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아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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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아리 전투는 1701년 9월 1일에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초기 전투 중 하나이다. 프랑스군은 7월 카르피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오스트리아군에 맞서기 위해 빌레루아 공작이 지휘를 맡았지만, 키아리에서 외젠 공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적인 지형을 간과하고 공격을 감행했다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오스트리아군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입지를 강화하고,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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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1년 프랑스 - 카르피 전투
카르피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기에 외젠 공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이 카티나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피에몬테 연합군을 기습 공격한 전투로, 전술적으로는 무승부였으나 전략적으로는 오스트리아 군의 진격을 지연시키지 못해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 1701년 오스트리아 - 카르피 전투
카르피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기에 외젠 공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이 카티나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피에몬테 연합군을 기습 공격한 전투로, 전술적으로는 무승부였으나 전략적으로는 오스트리아 군의 진격을 지연시키지 못해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 키아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전투 | 키아리 전투 |
| 전체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 | |
| 날짜 | 1701년 9월 1일 |
| 장소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키아리 |
| 결과 | 오스트리아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
| 교전국 2 | 프랑스 왕국, 스페인, 사보이아 공국 |
| 지휘관 및 병력 | |
| 지휘관 1 | 사보이 공자 외젠 |
| 지휘관 2 |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 |
| 병력 1 | 22,000명 |
| 병력 2 | 38,000명 |
| 사상자 | |
| 사상자 1 | 200명 - 300명 (사망 및 부상) |
| 사상자 2 | 2,000명 - 3,800명 (사망 및 부상) |
| 관련 전투 | |
| 전역 상자 | 카르피 전투 – 키아리 전투 – 크레모나 전투 – 루차라 전투 – 카디스 – 프리들링겐 전투 – 비고 만 해전 – 에케렌 전투 – 제1차 회흐슈테트 전투 – 셸렌베르크 전투 – 블레넘 전투 – 벨레즈-말라가 해전 – 엘릭스하임 전투 – 카사노 – 칼치나토 전투 – 라미예 전투 – 토리노 전투 – 카스틸리오네 – 알만사 전투 – 툴롱 – 오우데나르데 전투 – 릴 – 말플라크 전투 – 알메나라 전투 – 사라고사 전투 – 브리우에가 전투 – 비야비시오사 전투 – 부섕 공방전 – 드냉 전투 – 바르셀로나 공방전 |
2. 배경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이 갈등에 휘말렸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자신의 손자인 펠리페 5세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고자 했고,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이탈리아는 양측의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다.
2. 1. 전조
1701년 카르피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 사령관 니콜라 카티나는 민치오 강 뒤편으로 급히 퇴각하여, 사보이 공자 외젠에게 그 강과 아디제 강 사이의 모든 지역 지휘권을 넘겼다. 외젠은 페스키에라 델 가르다에서 민치오 강을 건너 프랑스군을 오글리오 강 너머로 몰아내려 하였다.[15][4]카티나가 소규모 제국군을 막지 못한 것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4세의 분노를 일으켰고, 루이 14세는 카티나를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로 교체했다. 전투를 감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빌레루아는 8월 말에 전장에 도착했다.[16][5] 루이 14세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승리가 필요했고, 그의 손자의 통치에 대한 이탈리아의 충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9월 7일, 프랑스 왕은 전투가 이미 벌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의 사령관에게 "당신이 지휘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훌륭하게 캠페인을 마무리할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썼다.[17][6] 빌레루아는 군대에 합류했고, 비토리오 아마데오 2세, 카티나, 로렌-보데몽 공작 샤를 앙리와 같은 그의 장군들과 함께 적을 찾아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3. 전투 경과
1701년 카르피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 사령관 니콜라 카티나는 민치오강 뒤편으로 급히 퇴각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4세는 카티나의 소극적인 태도에 분노하여 그를 빌레루아 공작으로 교체했다.[16] 빌레루아는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라는 명령과 함께 8월 말 전장에 도착했다.[16]
외젠은 결전을 예상하고 오글리오강 동쪽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그는 키아리 요새 앞에 병력과 대포를 배치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이 위치는 세 방향에서 시내로 보호받고, 기병이 활동할 공간이 부족하여 프랑스 보병의 정면 공격을 유도하기에 유리했다.[16]
