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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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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안니스 8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1425년 ~ 1448년)로, 마누일 2세의 아들이자 옐레나 드라가시의 장남이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동서 교회 통합을 시도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반대로 실패했고, 서유럽 십자군의 지원을 얻으려 했지만 바르나 전투와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하며 좌절되었다. 요안니스 8세는 세 번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으며, 1448년 사망하여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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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8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베노초 고촐리의
베노초 고촐리가 그린 "동방 박사들의 행렬" 중 일부. 요한네스 8세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됨 (1459–1461).
칭호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 군주
로마자 표기Iōánnēs Palaiologos
출생일1392년 12월 18일
사망일1448년 10월 31일
종교동방 가톨릭교회 (이전에는 동방 정교회)
통치
즉위1425년 7월 21일
대관식1421년 1월 19일
대관식 종류대관식
선임 황제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
후임 황제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
섭정1407년경 (공동 황제)
섭정 종류포고
가문
왕조팔레올로고스 왕조
아버지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
어머니헬레나 드라가시
배우자
배우자 1모스크바의 안나, (1414년 결혼, 1417년 사망)
배우자 2몬페라토의 소피아, (1421년 결혼, 1426년 이혼)
배우자 3트라페준타의 마리아, (1427년 결혼, 1439년 사망)

2. 생애

요안니스 8세는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와 세르비아 공작 콘스탄틴 드라가시의 딸인 옐레나 드라가시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1416년 이전 아버지와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고, 1421년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다 142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단독 황제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아버지와 동생 테오도로스 2세를 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모레아스 전제공령에서 아카이아 공국과의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우기도 했다.

아버지와 달리 오스만 제국에 대해 강경책을 펼쳤으나, 가짜 무스타파를 옹립하려던 초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1422년 무라트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로 이어졌고, 요안니스 8세는 수도 방어를 지휘해야 했다. 포위는 격퇴되었지만, 이듬해 1423년 제국의 주요 도시였던 테살로니키베네치아 공화국에 넘겨졌고 결국 오랜 공방전 끝에 1430년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서방 세계의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요안니스 8세는 동방 정교회로마 가톨릭교회의 통합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1423년1439년 두 차례 이탈리아를 방문했으며, 특히 1438년-1439년에는 피렌체 공의회에 직접 참석하여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함께 교회 통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회의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세프 2세, 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 요하네스 베사리온 등 700여 명의 대규모 사절단이 동행했다.

그러나 1440년 귀국 후 교회 통합은 콘스탄티노플 내부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 실질적으로 실패했으며, 제국 내 분열만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통합의 대가로 기대했던 서방의 십자군 원정 역시 1444년 바르나 전투1448년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연이어 대패하며 완전히 좌절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 신중한 외교적 노력 덕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자체는 유지될 수 있었으나, 그가 평생을 바친 대 오스만 강경책과 서방 연대 정책은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다.

요안니스 8세는 세 번의 결혼에도 자녀를 얻지 못하여 후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1437년부터 1439년까지 섭정을 맡았던 유능한 동생 콘스탄티노스 11세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으나, 다른 동생들, 특히 데메트리오스 팔라이올로고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요안니스 8세는 1448년 10월 31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했다. 그는 자연사한 마지막 비잔티움 제국 황제였으며, 사후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에 묻혔다. 그의 사후 어머니 옐레나 드라가시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최종적으로 제위를 계승했다.

2. 1.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동로마 제국에 우호적이던 오스만 제국술탄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고(1421년) 무라트 2세가 즉위하자, 동로마 궁정에서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외교 정책을 두고 의견이 나뉘었다. 아버지 마누일 2세는 무라트 2세와의 현상 유지를 주장했지만, 당시 공동 황제였던 요안니스 8세는 무라트 2세의 경쟁자인 무스타파를 내세워 오스만 제국을 분열시키고 영토 할양을 얻어내려는 강경책을 주장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마누일 2세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며 아들에게 실권을 넘겼다.

