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마 공작 카를로스 우고
1. 개요
카를로스 우고는 파르마 공작 자비에르의 아들로, 부르봉 왕가의 후손이다. 그는 카를리스타 운동의 지도자로서 스페인 왕위 계승을 주장했으나, 사회주의적, 자유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면서 전통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었다. 몬테주라 학살 사건과 가족 간의 분열을 겪은 후,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스페인 국적을 취득했다. 2010년 전립선암으로 사망했으며, 파르마 공작 및 다양한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를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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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위 | 파르마 공작 |
|---|---|
| 재임 기간 | 1977년 5월 7일 – 2010년 8월 18일 |
| 이전 | 사비에르 공작 |
| 이후 | 카를로스 공작 |
| 배우자 | 네덜란드 공주 이레네 (1964년 4월 29일 결혼, 1981년 1월 7일 이혼) |
| 자녀 | 카를로스 공작 마르가리타 데 보르본파르마 하이메 데 보르본파르마 카롤리나 데 보르본파르마 |
| 가문 | 보르본파르마 가문 |
| 아버지 | 사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
| 어머니 | 마들렌 드 부르봉뷔세 |
| 출생일 | 1930년 4월 8일 |
| 출생 장소 | 파리, 프랑스 |
| 사망일 | 2010년 8월 18일 |
| 사망 장소 | 바르셀로나, 스페인 |
| 매장일 | 2010년 8월 28일 |
| 매장 장소 | 파르마, 산타 마리아 델라 스테카타 교회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 스페인어 | 카를로스 우고 하비에르 마리아 시스토 루이스 로베르토 후안 호르헤 베네딕토 미겔 (Carlos Hugo Javier María Sixto Luis Roberto Juan Jorge Benedicto Miguel) |
|---|---|
| 이탈리아어 | 카를로 우고 사베리오 마리아 시스토 로도비코 로베르토 조반니 조르조 베네데토 미켈레 (Carlo Ugo Saverio Maria Sisto Lodovico Roberto Giovanni Giorgio Benedetto Michele) |
| 프랑스어 | 샤를 위그 그자비에 마리 시스트 루이 로베르 장 조르주 브누아 미셸 (Charles Hugues Xavier Marie Sixte Louis Robert Jean Georges Benoît Michel) |
| 관련 항목 | 카를리스타 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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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오시 투포우 5세는 통가의 제23대 국왕으로, 외무장관을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다 2006년 즉위 후 민주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권력을 이양하는 등 통가의 정치 개혁에 힘썼으나 결혼하지 않아 왕위 계승권이 있는 자녀는 없었다. -
옥스퍼드 대학교 동문 -
찰스 틸리
찰스 틸리는 미국의 사회학자, 정치학자, 역사학자로, 역사 사회학, 사회 운동, 국가 형성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며 관계적, 과정 중심적 접근 방식으로 사회과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카를로스 우고는 자비에르, 파르마 공작과 마들렌 드 부르봉-뷔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명은 위그 마리 시스트 로베르 루이 장 조르주 브누아 미셸이었다. 그는 루이 14세의 직계 남성 후손이었다. 1963년 6월 28일, 프랑스 센 항소 법원의 판결에 따라 공식적으로 이름을 샤를 위그로 개명했다.
그의 어머니는 부르봉 공 피에르 2세의 동생 리에주 주교를 지낸 루이의 서자로 시작하는 부르봉-뷔세 가문({{lang)의 후손이다.
그는 몬트리올에서 바칼로레아를 통과했고, 파리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3. 카를리스타 운동
카를리즘은 19세기 스페인에서 창설된 정치 운동으로, 부르봉 왕가의 카를로스 우고 분파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코 시대 스페인에서 카를리즘 단체는 전통주의 공동체로 알려졌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국민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를로스 우고는 1975년에 아버지 하비에르로부터 카를리스타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카를로스 우고의 사회주의적, 자유주의적 개혁 성향은 전통주의자들의 반발을 샀고, 특히 그의 동생 식스토 엔리케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카를리스타 운동의 분열로 이어졌다.
카를로스 우고는 1965년 이후, 프랑코 총통에게 접근하는 한편, 좌익 티토주의를 지지하며 자율 관리 사회주의와 연방주의의 스페인 도입을 주장했다. 그는 스페인 공산당의 산티아고 카리요 등과 연계하여 카를리스타 당을 민주 회의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1979년 총선에서 카를리스타 당은 국민 연합에 합류했지만, 국회의원 당선은 블라스 피냐르 뿐이었다. 결국 카를리스타 당은 의회에서 완전히 밀려났고, 카를로스 우고는 1979년 정치 활동을 단념,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특지로 스페인 국적을 받았다. 1980년에는 자신이 조직한 카를리스타 당에서 탈퇴했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통합 좌익 연합 결성에 참여했다.
