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브라크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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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릭스 브라크몽은 19세기 프랑스의 판화가이자 도예가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제자인 조제프 기샤르에게 미술을 배우고, 1852년 파리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며 이름을 알렸다. 브라크몽은 에칭 판화가 협회에 가입하고, 에두아르 마네, 앙리 팡탱라투르 등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판화 작업을 했다. 그는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했으며,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아 자포니즘 유행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세브르 도자기 회사 등에서 도자기 디자인을 하며 아르 누보 스타일의 전조를 보이기도 했다. 브라크몽은 1889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특히 판화와 도자기 디자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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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브라크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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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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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Félix Henri Bracquemond |
출생일 | 1833년 5월 22일 |
출생지 | 파리 |
사망일 | 1914년 10월 27일 |
사망지 | 세브르 |
국적 | 프랑스 |
직업 | 화가, 판화가, 도안가 |
활동 분야 | |
사조 | 인상주의 |
영향 관계 | |
영향을 준 인물 | 에드가 드가, 에두아르 마네, 제임스 맥닐 휘슬러 |
2. 생애
펠릭스 브라크몽은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석판화가로 훈련받았으며,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의 제자인 조세프 기샤르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작업실에서 미술을 배웠다.[1] 19세에 그린 할머니의 초상화는 살롱에서 테오필 고티에의 주목을 받았다.[2]
브라크몽은 회화보다 판화에 더 큰 관심을 가졌으며,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에서 기술적인 지식을 얻어 오랫동안 독학으로 판화 작업을 했다. 1856년, 에드몽 드 콩쿠르와 가까운 친구가 되어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으며,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판화집을 처음 발견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2]
1853년경부터 판화와 에칭에 전념하여 프랑스에서 에칭 예술의 부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샤를 보들레르의 출판인인 오귀스트 풀레 말라시를 통해 문학계에 들어섰으며, 테오도르 드 방빌, 쥘 바르베 도르비이, 귀스타브 제프로이, 펠릭스 나다르 등과 교류했다.[2] 오귀스트 로댕과도 친분이 있었다.
1862년, 인쇄업자 오귀스트 들라트르의 도움을 받아 출판업자 알프레드 카다르가 설립한 에칭 판화가 협회(Société des Aquafortistes)에 가입했다.[3] 1863년에는 판화를 출품했지만 심사에서 낙선하여, "낙선전"에 출품했다.[19]
1874년 나다르의 카퓌신 대로 작업실에서 열린 제1회 인상주의 화가 전시회에 참가했다.[6] 그는 오귀스트 콩트, 샤를 보들레르, 테오필 고티에의 초상을 포함한 에칭 프레임과 터너, 앵그르, 마네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에칭, 그리고 오리지널 에칭인 ''Les Saules'' (''버드나무''), ''Le Mur'' (''벽'') 등을 출품했다. 1879년에도 친구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2]
1856년, 브라크몽은 인쇄업자 오귀스트 들라트르의 작업실에서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만화 판화 컬렉션을 발견했는데, 이는 일본에서 ''가초가''로 알려진 그림 장르의 전형적인 예였다. 그는 이 주제에 매료되어 프랑스 자포니즘 유행의 선구자가 되었다.[7][8]
1860년, 파리의 도자기 상인 Eugène Rousseau|외젠 루소프랑스어에게 1867년 만국 박람회를 위해 디자인된 식탁 세트의 모티프를 의뢰받았다. 브라크몽은 ''가초가''의 주제를 차용한 모델을 제안했다. 유럽 예술가가 일본 예술가의 작품을 직접 복사하여 호쿠사이 만화의 동물 그림을 재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1867년 만국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이 서비스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70년 세브르 국립 제조소에서 일하면서 아르 누보 현대 스타일의 전조가 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리모주의 샤를 아빌랜드사의 파리 스튜디오의 예술 감독직도 맡았다.
1869년 8월 5일 파리에서 마리 브라크몽으로 알려진 화가 마리 키보롱과 결혼했다.[13] 1886년에 《그림과 색채에 관하여》라는 책과 목판화 및 석판화에 관한 연구를 저술했다. 이 책은 빈센트 반 고흐에게 매우 호평을 받았다.[14] 1889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 장교로 훈장을 받았다.[15] 가브리엘 P. 와이즈버그는 그를 "그 시대의 예술적 취향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16] 그는 세브르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펠릭스 브라크몽은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석판화가로 훈련받았으며,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의 제자인 조세프 기샤르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작업실에서 미술을 배웠다.[1] 19세에 그린 할머니의 초상화는 살롱에서 테오필 고티에의 주목을 받았다.[2]2. 2. 판화가로서의 활동
브라크몽은 회화보다 판화에 더 큰 관심을 가졌으며,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에서 기술적인 지식을 얻어 오랫동안 독학으로 판화 작업을 했다. 1856년, 에드몽 드 콩쿠르와 가까운 친구가 되어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으며,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판화집을 처음 발견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2]1853년경부터 판화와 에칭에 전념하여 프랑스에서 에칭 예술의 부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초상화, 풍경화, 현대 생활의 장면, 조류 연구 외에도 장 루이 에르네스트 메소니에, 귀스타브 모로,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등 다른 예술가들의 그림을 해석한 판화를 800점이 넘게 제작했다.[15]
샤를 보들레르의 출판인인 오귀스트 풀레 말라시를 통해 문학계에 들어섰으며, 테오도르 드 방빌, 쥘 바르베 도르비이, 귀스타브 제프로이, 펠릭스 나다르 등과 교류했다.[2] 오귀스트 로댕과도 친분이 있었다.