그러나 요안니스의 강경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무스타파는 서약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어겼고, 결국 무라트 2세에게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이에 분노한 무라트 2세는 1422년 6월(혹은 7월),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요안니스 8세는 수도 방어를 지휘했고, 포위 공격은 실패했지만 이는 복귀한 마누일 2세가 소아시아에서 반란을 유도하는 외교술을 발휘하여 무라트 2세가 군대를 철수시킨 덕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1423년에는 제국의 주요 영토인 테살로니키와 모레아스 전제공령이 오스만군의 침략을 받았다. 특히 그의 형제 안드로니코스가 1423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넘겨주었던 테살로니키는 오랜 공방전 끝에 1430년 오스만 제국에 최종적으로 함락되었다. 마누일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평화 협상을 추진하여 1424년 평화 조약을 맺었으나, 이는 동로마 제국이 신하의 예를 갖추고 무거운 공물을 바쳐야 하는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1425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단독 황제가 된 요안니스 8세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서방 가톨릭 교회와의 통합을 통해 십자군 형태의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의 협상을 위해 1438년-1439년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 직접 참석했다. 이 회의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세프 2세, 플레톤, 베사리온 등 많은 동로마 대표단이 동행했다. 오랜 논의 끝에 동서 교회의 통합이 선언되었으나,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교회 통합의 대가로 약속되었던 서방의 십자군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호소로 결성되어 헝가리폴란드의 왕 블라디슬라프 3세가 이끈 십자군은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무라트 2세에게 대패했고, 블라디슬라프 3세와 교황 특사 율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이 전사했다. 이와 연계하여 동생 콘스탄티노스그리스에서 벌인 군사 작전도 1446년 오스만군에게 격파되어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큰 피해를 입었다. 1448년에 시도된 또 다른 십자군 역시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서방의 군사력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맞서려던 요안니스 8세의 정책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심지어 동생 디미트리오스는 교회 통합에 반대하며 1442년 무라트 2세의 군사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도 했으나, 모레아스 전제공령에서 달려온 콘스탄티노스에 의해 격퇴되었다.

결국 요안니스 8세가 평생을 바쳐 추진했던 오스만 제국에 대한 강경책과 서방과의 연대를 통한 위기 극복 시도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그의 신중한 외교적 노력 덕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자체는 그의 치세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2. 2. 동서 교회 통합 시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커지자 요안니스 8세는 서방의 지원을 얻기 위해 동서 교회의 통합을 추진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과의 신중한 외교를 중시했던 아버지 마누일 2세의 정책과는 다른 강경 노선이었다. 마누일 2세는 십자군 결성을 통한 강경책을 주장하는 아들에게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메흐메트 1세 사후 무라트 2세가 즉위하자, 요안니스는 오스만 제국의 분할을 노리고 가짜 무스타파를 지원했으나 실패했다. 이로 인해 무라트 2세는 142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며, 비록 포위는 풀렸지만 제국은 1423년 테살로니키베네치아 공화국에 넘겨주어야 했고, 이는 결국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갔다(테살로니카 공성전 (1422–30)).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안니스 8세는 서방과의 통합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1425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단독 황제가 된 후, 요안니스 8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보호를 얻기 위해 1423년1439년 두 차례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그는 바젤 공의회(1431년)에 사절을 보내 사전 협상을 진행했으며, 마침내 1438년 직접 대표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페라라에서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만나 동방 정교회로마 가톨릭교회의 통합에 합의했다. 이 통합 논의는 페라라-피렌체 공의회(1438년-1439년)로 이어졌다. 이 회의에는 요안니스 8세 본인을 비롯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세프 2세, 황제의 동생 디미트리오스, 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게오르기오스 스콜라리오스, 요하네스 베사리온(후일 가톨릭 추기경) 등 700여 명의 대규모 사절단이 참석했다. 긴 논의 끝에 교리, 의례 등의 차이를 봉합하고 1439년 동서 교회의 통합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으며, 그 대가로 서방의 십자군 파병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1440년 2월, 3년간의 부재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요안니스 8세를 기다린 것은 통합에 대한 격렬한 반대였다. 대표단에 참여했던 마르코스 에우게니코스는 서명을 거부했고, 서명했던 스콜라리오스마저 귀국 후 입장을 번복하는 등, 성직자와 백성들 사이에서 통합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통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의 반대로 인해 사실상 실패하였다.

통합 반대파는 황제의 동생 디미트리오스를 중심으로 결집했고, 그는 1442년 통합 동맹에 불안을 느낀 무라트 2세의 지원을 받아 수도를 포위하기까지 했다. 비록 콘스탄티노스의 활약으로 포위는 풀렸지만, 내부 갈등은 깊어졌다.

더욱이 통합의 대가로 약속되었던 십자군 원정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에우제니오 4세의 호소로 결성되어 헝가리-폴란드 왕 블라디슬라프 3세가 이끈 십자군은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무라트 2세에게 대패했다. 이후 1446년 콘스탄티노스의 그리스 원정 실패, 1448년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의 십자군 패배가 이어지면서, 군사적 지원을 통해 제국을 구하려던 요안니스 8세의 계획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결과적으로 요안니스 8세가 평생을 걸고 추진했던 동서 교회 통합 정책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제국 내 분열만 심화시킨 채 실패로 돌아갔다.

