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냉수리 신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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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503년(지증왕 4년)에 제작된 신라의 금석문으로, 재산 분쟁 조정 과정과 그 이후 의례를 기록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증왕과 눌지 마립간의 교시를 근거로 진이마촌의 재산 분쟁을 해결하고, 분쟁 조정 후 소를 잡아 하늘에 보고하는 의식을 행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비문은 신라의 법률 및 행정 제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지증왕이 왕으로 불리기 전 갈문왕으로 칭해졌음을 보여주는 등 신라 왕호 변천 과정을 밝히는 데 기여한다. 또한, 비문은 신라어 고유 문법의 영향을 받아 순수한 한문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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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문 내용
비문의 내용은 크게 재산 분쟁 조정 과정과 그 이후의 의례를 기록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여러 판독안이 제시되었지만 초창기 판독안에서 크게 변화한 부분은 없다.[2]
비문에는 재산 소유권 분쟁을 신라 중앙 관료 7명이 조정하고, 조정 후에는 소를 희생으로 바쳐 하늘에 보고하는 의식을 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의 표현은 순수한 중국 한문이 아니며, 울진 봉평비와 마찬가지로 신라 고유어 문법의 영향을 받은 표기가 나타난다.[2]
2. 1. 분쟁 조정 과정
지도로갈문왕과 내지왕은 "진이마촌의 절거리로써 증거를 삼아 그로 하여금 재물을 얻도록 하라"는 교시를 내렸다.[2] 계미년 9월 25일, 지도로갈문왕과 6명의 관리는 공론하여 전대 2왕의 교시를 증거로 삼아 재물을 모두 절거리에게 주도록 했다.[2] 이들은 7명의 왕으로 불린다.[2]
절거리가 죽은 후에는 그의 동생 사노가 재산을 갖도록 하고, 말추와 사신지 두 사람은 재산에 대해 다시 논하지 말 것을 명하며, 만약 다시 논하면 중죄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2]
사건을 담당한 7명의 사전인은 하늘에 아뢰고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행한 후 이 사실을 기록했다.[2]
촌주 유지 간지와 수지 일금지 두 사람이 그 해에 일을 마쳤으므로 기록했다.[2]
2. 2. 조정 이후 의례
계미년 9월 25일에 7명의 왕이 모여 재물 분쟁을 조정하고, 절거리에게 재물을 주도록 하였다.[2] 조정 이후에는 소를 잡아 희생으로 바치는 의식을 행하고 이를 기록하였다.[2] 의례에 참여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여러 판독안이 제시되었지만 초창기 판독안에서 크게 변화한 부분은 없다.[2]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영천 청제비와 함께 신라의 법률 및 행정 제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왕명(敎)을 통해 재산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은 신라의 법치주의적 면모를 보여주며, 중앙 정부의 관리가 지방의 분쟁에 직접 개입하는 모습은 신라의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엿볼 수 있게 한다.[1]
이들은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혀 하늘에 아뢰는 의식을 행하고, 소를 잡아 희생으로 바치는 고계(誥戒)를 알렸다.[2]
3. 비문 판독
4. 역사적 의의
4. 1. 왕호 사용
비문에는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지증왕이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전 '갈문왕'으로 불렸음을 보여준다.[1]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며, 신라 왕호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5. 언어학적 특징
비문은 순수한 한문이 아닌, 신라 고유어의 문법적 제약이 반영된 독특한 문체로 작성되었다. 이는 울진 봉평비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1]
참조
[1]
문서
一運繰り上げて[[訥祇麻立干]]27年([[443年]])と見る見解がないわけではないが、支持されていない。
[2]
서적
6세기 금석문과 신라사회
2018-07-19
[3]
문서
[[실성 마립간]], [[입종 갈문왕]] 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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