2003년 9월 28일, 카를로스 우고는 프랑스 아르본에서 자신의 카를리스트 주장을 다시 한번 천명했다.
3.1. 카를리스타 운동의 기원과 분열
카를리즘은 19세기 스페인에서 시작된 정치 운동으로, 부르봉 왕가의 카를로스 우고 분파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5년 돈 하비에르는 장남 카를로스 우고를 위해 카를리스트 왕 지위를 포기했고, 카를로스 우고는 같은 해 8월 카를리스트 지도자가 되었다. 프랑코 시대 스페인에서 카를리즘 단체는 전통주의 공동체로 알려졌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국민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운동은 카를로스 우고와 그의 사회주의적, 자유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과, 그를 거부한 전통주의자들, 특히 그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 그의 남동생 식스토 엔리케 공자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1976년 5월, 프랑코 사망 1년 후, 카를로스 우고 파의 카를리스트 동조자 두 명이 연례 카를리스트 회합 중 극우 테러리스트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 사건은 몬테주라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테러리스트 중에는 스테파노 델레 키아이와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 (Triple A)의 회원들이 있었으며, 스페인 정보 기관과 시민 경비대 내의 프랑코주의 세력으로부터 물류 지원을 받았다.
돈 하비에르는 개인적인 편지에서 몬테주라에서 "카를리스트들이 혁명가들과 대결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돈 하비에르에 따르면 돈 식스토의 추종자들이 진정한 카를리스트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1976년 3월 4일, 아들 식스토와 동행한 돈 하비에르는 스페인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고, 그의 답변은 카를리스트 정통성을 보여주었다. 같은 날 그는 파리 공증인에 의해 인증된 선언문을 발표하여 자신의 이름이 "카를리즘 내의 심각한 교리적 오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것에 반대했으며, 카를로스 우고가 추진하는 정치 노선을 암묵적으로 부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돈 하비에르는 다른 파리 공증인에 의해 인증된 또 다른 선언문을 발표하여 장남을 "나의 유일한 정치적 후계자이자 카를리즘의 수장"으로 확인했다.
3.2. 몬테후라 사건
1976년 5월, 프랑코 사망 1년 후, 카를로스 우고 파의 카를리스트 동조자 두 명이 연례 카를리스트 회합 중 극우 테러리스트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 테러에는 스테파노 델레 키아이와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 (Triple A) 회원들이 가담했으며, 스페인 정보 기관과 시민 경비대 내 프랑코주의 세력으로부터 물류 지원을 받았다. 이 사건은 몬테주라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3.3. 가족 간 갈등
카를리즘은 19세기 스페인에서 시작된 정치 운동으로, 부르봉 왕가의 카를로스 우고 분파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5년 돈 하비에르는 장남 카를로스 우고를 위해 카를리스트 왕 지위를 포기했고, 카를로스 우고는 카를리스트 지도자가 되었다.
카를로스 우고의 사회주의적, 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지지와 거부는 카를리즘 운동의 분열을 초래했다. 특히 그의 남동생 식스토 엔리케 공자는 카를로스 우고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76년 5월, 프랑코 사후 1년 뒤, 카를로스 우고 파의 카를리스트 동조자 두 명이 연례 카를리스트 회합 중 극우 테러리스트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 사건은 몬테주라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돈 하비에르는 몬테주라 사건에 대해 "카를리스트들이 혁명가들과 대결했다"고 주장하며, 돈 식스토의 추종자들이 진정한 카를리스트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발언을 했다. 이후 돈 하비에르는 카를로스 우고의 정치 노선을 부인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카를로스 우고는 아버지가 식스토에게 납치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돈 하비에르는 이를 부인했다.
얼마 후, 돈 하비에르는 카를로스 우고를 "나의 유일한 정치적 후계자이자 카를리즘의 수장"으로 확인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도냐 마그달레나는 남편이 카를로스 우고에 의해 협박당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돈 하비에르는 스위스로 이송되어 사망했고, 미망인은 장남과 세 딸을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했다. 그녀는 카를로스 우고 등을 상속에서 제외하고, 리니에르 성에서 열리는 그의 시신 조문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4. 결혼과 가족
카를로스 우고가 오라녜-나사우의 이레네 공주(율리아나 여왕의 딸)와 약혼한 것은 네덜란드에서 헌법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레네 공주는 네덜란드 정부가 결혼 승인 법률 제정을 거부하여 왕위 계승권을 잃었다. 카를로스 우고의 스페인 왕위 계승 주장은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가 외국 왕위를 주장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국제 정치적 어려움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카를로스 우고와 이레네는 1964년 4월 29일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보르게세 예배당에서 전 네덜란드 교황 대사였던 파올로 조베 추기경에 의해 결혼했다. 네덜란드 왕실 인원은 참석하지 않았고, 이레네의 부모는 텔레비전으로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결혼식 후, 카를로스 우고와 이레네는 교황 바오로 6세와 개별 면담을 가졌다. 그들은 라스 팔마스 데 그란 카나리아에서 신혼여행을 보냈고, 그 후 마드리드에 정착했다.