1862년 6월, 인쇄업자 오귀스트 들라트르의 도움을 받아 출판업자 알프레드 카다르가 설립한 에칭 판화가 협회(Société des Aquafortistes)에 가입했다.[3] 그의 조언에 따라 장 바티스트 코로, 장 프랑수아 밀레,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카미유 피사로가 판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마네의 ''올랭피아''와 ''죽은 남자'' 에칭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88년, 오귀스트 르페르는 펠릭스 브라크몽, 다니엘 비에르주, 토니 벨트랑과 함께 잡지 ''라탕프 오리지널''을 창간하여 예술가와 아마추어들이 컬러 판화의 새로운 경향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앙리 리비에르는 이 시점부터 1888년부터 1902년까지 "에펠탑 36경"을 제작했다.[4] 1891년, 발로통은 고갱이나 에밀 베르나르와 함께 목판화 기술을 혁신했고,[5] 툴루즈 로트렉은 포스터 미술을 혁신했다.
1863년에는 판화를 출품했지만 심사에서 낙선하여, 그 해 낙선한 많은 예술가들의 청원에 의해 열린 "낙선전"에 출품했다. 1862년에 에칭 판화가 협회(Société des Aquafortistes)에 입회했다.[19] 에두아르 마네, 앙리 팡탱라투르, 알퐁스 르그로, 요한 용킨트, 오귀스탱 테오뒤르 리보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도 판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1874년에 열린 제1회 인상파 전시회에 초상 판화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와 앵그르의 원화를 바탕으로 한 복제 판화를 출품했다. 1879년의 제4회 인상파 전시회에도 출품했다.[20]
2. 3. 인상주의와의 관계
1874년 브라크몽은 나다르의 카퓌신 대로 작업실에서 열린 제1회 인상주의 화가 전시회에 참가했는데, 이들은 인상주의자로 불리게 된다.[6] 1874년 4월 15일에 열린 이 전시회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는 오귀스트 콩트, 샤를 보들레르, 테오필 고티에의 초상을 포함한 에칭 프레임과 터너, 앵그르, 마네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에칭, 그리고 오리지널 에칭인 ''Les Saules'' (''버드나무''), ''Le Mur'' (''벽'') 등을 출품했다. 1879년에도 친구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2]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회에 초상 판화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와 앵그르의 원화를 바탕으로 한 복제 판화를 출품했고, 1879년 제4회 인상파 전시회에도 출품했다.[20]
2. 4. 도예가로서의 활동
1856년, 브라크몽은 인쇄업자 오귀스트 들라트르의 작업실에서 일본의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제작한 만화 판화 컬렉션을 발견했는데, 이는 곤충, 갑각류, 물고기와 함께 꽃과 새를 묘사한, 일본에서 ''가초가''로 알려진 그림 장르의 전형적인 예였다. 그는 이 주제에 매료되어 19세기 후반에 장식 미술을 사로잡은 프랑스 자포니즘 유행의 선구자가 되었다.[7][8]1860년, 그는 먼저 도예가 테오도르 데크의 작업실로 돌아간 후, 파리의 도자기 상인 Eugène Rousseau|외젠 루소프랑스어에게 갔다. 루소는 그에게 1867년 만국 박람회를 위해 디자인된 식탁 세트의 모티프를 의뢰했다. 브라크몽은 직접 그린, ''가초가''의 주제를 차용한 모델을 제안했다. 유럽 예술가가 일본 예술가의 작품을 직접 복사하여 호쿠사이 만화의 동물 그림을 재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1867년, 브라크몽은 앙리 팡탱라투르, 카롤루스 뒤랑 그리고 도예가 마르크루이 솔롱과 함께 소시에테 뒤 징-라르의 9명의 회원이었다. 그들은 이 서비스가 예정된 일본식 만찬을 위해 매달 세브르에서 만났다.
