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아리이
1. 개요
트리아리이는 고대 로마 군단의 병과 중 하나로, 초기에는 부유한 계층으로 구성된 중장 보병이었다. 로마 군사 체계의 변화에 따라 트리아리이는 나이와 경험을 기준으로 분류되었으며, 주로 전투의 후방에서 지원 역할을 수행했다. 카밀루스 체계에서는 세 번째 전열에 배치되어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가 실패했을 때 투입되었고, 폴리비우스 체계에서는 600명으로 구성된 부대로서 스쿠툼 방패를 사용했다. 마리우스 군제 개혁 이후에는 병과 체계가 폐지되면서 트리아리이의 역할도 사라졌다.
| 구분 | 베테랑 로마 군단병 |
|---|---|
| 역할 | 백업 부대 후방 전투 |
| 전술 | 전투 전술의 일부 |
|---|
| 시대 | 공화정 초기 |
|---|---|
| 등장 배경 | 기존 군단 체제의 재조직화 |
| 무장 | 긴 창 (하스타) 검 (글라디우스) 방패 (스쿠툼) |
|---|---|
| 방어구 | 갑옷 투구 |
| 참고 자료 | 히스토리아 시빌리스의 로마 전투 전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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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부대 및 조직 -
하스타티
하스타티는 고대 로마군의 전열 보병 부대로, 초기에는 후방 지원 역할을 했으나 카밀루스의 군사 개혁 이후 전투의 선봉에 섰고, 폴리비우스 체계에서는 젊고 경험이 적은 병사들로 구성되어 필룸과 글라디우스를 사용해 적진을 돌파했으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중보병으로 재편되어 로마 제국 확장에 기여했다. -
고대 로마의 부대 및 조직 -
프린키페스
프린키페스는 로마 군대의 주요 보병 부대로, 초기에는 부유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하스타를 사용했으나, 포에니 전쟁 시기 폴리비우스식 군제개혁으로 베테랑 중보병 부대가 되어 글라디우스와 필룸을 사용했으며,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에는 다른 계급과 통합되어 중보병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
로마 공화정의 부대 및 조직 -
하스타티
하스타티는 고대 로마군의 전열 보병 부대로, 초기에는 후방 지원 역할을 했으나 카밀루스의 군사 개혁 이후 전투의 선봉에 섰고, 폴리비우스 체계에서는 젊고 경험이 적은 병사들로 구성되어 필룸과 글라디우스를 사용해 적진을 돌파했으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중보병으로 재편되어 로마 제국 확장에 기여했다. -
로마 공화정의 부대 및 조직 -
프린키페스
프린키페스는 로마 군대의 주요 보병 부대로, 초기에는 부유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하스타를 사용했으나, 포에니 전쟁 시기 폴리비우스식 군제개혁으로 베테랑 중보병 부대가 되어 글라디우스와 필룸을 사용했으며,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에는 다른 계급과 통합되어 중보병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
고대 로마의 보병부대 -
비길레스
비길레스는 고대 로마의 공공 소방대이자 야경꾼으로서 화재 진압, 치안 유지, 도망 노예 체포 등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창설되어 7개의 코호르트로 로마 시를 순찰하며 활동했다. -
고대 로마의 보병부대 -
하스타티
하스타티는 고대 로마군의 전열 보병 부대로, 초기에는 후방 지원 역할을 했으나 카밀루스의 군사 개혁 이후 전투의 선봉에 섰고, 폴리비우스 체계에서는 젊고 경험이 적은 병사들로 구성되어 필룸과 글라디우스를 사용해 적진을 돌파했으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중보병으로 재편되어 로마 제국 확장에 기여했다.
2. 역사와 사용
팻 소던에 의하면, 트리아리이는 로마 왕정 시기 군대의 옛 제1계층의 잔여물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삼니움인과 갈리아인과의 전투를 통해 로마인들은 유연성의 중요성과 이탈리아 중부의 험준한 지형에서 팔랑크스의 부적절함을 깨닫게 되었다.
로마군은 알리아 전투에서 궤멸적인 패배를 당한 후,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 의한 군사 개혁을 거쳤다. 카밀루스 체계에서 트리아리이는 부유한 병사들로 구성되었으며, 하스타이와 글라디우스로 무장하고 클리페이 방패와 청동 투구를 착용했다. 이들은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후방에 위치하며,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트리아리이까지 온다(rem ad Triarios redisse)"라는 표현은 절망적인 상황을 의미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폴리비우스 체계로 변화되었는데, 이때 트리아리이는 가장 경험 많은 병사들로 구성되었고, 스쿠타 방패를 사용했다. 이들은 여전히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 뒤에 위치했지만, 로라리이와 아켄시는 사라지고 벨리테스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기원전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사 개혁으로 트리아리이를 포함한 여러 병과가 해체되었다. 재산과 나이 제한이 폐지되고, 병사들은 직업 군인으로서 중보병으로 무장했다. 보조군은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2.1. 카밀루스 시대 (기원전 4세기)
팻 소던에 의하면, 트리아리이는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 의한 군제개혁 이전, 에트루리아 왕들 통치 시기 군대의 옛 제1계층의 잔여물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이들은 그리스의 호플리테스처럼 창, 가슴보호대, 넓은 방패로 무장한 중보병이었고, 거대한 팔랑크스 진형의 최전방에 섰다. 삼니움인들과의 교전, 갈리아인들의 출연은 로마인들에게 유연성의 중요성과 이탈리아 중부의 거칠고 언덕이 많은 지형에서 팔랑크스의 부적절함을 가르쳐주었다.
