했다. 14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동유럽, 흑해 연안,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등을 지배했다.
진 이후 중국의 여러 왕조 중 원, 청 등은 유목민의 왕조이거나 그 지배층에 의해 성립되었다. 동아시아에서 등자가 발명되어 기병의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수와 당을 세운 이들도 한화된 선비계로 여겨진다.[33][34][35]
그러나 총포 화기가 발달하면서 유목민의 군사적 활약은 쇠퇴한다. 기술 발전으로 철포와 대포가 발달하면서 기병의 돌격은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게 되었다. 또한, 발전된 도시 행정 기구는 유목민의 약탈을 어렵게 만들었다.
유목민 집단은 동맹, 혼인, 정치·군사적 이유 등으로 다른 집단과 융합하거나 분열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근현대적 민족관과 유목민 집단의 통합 의식은 이질적인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우즈베크인, 타타르인 등은 몽골 제국에서 칭기스칸 일족 등의 지휘 하에 재편성된 유목민 집단에 기원을 갖는다.
유목 집단은 복합적인 종족 구성을 가지며, 농경 인력을 포함하기도 한다. 유목 국가는 도시를 건설하여 관료 조직이나 수공업 조직을 배치하는 등 다종족 복합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유목 국가의 인공 도시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모뉴먼트적인 도시의 의미가 강하며, 오르도 발리크나 원의 대도가 그 전형이다.
8. 유목민의 식생활
중앙유라시아 유목 기마민족은 공통적으로 육류와 유제품을 중심으로 식생활을 영위했다. 이들은 고기(주로 말고기와 양고기)와 유제품, 그리고 쿠미스를 통해 필요한 에너지를 얻었다. 부족한 당분은 체내에서 아미노산으로부터 당신생을 통해 보충했다. 쿠미스는 미네랄과 비타민을, 효모와 유산균은 식이섬유를 대체하는 역할을 했다. 가축들이 자연의 풀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고기, 유제품, 쿠미스에는 오메가-3 지방산과 오메가-6 지방산이 균형 있게 포함되어 있었다.[40][42][47]
담수어, 채소, 과일은 구하기 어려워 거의 섭취하지 않았지만,[38] 필요한 영양소는 갖추어져 있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티베트와 몽골에서는 수입품인 전벽차(고형차)가 귀중품으로 화폐 역할도 했다.[46]
8. 1. 몽골의 식생활
몽골에서는 “붉은 음식”과 “흰 음식”으로 생활한다는 생각이 있으며, 붉은색은 고기를, 흰색은 유제품을 가리킨다.[38] 겨울에는 고기를 먹고, 육포 등으로 가공하여 보관한다. 우유로는 버터, 치즈, 요구르트, 쿠미스 등을 만든다. 아침에는 수테차도 마신다.[38]육류 중심의 유목민 생활에서 쿠미스는 귀중한 채소 대신 비타민과 미네랄을 보충하는 것으로 여름철을 중심으로 대량으로 마신다. 술이라고는 하지만, 알코올 함량은 1~3% 정도이며, 수분, 에너지, 비타민 C 보급원으로 영유아부터 노인까지 마신다.[39] 술이라기보다는 요구르트에 가까운 유산균 음료이며, 이것만으로도 식사 대용으로 할 만큼 여름 몽골의 주식과 같은 존재이다. 하루에 0.5~1.5리터 정도를 섭취한다는 보고가 대부분이지만, 하루 평균 1인당 4리터를 마신다는 놀라운 조사 결과도 있다. 쿠미스를 하루 3리터 마시면 1200kcal에 해당하며, 기초대사량에 해당한다. 발효 과정에서 증식하는 효모와 유산균은 몽골에서 부족한 식이섬유 대신, 균체가 장관 노폐물을 흡착하여 배출시키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40] 베이징농업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쿠미스에는 12종류의 인체 필수 미량 원소, 18종류의 아미노산, 여러 종류의 비타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산균이 비타민C를 생성하여 채소를 섭취하지 않는 유목민의 비타민 C 보급원이 되고 있다.[38][40] 쿠미스에는 비타민 C가 100ml당 8~11mg 함유되어 있다.[41] 마유 중의 유당은 발효에 의해 대부분이 알코올, 유산 또는 이산화탄소로 변환되므로 유당불내증 문제도 일어나기 어렵다.[42] 여름에 유목민이 식사를 하지 않고 쿠미스만으로 생활하는 것이 여행기에 기록되어 있다.[43][42] 다만 유당불내증인 몽골인도 있다.[44][45]
