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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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 공작은 1458년부터 1488년까지 브르타뉴 공작으로 재위했다. 그는 랭커스터 왕가 보호자로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에 관여했고,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중앙 집권화 정책에 반발하며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1488년 생토뱅 뒤 코르미에 전투에서 패배한 후 베르제 조약을 통해 자녀의 결혼에 대한 제한을 받았으며,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딸 안 드 브르타뉴가 공작위를 계승했으나, 프랑스 왕실과의 결혼을 통해 브르타뉴는 프랑스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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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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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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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브르타뉴 공작 |
재위 | 1458년 12월 26일 - 1488년 9월 9일 |
대관식 | 1459년 2월 3일 |
선임자 | 아르튀르 3세 |
후임자 | 안 |
배우자 | 마르그리트 드 브르타뉴 (1455년 결혼, 1469년 사망) 마르그리트 드 푸아 (1471년 결혼) |
자녀 | 장, 몽포르 백작 안 이자보 |
가문 | 드뢰몽포르 가문 |
아버지 | 에탕프 백작 리샤르 |
어머니 | 마르그리트 도를레앙 |
출생일 | 1433년 6월 23일 |
출생지 | 낭트, 클리송 |
사망일 | 1488년 9월 9일 |
사망지 | 쿠에롱 |
매장지 | 낭트 대성당 |
2. 생애
1433년 6월 23일에 에탕프 백작 리샤르와 마르그리트 도를레앙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샤르는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막내 아들이었다. 리샤르의 형들인 장 5세와 아르튀르 3세는 모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되었지만, 아르튀르 3세가 1458년에 사망했을 때 (장 5세의 아들들인 프랑수아 1세와 피에르 2세는 각각 1450년과 1457년에 아들 없이 사망) 유일한 적자 남성 상속인은 그의 조카 프랑수아 2세였다. 아버지 리샤르는 1438년에 프랑수아가 어렸을 때 이미 사망했다. 공작위는 1442년부터 사촌인 프랑수아 1세·피에르 2세 형제, 숙부 아르튀르 3세에게 계승되었지만, 모두 남자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방계였던 프랑수아 2세에게 계승되었다.[2][3]
2. 1. 어린 시절
프랑수아 2세는 1433년 6월 23일에 에탕프 백작 리샤르와 마르그리트 도를레앙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샤르는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막내 아들이었다. 리샤르의 형들인 장 5세와 아르튀르 3세는 모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되었지만, 아르튀르 3세가 1458년에 사망했을 때 (장 5세의 아들들인 프랑수아 1세와 피에르 2세는 각각 1450년과 1457년에 아들 없이 사망) 유일한 적자 남성 상속인은 그의 조카 프랑수아 2세였다.2. 2. 잉글랜드 왕실과의 관계
2. 2. 1. 랭커스터 가문의 보호자
프랑수아 2세는 1471년부터 1484년까지 망명 중인 잉글랜드의 랭커스터 왕가의 보호자가 되었다. 15세기 후반, 장미 전쟁으로 잉글랜드에서는 요크 왕가와 랭커스터 왕가가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서로 싸우는 내전이 벌어졌다. 1471년, 요크 왕가 군은 바넷 전투와 터크스베리 전투에서 라이벌들을 격파했다. 랭커스터 왕가의 국왕 잉글랜드의 헨리 6세와 그의 외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터크스베리 전투 이후 사망했다. 그들의 죽음으로 랭커스터 왕가는 왕위에 대한 직접적인 계승자를 잃게 되었다. 그 후, 요크 왕가의 국왕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는 잉글랜드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에 복종을 거부한 자들, 예를 들어 재스퍼 튜더와 그의 조카 헨리 튜더 (후일 잉글랜드의 헨리 7세)를 사형 선고하여 반역자로 지목하고 그들의 토지를 몰수했다.프랑수아는 튜더 가문이 프랑스로 도망치려 할 때 그들을 보호하게 되었는데, 영국 해협의 강풍으로 인해 그들은 브르타뉴 공국의 르 콩케에 상륙해야 했다. 헨리 튜더는 왕족의 혈통을 조금이나마 이어받은 유일한 랭커스터 왕가 귀족이었지만 왕위에 대한 주장이 미약했고, 에드워드 4세는 그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프랑수아는 헨리를 프랑스와의 분쟁에서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는 데 유용한 협상 도구로 여겼고, 따라서 튜더 가문을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다. 그는 재스퍼 튜더, 헨리 튜더, 그리고 그들의 망명 랭커스터 왕가 일행을 사르조의 쉬시니오 성에 수용했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렀다. 프랑수아는 그곳에서 망명한 이 잉글랜드인들을 플랜태저넷 왕가가 그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하는 모든 요구에 맞서 관대하게 지원했다.
