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와 군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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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카와 군이치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1910년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제8함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진주만 공격 당시 전함 제3전대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며, 사보섬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과달카날 전역에서의 전략적 판단으로 비판받았다. 종전 후 B급 전범으로 수감되었으며, 1981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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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와 군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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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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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미카와 군이치 |
본명 | 三川 軍一 (미카와 군이치) |
출생 | 1888년 8월 29일 |
출생지 | 일본, 히로시마현 |
사망 | 1981년 2월 25일 |
복무 기간 | 1910년–1945년 |
소속 | 일본 제국 해군 |
최종 계급 | 해군 중장 |
경력 | |
지휘 경력 | 하야토모 아오바 초카이 기리시마 병기동원국 제7전대 제5전대 제3전대 제8함대 해군 항해 학교 제2남방 방면 함대 서남 방면 함대 제13항공함대 제3남방 방면 함대 |
주요 전투 | |
참전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격 인도양 해전 미드웨이 해전 사보섬 해전 과달카날 해전 |
훈장 | |
수상 내역 | 욱일장 (3등) 욱일장 (4등) 서보장 (2등) |
2. 초기 생애 및 경력
미카와 군이치는 1930년대 중반 중순양함 아오바와 초카이, 그리고 전함 키리시마의 함장을 역임했다.[3] 1936년 12월 1일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1937년 11월 15일까지 일본 제국 해군 제2 함대 참모장을 역임했다.[4]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일본 제국 해군 참모부와 대본영에서 근무한 후, 다시 해상으로 돌아가 함대 전대를 지휘했으며, 처음에는 순양함, 다음에는 전함을 지휘했다. 1940년 11월 15일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3]
미카와의 주요 보직 및 진급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날짜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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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8월 15일 | "하야토모" 특무함 함장 |
1931년 12월 1일 | 해군병학교 교두 |
1934년 2월 20일 | "아오바" 함장 |
1934년 11월 15일 | "초카이" 함장 |
1935년 11월 15일 | "키리시마" 함장 |
1936년 12월 1일 | 해군 소장 진급, 제2함대 참모장 |
1937년 11월 15일 | 군령부 제2부장 |
1939년 11월 15일 | 제7전대 사령관 |
1940년 11월 1일 | 제5전대 사령관 |
1940년 11월 15일 | 해군 중장 진급 |
1941년 9월 6일 | 제1항공함대 소속 제3전대 사령관 |
2. 1. 초기 생애
미카와 군이치는 히로시마현 출신이다. 그는 1910년 일본 해군병학교 38기 졸업생으로, 149명의 생도 중 3등으로 졸업했다. 사관후보생으로 순양함 浅間|아사마일본어와 宗谷|소야일본어, 전함 薩摩|사쓰마일본어와 金剛|곤고일본어에서 복무한 후, 1913년부터 1914년까지 해군 어뢰 및 포술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4년 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위해 순양함 阿蘇|아소일본어에 탑승하여 중국으로 항해했다. 이후 구축함 杉|스기일본어와 수송선 ''세이토''에서 복무했으며, 일본 해군대학에서 수학했다.1919년부터 1920년까지 소위 미카와는 프랑스에서 열린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 회담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3]
1920년대 동안 미카와는 전함 榛名|하루나일본어와 순양함 龍田|다쓰타일본어, 生駒|이코마일본어, ''아소''를 포함한 여러 함선에서 항해사로 복무했다. 이후 해군 어뢰 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몇몇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1920년대 말, 사령관 미카와는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대표단의 일원이었으며, 그 직후 파리 주재 해군 무관이 되었다. 1930년 말 대령으로 진급한 그는 일본으로 귀국하여 행정 및 훈련 업무를 맡았다.