2. 3. 십자군 원정과 실패

아버지 마누엘 2세는 십자군 결성을 통한 대 오스만 제국 강경책을 주장하는 요안니스에게 신중론을 펼치도록 충고했으나, 아들이 따르지 않자 "지금 제국에 필요한 것은 황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요안니스는 젊은 시절 아버지와 동생 테오도로스 2세를 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모레아스 전제공령에서 아카이아 공국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자신감 넘치는 성격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외교에 신중했던 아버지 마누엘 2세에게는 불안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1421년 동로마 제국에 우호적이던 오스만 제국술탄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고 무라트 2세가 즉위하자, 동로마 궁정에서는 외교 정책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마누엘 2세는 무라트 2세와의 우호 관계 유지를 주장했지만, 요안니스는 자신이 포로로 잡았던 메흐메트 1세의 형제 (가짜) 무스타파를 오스만 제국의 유럽 측 군주로 옹립하여 제국을 분할시키고 영토 할양을 얻어내려 했다. 결국 건강이 좋지 않던 마누엘 2세는 요안니스에게 실권을 넘기고 은퇴했다.

그러나 요안니스의 강경책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무스타파는 서약을 어겼고, 결국 무라트 2세에게 패배하여 처형당했다. 동로마는 이 과정에 개입할 수 없었다. 무라트 2세는 동로마의 배신에 분노하여 1422년 7월,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포위는 성벽 덕분에 막아냈고, 복귀한 마누엘 2세가 외교술을 발휘해 소아시아 반란을 유도하여 무라트 2세가 철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듬해 1423년 오스만군의 침략으로 제국의 주요 영토였던 테살로니키를 상실했다. (테살로니키는 1423년부터 1430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이 통치하다 1430년 이후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마누엘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평화 협상을 추진하여 1424년 평화를 맺었으나, 이는 신하로서의 복종과 막대한 공납금을 지불하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1425년 마누엘 2세가 사망하고 단독 통치를 시작한 요안니스는 초기에는 실패를 반성하며 내정에 힘썼다. 유능한 동생 콘스탄티노스를 모레아스 전제공령에 파견하여 영내 정비와 아카이아 공국 세력 축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요안니스는 십자군 결성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젤 공의회(1431년)에 사절을 보내 사전 협상을 진행했고, 1438년부터 1439년까지 열린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는 직접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다. 이 회의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세프 2세, 동생 디미트리오스 전제공, 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게오르기오스 스콜라리오스, 요하네스 베사리온 등이 참여했다. 긴 논의 끝에 불확실한 십자군 파병 약속을 받고 동서 교회의 통합이 선언되었다.

1440년 2월, 3년간의 부재 끝에 귀국한 요안니스를 기다린 것은 통합에 대한 격렬한 반대였다. 대표단에 참여했던 마르코스 에우게니코스는 서명을 거부했고, 스콜라리오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서명을 철회했다. 심지어 동행했던 동생 디미트리오스는 통합에 반대하는 세력과 무라트 2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144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까지 했다. 이 반란은 모레아스에서 달려온 콘스탄티노스 전제공 덕분에 겨우 진압되었지만, 통합 반대파의 반감은 여전했다.

더욱이 교회 통합의 대가로 기대했던 서유럽의 십자군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호소로 결성되어 헝가리·폴란드 왕 블라디슬라프 3세가 이끈 십자군은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무라트 2세에게 대패했고, 블라디슬라프 3세와 교황 특사 체사리니 추기경 등이 전사했다. 이와 연계했던 콘스탄티노스 전제공의 그리스 원정도 실패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큰 피해를 입었다(1446년). 1448년에 다시 결성된 십자군마저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구원을 위한 군사적 노력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요안니스 8세가 평생을 바친 대 오스만 정책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요안니스 8세는 세 번의 결혼에도 자녀를 얻지 못해 후계자 문제로 고심했다. 넷째 동생 콘스탄티노스를 염두에 두었으나, 둘째 테오도로스 2세와 다섯째 디미트리오스가 반발하며 군사력 행사도 불사할 태세였다. 결국 테오도로스를 후계자로 정했으나, 그는 1448년 6월 요안니스보다 먼저 사망했다. 요안니스 8세 역시 미래를 기약하지 못한 채 1448년 10월 31일에 사망했다. 콘스탄티노스가 다음 황제로 즉위한 것은 그로부터 2개월 후의 일이다.

2. 4. 후계 문제와 죽음

요안니스 8세는 세 번의 결혼에도 자녀를 얻지 못하여, 후계자는 그의 네 명의 동생 중에서 선택되어야 했다. 그는 1437년부터 1439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섭정을 맡았던 넷째 동생 콘스탄티노스 11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지명하였다. 그러나 이에 둘째 동생 테오도로스 2세와 다섯째 동생 데메트리오스 팔라이올로고스가 반발하며 군사력 행사도 불사할 태세를 보였다.

