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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플리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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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플리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을 일컫는 말로, 팔랑크스 대형을 이루어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8세기 또는 7세기에 아르고스 방패가 유행하면서 등장했으며,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국가와 문명에 영향을 미쳤다. 호플리테스는 시민의 의무로, 갑옷, 방패, 창, 검 등의 장비를 갖추고 싸웠다. 팔랑크스 진형은 방어력과 파괴력이 뛰어났지만, 기동력과 측면 공격에 약점을 보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마케도니아식 파랑크스와 투레오포로이, 토라키타이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중장보병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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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플리테스
명칭
그리스어ὁπλίτης (호플리테스)
로마자 표기hoplítēs
발음 (IPA)/ˈhɒplaɪts/ (영어), /hoplîːtai̯/ (그리스어)
다른 표기HOP|lytes (영어)
기본 정보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
정의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
어원그리스어 ὅπλον (hoplon, '무기')에서 유래
복수형ὁπλῖται (호플리타이)
장비

방패
갑옷
군사적 역할
주요 전술팔랑크스 대형으로 전투
전투 방식밀집 대형으로 적을 압박하며 싸움
사회적 의미시민의 의무와 군사적 책임 강조
폴리스의 시민군 역할
관련 인물
유명한 호플리테스밀티아데스
레오니다스 1세
테미스토클레스
역사적 배경
등장 시기기원전 7세기경
몰락 시기기원전 4세기경
영향고대 그리스 군사 문화에 큰 영향
고대 로마 군대에 영향
기타
현대적 해석군사 전술과 사회적 의미에서 다양한 연구 대상
문화적 상징고대 그리스의 군사적 용기와 시민 정신의 상징

2. 역사

코린토스 출신의 아리발로스에 그려진 호플리테스(기원전 580~560년경, 루브르 박물관)


기원전 500년경 이탈리아 비테르보 근처에서 발견된 에트루리아 전사


스파르타 호플리테스 (1910년 이전 빈크휘젠 군복 일러스트 컬렉션 이미지)


호플리테스 전투 방식은 지중해 여러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주요 전투 방식이었으며, 에트루리아인과 초기 로마 군대 모두 사용했다. 하지만 스쿠툼 보병은 수세기 동안 존재했고 일부 집단은 두 가지 방식 모두를 사용했다. 로마인들은 나중에 더 유연한 마니플 조직으로 전투 방식을 표준화했는데, 이는 아펜니노 산맥과 같은 험준한 지형에서 더욱 다재다능했다. 로마군의 장비도 변화하여 창 대신 무거운 투창 (''필룸'')을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트리아리이''만이 주요 무기로 장창 (''하스타'')을 유지했다. 트리아리이는 여전히 전통적인 팔랑크스 진형으로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조합이나 유사한 방식은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일부는 계속해서 호플리테스로 싸웠다. 에피루스의 피르루스나 한니발 휘하에서 복무한 용병들(특히 루카니아인들)은 호플리테스처럼 무장하고 싸웠다.

초기 역사에서 고대 카르타고는 카르타고의 성스러운 부대와 같은 부대에서 그리스 호플리테스처럼 군대를 장비했다. 많은 그리스 호플리테스 용병들이 카르타고와 아케메네스 제국과 같은 외국 군대에서 싸웠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들이 카르다케스(Cardaces)의 형성에 영감을 주었다고 믿는다. 일부 호플리테스는 4세기에 일리리아 왕 바르딜리스(Bardylis) 휘하에서 복무했다. 일리리아인들은 그리스로부터 많은 무기와 전술을 수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디아도코이는 그리스 팔랑크스를 그들의 왕국으로 들여왔다. 그들은 대부분 그리스 시민이나 용병을 배치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군대의 마키모이(Machimoi)와 같이 현지 원주민들에게도 호플리테스 또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무기를 지급하고 훈련시켰다.