담수어, 채소, 과일은 일반적으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거의 먹지 않는다.[38]
위와 같이 고기(말고기와 양고기. 홀호그 등 전통 요리가 있다), 유제품, 쿠미스가 필요한 에너지와 단백질을 제공하고, 부족한 당분은 체내에서 아미노산으로부터의 당신생으로 보충되며, 미네랄, 비타민류는 쿠미스가 제공하고, 효모와 유산균이 식이섬유의 대체 역할을 한다. 필수지방산에 대해서는 가축이 자연의 풀을 먹이로 하기 때문에 고기, 유제품, 쿠미스에 오메가-3 지방산과 오메가-6 지방산이 적절한 균형으로 포함되어 있다. 편향된 식사이지만, 필요한 영양소는 모두 갖추어져 있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생선을 먹는 경우도 있다.[47]
8. 2. 티베트의 식생활
몽골에서는 “붉은 음식”과 “흰 음식”으로 생활한다는 생각이 있으며, 붉은색은 고기를, 흰색은 유제품을 가리킨다. 겨울에는 고기를 먹는다. 육포 등으로 가공하여 보관한다. 우유로는 버터, 치즈, 요구르트, 쿠미스 등을 만든다. 아침에는 수테차도 마신다.[38] 육류 중심의 유목민 생활에서 쿠미스는 귀중한 채소 대신 비타민과 미네랄을 보충하는 것으로 여름철을 중심으로 대량으로 마신다. 술이라고는 하지만, 알코올 함량은 1~3% 정도이며, 수분, 에너지, 비타민 C 보급원으로 영유아부터 노인까지 마신다.[39] 술이라기보다는 요구르트에 가까운 유산균 음료이며, 이것만으로도 식사 대용으로 할 만큼 여름 몽골의 주식과 같은 존재이다.티베트와 몽골에서는 수입품인 전벽차(고형차)가 귀중품이었기 때문에 화폐의 역할도 담당했다.[46]
담수어, 채소, 과일은 일반적으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거의 먹지 않는다.[38]
위와 같이 고기(말고기와 양고기. 홀호그 등 전통 요리가 있다), 유제품, 쿠미스가 필요한 에너지와 단백질을 제공하고, 부족한 당분은 체내에서 아미노산으로부터의 당신생으로 보충되며, 미네랄, 비타민류는 쿠미스가 제공하고, 효모와 유산균이 식이섬유의 대체 역할을 한다. 필수지방산에 대해서는 가축이 자연의 풀을 먹이로 하기 때문에 고기, 유제품, 쿠미스에 오메가-3 지방산과 오메가-6 지방산이 적절한 균형으로 포함되어 있다. 편향된 식사이지만, 필요한 영양소는 모두 갖추어져 있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생선을 먹는 경우도 있다.[47]
8. 3. 부족한 영양소 보충
몽골에서는 “붉은 음식”과 “흰 음식”으로 생활한다는 생각이 있으며, 붉은색은 고기를, 흰색은 유제품을 가리킨다. 겨울에는 고기를 먹고 육포 등으로 가공하여 보관한다. 우유로는 버터, 치즈, 요구르트, 쿠미스 등을 만든다. 아침에는 수테차도 마신다.[38] 육류 중심의 유목민 생활에서 쿠미스는 귀중한 채소 대신 비타민과 미네랄을 보충하는 것으로 여름철을 중심으로 대량으로 마신다. 술이라고는 하지만, 알코올 함량은 1~3% 정도이며, 수분, 에너지, 비타민 C 보급원으로 영유아부터 노인까지 마신다.[39] 술이라기보다는 요구르트에 가까운 유산균 음료이며, 이것만으로도 식사 대용으로 할 만큼 여름 몽골의 주식과 같은 존재이다. 하루에 0.5~1.5리터 정도를 섭취한다는 보고가 대부분이지만, 하루 평균 1인당 4리터를 마신다는 놀라운 조사 결과도 있다. 쿠미스를 하루 3리터 마시면 1,200킬로칼로리에 해당하며, 기초대사량에 해당한다. 발효 과정에서 증식하는 효모와 유산균은 몽골에서 부족한 식이섬유 대신, 균체가 장관 노폐물을 흡착하여 배출시키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40]베이징농업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쿠미스에는 12종류의 인체 필수 미량 원소, 18종류의 아미노산, 여러 종류의 비타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산균이 비타민C를 생성하여 채소를 섭취하지 않는 유목민의 비타민 C 보급원이 되고 있다.[38][40] 쿠미스에는 비타민 C가 100ml당 8~11mg 함유되어 있다.[41] 마유 중의 유당은 발효에 의해 대부분이 알코올, 유산 또는 이산화탄소로 변환되므로 유당불내증 문제도 일어나기 어렵다.[42] 여름에 유목민이 식사를 하지 않고 쿠미스만으로 생활하는 것이 여행기에 기록되어 있다.[43][42] 다만 유당불내증인 몽골인도 있다.[44][45]
필수지방산에 대해서는 가축이 자연의 풀을 먹이로 하기 때문에 고기, 유제품, 쿠미스에 오메가-3 지방산과 오메가-6 지방산이 적절한 균형으로 포함되어 있다.
