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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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머스 먼은 1571년에 태어난 영국의 상인으로, 동인도 회사의 이사이자 경제학자이다. 그는 중상주의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특히 무역을 통한 국가의 부 증진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먼은 《영국에서 동인도로의 무역에 관한 담론》(1621)과 《외국 무역을 통한 잉글랜드의 보물》(1664) 등의 저서를 통해 무역 수지 흑자, 즉 수출이 수입보다 많아야 국가의 부가 증진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동인도 회사의 활동을 옹호하고, 경제 정책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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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먼 | |
---|---|
기본 정보 | |
이름 | 토머스 먼 |
출생일 | 1571년 6월 17일 |
출생지 | 런던 |
사망일 | 1641년 7월 21일 |
사망지 | 런던 |
국적 | 영국 |
학문 분야 및 사상 | |
학파 | 중상주의 |
연구 분야 | 국제 무역 |
영향 | 영국의 경제사 영국의 경제 정책 |
기여 | 무역 차액주의 이론적 뒷받침 서비스의 유가성 제시 |
2. 생애와 배경
토머스 먼은 1571년 6월에 런던의 유력한 집안에서 셋째로 태어났으며, 6월 17일에 세인트 앤드루 허버드에서 세례를 받았다.[1] 그의 아버지 존 먼과 의붓아버지는 모두 모직물 상인이었고, 할아버지 존 먼은 왕립 조폐국의 주화 주조 책임자였다.[1] 이러한 가족 배경을 통해 먼은 통화 문제와 경제 전반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1]
1615년 먼은 동인도 회사의 이사로 선출되어 회사가 최대한의 역량으로 운영되도록 노력했다. 이를 위해서는 부를 극대화하고 수출을 증대해야 했다.[3] 1620년, 불황이 시작되면서 경제에서 먼의 역할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는 동인도 회사와 그 관행을 옹호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경제를 바로잡는 데 도움을 주어야 했다.
먼은 대외 무역이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는 수출이 수입을 초과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대외 무역을 통한 잉글랜드의 보물''에서 "우리는 외국인에게 그들이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매년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5] 이러한 무역 흑자를 달성하기 위해 먼은 잉글랜드가 따라야 할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했다.[5]
먼은 41세에 어슐러 맬코트와 결혼하여 존, 앤, 메리 세 자녀를 두었으며, 세인트 헬렌 비숍스게이트 교구를 집으로 선택했다.[1] 그의 교육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1596년경 머서스 회사의 일원으로 지중해 무역에 종사하며 상인 경력을 시작했다.[2] 그는 상인으로서 크게 성공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2]
3. 동인도 회사 이사
불황으로 이어진 무역 위기는 두 가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동인도 회사를 통해 영국은 수출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인도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역 수지 적자는 영국이 들여오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음을 의미했으며, 이는 중상주의 원칙에 따르면 경제에 명백한 손해였다. 둘째, 모든 수입품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영국은 귀금속을 인도에 보냈다. 1600년대에는 북유럽에서 지폐가 아직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의 유일한 실질적인 결정 요인으로 귀금속을 수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인도 회사의 경우 금괴에 대한 수출 제한이 완화되었다.[3] 이 조항으로 인해 사치품을 위해 은을 교환하는 것은 동인도 회사에 많은 부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시민들은 이것이 경제 침체의 주요 요인이라고 믿었다.
먼은 기업의 대표로 회사의 명성을 회복하고, 고객과 일반 대중에게 취해진 조치가 최선이었다는 것을 설득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담은 ''A Discourse of Trade from England Unto the East Indies.''를 출판했다.[4] 이 책에서 먼은 동인도 회사의 활동을 옹호했다.
4. 경제 정책
먼은 경제학 저술을 통해 초기 중상주의의 마지막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서비스라는 무형의 것의 수출이 가치 있는 거래라고 생각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며,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의견을 매우 초기에 적극적으로 언급한 인물이다.
먼은 무역이야말로 잉글랜드의 부를 증대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 소비를 줄이고, 수출로 돌릴 재화의 양을 늘린다.