2. 1. 고대 그리스

5세기 호플리테스


두 가지 공격 자세를 보여주는 호플리테스들, 아래쪽과 위쪽 자세 모두


고대 그리스의 분열된 정치 구조는 도시 국가 간 분쟁을 빈번하게 만들었지만, 전쟁의 규모는 제한했다.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는 전문 군인이 없었기 때문에, 농부나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던 병사들은 장기간 작전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모든 호플리테스는 국가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군사 작전에 참여해야 했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평생 전투 훈련을 받았고, 아테네인들은 60세 이후에만 병역에서 면제되었다. 이는 전투 지속 기간을 단축시켜, 전투는 여름 한철로 제한되기도 했다.

군대는 전투 장소로 직접 행군했으며, 전투 장소는 미리 합의되기도 했다. 전투는 평평한 지형에서 벌어졌고, 호플리테스들은 팔랑크스가 측면 공격을 받지 않도록 양쪽에 높은 지형이 있는 곳을 선호했다.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스파르타인들은 좁은 해안 협곡을 선택하여 페르시아 군대에 맞섰고, 적은 수로도 7일 동안 저지했다.

전투는 결전을 목표로 했으며, 팔랑크스 전투에 유리하도록 평평하고 열린 장소에서 벌어졌다. 전투는 짧았고 높은 수준의 규율이 필요했다. 초기 고전 시대에는 기병이 있었지만, 팔랑크스 측면 보호, 패잔병 추격, 후퇴 지원 등으로 역할이 제한되었다. 경보병과 투척병도 전투에 참여했지만 역할은 크지 않았다. 양측 팔랑크스가 교전하기 전, 경보병들은 소규모 충돌을 벌이고, 팔랑크스 측면과 후방을 보호했다.

스파르타의 군사 구조는 직사각형 팔랑크스 진형이었다. 8~10열 깊이로 조직되었으며, 충분한 호플리테스가 있으면 400m 이상을 덮을 수 있었다. 두 전열은 창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도록 가까이 접근했고, 는 뒤에서 돌과 창을 던졌다. 방패가 부딪히고, 최전방()은 상대방을 찌르며 위치를 유지하려 했다. 뒤의 병력은 창과 방패 무게로 지지했는데, 이는 적 진형으로 밀어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방 병사들은 대부분 지역 사회 구성원이었기에 최전방 병력에게 동기를 부여했다. ''오티스모스''는 팔랑크스에 반보에서 여러 보 전진을 명령하는 것이었다.[10]

흑색도형 암포라에 묘사된 팔랑크스 전투, . 호플리테스 팔랑크스는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이 시점에서 팔랑크스는 집단적인 무게를 이용하여 적 전열을 밀어내고 공포와 공황을 조성했다. 여러 차례 밀어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고대 기록에 따르면 조직적으로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한쪽 전열이 무너지면 병사들은 전장에서 도망쳤고, , peltast 또는 경기병에게 추격당했다.

호플리테스가 도망칠 때 무거운 를 버리는 것은 친구와 가족에게 수치를 안겨주었다(, 방패를 버린 자).[11] 전투 중 피해를 줄이기 위해 병사들은 aspis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호플리테스 장군들은 앞장서서 지휘했다. 전쟁은 단 한 번의 전투로 결정될 수 있었다.

upright


개별 호플리테스는 왼팔에 방패를 들고 자신과 왼쪽 병사를 보호했다. 팔랑크스 극우측 병사들은 반만 보호되었다. 전투에서 대항하는 팔랑크스들은 적 우익을 겹치려 했다.[13] 전투에서 팔랑크스는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다(호플리테스들이 이웃 방패 뒤에 남으려 했기 때문). 경험 많은 호플리테스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른쪽에 배치되었다. 플루타르크의 ''스파르타인들의 어록''에 따르면, "한 사람은 전체 전열을 위해 방패를 들었다"고 한다.[14]

