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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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F. 케네디는 1917년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에서 태어난 미국의 정치인으로,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거쳐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재임 기간 동안 쿠바 미사일 위기, 베를린 장벽 건설 등 냉전 시대의 주요 사건들을 겪었으며, 국내적으로는 시민권 운동과 우주 개발 경쟁을 추진했다. 1963년 댈러스에서 암살되어 그의 업적과 유산은 현재까지도 재평가되고 있다.

존 F. 케네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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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백악관 집무실 초상화
이름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로마자 표기John Fitzgerald Kennedy
별칭JFK, 잭
출생일1917년 5월 29일
출생지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
사망일1963년 11월 22일
사망 장소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사망 원인암살
안장 장소알링턴 국립묘지
정당민주당
배우자재클린 부비에 (1953년 9월 12일 결혼)
자녀캐롤라인, 존 주니어, 패트릭 포함 4명
부모조지프 P. 케네디 시니어
로즈 피츠제럴드
친척케네디 가문
부비에 가문 (결혼을 통해)
학력하버드 대학교 (문학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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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종교로마 가톨릭
음성 파일평화 봉사단 설립에 관한 케네디의 연설 (1961년 3월 1일 녹음)
군 복무
소속미국 해군
복무 기간1941년–1945년
계급중위
부대모터 어뢰정 대대 2
PT-109
PT-59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솔로몬 제도 전역
훈장해군 및 해병대 훈장
퍼플 하트 훈장
미국 방위 복무 훈장
미국 전역 훈장
아시아-태평양 전역 훈장 (종군 별 3개 포함)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훈장
정치 경력
직위미국 대통령
재임 기간1961년 1월 20일 – 1963년 11월 22일
이전 대통령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다음 대통령린든 B. 존슨
부통령린든 B. 존슨
상원 의원
소속 지역매사추세츠주
재임 기간1953년 1월 3일 – 1960년 12월 22일
이전 상원 의원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
다음 상원 의원벤저민 A. 스미스 2세
하원 의원
선거구제11선거구
소속 지역매사추세츠주
재임 기간1947년 1월 3일 – 1953년 1월 3일
이전 하원 의원제임스 마이클 컬리
다음 하원 의원팁 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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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해군 중위 시절 PT 109호에서
해군 중위 시절 PT 109호에서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에서 태어난 존 F. 케네디는 아일랜드 이민자 후손으로 가톨릭 집안 출신이다. 개신교가 주류였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가톨릭 집안은 직업 선택 등에 차별을 받았으나, 아버지 조지프 P. 케네디는 아들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랐다. 케네디는 1940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쿰 라우데 급으로 졸업한 뒤 태평양 전쟁해군에 복무했다.

케네디와 닉슨 간의 토론
케네디와 닉슨 간의 토론

1950년대를 전후하여 민주당 정치인으로 두각을 드러냈고,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유세 도중 그는 미국이 소련보다 핵무기 개발 경쟁에서 뒤처져 '미사일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하이오주 선거인단을 장악하지 못하고도 대통령에 당선되어 오하이오 징크스를 깬 유일한 대통령이다.

2.1. 가문 배경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에서 조셉 P. 케네디 시니어와 로즈 케네디의 아들로 태어났다. 케네디 집안은 아일랜드인의 후손으로 19세기 후반 대기근으로 말미암아 미국 매사추세츠 주로 이주한 가톨릭 집안이다.

케네디의 증조부 패트릭 케네디는 1848년 당시 영국령이었던 아일랜드의 차별과 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1849년 미국에 도착하여 보스턴에 정착한 그는 브리짓 머피와 사이에 5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셋째 아들은 콜레라로 요절했다. 아버지 패트릭 케네디는 1858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막내 아들이 존 F. 케네디의 할아버지인 패트릭 J. 케네디로, 보스턴에서 항만 노동자로 시작하여 실업가가 되었고, 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거쳐 보스턴의 유력한 민주당원이 되었다. 그는 메리 오거스타 히키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은 요절했고, 장남이 존 F.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P. 케네디 시니어이다.

