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사파롱가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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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사파롱가 해전은 1942년 11월 30일 밤, 제2차 세계 대전 중 과달카날 해역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일본 해군과 미국 해군 간의 전투였다.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려 했지만, 미군의 기습으로 구축함 1척을 잃고, 미 순양함 4척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전술적으로는 일본 해군이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과달카날 섬에 보급을 실패하여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해전은 미 해군의 야간 전투 능력과 어뢰 성능에 대한 과소평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이후 미 해군의 전술 교리 변경과 기술적 개선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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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사파롱가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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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룽가 곶 야간 전투 |
전역 | 솔로몬 제도 전역 |
분쟁 | 태평양 전쟁 |
날짜 | 1942년 11월 30일 |
장소 | 과달카날 섬 타사파롱가 곶 해역 |
결과 | 일본군의 전술적 승리, 미국군의 전략적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일본 제국 |
교전국 2 | 미국 |
지휘관 | |
일본군 지휘관 | 다나카 라이조 소장 |
미국군 지휘관 | 칼턴 H. 라이트 소장 |
병력 규모 | |
일본군 병력 | 구축함 8척 |
미국군 병력 |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 |
피해 규모 | |
일본군 피해 | 구축함 1척 침몰 |
미국군 피해 | 중순양함 1척 침몰, 중순양함 3척 대파 |
관련 전투 |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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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주력 항공모함 4척 (아카기, 가가, 소류, 히류)을 잃고 FS 작전을 연기해야 했다. 대신 솔로몬 제도, 뉴기니 제도에 항공 기지를 건설하여 오스트레일리아를 고립시키는 SN 작전을 발동하고,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8월 7일, 미군은 워치타워 작전을 발동하여 과달카날 섬과 툴라기 섬을 점령했다. 이에 제1차 솔로몬 해전이 발발하여 일본 해군이 승리했지만, 해군 육전대를 태운 수송선단이 격퇴되어 과달카날・툴라기 조기 탈환은 좌절되었다.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지 않아 미 해병대를 격퇴할 기회를 놓쳤고, 미 해병대는 일본군의 기재를 이용하여 헨더슨 비행장 기지를 완성했다.
8월 24일 제2차 솔로몬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류조의 항공대로 과달카날 섬의 비행장을 공격하여 미군 기동부대의 주의를 끌고, 그 사이에 제3함대 주력 (쇼카쿠, 즈이카쿠)이 미군 기동부대를 격파하려 했으나, 오히려 류조가 격침되고 분견대는 철수했다. 제7사단 이치키 부대의 증원 부대를 호위하던 제2수뢰전대 (기함 진츠, 사령관 다나카 라이조 소장)는 과달카날 섬 및 B-17의 항공 공격을 받아 진츠가 중파, 구축함 무츠키, 수송선 긴류마루가 격침되어 과달카날 섬행을 단념했다. 진츠는 스즈카제의 호위를 받으며 트럭 정박지로 향했고, 이듬해 1월까지 전선에서 이탈해야 했다.
11월 12일 제3차 솔로몬 해전에서 제2수뢰전대 (기함 하야시오, 사령관 다나카 라이조 소장)는 제38사단 주력, 3만 명·20일분의 식량과 화기·탄약 등을 실은 육군 수송선 11척을 호위하던 중, 11월 14일 미군기의 공격을 받아 수송선 6척이 침몰, 1척이 손상되어 후퇴하고, 4척만 남았다. 다나카 라이조 소장은 남은 구축함 8척 (하야시오, 오야시오, 구로시오, 카게로, 마키나미, 나가나미, 타카나미, 스즈카제)과 수송선 4척을 이끌고 과달카날 섬으로 향했다.