팔랑크스는 개인전과 다른 형태의 전투가 억압된 군사 진형이다. 초기 호메로스 시대, 암흑기 전투에서는 영웅들의 말과 행동이 전투 흐름을 바꾸었다. 호플리테스 전투는 병사들의 공동체와 단결에 크게 의존했다. 양쪽에서 친구와 가족이 밀고 앞에서 적들이 방패 벽을 형성하면서, 호플리테스는 기술과 무기 숙련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헌신과 정신력이 필요했다. 방어력을 제공하는 인간 벽을 형성하여 호플리테스는 사상자를 줄이며 효과적이 되었다. 호플리테스들은 규율을 가지고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교육받았다. 상호 보호를 위해 이웃을 신뢰해야 했기에 팔랑크스는 가장 약한 요소만큼만 강했다. 군대가 규율 있고 용감할수록 승리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스 도시 국가 간 교전은 한쪽 팔랑크스가 진형을 무너뜨린 후 도주함으로써 해결되었다.

팔랑크스 전투에서 계급 내 단결이 중요했던 만큼, 개인 전투 기술도 중요했다. 호플리테스 방패는 항상 고정되지 않았다. 싸움에서 호플리테스들은 방패와 검을 휘두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2~3피트 떨어져 있었다. 이는 개인 능력이 생각보다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옆 사람이 가까이 있다면 방패와 검을 동시에 휘두르기 어려웠을 것이다.[15] 전투 후 개별 용사를 선발했다는 증거가 있다. 헤로도토스의 테르모필라이 전투 기록에서 디에네케스가 가장 뛰어났다고 기록되었다.[16] 알페오스와 마론 형제도 용맹함으로 인정받았다.

호플리테스 전쟁이 발전한 정확한 시기는 불확실하며, 일반적인 이론은 기원전 8세기 또는 7세기에 아르고스 방패가 유행하기 시작한 때라고 본다.[29] 피터 크렌츠는 호플리테스 전쟁 이념이 기원전 7세기가 아니라 480년 이후에 발전했다고 주장한다.[30] 아나그노스티스 아겔라라키스는 그리스 파로스 섬에서 최초의 다중 매장지(남성 전사 공동 매장)에 대한 고고 인류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호플리테스 파랑크스 군사 조직 시기를 기원전 8세기 후반으로 밝혔다.[31]

호플리테스 전쟁의 부흥과 쇠퇴는 폴리스의 부흥, 쇠퇴와 관련이 있다. 호플리테스는 독립된 폴리스 간 무장 충돌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그리스 문명이 페르시아와 대치하면서 전쟁 초점이 바뀌었다. 막대한 적군과 맞선 개별 폴리스는 혼자 싸울 수 없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9~448년) 동안 여러 도시 동맹이 페르시아와 싸웠다. 이는 전쟁 규모와 병력 수를 크게 바꿨다. 호플리테스 파랑크스는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 보병보다 우수함을 증명했다.

|thumb|left|웅크린 전사, 톤도 형태 아티카식 흑색도형양식 키릭스, 기원전 560년경 (슈타틀리헤 안티켄잠룽겐))]]

이 기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 정치적 지위를 확보했고, 페르시아 전쟁 이후 두 도시의 경쟁은 그리스를 내전으로 몰아넣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이전과 달리 큰 규모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도시 동맹 간 전쟁이었고, 인력과 재정 자원은 전쟁 다양화를 가능하게 했다. 호플리테스 전쟁은 쇠퇴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는 세 번의 주요 전투가 있었지만, 결정적 승리는 없었다. 대신 해군, 경보병, 용병, 도시 성벽, 공성 병기, 정형화되지 않은 전술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는 소모전을 가능하게 했고 사상자를 크게 증가시켰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호플리테스는 경보병과 원거리 무기 병사와 맞섰고, 펠타스트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그리스인들에 의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호플리테스는 갑옷을 덜 입고 짧은 검을 휴대하며 기동성을 높였다. 이는 에크드로모스 경호플리테스 발전으로 이어졌다.