그의 외조부이자 동명이인인 존 F. 피츠제럴드는 미국 하원의원이자 보스턴 시장을 두 번 역임했다.

케네디의 형제자매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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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출생사망비고
조지프 P. 케네디 주니어1915년1944년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중 전사.
존 F. 케네디1917년1963년제35대 미국 대통령. 암살됨.
로즈메리 케네디1918년2005년로보토미 수술 실패 후 식물인간으로 생을 마감.
캐슬린 케번디시1920년1948년데번셔 공작 가문과 결혼, 남편 전사 후 비행기 사고로 사망.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1921년2009년스페셜 올림픽 조직.
패트리샤 케네디 로퍼드1924년2006년피터 로퍼드와 결혼 후 이혼.
로버트 F. 케네디1925년1968년암살됨.
진 케네디 스미스1928년2020년"베리 스페셜 아츠" 설립.
테드 케네디1932년2009년채퍼퀴딕 사건 연루, 상원의원 역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는 존 F. 케네디의 부인이며, 캐롤라인 케네디와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자녀이다. 잭 슐로스버그는 존 F. 케네디의 유일한 손자이다.

2.2. 어린 시절과 교육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 빌즈가 83번지에서 태어났다. 케네디 집안은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미국 매사추세츠 주로 이주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이다. 그의 외조부 존 F. 피츠제럴드는 미국 하원의원이자 보스턴 시장을 두 번 역임했다.

케네디의 출생지, 매사추세츠주 브룩라인
케네디의 출생지, 매사추세츠주 브룩라인

케네디의 부모는 사업가이자 정치인인 조셉 P. 케네디 시니어와 자선가이자 사교계 명사인 로즈 케네디였다. 케네디는 형인 조셉 P. 케네디 주니어와 여동생 7명(로즈메리, 캐슬린, 유니스, 패트리샤, 로버트, 진, 테드)을 두었다.

케네디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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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출생사망
조셉 P. 케네디 주니어1915년1944년
존 F. 케네디1917년1963년
로즈마리 케네디1918년2005년
캐슬린 케네디1920년1948년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1921년2009년
패트리샤 케네디 로포드1924년2006년
로버트 F. 케네디1925년1968년
진 케네디 스미스1928년2020년
테드 케네디1932년2009년


아버지 조셉 시니어는 자녀들에게 야망을 갖도록 격려하고, 식탁에서 정치적 논의를 강조했으며, 높은 수준의 학업 성취를 요구했다. 케네디는 10세 때까지 보스턴 브루클라인에서 살았지만, 어릴 때부터 여러 질병에 걸려 허약했다. 3세 때 홍역에 걸렸고, 그 외에도 수두와 볼거리에 걸렸으며, 원인 불명의 “지속적인 감기 증상”으로 항상 온몸이 열이 나고 몸살을 느꼈다. 선천적으로 척추에 장애가 있어 부상을 입기 쉬웠고, 잦은 격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케네디는 브루클라인에서 에드워드 디보션 스쿨 유치부를 거쳐 공립 초등학교에 진학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사립 덱스터 스쿨로 전학했다. 1927년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족은 뉴욕 교외의 브롱크스 지역 리버데일로 이사했고, 존은 리버데일 컨트리 스쿨로 전학했다. 1929년에는 뉴욕시 교외 웨스트체스터 카운티 브롱크스빌로 이사하여 저택을 지었다.