11월 15일 다나카 라이조 소장은 남은 수송선 4척 (히로카와마루, 야마우라마루, 기누가와마루, 산토마루)을 타사파롱가 정박지에 좌초시켜 양륙하기로 결정했다. 연합함대와 전진 부대 (제2함대)는 이 결정을 승인했지만, 외남양 부대 지휘관 (제8함대 사령장관 미카와 군이치 중장)은 수송선의 좌초 양륙에 반대하여, 일단 퇴피하여 다음날 양륙을 실시하도록 통지했다. 다나카 라이조 소장은 좌초 양륙을 강행하여 수송선 4척을 좌초시켰다. 제2수뢰전대는 오전 2시 30분에 호위를 중단하고 북쪽으로 퇴피했다. 해안에 좌초된 수송선 4척은 양륙 작업을 계속했지만, 병력 2,000명과 탄약 360상자 (경야포, 산포), 거의 4일분의 보리·쌀 1,500 묶음을 양륙한 시점에서, 오전 6시 이후의 공습과 미 함대의 함포 사격에 의해 모두 불탔다.
겨우 양륙한 병기·탄약 식량 대부분도 해변 집적지에 모으는 것이 고작이었고, 헨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해 오는 미군기의 폭격과 기총 소사에 의해 하역 조직력이 마비되고, 미군기의 공격에 의해 물자는 쌓인 채로 소실되었다. 이로 인해 과달카날 섬의 병력은 약 2 - 3만 명에 달했지만, 전염병에 걸린 자나 아사 직전의 자가 대다수였으며, 통상 전투가 가능한 병원은 8,000명 정도였다.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섬의 육군 부대에 식량과 의약품을 보급하기 위해 '드럼통 수송 작전'을 고안했다. 이 작전은 석유와 가스 드럼통을 비우고 그 안에 식량과 의약품을 절반만 채워 밀봉하고, 밧줄로 묶어 해상에 투하한 후, 해안의 육군 부대가 이를 끌어당겨 회수하는 방식이었다.[14]
1942년 11월 30일, 다나카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일본 해군 제2수뢰전대가 드럼통 수송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과달카날 섬으로 향했다. 다나카 라이조의 함대 주력은 제2구축대의 구축함 8척이었다. 이 중 6척의 구축함(구로시오, 오야시오, 가게로, 스즈카제, 가와카제, 마키나미)이 200~240개의 수송 드럼통들을 싣고 과달카날의 타사파롱가 곶으로 향했다. 다나카 라이조의 기함 나가나미와 다카나미가 6척의 수송 구축함을 호위하였다. 중량을 가볍게 하기 위해 6척의 수송 구축함은 93식 어뢰 (롱 랜스)의 재장전을 쇼트랜드에 남겨두고, 각 함선에는 튜브당 어뢰 1기씩 8기의 어뢰가 남겨졌다.[15][16]
2. 1. 과달카날 전역
1942년 8월 7일,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은 일본군의 남태평양 진출을 저지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툴라기, 플로리다 제도에 상륙했다. 이 상륙 작전은 6개월 간 이어진 과달카날 전역의 시작이었다.[6]섬에 있던 일본군 2,000~3,000명은 기습을 당했고, 8월 8일 밤에는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중장의 지휘 하에 있던 11,000명의 연합군이 툴라기와 근처 작은 섬들을 확보했으며, 과달카날의 룬가 포인트에 일본군이 건설 중이던 비행장을 점령했다. 이 비행장은 연합군에 의해 "헨더슨 비행장"으로 명명되었다. 헨더슨 비행장에서 작전을 펼치는 연합군 항공기는 과달카날에 대한 연합군의 암호명에서 따온 "선인장 항공대"(CAF)라고 불렸다.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해병대는 룬가 포인트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 후 두 달 동안 증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과달카날의 룬가 포인트에 주둔한 미군 병력은 20,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7]
- -|]]|thumb|350px|left|솔로몬 제도. "더 슬롯"(뉴 조지아 해협)은 부건빌과 숏랜드(중앙)에서 과달카날(오른쪽 아래)까지 섬의 중앙을 통과한다.]]