카를로스 우고와 이레네는 1981년 5월 26일 이혼했다.
4.1. 자녀
카를로스 우고는 네덜란드의 이레네 공주와 1964년 4월 29일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보르게세 예배당에서 결혼했다. 1981년 5월 26일 이혼하기 전까지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 이름 | 출생 | 비고 | ||||||||
|---|---|---|---|---|---|---|---|---|---|---|
| 카를로스 하비에르 베르나르도 시스토 마리아 | 1970년 1월 27일 | 안네마리 세실리아 괄리에 반 위젤과 2010년 6월 12일에 결혼, 세 자녀를 둠. 브리짓 클린스트라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카를로스 휴고(1997년 1월 20일 출생)를 둠. | ||||||||
| 이름 | 출생 |
|---|---|
| 부르봉-파르마의 루이사 공주 | 2012년 5월 10일 |
| 부르봉-파르마의 세실리아 공주 | 2013년 10월 17일 |
| 카를로스 엔리케 레오나르드, 부르봉-파르마의 상속 왕자 | 2016년 4월 24일 |
| 이름 | 출생 |
|---|---|
| 율리아 텐 카테 | 2008년 9월 3일 |
| 파올라 텐 카테 | 2011년 2월 25일 |
| 이름 | 출생 |
|---|---|
| 부르봉-파르마의 지타 클라라 공주 | 2014년 2월 21일 |
| 부르봉-파르마의 글로리아 이레네 공주 | 2016년 5월 9일 |
| 이름 | 출생 |
|---|---|
| 알라이아-마리아 브레닌크메이에르 | 2014년 5월 20일 |
| 자비에 브레닌크메이에르 | 2015년 12월 16일 |
2003년, 그의 딸 마르가리타는 카를로스 우고가 1983년에 태어난 하비에르라는 전 보모와 사생아 아들을 두었다고 밝혔다.
5. 정치 활동의 중단과 이후의 삶
1979년 카를로스 우고는 카를리스타 당의 정치 활동을 단념하고,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특지로 스페인 국적을 받았다. 1980년, 자신이 정당으로 조직한 카를리스타 당에서 탈퇴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후에 통합 좌익 연합의 결성에 참여했다.
2002년, 스페인 국립 역사 문서 보관소에 팔마 공작가가 소유한 역사 문서를 기증했지만, 동생 시크스토 엔리케는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003년 9월 23일, 카를로스 우고는 남프랑스 알본느(피레네-아틀란티크주바욘주)에서 카를리스타의 왕위 복귀를 선언했다. 그때, 스스로 몬테모린 백작을 칭하고, 자신의 4명의 자녀에게도 작위를 수여했다.
2010년, 전립선암으로 80세에 사망했다. 유해는 바르셀로나에서 전 부인과 자녀들이 거주하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보내져 성당에서 유족과 네덜란드 왕실의 친척들과 대면했다. 그 후, 유해는 이탈리아의 파르마로 옮겨져 역대 파르마 공이 잠든 영묘에 안치되었다.
6. 사망
2008년 2월, 카를로스 우고가 암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0년 8월 2일, 그는 자신의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2010년 8월 18일, 바르셀로나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카를로스 우고의 유해는 바르셀로나에서 헤이그로 옮겨졌고, 노르데인데 궁전(네덜란드 왕가의 세 공식 궁전 중 하나) 영지의 파겔 돔에서 가족과 친척들을 위해 안치되었다. 8월 28일, 시신은 이탈리아 파르마로 옮겨져 산타 마리아 델라 스테카타 성지의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7. 작위 및 서훈
카를로스 우고는 파르마 공작령의 파르네세 가문의 세습 상속자로서 콘스탄티누스 기사단의 수장직을 주장했다. 파르네세 공작들은 1699년에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로 인정받았고, 1706년 로마 교황청은 남성 장자 상속에 따라 파르네세의 상속자(1731년 이후 부르봉 왕가)에게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 지위를 확정했다.
스페인 왕위 요구자로서 카를로스 우고는 또한 스페인 금양모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라고 주장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금양모 기사단의 사슬이 관에 놓였고, 그는 결혼식에서 기사단의 표장을 착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