1483년 10월, 헨리 튜더는 브르타뉴에서 잉글랜드에 대한 침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프랑수아는 4만 금화, 1만 5천 명의 병사, 그리고 수송선단을 제공하여 이 침략을 지원했다. 헨리의 15척의 용선단은 폭풍으로 흩어졌고, 그의 배는 다른 배 한 척과 함께 잉글랜드 해안에 도착했다. 헨리는 해안에 있는 병사들이 새로운 요크 왕가의 국왕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의 병사임을 깨닫고 침략을 포기하고 브르타뉴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헨리의 잉글랜드 내 주요 공모자였던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483년 11월 2일에 처형되었는데, 이는 헨리의 배가 잉글랜드에 상륙하기 훨씬 전이었다. 리처드 3세에 대한 헨리의 음모가 드러났고, 버킹엄 공작이나 헨리 튜더가 없었기에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다.
실패한 봉기의 생존자들은 브르타뉴로 도망쳐 헨리 튜더의 왕위 계승 주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483년 크리스마스 날 렌 대성당에서 헨리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요크 왕가와 랭커스터 왕가를 통합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헨리의 두드러진 위상은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요크 왕가의 국왕은 랭커스터 왕가의 젊은이를 넘겨달라고 프랑수아 2세에게 여러 번 제안했다. 프랑수아는 국왕으로부터 더 나은 조건을 받을 가능성을 기대하며 거절했다. 1484년 중반, 프랑수아는 질병으로 인해 무력해졌고, 회복하는 동안 그의 재무관 피에르 랑데가 정부를 장악했다. 랑데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와 헨리와 그의 삼촌 재스퍼를 잉글랜드로 돌려보내는 대신 프랑스에 대한 위협적인 공격으로부터 브르타뉴를 방어하기 위해 3,000명의 잉글랜드 궁수를 약속하는 합의를 맺었다. 플랑드르의 주교인 존 모턴은 이 계획을 알고 튜더 가문에게 때맞춰 경고했다. 튜더 가문은 랑데의 병사들보다 몇 시간 먼저 가까운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탈출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샤를 8세의 궁정에 받아들여져 머물 수 있었고 자원을 제공받았다. 얼마 후, 프랑수아가 회복되자 그는 쉬시니오 성과 그 주변에 남아 있던 400명의 랭커스터 왕가 사람들에게 프랑스로의 안전 통행을 제공했고 심지어 그들의 경비를 지불했다. 프랑스에게 튜더 가문은 리처드 3세가 브르타뉴를 획득하려는 프랑스의 계획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유용한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랭커스터 왕가의 손실은 프랑수아 2세의 이익에 심각하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2. 2. 2. 명목상 리치몬드 백작
1136년경 잉글랜드 국왕 스티븐은 브르타뉴의 팡티에브르의 앨런을 초대 리치몬드 백작으로 임명했다. 앨런 이후, 작위와 영지는 보통 브르타뉴 공작에게 수여되었고, 몇 번의 공위 기간을 거친 후, 장 5세의 통치 기간인 1399년에 끝이났다. 장 5세 이후, 잉글랜드의 왕은 브르타뉴 공작보다 에드먼드 튜더 같은 다른 귀족들에게 이 작위를 수여했다. 그럼에도 장 6세부터 프랑수아 2세에 이르기까지 브르타뉴의 공작들은 명목뿐인 리치몬드 백작 작위를 사용했다. 프랑수아는 백국에 대한 그의 소유권을 유지하고 헨리 튜더가 영지를 취하길 바랬기에 가능했다.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는데 성공한 헨리 7세는 백국을 통합하고 왕실의 소유로 만들었다.2. 3. 프랑스 왕실과의 관계
