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페르 3세
1. 개요
크리스토페르 3세는 1416년 독일 노이마르크트인더오버팔츠에서 태어난 인물로, 1440년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하여 1448년 사망할 때까지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의 국왕을 역임했다. 그는 1439년 덴마크 섭정으로 임명된 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의 왕위를 차례로 계승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왕실과 귀족 간의 권력 균형이 이루어졌으며, 코펜하겐을 덴마크의 수도로 지정했다. 크리스토페르 3세는 각국의 자치와 귀족의 권리를 존중하려 했으나 중앙 집권화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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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크리스토퍼 |
|---|---|
| 다른 이름 | 크리스토파 아브 바이에른 |
| 칭호 | 덴마크 국왕 노르웨이 국왕 스웨덴 국왕 |
| 출생일 | 1416년 2월 26일 |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노이마르크트 인 데어 오버팔츠 |
| 사망일 | 1448년 1월 6일 |
| 사망지 | 스웨덴, 헬싱보리 |
| 매장지 | 로스킬레 대성당, 로스킬레 |
| 덴마크 국왕 즉위 | 1440년 4월 9일 |
|---|---|
| 덴마크 국왕 대관식 | 1443년 1월 1일 리베 대성당 |
| 스웨덴 국왕 즉위 | 1441년 |
| 스웨덴 국왕 대관식 | 1441년 9월 13일 웁살라 |
| 노르웨이 국왕 즉위 | 1442년 6월 |
| 노르웨이 국왕 대관식 | 1442년 7월 2일 오슬로 |
| 팔츠-노이마르크트 백작 즉위 | 1443년 |
| 덴마크 국왕 선임 | 에리크 아브 폼메른 |
| 덴마크 국왕 계승 | 크리스티안 1세 |
| 스웨덴 국왕 선임 | 에리크 아브 폼메른 |
| 스웨덴 국왕 계승 | 칼 크누손 |
| 노르웨이 국왕 선임 | 에리크 아브 폼메른 |
| 노르웨이 국왕 계승 | 칼 크누손 |
| 팔츠-노이마르크트 백작 선임 | 요한 아브 팔츠-노이마르크트 |
| 팔츠-노이마르크트 백작 계승 | 볼프강 아브 데어 팔츠 |
| 배우자 | 도로테아 폰 브란덴부르크 (1445년 결혼) |
|---|---|
| 가문 | 팔츠-노이마르크트 |
| 아버지 | 요한 아브 팔츠-노이마르크트 |
| 어머니 | 카타리나 폰 폼메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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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년 사망 -
윤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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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년 사망 -
요안니스 8세
요안니스 8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동서 교회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서유럽 십자군의 지원을 얻으려 했지만 좌절되었으며, 세 번 결혼했으나 자녀 없이 1448년 사망했다. -
1416년 출생 -
윤자운
윤자운은 조선 초 문신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은 윤회의 손자이자 신숙주의 처남이며, 여러 관직을 거쳐 수양대군 즉위 후 좌익공신에 책록,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성격이 편협하고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1416년 출생 -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는 15세기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일원으로, 아버지 코시모 데 메디치의 뒤를 이어 은행을 운영하며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고 르네상스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며, 아들 로렌초를 후계자로 육성하여 메디치 가문의 번영을 이끌었다. -
칼마르 동맹 -
크리스티안 1세
크리스티안 1세는 올덴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국왕을 지냈으며 슐레스비히 공작과 홀슈타인 백작을 겸했고 코펜하겐 대학교 설립에 기여했으나 칼마르 동맹 재건 시도는 실패했다. -
칼마르 동맹 -
마르그레테 1세
마르그레테 1세는 14세기 말 칼마르 동맹을 성립시켜 스칸디나비아 3국을 통합한 덴마크 여왕이자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섭정으로, 아들 올라프 2세 사후 에리크를 후계자로 삼아 3국의 왕으로 옹립하여 동맹을 통치하며 북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1416년 2월 26일 노이마르크트인더오버팔츠에서 팔츠노이마르크트의 요한 백작과 그의 아내인 포메라니아의 카타르지나의 아들 크리스토프로 태어났다. 1445년 코펜하겐에서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와 결혼했다.