2. 2. 해군병학교 및 초기 군 경력
미카와 군이치는 1910년 일본 해군병학교 38기를 149명 중 3등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사관후보생으로 순양함, 소야, 전함 사쓰마, 곤고에서 복무했다. 1913년 해군 중위로 진급하여 수뢰학교 보통과 학생이 되었고, 1914년에는 포술학교 보통과 학생으로 교육받았다.[6][7] 같은 해 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위해 순양함 아소에 탑승하여 중국으로 항해했다. 이후 구축함 스기와 수송선 ''세이토''에서 복무했으며, 일본 해군대학에서 수학했다.1916년 해군 대위로 진급했고, 해군대학교 을종 학생(항해)이 되었다. 1917년 5월 해군대학교 전수 학생, 1917년 12월 수송함 "아오시마" 항해장이 되었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소위 신분으로 프랑스에서 열린 베르사유 조약 회담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3]
1920년 5월 전함 "하루나" 분대장이 되었고, 1920년 7월 경순 "류타" 항해장, 1921년 11월 순양전함 "이코마" 항해장을 거쳐 1922년 5월 부설함 "아소" 항해장이 되었다. 1922년 12월 해군 소좌로 진급했고, 1924년 11월 해군대학 갑종 22기를 졸업하였다.
1920년대 동안 미카와는 전함 하루나와 순양함 류타, 이코마, 아소 등 여러 함선에서 항해사로 복무했다. 이후 해군 어뢰 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몇몇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1928년 12월 프랑스에 파견되었고, 1929년 국제 연맹 해군 대표 수행원이 되었다. 1930년 프랑스 대사관 무관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말에 대령으로 진급한 그는 일본으로 귀국하여 행정 및 훈련 업무를 맡았다.
2. 3. 프랑스 파견 및 간전기 활동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소위 미카와 군이치는 프랑스에서 열린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 회담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3] 1920년대 동안 미카와는 전함 하루나, 순양함 류타, 이코마, ''아소'' 등 여러 함선에서 항해사로 복무했다. 이후 해군 어뢰 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몇몇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1928년 12월 프랑스에 파견되었고, 1929년 국제 연맹 해군 대표 수행원으로 활동했다. 1930년 프랑스 대사관 무관을 역임했다. 1930년 말 대령으로 진급한 후 일본으로 귀국하여 행정 및 훈련 업무를 맡았다.3. 제2차 세계 대전
미카와 군이치는 진주만 공격 당시 전함 제3전대를 지휘했으며, 인도양 습격과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활약했다. 1942년 7월 14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남태평양의 제8함대 사령장관을 맡아 과달카날 전역과 솔로몬 제도 전역에서 일본 해군 부대를 지휘했다.
1942년 8월 8일부터 8월 9일에 걸쳐 벌어진 사보섬 해전에서 미 해군과 왕립 호주 해군에 큰 타격을 입혔으나, 미군의 수송선단을 공격하지 않고 퇴각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을 받았다. 미카와는 당시 정보 부족과 함선 손실을 우려하여 내린 결정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이미 공격 범위 밖으로 벗어난 상태였다.
1942년 11월 13일부터 11월 14일 밤, 과달카날 해전에서 헨더슨 비행장에 대한 포격을 지휘했지만, 다음 날 중순양함 1척을 잃었다. 다나카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도쿄 익스프레스는 과달카날에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하는 야간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라에에 일본 증원군을 상륙시키려던 시도는 비스마르크 해 해전에서 큰 피해를 보았다.
미카와는 솔로몬 제도 상실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필리핀과 같은 후방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는 솔로몬 제도 전투가 일본군의 "블랙홀"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필리핀에서 함대를 지휘하다가 1944년 10월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일본에서 육상 근무를 했고, 1945년 5월 해군에서 물러났다.
3. 1. 진주만 공격과 초기 태평양 전선
미카와 군이치는 진주만 공격 당시 전함 제3전대(BatDiv 3) 지휘관이었다. 그는 진주만 공격 부대 호위 부대의 일환으로 자신의 전대 제1부대를 직접 지휘했으며, 나머지 전함들은 말레이시아에 일본군 상륙을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파견되었다. 미카와는 인도양 습격과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선두에서 지휘했다.[9]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에 참가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공격 후, 미카와는 재공격을 건의했지만, 제1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는 예정대로 공격을 진행하지 않고 이탈을 결정했다.[9]
1942년 1월 20일부터 22일까지 라바울・카비엥 공략 지원에 참가했다. 1942년 3월에는 자바 해 소탕전에 참가했으며, 1942년 4월에는 인도양 작전 실론 해전에 참가했다. 1942년 6월 5일부터 7일까지는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다.