1930년, 13세 때 코네티컷주 뉴밀포드의 가톨릭 기숙학교인 캔터베리 스쿨에 입학했지만, 홍역, 발열, 맹장염 등 여러 건강 문제로 이듬해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조셉은 존을 형 조셉 P. 케네디 주니어가 다니던 초트 학교로 전학시켰다. 형은 학교에 잘 적응했지만, 존은 반항적인 학생으로 유명해져 “모커(Mocker, 교칙 위반자, 사람을 놀리는 사람)”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퇴학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졸업 전에는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소화기 장애(궤양성 대장염으로 여겨진다.) 진단을 받고 스테로이드를 투여받았다. 존은 평생 척추 통증에 시달렸다.
1931년경 하이애니스 포트(Hyannis Port, Massachusetts)의 케네디 가족, 왼쪽 상단의 흰 셔츠를 입은 JFK
1931년경 하이애니스 포트(Hyannis Port, Massachusetts)의 케네디 가족, 왼쪽 상단의 흰 셔츠를 입은 JFK


1935년 초트 학교를 졸업한 존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해럴드 라스키 교수 밑에서 공부했지만, 곧 건강이 악화되어 “황달” 진단을 받고 귀국했다. 그 후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여기서도 건강 문제로 백혈병 진단을 받고 6주 만에 그만두었다.

성적이 뛰어나고 운동도 만능인 형 조셉 주니어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엄격한 아버지 조셉에 대한 죄책감이 존을 괴롭혔다. 하지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형에게 계속 도전함으로써 어려움에서 도망치지 않고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정신력과 인내심을 기르게 되었다.

1936년 9월,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1940년 하버드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쿰 라우데 급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케네디가 상급생이었을 때, 그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정치 철학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3학년 때 학장 명단에 올랐다. 1940년, 케네디는 뮌헨 협정 당시 영국의 협상에 대한 논문 "뮌헨의 유화 정책(Appeasement in Munich)"을 완성했다. 이 논문은 7월 24일 왜 영국은 잠들었는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3. 해군 복무

해군 중위 시절 PT 109호에서
해군 중위 시절 PT 109호에서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에서 태어난 존 F. 케네디는 1940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뒤 태평양 전쟁 중에 해군에 복무했다.

1940년 봄, 케네디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와 해군 시험을 치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불합격했다. 아버지 조셉은 주재무관이었던 앨런 굿리치 커크 해군 대령에게 부탁하여 해군 장교 양성 과정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케네디는 1941년 9월 25일 미국 해군 장교로 임관되었지만, 아버지의 배려로 전장에 나가지 않고 워싱턴 D.C.의 미국 해군 정보국에 배속되었다. 1942년 1월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 있는 제6 해군 관구 본부의 ONI 현장 사무소에 배속되었다.

중위(Lieutenant (junior grade)) 케네디(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와 그의 PT-109호 승무원들, 1943년
중위(Lieutenant (junior grade)) 케네디(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와 그의 PT-109호 승무원들, 1943년

1943년, 자신의 해군 순찰정인 PT-109호에 탑승한 케네디
1943년, 자신의 해군 순찰정인 PT-109호에 탑승한 케네디

그 후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아버지 조셉은 1942년 7월 해군 장관 제임스 포레스터에게 부탁하여 아들을 해상 근무로 전근시켰다. 케네디는 시카고의 해군 예비장교 훈련학교와 로드아일랜드주 멜빌의 모터 어뢰정 전대 훈련센터에서 6개월간의 훈련을 마쳤다.

1943년 4월, 케네디는 제2모터어뢰전대에 배속되었고, 4월 24일에는 툴라기 섬, 솔로몬 제도에 주둔하고 있던 PT-109호의 지휘를 맡았다. 8월 1일에서 8월 2일 밤 사이, 뉴조지아 전투 지원 임무 중, PT-109호는 아마기리''호 구축함에 측면에서 들이받혀 두 동강이 났고, PT-109호 승무원 2명이 사망했다.

항복을 피한 나머지 승무원들은 8월 2일 PT-109호 잔해에서 남서쪽으로 5.6km 떨어진 플럼 푸딩 섬으로 헤엄쳐 갔다. 케네디는 이빨로 구명조끼 끈을 물고 심하게 화상을 입은 승무원 한 명을 섬까지 끌고 갔다. 거기서 케네디와 그의 부하인 조지 로스 소위는 산호섬을 헤쳐 나가며 도움을 찾았다. 영어를 하는 원주민과 카누를 만났을 때, 케네디는 코코넛 껍질에 자신의 위치를 새겨 구조 요청을 했다. 코코넛 메시지가 전달된 지 7일 후, PT-109호 승무원들은 구조되었다.