1439년 외숙 포메라니아의 에리크가 왕위에서 물러난 후 덴마크 의회에 의해 덴마크 왕위 계승자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덴마크 섭정이 되었다. 1440년 4월 9일 덴마크 국왕 크리스토페르 3세로 즉위했으며, 1443년 1월 1일 리베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1441년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 9월 13일 웁살라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442년 6월 노르웨이 국왕으로 즉위, 7월 2일 오슬로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크리스토페르 3세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국왕으로 재임하면서 왕실과 귀족 간 힘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이 균형은 1660년까지 이어졌다. 로스킬레 저택 화재 이후 코펜하겐으로 거처를 옮기고, 코펜하겐을 덴마크 수도로 결정했다.
1448년 1월 6일 헬싱보리에서 사망,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덴마크 왕위는 크리스티안 1세가, 스웨덴과 노르웨이 왕위는 칼 8세(노르웨이의 칼 1세)가 승계받았다.
2.1. 출생과 가계
1416년 2월 26일 노이마르크트인더오버팔츠에서 팔츠노이마르크트의 요한 백작과 그의 아내인 포메라니아의 카타르지나의 아들 크리스토프(Christoph)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의 루퍼트왕의 아들이었던 팔라틴 백작 요한과, 포메라니아 공작 바르티슬라프 7세의 딸이자 스칸디나비아의 왕 에리크 포메라니아의 누이였던 폰 노이마르크의 팔라틴 백작 부인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리스토퍼는 바이에른의 윗팔라티네이트에 있는 오버팔츠의 노이마르크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1445년에는 코펜하겐에서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와 결혼했다.
2.2. 칼마르 동맹의 왕위에 오르다
1439년 크리스토프의 외숙 포메라니아의 에리크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덴마크 의회는 크리스토프를 덴마크의 왕위 계승자로 임명했다. 같은 해 크리스토프는 덴마크의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며, 1440년 4월 9일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토페르 3세로 즉위했다. 1443년 1월 1일에는 리베에서 덴마크 국왕 대관식을 치렀다.
1441년에는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9월 13일 웁살라에서 스웨덴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1442년 6월에는 노르웨이 국왕으로도 즉위, 7월 2일 오슬로에서 노르웨이 국왕 대관식을 치렀다.
크리스토페르는 각국의 자주성과 귀족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여 중앙 집권화에는 실패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왕실과 귀족 사이의 힘의 균형이 시작되었고, 이 균형은 1660년까지 이어졌다.
2.3. 통치 기간
1439년 크리스토프의 외숙 포메라니아의 에리크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 덴마크 의회에 의해 덴마크의 왕위 계승자로 임명되었다. 1439년에 덴마크의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며, 1440년 4월 9일에는 덴마크의 국왕인 크리스토페르 3세로 즉위했다. 1443년 1월 1일에는 리베에서 덴마크 국왕 대관식을 치렀다.
1441년에는 스웨덴의 크리스토페르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같은 해 9월 13일에는 웁살라에서 스웨덴 국왕 대관식을 치렀다. 1442년 6월에는 노르웨이의 크리스토페르 국왕으로 즉위했고, 같은 해 7월 2일에는 오슬로에서 노르웨이 국왕 대관식을 치렀다.
크리스토페르 3세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국왕으로 재임하면서 왕실과 귀족 간의 힘의 균형을 이루었다. 이러한 균형 상태는 1660년까지 이어졌다. 로스킬레에 있던 자신의 저택이 화재로 소실된 이후에는 코펜하겐으로 거처를 옮기고, 코펜하겐을 덴마크의 수도로 결정했다.
크리스토페르 3세 치세 초기, 퓔렌(Funen)과 유틀란트(Jutland)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을 진압했다. 퓔렌의 반란을 진압한 후, 유틀란트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북유틀란트, 그중에서도 벤드시셀(Vendsyssel)은 매우 불안정하여 [[헨리크 레벤트로(Henrik Tagesen Reventlow)](1441년 처형)가 이끄는 2만 5천 명의 농민군이 크리스토페르의 통치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왕이 행동하기 전에 유틀란트의 귀족 가문들은 자체 군대를 조직하여 올보르(Aalborg) 서쪽으로 진군하여 레벤트로의 군대와 맞섰다.