요안니스는 고심 끝에 테오도로스 2세를 제위 계승자로 정하기도 했으나, 그는 1448년 6월 요안니스보다 먼저 사망했다. 결국 요안니스 8세는 후계 문제를 명확히 매듭짓지 못한 채 1448년 10월 31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했다. 그는 자연사한 마지막 비잔티움 제국 황제였으며, 사후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에 묻혔다. 그의 사후, 동생 데메트리오스의 책략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옐레나 드라가시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최종적으로 제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3. 혼인 관계

요안니스 8세는 세 차례 혼인했으나 자녀는 없었다.[6][7]


  • 첫 번째 혼인은 1414년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1세 드미트리예비치와 소피야 게디미나이차이의 딸인 안나 바실리예브나 모스콥스카야( Анна Василиевна|안나 바실리예브나rus, 1403년? - 1417년 8월)와 이루어졌다. 그녀는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손녀이기도 하다. 안나는 1417년 8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휩쓴 흑사병으로 사망하여 립스 수도원에 묻혔다.

  • 두 번째 혼인은 아버지 마누일 2세교황 마르티노 5세의 주선으로 1421년 1월 19일 몬페라토 후작 테오도로 2세 팔레올로고의 딸인 소피아 팔레올로가( Σοφία|소피아ell, ? - 1434년 8월 21일)와 이루어졌다. 소피아의 어머니는 바르 공작 로베르 1세 드 바르와 마리 드 발루아의 딸인 잔 드 바르이며, 외조부모는 프랑스 국왕 장 2세와 본 드 뤽상부르 왕비이다. 요안니스 8세의 공동 황제 대관식과 함께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이었으나, 역사가 두카스에 따르면 요안니스 8세는 소피아의 용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버지 마누일 2세 사후인 1426년 8월 이혼하여 소피아는 고국 이탈리아 몬페라토로 돌아가 수녀가 되었다. 그녀 역시 팔레올로고스 왕조 출신이다.

  • 세 번째 혼인은 후일 추기경이 되는 베사리온의 주선으로 1427년 트레비존드 황제 알렉시오스 4세 메가스 콤네노스와 테오도라 칸타코우제네의 딸인 마리아 메갈레 콤네네( Μαρία Κομνηνή Παλαιολογίνα|마리아 콤네네 팔레올로기나ell, ? - 1439년 12월 17일)와 이루어졌다. 마리아는 1427년 8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다음 해 9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요안니스 4세 메가스 콤네노스의 누이였으며, 미모로 널리 알려져 요안니스 8세의 마음에 들었다고 전해진다. 마리아는 1439년 겨울 흑사병으로 사망했는데,[7] 이는 남편 요안니스 8세가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다가 귀국하는 도중이었다. 그녀는 같은 시기에 사망한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의 황후 이레네 에우게니아 가틸루시오와 함께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에 묻혔다. 요안니스 8세는 귀국 후에야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4. 평가 및 영향

요안니스 8세는 이탈리아 방문 당시 여러 화가에 의해 초상화로 그려졌다.[5]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베노초 고촐리가 피렌체 메디치-리카르디 궁전의 동방 박사 예배당 남쪽 벽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리스도의 채찍질''에도 요안니스 8세가 묘사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시나이 반도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있는 필사본에도 그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동방 박사의 경배』(부분, 베노초 고촐리 그림)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 저택 예배당 벽화 『동방 박사의 경배』(베노초 고촐리 그림) 속 동방 박사 중 한 명은 페라라-피렌체 공의회 때 피렌체를 방문했던 요안니스 8세를 모델로 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당시 피렌체에 공의회를 유치한 인물은 코시모 데 메디치였다.

5. 대중문화 속 묘사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 가문 저택 내 예배당 벽화인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 박사의 경배』에 그려진 동방 박사 중 한 명은 피렌체 공의회 참석차 피렌체를 방문했던 요안니스 8세를 모델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8][5] 당시 피렌체에 공의회를 유치한 인물은 코시모 데 메디치였다.

5. 1. 갤러리

요안니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여러 화가들에게 그려진 것으로 유명하다.[8][5] 그의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피렌체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의 마기 채플 남쪽 벽에 그린 베노초 고촐리의 작품일 것이다. 일부 해석에 따르면 요안니스 8세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리스도의 채찍질''에도 묘사되어 있을 수 있다. 요안니스의 초상화는 시나이 반도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있는 필사본에도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Oxford Dictionary of Byzantium https://archive.org/[...]
[2] 문서 Prosopographisches Lexikon der Palaiologenzeit https://archive.org/[...]
[3] 서적 Encyclopedia of Greece and the Hellenic Traditi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4] 간행물 The tombs of the Palaiologan emperors
[5] 웹사이트 Drawings of John VIII Palaiologos http://nauplion.net/[...] 2008-07-05
[6] 웹사이트 Dear John http://surprisedbyti[...]
[7] 서적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웹사이트 Drawings of John VIII Palaiologos http://naupli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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