PT-109호 구조는 즉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케네디는 용기와 리더십으로 해군 및 해병대 훈장을 수여받았고, 사고 당시 입은 부상으로 퍼플 하트 자격을 얻었다.

한 달간의 회복 후 케네디는 PT-59호를 지휘했다. 11월 2일, 케네디의 PT-59호는 다른 두 척의 PT정과 함께 40~50명의 해병대원을 구출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11월 18일, 의사의 지시에 따라 케네디는 지휘권에서 해임되었고 툴라기의 병원으로 보내졌다. 1943년 12월, 건강 악화로 케네디는 태평양 전선을 떠나 1944년 1월 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1945년 3월 1일, 케네디는 신체 장애로 해군 예비군에서 퇴역했고 중위 계급으로 명예 제대했다.

훗날 어떻게 전쟁 영웅이 되었냐는 질문에 케네디는 "쉬웠어요. 내 PT 보트를 반으로 잘랐으니까요."라고 농담했다.

2.4. 언론인 활동 (1945)

존 F. 케네디는 1945년에 언론인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그는 1941년에 미국 해군 장교로 임관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PT 보트(파트롤 어뢰정) 함장으로 복무했다.

3. 정치 경력

1960년 1월 2일, 케네디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젊은 나이와 경험 부족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와 뛰어난 연설은 그에게 많은 지지자를 확보해주었다. 케네디는 상원 원내대표 린든 존슨, 애들레이 스티븐슨 2세, 허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을 포함한 몇몇 잠재적인 경쟁자들과 맞섰다.

케네디는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유세를 펼쳤다. 그의 선거 운동 전략은 여러 경선에서 승리하여 대의원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정당 보스들에게 자신의 당선 가능성을 보여주고, 가톨릭 신자가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비판자들에게 증명하는 것이었다. 1960년 민주당 전국 대회로 이어지는 위스콘신과 서버지니아 경선에서 험프리 상원의원을 꺾고 승리하면서, 케네디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전당대회로 나아가는 동력을 얻었다.

케네디가 전당대회에 참가했을 때, 그는 가장 많은 대의원을 확보했지만, 지명을 확보할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다. 케네디의 출마는 그의 경험 부족을 우려했던 해리 S. 트루먼 전 대통령의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잘 조직된 선거 운동을 통해 1차 투표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대의원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후 케네디는 남부에서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린든 존슨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다.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면서 케네디는 잘 알려진 "신 프런티어" 연설을 했다.

가을 대선 운동이 시작될 무렵, 공화당 후보이자 현직 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여론 조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주요 쟁점으로는 경제를 다시 활성화하는 방법, 케네디의 가톨릭 신앙, 쿠바 혁명, 그리고 소련의 우주 및 미사일 프로그램이 미국의 프로그램을 능가했는지 여부가 포함되었다. 케네디는 자신의 가톨릭 신앙이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정교분리를 존중하고 가톨릭 관리들이 공공 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케네디와 닉슨 선거 운동 캠프는 텔레비전 토론에 동의했다. 첫 번째 토론에서 케네디는 텔레비전에 적합한 준비를 한 반면, 닉슨은 그렇지 못했다.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케네디가 더 매력적으로 보였고 승리했다고 믿었던 반면, 라디오 청취자들은 닉슨이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토론은 이제 미국 정치 역사의 이정표로 여겨지고 있으며,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케네디의 선거 운동은 첫 번째 토론 이후 탄력을 받았고, 그는 대부분의 여론 조사에서 닉슨을 근소하게 앞섰다. 선거일에 케네디는 20세기 가장 접전이었던 대통령 선거 중 하나에서 닉슨을 물리쳤다. 전국 득표수에서 케네디는 닉슨을 불과 0.2%포인트 차이로 앞섰고, 선거인단에서는 303표 대 219표를 얻었다. 43세의 케네디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금주법 시대에 마피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아버지 조지프 P. 케네디 시니어의 의뢰로, 샘 지안카나를 포함한 마피아와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3.1. 하원의원 (1947-1953)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존 F. 케네디의 하원의원 시절(1947-1953)에 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는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