농민들은 자신들을 공격해 올 기사들을 막기 위해 3겹으로 된 거대한 마차 요새를 만들었다. 또한 진영 앞 습지에 나뭇가지를 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단단한 땅처럼 보이게 했다. 에스케 옌센 브록(Eske Jensen Brock)이 이끄는 자만심에 가득 찬 귀족 군대는 1441년 5월 3일 성 요르겐스베르그(St. Jørgensbjerg)에 나타났다. 기사들은 진영을 공격했지만 곧 습지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농민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했다. 브록은 성 요르겐스베르그 전투(Slaget ved Skt. Jørgensbjerg)에서 사망했고, 그의 시체는 조각나 주변 도시들에 경고로 보내졌다. 그 후 농민들은 [[올보르후스(Aalborghus)](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영지)를 습격하여 귀족 닐스 굴덴스티에르네(Niels Guldenstierne)를 도주하게 만들었다.
전투 후 포로들의 처우는 크리스토퍼가 농민들을 진압하려는 결의를 더욱 굳히게 했다.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북쪽 유틀란트 성 요르겐스베르그 근처 후스비 홀(Husby Hole)에 있는 반란군 진영으로 진군했다. 반란군의 수가 자신의 군대보다 많았기 때문에 크리스토퍼는 진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반란죄로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고 알렸다. 모르스 섬과 티스테드(Thisted)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진영을 떠났고, 그 때문에 이후로는 비겁자이자 배신자로 불렸다. 크리스토퍼는 1441년 6월 8일 반란군 진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반란군은 맹렬하게 싸웠지만 중무장한 기사들을 이길 수 없었다. 수천 명의 반란군이 사망했고, 생존자들은 막대한 벌금을 물었다. 더욱 심각한 결과는 반란군들이 자유민의 지위를 잃고 일하던 농장의 농노가 된 것이었다. 왕은 농민들이 짧은 칼보다 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중죄로 만들었다. 이로써 덴마크의 한때 자유로웠던 농민들은 완전히 복종하게 되었다.
1442년 5월, 크리스토퍼는 세 왕국 모두의 귀족들을 만나기 위해 뢰되세로 여행했다. 그곳에서 노르웨이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그 후 오슬로로 가서 1442년 7월 2일에 즉위했다. 다음 해에는 리베 근처의 우르네호베드 회의에서 덴마크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스웨덴 귀족들은 어떤 권력도 포기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따라서 크리스토페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너무 독일적이라고 주장했고, 그의 삼촌(전 국왕 에릭)이 고틀란트에 있는 그의 성에서 배를 약탈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일련의 흉작의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사람들은 너무 배고파서 찾을 수 있는 조금의 밀가루에 빻은 나무껍질을 섞어 먹었다. 크리스토퍼는 스웨덴에서 경멸적으로 "나무껍질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반면에 그는 귀족과 한자 동맹 도시들의 한계 내에서 도시와 상인들을 지원하려고 노력했다.
크리스토페르는 고틀란트에서 에릭에 대항하여 효과 없는 전쟁과 협상을 벌였는데, 이는 스웨덴과 한자 동맹 모두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칼마르 동맹 조약이 변경되어 귀족들이 대부분의 정책 결정권을 갖게 되었고, 국왕은 바이킹 시대 이후 군주들이 얻었던 많은 권한을 상실했다.
2.4. 사망과 후계
1448년 1월 6일 헬싱보리에서 3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사후, 덴마크의 왕위는 크리스티안 1세가 승계받았고,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위는 칼 8세(노르웨이의 칼 1세)가 승계받았다. 크리스토페르 왕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그의 미망인인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는 덴마크의 새로운 국왕인 크리스티안 1세와 재혼했다.
3. 족보
크리스토페르 3세는 요한 폰 팔츠노이마르크트 백작과 카타르지나 포모르스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독일 왕 루프레히트이며, 외조부는 바르치스와프 7세이다.
| 관계 | 이름 |
|---|---|
| 부친 | 요한 폰 팔츠노이마르크트 백작 |
| 모친 | 카타르지나 포모르스카 |
| 조부 | 루프레히트 |
| 조모 | 엘리자베스 폰 호엔촐레른뉘른베르크 |
| 외조부 | 바르치스와프 7세 |
| 외조모 | 마리아 폰 메클렌부르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