많은 유명 인물, 철학자, 예술가, 시인들이 호플리테스로 싸웠다.[32][33]

네피오드킨에 따르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 중보병과의 전투는 페르시아인들이 낫 달린 전차를 도입하도록 영감을 주었다.[34]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d)의 왕이 그리스 호플리테스를 죽이는 모습. 기원전 500년경~기원전 475년경,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시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함께 고대 그리스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던 가장 유명한 도시 국가이다. 스파르타의 자유 시민들은 평생 호플리테스로 복무하며 훈련했고, 이는 스파르타가 전문 상비군을 갖추게 했다. 최대 6,000명에서 최소 1,000명[35]의 스파르타 군대는 6개의 모라 또는 대대로 나뉘어 규율과 맹렬함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군 복무는 스파르타 남성의 주요 의무였으며, 스파르타 사회는 군대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호플리테스로서 군 복무는 40세까지, 때로는 전투 능력에 따라 60세까지 지속되었다.

토기 그림에 그려진 호플리테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중장보병은 '''호플리테스'''(복수형 호플리타이)라고 불렸다. "호플리테스(ὁπλίτης, hoplítēs)"는 "무기"를 의미하는 "호플론(ὅπλον)"에서 유래했지만, 호플리테스가 사용한 원형 방패를 호플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호플리테스는 폴리스의 자유 시민과 메토이코이였으며, 병역은 시민의 의무였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따르면, 아테네 시민 중장보병은 1만 명이 넘었고, 메토이코이 중장보병도 3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37] 호플론은 나무에 소가죽을 겹쳐 틀을 청동으로 보강한 것이었는데, 달릴 때는 방해가 되었지만, 패주할 때 방패를 버리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역사적으로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소형의 것이 사용되었으며, 청동 투구와 경갑 및 가죽을 굳힌 갑옷(마케도니아 병사는 갑옷을 입지 않고 방패를 흉갑 대신 착용했다)을 장비하고 싸웠다.

당시 토기 그림이나 조각 등에 그려진 호플리테스는 머리는 투구, 가슴부터 배는 갑옷, 손은 각반, 다리는 무릎 보호대·정강이 보호대로 보호하고 있으면서, 성기를 포함한 허리 부분만은 알몸인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 많이 보인다. 실제로 그런 모습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러한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호플리테스는 팔랑크스라는 밀집 대형을 지어 싸웠다. 방패를 왼쪽 어깨 힘으로 지탱하고, 노출된 오른쪽 몸통은 옆 보병 방패로 보호했다. 이 진형은 정면에 대해서는 큰 방어력과 파괴력을 가졌지만, 기동력 있는 기병 등에 의한 측면·후면 공격에 약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시대가 진행됨에 따라 중앙에 중장보병 밀집 진을 전개하고, 측면을 기병대로 호위했다. 전면에는 경장보병 등에 의한 산병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주요 공격용 무기는 마케도니아 왕국 흥성 이전에는 한 손으로 어깨 높이에 겨누는 창이었고,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에서는 두 손으로 잡는 창(사리사)이었다.

통례로, 전투 후 전장을 지배하는 쪽이 승자로 여겨지고, 그 장소에 전리품인 적 갑옷 중 가장 훌륭한 것을 사용하여 전승 기념비(:en:Tropaion)를 세워 아레스나 다른 신에게 바쳤다. 그것은 신성시되어, 다음에 같은 장소에서 전투에서 이길 때까지 아무도 이것을 허물 수 없었다.

2. 1. 1. 호플리테스 전쟁의 전환에 대한 이론

암흑기 전쟁은 기원전 8세기에 호플리테스 전쟁으로 이행되었다. 역사가들과 연구자들은 수세기 동안 이러한 변화의 이유와 속도에 대해 논쟁해 왔으며, 현재까지 세 가지 주요 이론이 존재한다.

앤서니 스노드그래스(Anthony Snodgrass)가 제시한 점진적 이론(Gradualist Theory)은 호플리트 전투 방식이 갑옷과 무기의 혁신에 따라 단계적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다.[23] 스노드그래스는 호플리트 갑옷의 고고학적 발견물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팔랑크스(phalanx) 전술의 발전 과정을 추정하여 기원전 750년부터 650년까지 약 100년에 걸쳐 이러한 변화가 완료되었다고 주장한다.[24] 팔랑크스의 발전에는 시간이 걸렸는데, 팔랑크스가 발전할수록 더욱 밀집된 대형이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엘리트 전사들을 그리스 시민들 중에서 모집해야 했기 때문이다.[25] 그리스 시민들에게 필요한 많은 양의 호플리트 갑옷을 배포해야 했던 것 또한 팔랑크스 전술의 도입에 걸리는 시간을 늘렸다. 스노드그래스는 갑옷이 제자리에 갖춰진 후에야 팔랑크스 전술이 보편화되었다고 생각한다.[24]