3. 2. 제8함대 사령장관과 과달카날 전역
1942년 7월 14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미카와 군이치는 남태평양에서 주로 뉴브리튼 섬의 라바울, 뉴아일랜드의 카비엥에 있는 주요 기지를 기반으로 하는 새롭게 창설된 제8함대를 지휘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과달카날 전역과 솔로몬 제도 전역에 관련된 일본 해군 부대를 지휘했다.1942년 8월 8일 ~ 8월 9일에는 사보섬 해전을 지휘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이후 미군의 수송선단을 공격하지 않고 퇴각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을 받았다.
1942년 11월 13일부터 11월 14일 밤, 미카와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과달카날의 헨더슨 비행장에 대한 순양함 부대 포격을 지휘했지만, 다음 날 후퇴하는 중순양함 1척을 잃었다.[5] 다나카 라이조 소장은 과달카날의 일본 육군 부대에 병력과 보급품을 전달하는 "도쿄 익스프레스" 야간 작전을 종종 지휘했다. 그러나 미카와의 라에 기지에 일본 증원군을 상륙시키려는 시도는 비스마르크 해 해전으로 이어져 일본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미카와는 솔로몬 제도를 잃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필리핀과 같은 후방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는 일본 해군 최고 사령부에 솔로몬 제도에서 미국과 싸우는 것은 일본 군인, 해군, 비행사, 함선을 "블랙홀"에 쏟아붓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일본 해군 상사들과 육군 장군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3. 2. 1. 사보섬 해전
1942년 8월 8일부터 8월 9일 밤, 미카와 군이치는 중순양함과 구축함 1척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여 과달카날 인근 아이언바텀 사운드에서 미 해군 군함과 왕립 호주 해군 순양함을 상대로 사보섬 해전에서 압승을 거두었다.[2]그러나 미카와는 승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사들로부터 다소 비판을 받았다.[3] 그는 남쪽으로 추격하여 1942년 8월 8일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국 제1해병사단에게 탄약과 보급품을 계속 전달할 수 있도록 새벽까지 기다리고 있던 비무장 미국 화물 수송선대를 공격할 수도 있었으나,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라바울 기지로 돌아가 안전을 확보하기로 결정했다.[3] 미카와가 지휘한 함선 중 침몰하거나 심하게 손상된 유일한 함선은 순양함 카코(加古)로, 라바울로 귀환하는 도중 미국 해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3]
전쟁 후 미카와는 당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과달카날 섬 바로 남쪽에 미 항공모함 기동 부대가 있었고, 아침에 공습을 감행하여 자신의 함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이 분명하며, 출항 직전에 나가노 오사미 일본 해군 참모총장으로부터 가능한 한 함선을 잃지 않도록 지시받았고, 수송선을 공격하고 어둠 속에서 안전하게 철수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3] 그러나 당시 그는 미국 항공모함들이 전날 저녁 남쪽으로 철수하여 이미 그들의 공격 범위 밖으로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3] 따라서 그는 그 당시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사보섬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 것이 잘못된 결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3]
3. 2. 2. 과달카날 해전
1942년 8월 8일부터 9일 밤, 미카와 군이치는 중순양함과 구축함 1척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여 과달카날 인근 아이언바텀 사운드에서 사보섬 해전을 이끌었다. 이 해전에서 미 해군과 왕립 호주 해군 순양함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4]하지만 미카와는 승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2년 8월 8일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국 제1해병사단에 보급품을 전달하던 비무장 미국 화물 수송선대를 공격하는 대신, 북쪽으로 돌아가 라바울 기지로 귀환했다. 이 과정에서 순양함 카코(加古)가 미국 해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4]