외젠 루소는 크레일-몽테로 도자기에서 200개의 작품을 제작하도록 주문했다. 브라크몽은 이 제조사에서 사용한 에칭과 판화를 제작했다. 증명서들은 잘라내어 장식을 받기 위해 점토에 올려졌다. 오븐 속에서 열은 종이를 사라지게 하고, 그림의 흔적만 남겼다. 그런 다음 그 위에 채색을 하고 작품을 큰 오븐에 넣었다.
1867년 만국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이 서비스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서비스는 "가구 및 가정용 기타 물품"의 세 번째 그룹, 17번 클래스 "도자기, 토기 및 고급 도자기"의 58번으로, 오래된 오크나무에 벨벳 받침대가 있는 루이 13세 선반에 설치되었다. 카운터 위에는 루소의 이름이 불에 구워진 에나멜로 된 판에 새겨져 있었다. 배심원들은 그에게 동메달을 수여했다(루소는 제조업체가 아닌 상인이었기 때문에). 금메달은 제조업체 레뵈프와 밀리에에게 수여되었다. 이 서비스는 또한 두 가지 새로운 특징을 자랑했다. 첫 번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취향과 개인적인 용도에 따라 자신의 서비스를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루소는 "고기를 위한 헛간, 생선을 위한 갑각류, 디저트를 위한 꽃"을 제안했다. 두 번째는 이 서비스가 더 넓은 계층에 맞춰졌다는 것이다. "그 사치스러움은 부르주아를 위한 것이었고, 그 모습은 귀족을 위한 사냥의 역할을 했다."
그 후 이 서비스는 완성되었고 (찻잔, 커피 등), 제조사는 크레일 및 몽테로 공장에 맡겨졌다. 레뵈프의 후계자인 바를루에는 1880년대 초에 이를 재출판했다. 1885년, 외젠 루소는 자신의 사업을 에르네스트-밥티스트 르베이예에게 매각했고, 그는 자신의 브랜드로 이 서비스를 계속 출판했다. 많은 재출판 또는 변형이 뒤따랐다. 그중에는 보르도의 쥘 비야르 제조사(19세기 후반), 크리스탈 계단(20세기 초), 또는 여전히 재출판되고 있는 지엔의 도자기 ''큰 새'' 등이 있다. 또한 이 서비스의 많은 작품들이 현재 다양한 프랑스 국립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국립 아드리앙 두부셰 박물관 등)에 보존되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10]
일본 판화에서 영감을 받은 이 서비스의 각 요소는 다른 모티프로 장식되었다. 이 장식은 다양한 새, 물고기, 갑각류를 다루고 연관시키면서 항상 식물과 곤충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었다. 이 장식은 종종 3부작으로 제시된다. 나비는 나뭇가지가 꺾이는 곳에서 수탉을 만나고, 잠자리는 수련이 굽어지는 곳에서 잉어를 만난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이 서비스의 시적인 매력을 칭찬하고 그 특별한 장식을 칭찬했다. 특히 스테판 말라르메는 프랑스 가구에서 복고 이후 "눈에 보이는 쇠퇴"를 언급하며 이 서비스에 대한 그의 매력을 증언했다. 그는 루소에 대한 특별한 찬사를 위해 도자기에 집중했고, 그는 영국의 모방자들로부터 그를 옹호했다. "나는 브라크몽이 가금류와 어류 연못에서 빌린 일본 모티프로 장식한 이 훌륭하고 독특한 서비스에 대한 모든 암시를 거부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식기이다. 각 작품, 심지어 접시조차도 특별한 묘사를 원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파리의 작품, 영국 표절에 대한 그림적이고 정신적인 우선 순위를 주장하게 되어 만족한다..." 말라르메는 "프랑스 정신으로 만들어진 높은 일본의 매력의 번역"으로 데크, 콜리노, 루소를 언급하며 "나는 특히, 대담하게, 아쿠아포르티스트 브라크몽에게 요청된 식탁 서비스를 언급해야 한다. 닭장과 물고기 연못의 평범한 주인이 기쁨의 색상으로 강조되어 있다."라고 평가했다. 말라르메 자신도 1866–1875년 기간 동안 출판된 이 서비스의 작품을 소유했다.
펠릭스 브라크몽은 1870년 세브르 국립 제조소에서 일하면서 그의 작품에 아르 누보 현대 스타일의 전조가 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또한 리모주의 샤를 아빌랜드사의 파리 스튜디오의 예술 감독직을 맡았다.
2. 5. 말년
1869년 8월 5일 파리에서 마리 브라크몽으로 알려진 화가 마리 키보롱과 결혼했다.[13] 그들의 아들 피에르는 펠릭스가 마리의 작품에 질투심을 느끼고 비판했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비난은 마리가 그림을 그만두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그는 1886년에 출판되어 빈센트 반 고흐에게 매우 호평을 받은[14] 《그림과 색채에 관하여》라는 책과 목판화 및 석판화에 관한 연구를 저술했다. 그의 최고의 판화는 풍경이나 동물에 집중되었는데, 《갈대와 물오리》(1882), 《제비》(1882), 《갈매기》(1888) 등이 대표적이다.