빠른 적응 모델은 역사학자 Paul Cartledge와 Victor Davis Hanson에 의해 개발되었다.[26] 그들은 파랑크스가 군사 세력에 의해 독자적으로 창안되었지만, 너무 효과적이어서 다른 세력들은 이 전투 대형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전쟁 방식을 즉시 적응해야 했다고 믿었다.[26] 빠른 적응론자들은 파랑크스 대형에 필요한 이중 손잡이 방패가 기동성을 너무 제약했기 때문에, 일단 도입되자 암흑기의 자유로운 전투 방식은 호플리테스에 대항하기에 부적절했고, 이는 전환 속도를 더욱 높였다고 주장한다.[23] 곧 파랑크스 대형과 호플리테스 갑옷은 고대 그리스 전역에 널리 사용되었다. 카틀리지와 한슨은 이 전환이 기원전 725년부터 675년까지 이루어졌다고 추정한다.[26]

치기 항아리에 묘사된 창과 투창을 든 호플리테스


한스 반 위스(Hans Van Wees)가 제시한 확장된 점진주의 이론(Extended Gradualist theory)은 세 가지 주요 전환 이론 중 가장 긴 설명을 제공한다. 반 위스는 암흑기(Dark Ages)의 토기에서 발견되는 상징물을 사용하여, 팔랑크스(phalanx) 전술의 기초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펼친다.[23] 특히 그는 치기 항아리(Chigi Vase)의 예를 들어 호플리테스 병사들이 등에 창과 투창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성숙한 호플리테스는 투창과 같은 원거리 무기를 휴대하지 않았다.[24] 치기 항아리는 그리스 미술에서 팔랑크스로 알려진 호플리테스 전열을 묘사한 유일하거나 거의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 호플리테스 병사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중요한 자료이다.[27] 이를 통해 반 위스는 암흑기의 원거리 전투에서 호플리테스 전투의 근접전으로의 전환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전환기의 또 다른 증거는 스파르타 시인 티르타이오스(Tyrtaios)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포탄의] 격렬한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투석기의 포화에도, 투구는 [굴하지 않고 전쟁의] 격렬한 소음을 견딜 것이다.”라고 썼다.[28] 다른 어떤 텍스트에서도 티르타이오스는 미사일이나 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 호플리테스 전사들이 어느 정도 원거리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전환기에 대한 또 다른 근거를 제시한다. 확장된 점진주의자들은 호플리테스 전사들이 진정한 팔랑크스 전술로 싸운 것은 기원전 5세기 이후라고 주장한다.[23] 전환 속도에 대한 추정치는 기원전 750년부터 기원전 450년까지 최대 300년에 이른다.

2. 2. 고대 로마

로마 군단의 중장보병은 초기에는 에트루리아(Etruria)를 통해 도입된 그리스식 전술을 사용했다. 하지만, 산악 민족인 삼니움인(Samnites)과의 전투에서 전열이 흐트러지는 데 취약한 밀집 대형의 단점을 극복한, 산개 전술을 사용하게 되었다. 공격용 무기는 투창(필룸(pilum))과 검(글라디우스(gladius))이었다. 방어구는 청동 투구와 철제 쇄갑옷(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을 사용했고, 방패(스크툼(scutum))는 몸 앞면을 완전히 가릴 수 있는 대형 방패를 채용하게 되었다.