과달카날에 대한 연합군의 상륙에 대응하여, 일본 대본영은 하야쿠타케 하루키치 중장의 지휘 하에 라바울에 주둔한 일본 제17군을 섬을 탈환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17군의 첫 번째 부대는 8월 19일에 섬에 도착하기 시작했다.[8]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상실한 일본군은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했고, 헨더슨 비행장의 미군 비행기 때문에 대형 수송선을 사용할 수 없었다. 미카와 군이치 부제독의 지휘를 받는 제8함대의 일본 군함, 주로 경순양함과 구축함은 "더 슬롯"을 따라 과달카날까지 왕복하는 데 보통 하룻밤이면 충분했고, CAF의 공습에 노출되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중장비, 차량, 식량 등을 수송하기 어려웠다. 이 고속 군함의 과달카날 수송은 전역 기간 내내 이루어졌고, 연합군은 "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불렀으며, 일본군은 "쥐 수송"이라고 불렀다.[9]
일본군은 1942년 8월부터 11월까지 헨더슨 비행장을 탈환하고 과달카날에서 연합군을 몰아내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일본군이 추가 병력을 섬에 투입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11월 12~15일의 과달카날 해전에서 실패했다.[10]
11월 26일, 일본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은 라바울에서 새로운 일본 제8방면군의 지휘를 맡았다. 이마무라의 최우선 목표는 헨더슨 비행장과 과달카날 탈환이었으나, 연합군의 부나-고나 전투로 인해 뉴기니 방어가 더 시급해지면서 과달카날 증원은 보류되었다.[11]
- -|]]|thumb|right|다나카 라이조]]
- -|]]|thumb|right|칼턴 H. 라이트]]
CAF 항공기, 툴라기 주둔 미 해군 어뢰정의 위협과 밝은 달빛으로 인해 일본군은 과달카날에 주둔한 병력에게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잠수함에 의존하게 되었다. 11월 16일부터 3주 동안 16척의 잠수함이 매일 밤 한 척씩 야간에 식량을 섬으로 수송했다. 각 잠수함은 20~30톤의 물자를 수송할 수 있었는데, 이는 제17군에게 하루치의 식량에 해당했지만, 정글을 통해 최전선 부대로 물자를 손으로 운반하는 어려운 작업으로 인해 과달카날의 일본군을 유지하는 데는 제한적인 가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일본군은 솔로몬 제도 중부에 3개의 기지를 건설하려 했지만, 연합군의 기지 공습으로 인해 이 계획은 포기되었다.[12]
11월 26일 제17군은 이마무라에게 심각한 식량 위기에 직면했다고 통보했다. 일부 최전선 부대는 6일 동안 보급을 받지 못했고, 후방 부대조차도 3분의 1 배급을 받고 있었다. 이 상황으로 인해 일본군은 필요한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구축함을 다시 사용해야 했다.[13]
제8함대 요원들은 과달카날에 물자를 수송하는 구축함의 노출을 줄이기 위한 계획을 고안했다. 대형 기름 통이나 가스 드럼을 세척하여 의료품과 식량으로 채우고 부력을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남겨두고 밧줄로 묶었다. 구축함이 과달카날에 도착하면 급선회를 하고 드럼을 풀면 해안에서 수영자나 보트가 밧줄의 부유된 끝을 잡아 해변으로 가져갈 수 있으며, 병사들이 물자를 끌어올 수 있었다.[14]