9. 유목 문화와 현대 사회
유목민 집단은 동맹 체결, 지도자 가계의 혼인을 통한 구성원 및 가축 무리의 지참금적 분할 합류, 또는 정치·군사적 이유로 다른 집단의 지배하에 통합되는 등 언어나 조상 계보를 달리하는 다른 집단과의 융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또한, 지도자 가계에서 새로운 세대의 독립 등에 의한 집단의 분열도 일상적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조상, 언어, 문화를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근현대적 민족관과 유목민 집단의 통합 의식, 동족 의식에는 매우 이질적인 면이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중앙아시아에 분포하는 많은 튀르크계 “민족”(예: 우즈베크인, 타타르인)은 몽골 제국에서 칭기스칸 일족이나 몽골 고원 출신 무장의 지휘 하에 재편성된 중앙아시아의 튀르크·몽골계 유목민 집단에 기원을 갖는다.
개별 유목 집단은 이동 생활 구성원 자체가 복합적인 종족 구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계(冬營地)에서 여름철의 빈자리를 지키는 인력이나 농경 인력을 포함한다. 유목 국가급의 대집단이 되면 지원 기지로 도시를 건설하여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관료 조직이나 수공업 조직을 배치하는 등 다종족 복합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유목 국가의 인공 도시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모뉴먼트적인 과시 도시로서의 의미가 강하며, 위구르의 오르도 발리크나 원의 대도가 그 전형이다.
9. 1. 지속 가능한 발전
유목민 집단에서는 동맹 체결, 지도자 가계의 혼인을 통한 구성원 및 가축 무리의 지참금적 분할 합류, 또는 정치·군사적 이유로 다른 집단의 지배하에 통합되는 등 언어나 조상 계보를 달리하는 다른 집단과의 융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또한, 지도자 가계에서 새로운 세대의 독립 등에 의한 집단의 분열도 일상적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조상, 언어, 문화를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근현대적 민족관과 유목민 집단의 통합 의식, 동족 의식에는 매우 이질적인 면이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중앙아시아에 분포하는 많은 튀르크계 “민족”, 예를 들어 우즈베크인, 타타르인과 같은 유목민 출신 “민족”의 대부분은 중세의 몽골 제국에서 칭기스칸 일족이나 몽골 고원 출신 무장의 지휘 하에 재편성된 중앙아시아의 튀르크·몽골계 유목민 집단에 기원을 갖는다.실제로 개별 유목 집단은 위에서처럼 이동 생활 구성원 자체가 복합적인 종족 구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계(冬營地)에서 여름철의 빈자리를 지키는 인력이나 농경 인력을 포함한다. 더 나아가 유목 국가급의 대집단이 되면 지원 기지로 도시를 건설하여 거기에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관료 조직이나 수공업 조직을 배치하는 등 다종족 복합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유목 국가의 인공 도시의 특징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모뉴먼트적인 과시 도시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그 전형이 위구르의 오르도 발리크나 원의 대도이다.