로마 군단, 테스투도

2. 3. 동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은 군의 주력으로 중기병(카타프락토스)을 운용했지만, 중장보병 부대도 계속 편성하였다. 이들은 스쿠타라는 방패를 들고 전열을 형성하여 스크타토스라고 불렸다.[38] 스쿠타 방패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사용된 타원형이었으나, 11세기 이후에는 점차 쇠퇴하고 10세기부터 하반부가 뾰족하고 길게 뻗은 서양 연 모양의 방패가 사용되었다.[39]

『스키리체스 연대기』에 묘사된 동로마의 중장보병(스크타토스). 방패는 서양 연형이다.


병사들은 철제 투구를 착용하고,[40] 몸통에는 라멜라 갑옷이나 사슬 갑옷, 누비 방어구를 사용했으며, 주로 장창으로 무장했다.[41]

2. 4. 고대 중국

전국 시대에 전쟁 양상이 전차전에서 보병전으로 변화하면서 중장보병이 군의 주력이 되었다. 대국 간의 대규모 전투가 빈번해진 전국 시대 후기의 중장보병은 철제 투구와 철제 견갑을 갖춘 소찰갑옷을 착용하고 가죽신을 신었으며, 한 손으로 다루는 무기의 경우 칠을 칠한 비교적 소형의 목제 방패를 들었다. 무기는 청동제 검이나 동제 육질봉이 방패와 함께 사용되었고, 양손으로 다루는 장병의 철제 (창 포함)이나 강철제 , 청동제 가 사용되었으며, 가 대량으로 투입되었다.

2. 5. 일본

일본에서는 고대(아스카 시대 이전)에 과 방패를 든 중장보병이 존재했지만, 그 후 보병에 의한 밀집전을 필요로 하는 전쟁 형태는 국내에서 사라졌고, 이어 국내의 소규모 분쟁을 효율적으로 진압하는 정예 기마 전사로서 무사가 등장했다. 그 후 전국 시대가 되어 중장보병은 전투원의 대량 동원과 무기의 지급이 가능해진 다이묘 영국 간의 분쟁에서 아시가루 부대(足軽部隊)로서 다시 등장한다.

아시가루는 헤이안 시대 초에는 부대에 선행하여 적 집락을 방화하고 야간에 게릴라 활동을 하는 등의 잡병을 가리켰고, 장비도 전투원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대나무나 나무로 만든 형식적인 방어구를 갖춘 경보병 집단에 불과했지만, 전국 시대 말기가 되면 세력 간의 결전에 동원되는 아시가루 보병에게는 철제 구족이 지급되게 되었고, 장병창, 활, 철포, 등의 양손으로 다루는 무기를 사용하여 싸웠다. 방패는 구족에 통합되었고, 본격적인 화살이나 탄환 방어에는 설치식 치타테(置盾)나 다케츠카(竹束) 등이 사용되었다. 문헌에는 비(備)라고 불리는 여러 병과 200~500명 정도의 규모로 구성된 부대가 보이고, 또한 조선 전쟁의 기록에는 수명 또는 15~30명을 단위로 분산 돌격을 감행한 모습이 적혀 있다.

2. 6. 유럽의 변천

고대 말기에는 전투 양상이 세력 간의 대회전에서 북동쪽 민족의 약탈과 이에 대한 격퇴 추격으로 변화하면서, 기동력을 중시하는 기마 병력 편제가 중요해졌다.[42] 또한 등자의 전래로 중기병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중장보병은 전장의 주역에서 물러났다. 근세화기가 발명되면서 중기병의 강점은 사라지고 보병이 다시 주역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화기를 장비한 경장 보병이었다. 스페인테르시오는 장창(파이크)을 장비한 창병의 방어구를 비교적 경장으로 갖춘 밀집 진형이었다.

테르시오, 로크루아 전투(1643년)


장갑병은 요새 방어 등에서 강점을 보이기도 했지만(로도스 섬 공방전), 화기와 대포의 파괴력이 증대되면서 장갑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보병이 진형을 짜서 싸우는 전술적 의미도 저하되어, 용병의 도주 방지 등 운용상의 요구 외에는 밀집 진형이 채택되지 않았다. 사격선 형성을 위해 종대·횡대를 형성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중장보병과 경장보병에 의한 전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3. 장비

3. 1. 갑옷

각 호플리테는 자신의 장비를 직접 준비해야 했기에, 장비를 구매할 수 있는 사람만이 호플리테로 참전할 수 있었다. 로마 공화국 군대와 마찬가지로 중산층이 보병의 대부분을 구성했다. 장비는 표준화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도시 국가 간에 일반적인 디자인 경향이 있었다. 호플리테들은 맞춤형 갑옷을 착용했고, 방패에는 가족이나 씨족의 문장이 장식되어 있었지만, 후대에는 도시 국가의 상징이나 문장으로 대체되었다. 장비는 제작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가족 내에서 대대로 물려줄 수 있었다.