1458년, 프랑수아 2세는 숙부 아르튀르 3세가 적자 없이 사망하자 브르타뉴 공작위를 계승했다. 아버지 리샤르는 프랑수아 2세가 어렸을 때인 1438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사촌인 프랑수아 1세, 피에르 2세 형제, 숙부 아르튀르 3세가 차례로 공작위를 계승했지만 모두 남자 후계자가 없어 방계인 프랑수아 2세에게 돌아갔다.[2][3]프랑수아 2세는 제후 간섭과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던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대립했다. 1465년 4월, 루이 11세의 동생 베리 공작샤를 및 샤로레 백작 샤를 (후의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 공익 동맹을 결성했으나, 루이 11세의 외교로 동맹이 와해되어 같은 해 12월 화해했다. 1467년 다시 베리 공작, 부르고뉴 공작과 모의하여 서쪽에서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루이 11세의 반격으로 1468년 9월 다시 화해해야 했다. 이 두 번의 반란으로 프랑수아 2세는 얻은 것이 없었다.[4]
1468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4세와 동맹을 맺고 베리 공작, 부르고뉴 공작과 연합하여 1471년 세 번째 반란을 일으켰다. 상비군을 보유한 루이 11세가 우위를 점했고, 1472년 5월 베리 공작이 급사하면서 반란군의 한 축이 무너졌다. 결국 10월에 루이 11세와 화해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전투를 계속했지만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고, 에드워드 4세도 1475년 루이 11세와 을 체결하여 반란은 진압되고 프랑스 왕권은 강화되었다.[5][6]
한편, 프랑수아 2세는 장미 전쟁으로 잉글랜드에서 망명 온 헨리 튜더(후의 헨리 7세)와 숙부 재스퍼 튜더를 1471년부터 반에 숨겨주었다. 1476년 에드워드 4세가 이들의 인도를 요구하자 일시 수락하는 척했지만 철회했다. 반은 헨리 튜더를 중심으로 한 반 요크 왕조 거점이 되었으나, 1484년 프랑수아 2세가 정신 장애를 겪게 되자 헨리 튜더는 프랑스로 이동했다. 1485년 잉글랜드에 상륙,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격파한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즉위하여 튜더 왕조를 열었다.[7]
1483년 루이 11세 사후, 아들 샤를 8세가 즉위하자 섭정인 누이 안 드 보제와 부르봉 공작피에르 2세 부부가 루이 11세의 정책을 계승, 제후 간섭을 시도하며 브르타뉴 귀족들과 접촉했다. 이들은 아들이 없는 프랑수아 2세 사후 샤를 8세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삼겠다는 지지를 얻어냈다. 1486년 프랑수아 2세는 이에 반발, 둘째 아내에게서 얻은 장녀 안을 후계자로 정하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 12세(후의 프랑스 왕) 등과 결탁하여 왕가에 네 번째 반란을 일으켰다.[8]
이라 불리는 이 반란은 2년간 지속되었으나, 1488년 7월 28일 생토뱅 뒤 코르미에 전투에서 브르타뉴군이 왕군에게 패배하고 브르타뉴도 제압당했다. 8월 20일 프랑수아 2세는 샤를 8세의 허락 없이는 딸들을 결혼시킬 수 없다는 베르제 조약을 수용해야 했다. 이후 프랑수아 2세는 승마에 몰두하다 9월 9일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향년 55세) 당시 11세였던 안이 공작위를 계승했지만, 1491년 샤를 8세, 이후 루이 12세와 결혼하면서 브르타뉴는 사실상 프랑스 왕가에 흡수되었다.[9]
2. 3. 1. 루이 11세
루이 11세는 군사 전술보다는 외교에 능숙한 인물로, எதிரிகளை 속이는 데 달인이었다. 그의 별명은 "전세계의 거미"였는데, 이는 그의 끊임없는 외교 술책에서 비롯되었다.[4]프랑수아 2세는 1465년 루이 11세의 중앙 집권화 정책에 반발하여 결성된 공익 동맹의 일원이었다.[4] 이 동맹에는 용담공 샤를과 베리 공작 샤를 등이 참여했다.[4]