쇼트랜드 제도에 기지를 둔 제8함대의 과달카날 증원 부대는 소장 다나카 라이조의 지휘 하에 미카와에 의해 11월 30일 밤, 드럼 방식을 사용하여 예정된 5번의 작전 중 첫 번째 작전을 수행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았다. 다나카 부대는 제2구축대대 8척의 함선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6척의 구축함이 각 200~240개의 물자 드럼을 타사파롱가 곶까지 수송하도록 배정되었다. 다나카의 기함 나가나미는 다카나미와 함께 호위 역할을 했다. 6척의 드럼 수송 구축함은 구로시오, 오야시오, 가게로, 스즈카제, 가와카제, 마키나미였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드럼 수송 구축함은 93식 어뢰 (롱 랜스)의 재장전을 쇼트랜드에 남겨두고, 각 함선에는 튜브당 어뢰 1기씩 8기의 어뢰가 남겨졌다.[15][16]
과달카날 해전 이후, 연합군 남태평양 지역 사령관 미국 해군 부제독 윌리엄 할시는 11월 24일에 에스피리투 산토에 제67기동부대(TF67)를 편성하는 것을 포함하여 지휘 하의 미 해군 부대를 재편성했으며, 제67기동부대는 중순양함 미니애폴리스, 뉴올리언스, 펜사콜라, 노샘프턴, 경순양함 호놀룰루 및 4척의 구축함(플레처, 드레이턴, 모리, 퍼킨스)으로 구성되었다. 11월 28일, 칼턴 H. 라이트 미 해군 소장이 토머스 킨케이드를 대신하여 TF67의 사령관이 되었다.[17]
라이트는 지휘를 맡자마자 자신의 함선 지휘관들에게 미래에 일본군과 교전하기 위한 자신의 계획을 브리핑했는데, 그는 과달카날 주변에서 야간 전투를 예상했다. 킨케이드와 함께 작성한 이 계획은 레이더를 장착한 구축함이 순양함 앞에서 정찰하여 일본 군함을 발견하면 기습 어뢰 공격을 가한 다음, 순양함이 사격할 수 있는 명확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해당 지역을 떠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후 순양함은 10,000~12,000 야드(9,100~11,000 미터) 거리에서 함포 사격을 가하도록 했다. 순양함의 수상기는 전투 중에 정찰하고 조명탄을 투하할 예정이었다.[18]
- -|]]|thumb|left|11월 30일, 과달카날로 향하는 TF67. ''플레처'' (전경) 뒤에는 ''퍼킨스'', ''모리'', ''드레이턴''과 순양함이 (멀리) 따라오고 있다.]]
11월 29일, 연합군 정보 요원들은 다나카의 보급 작전을 알리는 과달카날의 제17군에 전달된 일본군 암호문을 가로채 해독했다. 할시는 이 메시지를 전달받고 라이트에게 TF67을 이끌고 과달카날 인근에서 다나카를 요격하도록 명령했다. TF67은 라이트가 ''미니애폴리스''에 기함을 두고 11월 29일 자정 직전에 과달카날까지 580 마일(930 킬로미터)를 항해하기 위해 27 노트(시속 50 킬로미터)로 에스피리투 산토를 출발했다. 항해 중 과달카날로 향하는 호송 임무에서 돌아오던 구축함 램슨과 라드너는 TF67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라이트는 합류하는 구축함의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전투 계획을 브리핑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순양함 뒤에 위치를 배정했다. 11월 30일 17:00에 라이트의 순양함은 그날 밤 예상되는 전투 중에 조명탄을 투하하기 위해 툴라기로 각각 수상기를 1대씩 발진시켰다. 20:00에 라이트는 승무원들에게 전투 배치를 명령했다.[19]
다나카 부대는 11월 30일 이른 아침, 과달카날로 향하기 위해 쇼트랜드 제도를 출발했다. 다나카는 부겐빌 해협을 통해 북동쪽으로 향한 후 남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인도미테이블 해협을 통과하여 연합군의 항공 정찰기를 회피하려 했다. 부겐빌 남부에 주둔한 호주 해안 감시원 폴 메이슨은 다나카의 함선이 쇼트랜드를 출발했다는 소식을 무선으로 보고했고, 이 메시지는 라이트에게 전달되었다. 동시에 일본 정찰기가 과달카날 인근에서 연합군 호송대를 발견하고 이 정보를 다나카에게 전달했으며, 다나카는 구축함 지휘관들에게 그날 밤 작전을 예상하고 "그런 경우 물자 하역에 관계없이 적을 파괴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20]