코르푸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호플리테 방어구.


호플리테 군대는 중장보병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갑옷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완전한 청동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무게가 약 32kg에 달했지만, 비용 효율적이고 적절한 보호 기능을 제공했던 리넨 갑옷인 리노토락스가 더 흔했다. 사용된 투구의 디자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하게 변했다. 코린트식 투구는 처음에는 표준화되었고 성공적인 디자인이었다. 후기 변형에는 코린트식 투구의 경량화 버전인 칼키디식 투구와 후기 호플리테들이 착용했던 간단한 필로스 투구가 포함된다. 투구에는 종종 하나 이상의 말총 술 장식과/또는 청동 동물 뿔과 귀가 장식되어 있었고, 종종 페인트칠도 되어 있었다. 트라키아식 투구는 보호 기능을 더욱 높이기 위해 큰 시야 가리개가 있었다.

아리스티온의 비석, 중장보병 또는 호플리테. 기원전 510년.


고대 아테네 호플리테의 갑옷

3. 2. 방패

홉플리테스는 아스피스/아스피스grc(때로는 호플론/호플론grc)라고 불리는 크고 오목한 방패를 사용했는데, 지름이 80-100cm 정도였고 무게는 6.5-8kg 정도였다.[17][18] 방패는 세 겹으로 만들어졌는데, 중간 층은 두꺼운 나무로, 적을 향한 바깥층은 청동으로, 안쪽은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아르고스식 손잡이로 알려진 이 손잡이는 방패 가장자리에 위치했고, 중앙에는 가죽 끈(전완부용)으로 지탱되었다. 이 두 지점의 접촉은 타격 후 방패가 옆으로 흔들리는 것을 막았고, 그 결과 병사들은 방패를 잃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를 통해 홉플리테스 병사는 방패를 더욱 기동성 있게 사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방패의 공격적인 능력을 활용하고 파랑크스를 더 잘 지원할 수 있었다. 앞으로 밀어붙이도록 설계된 큰 방패는 홉플리테스에게 가장 필수적인 장비였다.[19]

3. 3. 창

호플리테스의 주요 공격 무기는 도리(dory)라 불리는 이었다. 길이는 약 2.5~4.5m, 지름은 약 2.5cm였다. 창 끝에는 잎 모양의 촉이 달려 있었고, 뒤쪽에는 사우로테르(σαυροτήρ, 사우로테르/saurotergrc)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사우로테르는 창을 땅에 꽂거나, 창이 부러졌을 때 보조 무기로 사용되었으며, 쓰러진 적을 마무리할 때도 쓰였다. 또한 창의 균형을 잡는 역할도 했다.

호플리테가 창을 위로 잡고 사용했는지, 아래로 잡고 사용했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다. 아래로 잡으면 제어하기 좋고, 위로 잡으면 공격력이 더 강했다.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자세를 모두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3. 4. 검

호플리테스는 주로 크시포스(xiphos)라 불리는 단검을 휴대했지만, 후대에는 더 길고 무거운 형태의 검도 사용했다.[20] 단검은 주무기인 창이 부러지거나 분실되었거나, 또는 파랑크스(phalanx)의 진형이 무너졌을 때 사용하는 보조 무기였다.[20] 크시포스는 보통 약 60cm 길이의 칼날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파르타인들이 사용한 것은 종종 30~45cm에 불과했다.[20] 이 매우 짧은 크시포스는 두 호플리테스 부대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밀집된 상황에서 매우 유리했는데, 방패벽의 틈을 통해 적의 무방비 상태인 사타구니나 목구멍을 찌를 수 있었던 반면, 더 긴 검을 휘두를 공간은 없었기 때문이다.[20] 이러한 작은 무기는 많은 호플리테스들이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중에 갑옷을 버리기 시작한 후 특히 유용했을 것이다.[20] 호플리테스는 또한 앞으로 휘어진 칼날을 가진 무거운 단검인 코피스(kopis)를 휴대하기도 했다.[20]