1467년, 용담공 샤를이 부르고뉴 공국을 계승하면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왕국을 세우려 했으나,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루이 11세는 강력한 적수를 잃게 되었다.[5] 공익 동맹은 사실상 패배했지만, 일부는 1485년 광기 전쟁에서 다시 동맹을 맺었다.[5]
1483년 루이 11세가 사망하고 그의 딸 안 드 프랑스가 샤를 8세의 섭정을 맡게 되면서, 프랑수아 2세와 브르타뉴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8]
2. 3. 2. 안 드 프랑스의 섭정
프랑수아 2세는 샤를 8세의 미성년 시절에 공국의 자치성을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었다. 그는 안 드 프랑스의 섭정 정치에 맞서 오를레앙 공작 루이 (미래의 루이 12세)와 앙굴렘 백작 샤를과 함께 동맹을 조직했다.[8] 안은 그녀의 아버지 루이 11세가 브르타뉴에게 했던 같은 정책을 추구하려 하였다.하지만 프랑스와의 관계에 집중을 둔 프랑수아 2세는 그의 영지를 등한시 하였다. 그의 부패와 억압적인 수상인 기욤 쇼뱅은 1477년에 재무관 피에르 랑드에 의해 타도 당하였다. 브르타뉴 귀족의 대부분들이 안과 샤를에게 매수를 당하여 브르타뉴를 예속화시키려는 그들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랑드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1485년에 그를 처형한다.
1486년, 브르타뉴의 유력자들이 프랑수아 2세의 딸 안의 계승을 인정하였분더러, 프랑스에게서 공국의 자치를 보장받게 되었다. 샤토브리앙 조약이 1487년에 프랑스와 체결되었고 브르타뉴의 자치가 재확인되었다. 하지만 샤토브리앙 조약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계속해서 공국을 압박하였다.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의 지도하에서, 프랑스 왕실군은 브르타뉴로 향하는걸 통제하는 반, 푸제르에서 꼼짝도 못 하고 말았다.
2. 3. 3. 광기 전쟁 (La Guerre Folle)
프랑수아는 프랑스에 대항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동맹을 맺었다. 반란 영주인 알랭 다르브레는 프랑수아의 딸 안과 결혼할 것이라고 믿고 스페인 국왕이 제공한 5,000명의 군대로 브르타뉴 군대를 증강했다.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 역시 1,500명의 병력을 보냈고, 에드워드 우드빌, 로드 스케일스는 영국에서 궁수 부대를 데려왔다. 그러나 프랑수아는 1488년 7월 28일 생토뱅 뒤 코르미에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전투는 또한 에드워드 우드빌이 사망하고 오를레앙 공 루이와 장 4세 드 샬롱-아를레가 포로로 잡히면서, 전쟁을 벌이던 귀족 지도자들의 권력 기반을 파괴했다. 알랭 다르브레와 장 4세 드 리외는 탈출에 성공하여 분쟁을 지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칠 뒤인 8월 10일, 프랑수아는 베르제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 조약의 조건에 따라 공작은 자신과 자신의 공국을 프랑스 국왕의 봉신으로 복종하고, 브르타뉴에서 외국 군주와 군대를 추방해야 했다. 또한, 그는 자녀를 자신이 선택한 구혼자와 결혼시키는 능력을 제한받았으며, 생말로, 푸제르, 디낭, 그리고 생토뱅의 영토를 국왕에게 양도하여 남성 후계자가 없는 경우 국왕이 계승을 결정하도록 보장해야 했다. 프랑수아는 몇 달 후 여유로운 승마 중에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그는 딸 안 드 브르타뉴만 남겼고, 따라서 조약은 그의 후계자인 그녀가 샤를 8세와 결혼하도록 강요하는 데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루이 12세와 결혼하도록 했다. 프랑스의 승리와 조약 서명에도 불구하고, 광기 전쟁(La Guerre Folle)은 1491년 12월, 안이 샤를 8세와 결혼할 때까지 프랑수아의 사망 이후 3년 더 지속되었다.
