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프랑스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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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프랑스 동맹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프랑스의 팽창을 막고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국가들이 결성한 군사 동맹을 통칭한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총 7차례의 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제1차(1792-1797)부터 제7차(1815)까지 각 동맹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집권 시기에 프랑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했다. 대프랑스 동맹이라는 용어는 프랑스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과 구분되며, 프랑스와 동맹국 간의 전쟁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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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랑스 동맹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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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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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대프랑스 동맹 |
일부 |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
시기 | 1792년 4월 20일 - 1815년 11월 20일 |
장소 | 유럽 유럽 국가의 해외 식민지 |
결과 | 동맹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1804년 이전) (1804년 이후) 프랑스의 위성국 |
교전국 2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1801) (1801-) (1806년 이전) (1804년 이후) |
지휘관 | |
프랑스 측 지휘관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루이 베르티에 루이 니콜라 다부 장 란† 앙드레 마세나 조아생 뮈라 미셸 네 니콜라 장드듀 술트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장바티스트 주르당 에두아르 모르티에 클로드 페랭 자크 마크도날 니콜라 우디노† 루이 가브리엘 쉬셰 피에르 빌뇌브† 조제프 보나파르트 외젠 드 보아르네 |
동맹국 측 지휘관 | 조지 3세 섭정왕자 조지 요크 공작 프레더릭 윌리엄 피트 아서 웰즐리 헨리 파제트 롤랜드 힐 존 무어 프란츠 2세 카를 필리프 테셴 공작 카를 카를 레이베리히 요한 폰 외스터라이히 요제프 라데츠키 알렉산드르 1세 바클라이 드 톨리 미하일 쿠투조프 레온티 베니히센 표트르 바그라티온 표트르 비트겐슈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게프하르트 블뤼허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
피해 규모 | |
프랑스군 | 1792-1801년: 1,000,000명 사망, 부상, 실종, 포로 또는 탈영 1805-1815년: 306,000명 사망 |
오스트리아군 | 1792-1797년: 514,700명 사망, 부상 또는 포로 1799-1801년: 440,000명 사망, 부상 또는 포로 1805-1815년: 396,000명 전사 |
프로이센군 | 154,000명 전사 |
러시아군 | 299,000명 전사 |
기타 피해 |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700,000명 사망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300,000명 사망 반도 전쟁: 2,400,000명 사망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450,000명 사망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60,000명 사망 |
관련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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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어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라는 용어는 프랑스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과 구별된다.
- 프랑스 혁명 전쟁: 1792년부터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기 전까지 혁명 프랑스가 관련된 모든 전쟁을 포함한다.
- 나폴레옹 전쟁: 1799년부터 1815년까지 나폴레옹이 통치하던 프랑스가 관련된 전쟁(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포함)을 의미하거나,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정의되기도 한다.[3]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1798-1802)은 나폴레옹 집권 시기에도 발발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 전쟁에 포함되기도 하고 나폴레옹 전쟁에 포함되기도 한다.[3] 어떤 경우에는 나폴레옹이 직접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 프랑스 총재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전쟁으로 간주되어 나폴레옹 전쟁으로 불리지 않기도 한다.
'대프랑스 동맹 전쟁'은 대프랑스 동맹 당사국이 관련된 전쟁만을 의미하므로,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 포함된 모든 전쟁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스위스 침공(1798), 슈테클리크리크(1802), 반도 전쟁(1807-1814), 러시아 침공(1812) 등은 대프랑스 동맹 전쟁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 프랑스 전쟁"이라는 용어는 1792년부터 1815년까지의 거의 지속적인 전쟁 기간을 지칭하기 위해 영국 역사학에서 사용되기도 한다.[7] 역사학자 마이크 래포트는 1792년부터 1815년까지의 전체 기간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프랑스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2. 1. 어원
"대프랑스 동맹"이라는 용어는 1803년 프랑스 호민원 보고서에서 처음 사용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이 보고서의 제목은 ''Résultats des guerres, des négociations et des traités qui ont préced́é et suivi la coalition contre la France'' ("프랑스에 대한 동맹의 전후 전쟁, 협상 및 조약의 결과")였다.[4] 1793년 4월, 뒤무리에 장군이 네르빈덴 전투에서 패배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면서 프랑스에 큰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Les événements de cette époque sont les plus pénibles à décrire de tous ceux qui ont signalé ''les guerres de la coalition''." ("그 시대의 사건들은 '동맹 전쟁'을 특징짓는 모든 사건들 중 묘사하기 가장 고통스럽다." [강조 추가])라고 언급되었다.[4]1805년 1월, ''잘츠부르크 인텔리겐츠블라트''는 "Das Staatsinteresse von Baiern bei dem dritten Koalitions-Kriege" ("바이에른의 제3차 동맹 전쟁에서의 국익")를 논하며 동맹 전쟁에 번호를 매긴 최초의 사례 중 하나였다.[5] 비록 제3차 동맹이 그 당시에 결성되었지만, 전쟁은 아직 발발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신문은 이웃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오스트리아가 이끄는 동맹보다는 프랑스 제국 편에 설 가능성이 높은 이유에 대해 논의했다. 1805년 9월 30일, 울름 전역이 시작된 지 며칠 후, 나폴레옹 황제는 스트라스부르에서 군인들에게 연설을 시작하면서 "Soldats, la guerre de la troisième coalition est commencée." ("병사들이여, 제3차 동맹 전쟁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6]
2. 2. 다른 용어와의 비교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라는 용어는 프랑스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과 구별된다. 프랑스 혁명 전쟁은 1792년부터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기 전까지 혁명 프랑스가 관련된 모든 전쟁을 포함한다. 반면, 나폴레옹 전쟁은 1799년부터 1815년까지 나폴레옹이 통치하던 프랑스가 관련된 전쟁(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포함)을 의미하거나,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정의되기도 한다.[3]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1798-1802)은 나폴레옹 집권 시기에도 발발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 전쟁에 포함되기도 하고 나폴레옹 전쟁에 포함되기도 한다.[3] 어떤 경우에는 나폴레옹이 직접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 프랑스 총재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전쟁으로 간주되어 나폴레옹 전쟁으로 불리지 않기도 한다.
'대프랑스 동맹 전쟁'은 대프랑스 동맹 당사국이 관련된 전쟁만을 의미하므로,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 포함된 모든 전쟁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스위스 침공(1798), 슈테클리크리크(1802), 반도 전쟁(1807-1814), 러시아 침공(1812) 등은 대프랑스 동맹 전쟁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 프랑스 전쟁"이라는 용어는 1792년부터 1815년까지의 거의 지속적인 전쟁 기간을 지칭하기 위해 영국 역사학에서 사용되기도 한다.[7] 역사학자 마이크 래포트는 1792년부터 1815년까지의 전체 기간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프랑스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3. 동맹국
(1792–1797)
(1798–1802)
(1803–1806)
(1806–1807)
(1809)
(1813–1814)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