빌레루아는 외젠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카티나의 경고를 무시했다.[16] 9월 1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이 퇴각한다는 첩보에 속아 오글리오강을 건너 공격을 시도했으나,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춘 오스트리아군 전 병력과 마주쳤다.[18][19]
3. 1. 프랑스군의 공격과 오스트리아군의 방어
9월 1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키아리로 진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외젠은 이미 키아리 요새 앞에 병력과 총기를 배치하여 요새화한 상태였다.[16] 외젠은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근거리 사격을 명령했고,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게 3,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250명 이상의 장교를 사살했다.[20] 이 숫자는 열병이 부상자들에게 퍼지면서 더욱 늘어났다.[20]
프랑스군 사령관 빌레루아는 전투 중에 평정심을 잃었고, 카티나는 부상을 당했지만 퇴각을 지휘해야 했다.[16]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고 오글리오 강에서 약 1마일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했다. 이후 두 달 동안 대치가 이어졌는데, 프랑스군은 공격을 재개할 만큼 사기가 회복되지 않았고, 외젠은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춘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16]

3. 2. 양측의 대치
외젠은 결전을 기대하며 오글리오 강 동쪽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그는 키아리 요새 앞에 병력과 대포를 배치하고 참호를 구축하여 방어 태세를 갖췄다. 이 위치는 세 방향에서 시내로 보호받고, 기병 운용 공간이 부족하여 프랑스 보병의 정면 공격을 유도하기에 유리했다.[16][5]빌르로이는 외젠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카티나의 경고를 무시했다.[16][5] 프랑스-스페인 보병대는 9월 1일, 오스트리아군이 퇴각한다는 첩보에 속아 오글리오 강을 건너 공격을 시도했다.[18][7] 그러나 이들은 곧 오스트리아군 전 병력과 마주쳤고, 오스트리아군의 맹렬한 사격에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19] 프랑스군은 3,000명 이상의 사상자와 250명 이상의 장교를 잃었고, 열병으로 인해 피해가 더욱 커졌다.[20]
빌르로이는 전투 중 평정심을 잃었고, 부상당한 카티나가 퇴각을 지휘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오글리오 강 근처에 참호를 파고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했다.[16] 이후 두 달 동안 양측은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프랑스군은 계속된 공격 실패로 사기가 저하되었고, 외젠은 잘 방어된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것을 꺼렸다.[16][5] 가을이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특히 늪지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상황이 심각했다. 결국 11월 중순, 프랑스군은 오글리오 강을 건너 밀라노 공국으로 퇴각했다.[21][9]
4. 전투의 영향
키아리 전투의 결과,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탈영병이 속출했다. 반면, 외젠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밀라노에서 프랑스 군대는 지역 주민들에게 병사들의 급료와 숙소를 위한 500만 리브르, 사료를 위한 200만 리브르를 강제로 징수하여 민심을 잃었다.[21] 반면 외젠은 만토바 공국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미란돌라와 과스탈라를 차지했다.[18] 외젠은 지역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군율을 엄격하게 지켰는데, 약탈을 이유로 병사 48명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21]
4. 1. 국제 관계 변화
키아리 전투에서 외젠의 승리는 해상 강국들이 레오폴트 1세를 돕도록 장려하는데 도움이 되었다.[9] 1701년 9월 7일, 전투가 벌어진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은 대동맹의 두 번째 조약을 체결하여 황제의 이탈리아 내 스페인 영토에 대한 주장을 지지했다.[9]프랑스군은 여전히 밀라노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입지는 약했다. 사기는 저조했고 탈영병이 많았다. 루이 14세는 빌레루아에게 "다시 유리한 상황이 아니면 적을 공격하지 말라"고 촉구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손자(필리프 5세)가 이탈리아를 잃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11] 10월이 되자 프랑스군은 전쟁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잃었지만, 루이 14세는 다음 해 전투를 위해 증원을 보내 황제가 외젠의 세력만큼 증강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5. 평가
키아리 전투는 사보이 공작 외젠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보여주는 전투로 평가된다. 반면, 빌레루아는 상황 판단 오류와 무리한 공격으로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는 비판을 받는다.
참조
[1]
서적
The Art of Warfare in the Age of Marlborough
[2]
웹사이트
Imperial Army at the Battle of Chiari
https://web.archive.[...]
[3]
정보
[4]
서적
History of the House of Austria
[5]
서적
Prince Eugene of Savoy
[6]
서적
Louis XIV
[7]
서적
History of the House of Austria
[8]
서적
Louis XIV
[9]
서적
Prince Eugene of Savoy
[10]
서적
Leopold I of Austria
[11]
서적
Louis XIV
[12]
서적
The Art of Warfare in the Age of Marlborough
[13]
정보
[14]
정보
[15]
서적
History of the House of Austria, vol.ii
[16]
서적
Prince Eugene of Savoy
[17]
서적
Louis XIV
[18]
서적
History of the House of Austria, vol.ii
[19]
서적
[20]
서적
Louis XIV
[21]
서적
Prince Eugene of Savoy
[22]
서적
Louis X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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