1483년에 루이 11세가 사망하고 아들 샤를 8세가 즉위하자, 섭정인 누이 안 드 보제와 부르봉 공작피에르 2세 부부가 루이 11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제후에 대한 간섭을 꾀했고, 브르타뉴 귀족들과 접촉하여, 아들이 없는 프랑수아 2세가 죽은 후 샤를 8세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삼겠다는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반발한 프랑수아 2세는 1486년에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장녀 안을 후계자로 정하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 12세 (후의 프랑스 왕 루이 12세) 등과 결탁하여 왕가에 네 번째 반란을 일으켰다.
이라고 불리는 반란은 2년간 지속되었지만, 1488년 7월 28일의 에서 브르타뉴군은 왕군에게 패배했고, 브르타뉴도 제압되어, 8월 20일에 프랑수아 2세는 샤를 8세의 허락 없이는 딸들을 결혼시킬 수 없다는 베르제 조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전후 프랑수아 2세는 승마에 열중했지만, 9월 9일에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향년 55세였다. 당시 11세였던 안이 브르타뉴 공작위를 계승했지만, 1491년에 샤를 8세, 후에 루이 12세 두 명의 프랑스 왕의 왕비가 됨으로써, 브르타뉴는 사실상 왕가가 손에 넣게 되었다.
3. 결혼과 자녀
프랑수아 2세는 두 차례 혼인했다.
첫 번째 부인은 사촌이자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 공작의 장녀인 마르그리트 드 브르타뉴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아들 몽포르 백작 장(1463년 6월 29일 ~ 1463년 8월 25일)이 태어났으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나바라의 공주 마르그리트 드 푸아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두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 안 드 브르타뉴 (1477년-1514년): 프랑수아 2세의 유일한 합법적 상속녀였다.
- 이자보(1478년–1490년): 1481년 장 달브레와 약혼하였으나,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렌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프랑수아 2세는 샤를 7세의 옛 정부인 앙투아네트 드 메넬레와의 사이에서 몇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그 중에는 마슈쿨 영주 프랑수아 다보구르(1462년 - 1510년) 등이 있었다.
4. 유산
브르타뉴 귀족들은 프랑수아 2세가 헌신적으로 지키려 했던 여공작 안과 공국의 자치를 수호했다.[1] 1489년 귀족들은 잉글랜드와 레동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의 브르타뉴 합병을 막으려 했다.[1] 그러나 1491년 샤를 7세가 브르타뉴를 침략하고 안과 강제로 결혼하면서, 공국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했다.[1] 1492년 헨리 7세는 에타플 조약을 통해 퍼킨 워백에 대한 지원 중단과 배상금 지불을 대가로 브르타뉴 자치에 대한 잉글랜드의 방어를 철회했다.[1] 공국은 프랑스 왕실에 합병되는 과정을 겪으며 자치를 잃었고, 강력한 동맹 역시 무력화되었다.[1] 하지만 안은 왕비로서 브르타뉴의 자치와 프랑수아 2세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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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ritt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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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エチュヴェリ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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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エチュヴェリ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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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일,佐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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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チュヴェリ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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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일,佐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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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일,佐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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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佐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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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佐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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