전쟁 후, 미카와는 당시 정보로는 과달카날 남쪽에 미 항공모함 기동 부대가 있었고, 아침에 공습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출항 전 나가노 오사미 일본 해군 참모총장으로부터 함선 손실을 최소화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수송선을 공격하고 안전하게 철수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미 항공모함들은 이미 철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카와의 결정은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었다.[4]
1942년 11월 13일부터 14일 밤, 미카와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헨더슨 비행장에 대한 순양함 포격을 지휘했지만, 다음 날 중순양함 1척을 잃었다.[5]
3. 3. 후방 지역 전임과 종전
미카와 군이치는 1943년 4월까지 남태평양에서 제8함대를 지휘하며 과달카날 전역과 솔로몬 제도 전역에 관여했다. 사보섬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군 수송선단을 공격하지 않고 퇴각하여 상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9] 미카와는 당시 정보 부족과 함선 손실을 우려하여 내린 결정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이미 공격 범위 밖으로 벗어난 상태였다.[10]과달카날 해전에서는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지휘했지만, 퇴각 중 중순양함 1척을 잃었다. 다나카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도쿄 익스프레스"는 과달카날에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하는 야간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라에에 일본 증원군을 상륙시키려던 시도는 비스마르크 해 해전에서 큰 피해를 보았다.
미카와는 솔로몬 제도 상실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필리핀과 같은 후방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는 일본 해군 최고 사령부에 솔로몬 제도 전투가 일본군의 "블랙홀"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3년 4월부터 9월까지 일본에서 해군 참모 등의 육상 보직을 맡았고, 이후 필리핀에서 제2 남방 함대를 지휘했다. 1944년에는 필리핀에서 "남서부 방면 함대"와 "제13 항공 함대"를 지휘했다. 1944년 10월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일본에서 육상 근무를 하다가 1945년 5월 해군에서 물러났다.
종전 후, 미카와는 B급 전범으로 수감되었다가[11] 출소 후 평범한 삶을 살다가 1981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아키카제 학살
1943년 3월, 구축함 아키카제는 카이리루 섬의 로마 가톨릭 선교 본부와 웨와크에서 독일 선교사, 그들의 하인 및 부양가족(어린이 3명 포함)을 포함한 약 60명의 민간인들을 대피시켰다. 이들은 제8함대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구축함에서 학살되었다.[1] 당시 제8함대 사령관이었던 미카와 군이치와 그의 참모장 오니시 신조 중장은 이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1]
제8함대 사령부에서 시게토쿠 카미 중위는 학살 이후 ''아키카제'' 함장을 심문했다.[1] 미카와와 오니시는 호주 전쟁 범죄 수사대가 60명 이상의 민간인을 살해하라는 명령이 단독으로 하위 장교에 의해 내려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전쟁 후에 심문을 받았다.[1]
두 제독 모두 학살을 독자적으로 명령한 것은 카미이며, 아마도 민간 업무를 담당하는 다른 참모 장교가 도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학살 사실을 사후에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다.[1] 그러나 역사가 다나카 유키는 그들의 주장이 명령 발령 당시 시행되던 전시 해군 절차와 대조해 볼 때 의심스럽다고 기록했다. 제8함대의 통신 장교가 미카와와 오니시의 부서명이 없다면 카미의 명령을 암호화하여 ''아키카제'' 함장에게 전달하는 데 동의했을 가능성은 낮았다.[2] 또한, 학살에 연루된 낮은 계급의 장교들은 전쟁 중 사망하여 그들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었다.[3] 조사 위원회 위원인 앨버트 클레스타트 선장의 의견으로는, 제독들이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도 부하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지휘 책임을 져야 했다.[2]
5. 전후
전후 미카와 제독은 일본에서 비교적 조용하고 긴 삶을 살았으며, 1981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미카와와 롱 랜스 어뢰는 1992년 마셜 제도 공화국에서 발행한 기념 우표를 통해 기념되었다. 미카와의 인물은 1970년 미국/일본 전쟁 영화인 토라! 토라! 토라!에도 등장했으며, 일본 배우 스가 후지오가 연기했다.