1889년에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장교로 훈장을 받았다.[15]
가브리엘 P. 와이즈버그는 그를 "그 시대의 예술적 취향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16]
실제로 그는 일본 도자기 선적의 포장재로 사용된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목판화의 아름다움을 인정한 사람이었고, 이는 19세기 후반 예술의 외관을 바꾸는 데 기여한 발견이었다.[17]
그는 세브르에서 사망했다.
3. 작품
브라크몽은 초상화, 풍경화, 현대 생활의 장면, 조류 연구 등 다양한 주제의 판화를 제작했으며, 다른 예술가들의 그림을 해석한 판화도 다수 제작했다. 그의 대표적인 판화 작품으로는 《갈대와 물오리》(1882), 《제비》(1882), 《갈매기》(1888) 등이 있다.[2] 그는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목판화의 아름다움을 인정한 사람이기도 하다.[17]
그는 도자기 디자인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4. 영향
펠릭스 브라크몽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판화 예술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에칭 기법의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56년, 브라크몽은 인쇄업자 오귀스트 들라트르의 작업실에서 일본의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제작한 호쿠사이 만화 판화 컬렉션을 발견했다. 그는 이 컬렉션에 매료되어 자포니즘 유행의 선구자가 되었다.[7][8]
그는 일본 미술, 특히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판화에 깊은 영향을 받아, 이를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자포니즘 확산에 기여했다. 1860년, 그는 도예가 테오도르 데크를 거쳐 파리의 도자기 상인 외젠 루소에게 갔다. 루소는 1867년 만국 박람회를 위해 디자인된 식탁 세트의 모티프를 브라크몽에게 의뢰했고, 브라크몽은 ''가초가''의 주제를 차용한 모델을 제안했다. 이는 유럽 예술가가 일본 예술가의 작품을 직접 복사하여 호쿠사이 만화의 동물 그림을 재현한 최초의 사례였다.
외젠 루소는 크레일-몽테로 도자기에서 200개의 작품을 제작하도록 주문했고, 브라크몽은 에칭과 판화를 제작했다. 1867년 만국 박람회에서 처음 선보인 이 서비스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가구 및 가정용 기타 물품" 부문에서 동메달을 수상했다.[10] 이 서비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서비스를 구성할 수 있고, 더 넓은 계층에 맞춰졌다는 두 가지 특징을 가졌다.
브라크몽의 도자기 디자인은 당시 유럽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아르 누보 스타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1870년 세브르 국립 제조소에서 일하면서 그의 작품에 아르 누보 현대 스타일의 전조가 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또한 리모주의 샤를 아빌랜드사의 파리 스튜디오의 예술 감독직을 맡았다.
브라크몽은 또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862년 6월, 그는 인쇄업자 오귀스트 들라트르와 함께 소시에테 데 아쿠아포르티스트를 설립했다.[3] 그의 조언에 따라 장 바티스트 코로, 장 프랑수아 밀레,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카미유 피사로가 판화를 시작했다. 그는 마네의 ''올랭피아'' 에칭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1888년, 오귀스트 르페르는 펠릭스 브라크몽과 함께 잡지 ''라탕프 오리지널''을 창간하여 컬러 판화의 새로운 경향을 알렸고, 앙리 리비에르는 "에펠탑 36경"을 제작했다.[4] 1891년, 발로통은 고갱이나 에밀 베르나르와 함께 목판화 기술을 혁신했다.[5]
5. 평가
펠릭스 브라크몽은 당대 예술계에서 판화가이자 도예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판화 작품은 섬세한 묘사와 독창적인 표현으로, 도자기 디자인은 혁신적인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그는 풍경이나 동물을 소재로 한 판화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대표작으로는 《갈대와 물오리》(1882), 《제비》(1882), 《갈매기》(1888) 등이 있다.
가브리엘 P. 와이즈버그는 펠릭스 브라크몽을 "그 시대의 예술적 취향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16] 그는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목판화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서양에 소개해 19세기 후반 예술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17]
1889년, 펠릭스 브라크몽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 장교로 훈장을 받았다.[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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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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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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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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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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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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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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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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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usee-ors[...]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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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Fantin-Latour, Toast avec la vérité, 1865
http://arts-graphi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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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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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B1911
Bracquemond, Félix
[16]
학술지
Félix Bracquemond and the Molding of French Taste
1976-09
[17]
학술지
Remarques sur la Japonisme de Bracquemond
Kodansha International
[18]
서적
L'Impressionnisme et son époque : dictionnaire international
[19]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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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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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écouvrir les Impressionnis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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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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