# 토지 및 기타 국내의 천연자원을 유효하게 활용하여 수입의 필요를 줄인다.
# 외국 원료를 사용하여 국내에서 생산한 재화에 대한 수출 관세를 낮춘다.
# 수요 변동이 적은 재화를 수출한다. 이는 가격이 높을수록 화폐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5. 저술
토머스 먼은 경제학 관련 저술을 남겼으며, 초기 중상주의의 마지막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서비스와 같은 무형 상품의 수출이 가치 있는 거래라고 생각한 선구자 중 한 명이며,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매우 이른 시기에 적극적으로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먼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제목 | 출판 연도 | 내용 |
---|---|---|
영국에서 동인도로의 무역에 관한 담론 (A Discourse of Trade from England unto the East Indies) | 1621년 | 동인도 회사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잉글랜드는 은 부족과 동인도 회사를 통한 은 유출에 대한 비난이 높았는데, 먼은 이 책을 통해 회사의 활동을 변호했다.[6] |
외국 무역을 통한 잉글랜드의 보물 ('Englands Treasure by Foreign Trade'') | 1664년 | 먼의 사후에 아들 존 먼에 의해 출판되었다. 사우스햄튼 백작 토마스 라이어슬리에게 헌정되었으며, 조시아 차일드와 유사하게 고전적인 의미의 중상주의적 관점을 보여준다. 제라르 드 말린스의 은 수출 제한론에 반박하며, 무역 수지 흑자를 통해 잉글랜드가 부를 축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4] |
먼은 무역을 통해 잉글랜드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했다.[5]
- 국내 소비를 줄여 수출 가능한 재화의 양을 늘린다.
- 토지와 천연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수입 필요성을 줄인다.
- 외국 원료를 사용하여 국내에서 생산한 제품에 대한 수출 관세를 낮춘다.
- 수요 변동이 적은 상품을 수출하여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화폐 유입을 늘린다.
그는 "우리나라에는 재물을 산출하는 광산이 없으니, 외국 무역 외에 재물을 획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외국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외국 무역에 의한 잉글랜드의 재물)[5]
5. 1. 영국에서 동인도로의 무역에 관한 담론 (1621)
동인도 회사는 영국 국왕과 함께 새로운 땅을 식민지화하고 동인도와 무역을 하기 위해 설립된 무역 회사였다. 1615년 먼은 회사의 이사로 선출되어 회사가 최대한의 역량으로 운영되도록 노력했다. 이를 위해서는 부를 극대화하고 수출을 증대해야 했다. 1620년, 불황이 시작되면서 경제에서 먼의 역할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는 동인도 회사와 그 관행을 옹호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경제를 바로잡는 데 도움을 주어야 했다.불황으로 이어진 무역 위기는 두 가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동인도 회사를 통해 영국은 수출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인도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역 수지 적자는 영국이 들여오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음을 의미했으며, 이는 중상주의 원칙에 따르면 경제에 명백한 손해였다. 둘째, 모든 수입품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영국은 귀금속을 인도에 보냈다. 1600년대에는 북유럽에서 지폐가 아직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의 유일한 실질적인 결정 요인으로 귀금속을 수출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동인도 회사의 경우 금괴에 대한 수출 제한이 완화되었다.[3] 이 조항으로 인해 사치품을 위해 은을 교환하는 것은 동인도 회사에 많은 부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시민들은 이것이 경제 침체의 주요 요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먼은 기업의 대표로 나섰다. 그의 임무는 회사의 명성을 회복하는 동시에 고객과 일반 대중에게 취해진 조치가 궁극적으로 최선이었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처음 출판한 저서인 ''A Discourse of Trade from England Unto the East Indies.''를 통해 전달했다.[4]
먼의 1621년 저서인 《영국에서 동인도로의 무역에 관한 담론》(A Discourse of Trade from England unto the East Indies)은 회사의 윤리를 옹호하는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6] 동인도 회사가 은을 수출하는 관행 때문에 일반적인 여론은 회사를 비난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회사는 무역 독점권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 이 책은 동인도 회사가 은 부족과 그로 인한 경기 침체의 원인이라는 비난에 답하기 위해 저술되었다. 먼은 귀금속 손실 자체가 경제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7] 먼은 간접적으로 동인도 회사의 관행이 실제로 경제에 이익을 준다고 주장했다. 수입된 상품 중 일부는 재수출될 때 (대부분 유럽 대륙으로) 더 큰 이윤을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해운 산업의 성장과 부두 노동자의 고용도 크게 증가했다.