기원전 4세기에 로마의 군사 체계는 에트루리아인들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효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기원전 390년 갈리아의 침략 당시, 에트루리아 거주민들의 지원 요청으로 파견된 소규모 로마군은 알리아 전투에서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는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 의한 군사 개혁을 촉발시켰다. 새로운 체계에서 로마인들은 재산을 기준으로 분류되었고, 트리아리이들은 말을 탄 에퀴테스 다음으로 부유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약 2m 길이의 창인 하스타이와 84cm 길이의 글라디이로 무장했다.
트리아리이들은 그리스식 방패인 클리페이를 가지고 호플리테스처럼 교전했으며, 깃털로 장식된 청동 투구를 썼다. 무거운 판금 갑옷과 사슬갑옷이 선호되었으며, 방패에 조상들의 초상을 새겨넣기도 했다.
카밀루스 체계의 군단에서 900명의 트리아리이들은 60명씩 15개의 마니풀루스를 형성했다. 이들은 첫번째 전열의 하스타티와 두번째 전열의 프린키페스 후방, 그리고 로라리이와 아켄시의 앞쪽에 섰다. 회전에서 경보병인 레베스가 하스타티의 진군을 엄호했고,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가 적을 무너트리지 못하면 트리아리이가 전투를 맡았다. "트리아리이까지 온다(rem ad Triarios redisse)"라는 표현은 절망적인 상황을 의미했다. 에퀴테스는 측면 방위와 적 추격에, 로라리이와 아켄시는 보조 역할에 사용됐다.
2.2. 폴리비우스 체계 (기원전 3세기)
기원전 3세기 말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카밀루스 체계는 카르타고 같은 적들과 싸우면서 비효율성이 증명되었다. 일련의 "유기적인" 변화 이후, 새로운 체계가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보병들은 재산보다는 나이와 경험에 따라 계층이 분류되었고, 트리아리이들은 가장 경험이 풍부한 이들로 이뤄졌다. 그들의 장비와 역할은 이전의 원형 방패 클리페우스 보다 뛰어난 방어도를 제공한 넓은 사각형의 방패 스쿠타를 들고다니는것을 제외하면 이전의 체계에서 존재했던 것과 매우 유사했다.
트리아리이의 수는 군단 당 600명으로 감소하였고, 마니풀루스당 60명이 이뤄진 10개로 형성됐다. 트리아리이들은 여전히 전방 전열의 하스타티와 두번째 전열의 프린키페스 뒤에 위치한 세번째 전열을 이루었지만 로라리이와 아켄시는 사라졌다. 레베스는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며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이에 배치된 벨리테스로 대체되었다.
회전은 비슷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벨리테스가 앞쪽에 모여 하스타티의 전진을 지원하기 위해 재블린을 던졌다. 하스타티가 적을 무너트리는데 실패하면, 이들은 검으로 재무장한 프린키페스에게 물러났다. 프린키페스가 적들을 무너트리는데 실패하면, 이들은 적들과 교전하는 트리아리이의 배후로 물러난다.
이 교전 순서는 바스그라데스 전투, 자마 전투 같은 특이한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은 이뤄졌다. 바스그라데스 전투에서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평범한 방식으로 그의 병사들을 구성했지만, 하스타티가 적들과 교전을 시작하자,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이들을 적 카르타고군에 보내 측면 병력으로 사용했다.
자마 전투에선 스키피오는 그의 병력들을 서로 사이가 넓은 틈을 가진 열로 배열시켰다. 카르타고 전투코끼리들을 이 틈으로 끌어들여 로마군에 많은 사상자를 입히지 못 하고 벨리테스에게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코끼리들이 달아나자,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보병대와 교전에 대비하여 가운데에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이로 된 긴 전열과 측면에는 하스타티를 배치하였다.
2.3. 마리우스 군제개혁 (기원전 2세기)
기원전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사 개혁으로, 아프리카의 유구르타와 북방의 게르만 부족들과 맞선 전쟁에서의 인력 부족에 대처하여, 다른 계층의 부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재산과 나이 요구사항들은 폐지되었다. 대신에 병사들은 도시에서 활동하기 보다는 직업 군인으로서 군단에 입대하는 것으로 정해졌고, 같은 상태로 구입된 장비를 갖춘 중보병으로서 모두 무장되었다. 지방의 비정규 병력 보조군들은 궁병, 척후병, 기병 등의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살루스티우스는 그의 저서 유구르타 전쟁에서 로마군 또는 동맹군의 정규 중보병들이 가벼운 장비를 갖추고 경보병들 같이 싸웠다는 예시를 묘사하기도 했다. 이것은 아마도 일반적인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