2. 2. 드럼통 수송 작전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섬의 육군 부대에 식량과 의약품을 보급하기 위해 새로운 수송 방식인 '드럼통 수송 작전'을 고안했다. 이 작전은 석유와 가스 드럼통을 비우고 그 안에 식량과 의약품을 절반만 채워 밀봉하고, 밧줄로 묶어 해상에 투하한 후, 해안의 육군 부대가 이를 끌어당겨 회수하는 방식이었다.[14]1942년 11월 30일, 다나카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일본 해군 제2수뢰전대가 드럼통 수송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과달카날 섬으로 향했다. 다나카의 함대 주력은 제2구축대의 구축함 8척이었다. 이 중 6척의 구축함(구로시오, 오야시오, 가게로, 스즈카제, 가와카제, 마키나미)이 200~240개의 수송 드럼통들을 싣고 과달카날의 타사파롱가 곶으로 향했다. 다나카의 기함 나가나미와 다카나미가 6척의 수송구축함을 호위하였다. 중량을 가볍게 하기 위해 6척의 수송구축함은 93식 어뢰 (롱 랜스)의 재장전을 쇼트랜드에 남겨두고, 각 함선에는 튜브당 어뢰 1기씩 8기의 어뢰가 남겨졌다.[15][16]
3. 전투
1942년 11월 30일 밤, 다나카 라이조 소장이 이끄는 일본 해군 제2수뢰전대는 과달카날 섬 북서쪽 해역에 접근했다. 이들의 목표는 드럼통을 이용하여 과달카날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제2수뢰전대는 8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6척은 200~240개의 보급용 드럼통을 싣고 있었다. 다나카 소장의 기함은 나가나미였고, 타카나미가 호위를 맡았다.[27]
한편, 칼턴 H. 라이트 소장이 지휘하는 미 해군 제67기동부대는 과달카날 해역에서 일본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제67기동부대는 중순양함 미니애폴리스, 뉴올리언스, 펜사콜라, 노샘프턴과 경순양함 호놀룰루, 그리고 구축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23시 06분, 미군 함대는 레이더로 다나카 함대를 탐지했다. 23시 16분, 다나카 소장은 보급 작전을 중단하고 전투를 지시했다. 23시 20분, 미군 구축함들은 어뢰를 발사했지만, 너무 멀거나 방향이 맞지 않아 명중하지 못했다.
23시 21분, 미군 순양함들은 포격을 시작했고, 가장 가까이 있던 일본 구축함 타카나미에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타카나미는 반격하며 어뢰를 발사했지만, 곧 미군의 포격에 큰 피해를 입고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27]
타카나미가 파괴되는 동안, 다른 일본 구축함들은 어뢰를 발사하며 반격했다. 스즈카제, 나가나미, 가와카제는 어뢰를 발사했고, 구로시오와 오야시오도 어뢰를 발사하여 총 44발의 어뢰가 미군 함대를 향해 접근했다.
23시 27분, 스즈카제 또는 타카나미에서 발사된 어뢰 2발이 미니애폴리스를 강타하여 연료 저장고와 보일러실에 큰 피해를 입혔다. 곧이어 뉴올리언스도 어뢰에 맞아 선수 부분이 파괴되었다. 23시 39분에는 펜사콜라가 어뢰에 맞아 큰 화재가 발생했다.
호놀룰루는 빠른 속도와 기동으로 피해를 입지 않고 전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노샘프턴은 가와카제에서 발사된 어뢰 2발을 맞고 침몰했다.