검집은 콜레오스/κολεόςgrc라고 불렸다.[20]

4. 전술

고대 그리스의 분열된 정치 구조는 잦은 분쟁을 야기했지만, 제한된 병력과 짧은 전투 기간으로 인해 전쟁의 규모는 제한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농부나 노동자로, 전역 후 생업에 복귀해야 했기에 장기간의 전투는 어려웠습니다. 스파르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은 전문적인 군인을 보유하지 않았고, 아테네의 경우 60세 이상만이 병역에서 면제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전투는 주로 여름 한철에 집중되었습니다.

전투는 일반적으로 평평하고 개방된 지형에서 벌어졌으며, 호플리테스들은 팔랑크스 대형을 이루어 전투를 벌였습니다. 특히,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은 좁은 해안 협곡을 이용하여 페르시아군에 맞서 7일 동안 저항했습니다. 기병은 팔랑크스의 측면을 보호하고, 패배한 적을 추격하거나 후퇴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경보병과 투척병도 전투에 참여했지만 그 역할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스파르타군의 팔랑크스 진형은 8~10열 깊이의 직사각형 형태였으며, 충분한 병력이 있을 경우 400m 이상의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양측 팔랑크스는 근접하여 전투를 벌였고, 뒤쪽의 병사들은 앞쪽 병사들을 밀어 적 진형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이 밀어내기 전술은 ''오티스모스''(othismos)라고 불렸으며, 고대 기록에 따르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한쪽 진형이 무너지면 병사들은 도주했고, 경기병 등이 이들을 추격했습니다.

호플리테스는 무거운 방패를 버리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으며, 방패는 자신과 왼쪽 동료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팔랑크스 우측 병사들은 반만 보호되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양측은 서로의 우측을 겹치려 했고, 팔랑크스는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경험 많은 호플리테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른쪽에 배치되었습니다. 플루타르크는 "한 사람은 전체 전열을 위해 방패를 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호플리테스 전투는 개인보다 공동체의 단결을 중시하는 전투 방식으로, 병사들의 헌신과 정신력이 중요했습니다. 팔랑크스는 가장 약한 요소만큼만 강했기 때문에, 규율과 용기가 승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투 후에는 개별적인 용사를 선발하기도 했는데, 헤로도토스는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디에네케스를 가장 뛰어난 용사로 꼽았습니다.[16]

5.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군대는 주력 부대로 주로 ''페제타이로이(Pezhetairoi)''(보병 동반자)를 배치했지만, 코린토스 동맹(League of Corinth)에서 제공받거나 고용된 용병으로부터 온 일부 고전적인 호플리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부대 외에도 마케도니아인들은 히파스피스트(Hypaspists)를 운용하였는데, 이들은 정예 부대로 알렉산더의 파랑크스의 노출된 우익을 보호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스 군대는 헬레니즘 시대 동안 대부분 마케도니아 파랑크스 방식의 병력을 배치했다. 고전적인 호플리테스 외에도 헬레니즘 국가들은 투레오포로이(Thureophoroi)와 토라키타이(Thorakitai)라는 두 가지 새로운 유형의 호플리테스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리스인들이 갈라티아의 ''투레오스'' 방패를 채택하면서 등장했으며, 투레오포로이는 긴 돌격 창, 짧은 검, 그리고 필요에 따라 투창을 사용했다. 토라키타이는 투레오포로이와 유사했지만, 더 무거운 갑옷을 착용했고, 보통 쇠사슬 갑옷을 입었다. 이 병력은 경보병과 파랑크스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중보병의 형태로 간격을 메우는 데 사용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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