9. 2. 문화 다양성
유목민 집단에서는 동맹 체결, 지도자 가계의 혼인을 통한 구성원 및 가축 무리의 지참금적 분할 합류, 또는 정치·군사적 이유로 다른 집단의 지배하에 통합되는 등 언어나 조상 계보를 달리하는 다른 집단과의 융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또한, 지도자 가계에서 새로운 세대의 독립 등에 의한 집단의 분열도 일상적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조상, 언어, 문화를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근현대적 민족관과 유목민 집단의 통합 의식, 동족 의식에는 매우 이질적인 면이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중앙아시아에 분포하는 많은 튀르크계 “민족”, 예를 들어 우즈베크인, 타타르인과 같은 유목민 출신 “민족”의 대부분은 중세의 몽골 제국에서 칭기스칸 일족이나 몽골 고원 출신 무장의 지휘 하에 재편성된 중앙아시아의 튀르크·몽골계 유목민 집단에 기원을 갖는다.실제로 개별 유목 집단은 위에서처럼 이동 생활 구성원 자체가 복합적인 종족 구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계(冬營地)에서 여름철의 빈자리를 지키는 인력이나 농경 인력을 포함한다. 더 나아가 유목 국가급의 대집단이 되면 지원 기지로 도시를 건설하여 거기에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관료 조직이나 수공업 조직을 배치하는 등 다종족 복합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유목 국가의 인공 도시의 특징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모뉴먼트적인 과시 도시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그 전형이 위구르의 오르도 발리크나 원의 대도이다.
9. 3. 한국 사회와 유목 문화
유목민 집단에서는 동맹 체결, 지도자 가계의 혼인을 통한 구성원 및 가축 무리의 지참금적 분할 합류, 또는 정치·군사적 이유로 다른 집단의 지배하에 통합되는 등 언어나 조상 계보를 달리하는 다른 집단과의 융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또한, 지도자 가계에서 새로운 세대의 독립 등에 의한 집단의 분열도 일상적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조상, 언어, 문화를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근현대적 민족관과 유목민 집단의 통합 의식, 동족 의식에는 매우 이질적인 면이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중앙아시아에 분포하는 많은 튀르크계 “민족”, 예를 들어 우즈베크인, 타타르인과 같은 유목민 출신 “민족”의 대부분은 중세의 몽골 제국에서 칭기스칸 일족이나 몽골 고원 출신 무장의 지휘 하에 재편성된 중앙아시아의 튀르크·몽골계 유목민 집단에 기원을 갖는다.실제로 개별 유목 집단은 위에서처럼 이동 생활 구성원 자체가 복합적인 종족 구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계(冬營地)에서 여름철의 빈자리를 지키는 인력이나 농경 인력을 포함한다. 더 나아가 유목 국가급의 대집단이 되면 지원 기지로 도시를 건설하여 거기에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관료 조직이나 수공업 조직을 배치하는 등 다종족 복합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유목 국가의 인공 도시의 특징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모뉴먼트적인 과시 도시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그 전형이 위구르의 오르도 발리크나 원의 대도이다.
9. 4.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유목민 집단에서는 동맹 체결, 지도자 가계의 혼인을 통한 구성원 및 가축 무리의 지참금적 분할 합류, 또는 정치·군사적 이유로 다른 집단의 지배하에 통합되는 등 언어나 조상 계보를 달리하는 다른 집단과의 융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또한, 지도자 가계에서 새로운 세대의 독립 등에 의한 집단의 분열도 일상적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조상, 언어, 문화를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근현대적 민족관과 유목민 집단의 통합 의식, 동족 의식에는 매우 이질적인 면이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중앙아시아에 분포하는 많은 튀르크계 “민족”, 예를 들어 우즈베크인, 타타르인과 같은 유목민 출신 “민족”의 대부분은 중세의 몽골 제국에서 칭기스칸 일족이나 몽골 고원 출신 무장의 지휘 하에 재편성된 중앙아시아의 튀르크·몽골계 유목민 집단에 기원을 갖는다.실제로 개별 유목 집단은 위에서처럼 이동 생활 구성원 자체가 복합적인 종족 구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계(冬營地)에서 여름철의 빈자리를 지키는 인력이나 농경 인력을 포함한다. 더 나아가 유목 국가급의 대집단이 되면 지원 기지로 도시를 건설하여 거기에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관료 조직이나 수공업 조직을 배치하는 등 다종족 복합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유목 국가의 인공 도시의 특징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모뉴먼트적인 과시 도시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그 전형이 위구르의 오르도 발리크나 원의 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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