6. 연보
- 1910년 7월 - 해군병학교 졸업 (38기)
- 1912년 12월 - 전함 "곤고" 승무원
- 1913년 7월 - 순양함 "소야" 승무원
- 1913년 12월 - 해군 중위 진급, 수뢰학교 보통과 학생
- 1914년 5월 - 포술학교 보통과 학생
- 1914년 12월 - 순양함 "아소" 승무원
- 1916년 2월 - 구축함 "스기" 승무원
- 1916년 - 해군 대위 진급, 해군대학교 을종 학생(항해)
- 1917년 5월 - 해군대학교 전수 학생
- 1917년 12월 - 수송함 "아오시마" 항해장
- 1918년 3월 - 프랑스 파견
- 1920년 5월 - 전함 "하루나" 분대장
- 1920년 7월 - 경순 "류타" 항해장
- 1921년 11월 - 순양전함 "이코마" 항해장
- 1922년 5월 - 부설함 "아소" 항해장
- 1922년 12월 - 해군 소좌 진급
- 1924년 11월 - 해군대학교 갑종 22기 졸업
- 1928년 12월 - 프랑스 파견
- 1929년 - 국제 연맹 해군 대표 수행원
- 1930년 - 프랑스 대사관 무관
- 1930년 12월 - 해군 대좌 진급
- 1931년 8월 15일 - "하야토모" 특무함 함장
- 1931년 12월 1일 - 해군병학교 교두 취임
- 1934년 2월 20일 - 순양함 "아오바" 함장
- 1934년 11월 15일 - 순양함 "쵸카이" 함장
- 1935년 11월 15일 - 전함 "키리시마" 함장
- 1936년 12월 1일 - 해군 소장 진급, 제2함대 참모장 취임
- 1937년 11월 15일 - 군령부 제2부장 취임
- 1939년 11월 15일 - 제7전대 사령관 취임
- 1940년 11월 1일 - 제5전대 사령관 취임
- 1940년 11월 15일 - 해군 중장 진급
- 1941년 9월 6일 - 제3전대 사령관 취임
- 1942년 7월 14일 - 제8함대 사령장관 친임
- 1943년 4월 20일 - 해군 항해학교 교장 취임
- 1943년 9월 3일 - 제2남견함대 사령장관 친임
- 1944년 6월 - 남서 방면 함대 사령장관 겸 제13항공함대 사령장관 친임
- 1944년 8월 - 제3남견함대 사령장관 겸임
- 1944년 11월 1일 - 군령부 출사
- 1944년 12월 - "S사건 조사위원회"(항공모함 시나노가 미 잠수함 아처피시의 어뢰 공격에 격침된 건) 위원장
- 1945년 1월 - 대기
- 1945년 5월 21일 - 예비역 편입
7. 서훈
참조
[1]
웹사이트
Mikawa Gunichi
http://navalhistory.[...]
[2]
웹사이트
Naval History via Flix
http://navalhistory.[...]
[3]
웹사이트
Vice Admiral Gunichi Mikawa, Imperial Japanese Navy, (1888–1981)
http://www.history.n[...]
U.S. Department of the Navy: Naval Historical Center
[4]
웹사이트
Marineunteroffizierslehrabteilungen
https://www.axishist[...]
[5]
서적
Axis History Factbook
[6]
간행물
[7]
간행물
[8]
간행물
[9]
서적
ハワイ作戦
[10]
논문
戦闘ドキュメント ガダルカナル島を巡る日米空母決戦-第2章-米海兵師団ガ島に上陸 熾烈な争奪戦の幕開け
学習研究社
[11]
서적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12]
뉴스
授爵・叙任及辞令
『官報』
1920-09-08
[13]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945-11-28
[14]
문서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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