23시 44분, 다나카 소장은 함대에 전장 이탈을 명령했다. 구로시오와 가게로는 추가로 어뢰를 발사했지만 빗나갔다. 타카나미의 생존자 구조를 위해 오야시오와 구로시오가 돌아왔지만, 미군 함선을 발견하고 구조를 포기했다.[29]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구축함 타카나미를 잃었지만, 미군 순양함 부대에 큰 피해를 입히고 전장을 이탈했다.[27]
3. 1. 양측 전력
미국 제67기동부대 | 일본 第二水雷戦隊|제2수뢰전대일본어 | ||||
---|---|---|---|---|---|
TF/TG | 군함 | 지휘관 | TF | 군함 | 지휘관 |
선봉 TG 67.4 | 플레처 (DD) | 윌리엄 M. 콜 | 제31구축대 | ||
퍼킨스 (DD) | 월터 칠코트 포드 | 호위 부대 | 나가나미 (DD) (FF) | 다나카 라이조 소장 | |
모리 (DD) | 젤저 로열 심스 | 타카나미 (DD) | 오구라 마사미[27] | ||
드레이튼 (DD) | 제이콥 엘리엇 쿠퍼 | 수송 부대 1 (타사파롱가 곶) | 마키나미 (DD) | 히토미 도요지[28] | |
TF 67.2 | 미니애폴리스 (CA) | 칼턴 H. 라이트 소장 찰스 E. 로젠달 대령 | 제15구축대 | ||
뉴올리언스 (CA) | 클리포드 H. 로퍼 대령 | 오야시오 (DD) | 사토 토라지로 대령[29] 아즈마 히데오 | ||
펜사콜라 (CA) | 프랭크 L. 로우 대령 | 쿠로시오 (DD) | 다케우치 하지미 | ||
TG 67.2.3 | 호놀룰루 (CL) | 말론 S. 티스데일 소장 로버트 W. 헤일러 대령 | 카게로 (DD) | 아리모토 테루미치 | |
노샘프턴 (CA) | 윌라드 A. 키츠 3세 대령 | 제24구축대 | |||
후위 부대 | 램슨 (DD) | 로렌스 A. 아베크롬비 중령 필립 헨리 피츠제럴드 중령 | 수송 부대 2 | 카와카제 (DD) | 나카하라 기이치로 중령 야나세 요시오 |
라드너 (DD) | 윌라드 M. 스위터 중령 | 스즈카제 (DD) | 시바야마 가즈오 |
3. 2. 전투 경과
1942년 11월 30일 밤, 다나카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일본 해군 제2수뢰전대는 과달카날 섬 북서쪽 해역에 접근했다. 주요 목적은 드럼통을 이용해 과달카날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제2수뢰전대는 8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6척은 200~240개의 보급용 드럼통을 적재하고 있었다. 다나카 소장의 기함은 나가나미였고, 다카나미가 호위를 맡았다.한편, 미 해군 제67기동부대는 칼턴 H. 라이트 소장의 지휘 하에 과달카날 해역에서 일본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제67기동부대는 중순양함 미니애폴리스, 뉴올리언스, 펜사콜라, 노샘프턴과 경순양함 호놀룰루, 그리고 구축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23시 06분, 미군 함대는 레이더를 통해 다나카 함대를 탐지했다. 23시 16분, 다나카 소장은 보급 작전 중단을 명령하고 전투를 지시했다. 23시 20분, 미군 구축함들은 어뢰를 발사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거나 방향이 맞지 않아 명중하지 못했다.
23시 21분, 미군 순양함들은 포격을 개시했고, 가장 가까이 있던 일본 구축함 다카나미에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다카나미는 반격하며 어뢰를 발사했지만, 곧 미군의 포격에 큰 피해를 입고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다카나미가 파괴되는 동안, 다른 일본 구축함들은 어뢰를 발사하며 반격했다. 스즈카제, 나가나미, 가와카제는 어뢰를 발사했고, 구로시오와 오야시오도 어뢰를 발사했다. 일본군이 발사한 총 44발의 어뢰는 미군 함대를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23시 27분, 스즈카제 또는 다카나미에서 발사된 어뢰 2발이 미니애폴리스를 강타하여 연료 저장고와 보일러실에 큰 피해를 입혔다. 곧이어 뉴올리언스도 어뢰에 맞아 선수 부분이 파괴되었다. 23시 39분에는 펜사콜라가 어뢰에 맞아 큰 화재가 발생했다.