결국 먼은 동인도 회사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에 성공했고, 회사의 가장 큰 공격자들로부터 압력을 완화했다. 그의 뛰어난 변호는 그가 1622년 무역 상설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된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8] 위원회에서 먼의 주요 임무는 영국 경제 정책과 관련하여 정부에 권고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5. 2. 외국 무역을 통한 잉글랜드의 보물 (1664)
먼은 대외 무역이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며, 수출이 수입을 초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국 무역을 통한 잉글랜드의 보물''에서 "우리는 외국인에게 그들이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매년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5]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했다.[5]- 국내 생산 가능 수입품 금지
- 영국산 제품 선호 유도로 사치품 수입 감소
- 외국 시장용 국내 생산품 수출 관세 인하
- 이웃 국가에 대안이 없을 시, 수출품 가격 인상
- 황무지 경작으로 생산량 증가 및 수입량 감소
- 영국 선박으로만 해운 수행
먼의 첫 저술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외국 무역을 통한 잉글랜드의 보물》(England's Treasure by Forraign Trade) 또는 《외국 무역의 균형이 우리 보물의 규칙이다》(the Balance of Forraign Trade is the Rule of Our Treasure)였다. 1620~1630년 사이에 쓰였으나, 1664년 아들 존이 "공익을 위해" 출판했고, 사우샘프턴 백작에게 헌정되었다.[4]
상인 경험과 동인도 회사 이사 경험으로, 이 책은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다. 특히, 《잉글랜드의 보물》은 제라드 드 말린스와 에드워드 미슬덴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먼은 말린스의 고정 환율 제안이 경제에 해롭다고 보았다. 이 책에서 먼의 무역 수지 이론 개념이 처음 나타난다. 먼은 영국 정책이 수입보다 수출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책은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책의 상당 부분은 영국인이 네덜란드인과 달리 직업 윤리, 소비 자제, 활발한 무역 체제가 부족하다고 질책한다.[2]
먼은 지중해 무역 후 런던에서 큰 부를 쌓았다. 영국 동인도 회사 임원, 1622년 상설 통상 위원회 위원이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은 부족, 동인도 회사로 인한 은 유출 비난이 높았다.
1621년 저서 『잉글랜드에서 동인도 제도로의 무역에 대한 논술』은 동인도 회사 활동을 옹호한다. 가장 유명한 저서 『외국 무역을 통한 잉글랜드의 보물』은 1630년경 쓰였으나, 1664년 아들 존 먼이 출판, 사우스햄튼 백작 토마스 라이어슬리에게 헌정되었다. 먼의 사상은 조시아 차일드와 유사, 중상주의자로 제라르 드 말린스의 은 수출 제한론을 반박했다.
먼은 무역이 잉글랜드 부 증대 방법이며, 이를 위해 소비를 줄이고 수출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 또, 국내 천연자원 활용으로 수입 필요를 줄이고, 외국 원료 사용 국내 생산품 수출 관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수요 변동 적은 재화 수출이 화폐 증가에 유리하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재물을 산출하는 광산이 없으니, 외국 무역 외에 재물을 획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 무역에 의한 잉글랜드의 재물』)
참조
[1]
문서
Biographical Notes on Thomas Mun (1571-1641)
https://faculty.unlv[...]
[2]
문서
Introduction to England's Treasure by Forraign Trade, or The Ballance of Our Forraign Trade Is the Rule of Our Treasure by Thomas Mun
http://publishing.cd[...]
[3]
문서
John Ramsay McCulloch, A Select Collection of Early English Tracts on Commerce from the Originals of Mun, Roberts, North, and Others (1856)
http://oll.libertyfu[...]
[4]
EB1911
Mun, Thomas
[5]
웹사이트
https://books.google[...]
2017-06-13
[6]
웹사이트
Mun, Thomas
http://www.encyclope[...]
[7]
웹사이트
East India Company and Thomas Mun
https://books.google[...]
[8]
웹사이트
Thomas Mun member of the governments standing commission on trade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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