호놀룰루는 빠른 속도와 기동으로 피해를 입지 않고 전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노샘프턴은 가와카제에서 발사된 어뢰 2발을 맞고 침몰했다.
23시 44분, 다나카 소장은 함대에 전장 이탈을 명령했다. 구로시오와 가게로는 추가로 어뢰를 발사했지만 빗나갔다. 다카나미의 생존자 구조를 위해 오야시오와 구로시오가 돌아왔지만, 미군 함선을 발견하고 구조를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구축함 다카나미를 잃었지만, 미군 순양함 부대에 큰 피해를 입히고 전장을 이탈했다.
미국 제67기동부대 | 일본 第二水雷戦隊|제2수뢰전대일본어 | ||||
---|---|---|---|---|---|
TF/TG | 군함 | 지휘관 | TF | 군함 | 지휘관 |
선봉 TG 67.4 | 플레처 (DD) | 윌리엄 M. 콜 | 제31구축대 | ||
퍼킨스 (DD) | 월터 칠코트 포드 | 호위 부대 | 나가나미 (DD) (FF) | 다나카 라이조 소장 | |
모리 (DD) | 젤저 로열 심스 | 다카나미 (DD) | 오구라 마사미[27] | ||
드레이튼 (DD) | 제이콥 엘리엇 쿠퍼 | 수송 부대 1 (타사파롱가 곶) | 마키나미 (DD) | 히토미 도요지[28] | |
TF 67.2 | 미니애폴리스 (CA) | 칼턴 H. 라이트 소장 찰스 E. 로젠달 대령 | 제15구축대 | ||
뉴올리언스 (CA) | 클리포드 H. 로퍼 대령 | 오야시오 (DD) | 사토 토라지로 대령[29] 아즈마 히데오 | ||
펜사콜라 (CA) | 프랭크 L. 로우 대령 | 구로시오 (DD) | 다케우치 하지미 | ||
TG 67.2.3 | 호놀룰루 (CL) | 말론 S. 티스데일 소장 | 가게로 (DD) | 아리모토 테루미치 | |
노샘프턴 (CA) | 윌라드 A. 키츠 3세 대령 | 제24구축대 | |||
후위 부대 | 램슨 (DD) | 로렌스 A. 아베크롬비 중령 필립 헨리 피츠제럴드 중령 | 수송 부대 2 | 가와카제 (DD) | 나카하라 기이치로 중령 야나세 요시오 |
라드너 (DD) | 윌라드 M. 스위터 중령 | 스즈카제 (DD) | 시바야마 가즈오 |
4. 전투 이후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칼턴 H. 라이트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은 일본군의 도쿄 익스프레스 보급 작전을 저지하려 했으나, 일본 구축함의 어뢰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미니애폴리스는 어뢰 두 발을 맞고 선수 부분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37명이 사망했다.[42] 뉴올리언스는 어뢰 한 발에 선수 탄약고와 항공 휘발유 저장고가 폭발하여 포탑 2번 앞부분이 절단되었고, 183명이 사망했다.[43] 펜서콜라는 주 돛대에 어뢰를 맞아 화재가 발생하고 125명이 사망했으며, 함선 기능이 크게 손상되었다.[45][46] 노샘프턴은 어뢰 두 발을 맞고 침몰하여 50명이 사망했다.[48] 반면, 호놀룰루는 빠른 속도와 기동으로 피해를 입지 않고 전투 지역을 벗어났다.[47]
일본 해군은 구축함 다카나미가 격침되었지만,[50] 나머지 함선들은 큰 피해 없이 과달카날 해안을 따라 철수했다.
4. 1. 전술적/전략적 승패
타사파롱가 해전은 일본군의 전술적 승리로 끝났다. 일본 해군은 산소 어뢰를 활용하여 미군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93식 어뢰는 직경 61cm, 탄두 폭약 490kg으로, 미군 Mk.15 어뢰(직경 53cm, 폭약 375kg)보다 훨씬 강력했다. 또한, Mk.15의 사정거리는 4,500m였지만, 산소 어뢰는 20,000m로 4배 이상 길었고, 궤적이 거의 보이지 않아 탐지가 어려웠다.[58]당시 일본 해군 구축함은 대부분 카게로형 구축함 및 그 개량형인 유구모형 구축함으로, 모두 93식 어뢰를 탑재하고 있었다. 미군 순양함 부대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54]
그러나 일본군은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원래 목적인 수송 작전에는 실패했다. 따라서 전술적으로는 일본군의 승리였지만, 전략적으로는 미군의 승리였다. 미군은 일본군의 보급을 저지하여 과달카날 섬의 일본군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59][60][61]
이 해전 이후 일본군, 특히 다나카 소장의 지휘에 대해 일본과 미국에서의 평가가 크게 엇갈렸다.[55]
4. 2. 양측의 평가
일본 해군 내부에서는 다나카 라이조 소장의 지휘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주요 비판점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비판으로 인해 다나카 소장은 제2수뢰전대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해상 근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나카 소장을 옹호하는 평가도 존재한다.
- '지휘관 선두'는 일본 해군의 전통이었으나, 이를 고수하다 사령관이 먼저 전사하는 사례도 있었다.
- 다나카 소장은 항공기의 위력을 정당하게 평가하여 드럼통 수송에 반대했다.[79]
- 탈락함 승무원 구조는 기함이 직접 하는 경우가 드물다.
- 다나카 소장은 전투 중에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81]
미국 해군은 다나카 소장의 지휘를 높이 평가했다.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은 다나카 소장을 "불굴의 맹장"이라 칭송하며, 적절한 시기에 돌격 명령을 내려 미군에 큰 타격을 준 판단력과 일본 구축함 부대의 움직임을 극찬했다.
4. 3. 이후 작전에 미친 영향
타사파롱가 해전 이후, 일본군은 과달카날에 대한 보급을 계속 시도해야 했다. 그러나 미군은 순양함을 좁은 해역에 투입하는 대신, 어뢰정과 항공기를 활용하여 일본군의 수송 작전을 저지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59]12월 3일, 다나카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2차 수송 부대는 타사파롱가에 1,500개의 드럼통을 투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음 날 미군 항공기의 공격으로 대부분 파괴되어 육상 부대가 회수할 수 있었던 것은 310개에 불과했다. 원래 밤사이에 회수할 예정이었지만, 굶주림에 지쳐 체력이 떨어진 육상 부대 병사들은 드럼통 인양이라는 중노동을 견딜 수 없었다.[59]
12월 7일의 제3차 수송 작전은 미 해군 PT 보트의 공격으로 인해 드럼통 투입을 단념해야 했다.[59] 12월 8일, 일본 해군은 구축함 수송 중단을 선언했지만, 육군과의 협의 끝에 12월 11일에 마지막 수송 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64][65]
12월 11일의 제4차 수송 작전에서는 일본군의 최신예 구축함 테루즈키|테루즈키/Teruzuki일본어ja-Latn가 격침되고, 1,200개의 드럼통 중 220개만이 회수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60] 구축함 수송과 병행하여 잠수함 수송도 실시되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0]
결국,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의 보급 문제와 전력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12월 31일, 어전회의를 통해 과달카날 섬 철수를 정식 결정했다. 1943년 2월,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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