3.2. 상원의원 (1953-1960)

케네디는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 1960년 1월 2일, 케네디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젊은 나이와 경험 부족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카리스마와 뛰어난 연설 능력은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케네디는 상원 원내대표 린든 존슨, 애들레이 스티븐슨 2세, 허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등 잠재적 경쟁자들과 맞서야 했다. 그는 광범위한 유세를 통해 지지를 확보했고, 여러 경선에서 승리하여 정당 보스들에게 자신의 당선 가능성을 입증했다. 특히 위스콘신과 서버지니아 경선에서 험프리 상원의원을 꺾고 승리하면서 1960년 민주당 전국 대회로 가는 동력을 얻었다.

1960년 민주당 전국 대회에서 케네디는 가장 많은 대의원을 확보했지만, 지명을 확정하기에는 부족했다. 해리 S. 트루먼 전 대통령은 케네디의 경험 부족을 우려하며 반대했지만, 케네디는 잘 조직된 선거 운동을 통해 1차 투표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얻는 데 성공했다.

케네디는 남부 지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린든 존슨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다. 그는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 연설에서 유명한 "신 프런티어" 연설을 통해 새로운 도전을 강조했다.

3.3. 1960년 대통령 선거

1960년 1월 2일, 케네디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출마를 선언했다. 린든 존슨, 애드레이 스티븐슨 2세, 허버트 험프리 등과 경선에서 맞붙어 위스콘신과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승리하며 1960년 민주당 전국 대회로 가는 동력을 얻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 포스터
1960년 대통령 선거 포스터


전당대회에서 케네디는 가장 많은 대의원을 확보했지만, 지명에는 부족했다. 해리 S. 트루먼 전 대통령은 케네디의 경험 부족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케네디는 잘 조직된 선거 운동으로 1차 투표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얻었다. 이후 남부에서 지지를 얻기 위해 린든 존슨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면서 신 프런티어 연설을 했다.

가을 대선 운동에서 공화당 후보이자 현직 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 여론 조사에서 앞섰다. 주요 쟁점은 경제, 케네디의 가톨릭 신앙, 쿠바 혁명, 소련과의 우주 및 미사일 경쟁이었다. 케네디는 정교분리를 존중하고 가톨릭의 공공 정책 결정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텔레비전 토론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텔레비전 토론


케네디와 닉슨은 텔레비전 토론을 했다. 첫 번째 토론에서 케네디는 세트 디자인과 카메라 배치에 대해 논의하고 파란색 정장을 입어 눈부심을 줄였다. 반면 닉슨은 회색 정장을 입어 배경과 조화를 이루었고, 스튜디오 조명으로 인해 땀을 흘려 지휘관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케네디가 승리했다고 믿었고, 라디오 청취자들은 닉슨이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텔레비전 토론은 미국 정치 역사에서 텔레비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 결과
1960년 대통령 선거 결과


케네디는 대부분의 여론 조사에서 닉슨을 근소하게 앞섰다. 선거일에 케네디는 닉슨을 0.2%포인트 차이로 앞섰고, 선거인단에서는 303표 대 219표로 승리했다. 43세의 케네디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케네디는 금주법 시대에 마피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아버지 조지프 P. 케네디 시니어의 의뢰로, 샘 지안카나를 포함한 마피아와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4. 대통령 재임 (1961-1963)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케네디는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과 접전 끝에 근소한 표 차이로 승리, 1961년 1월 20일에 제35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당시 43세로, 미국 역사상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 중 가장 젊었다. (취임 당시 42세였던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부통령 승계). 20세기에 태어난 첫 번째 대통령이자,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취임식
대통령 취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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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워렌 연방 대법원장의 입회하에 취임 선서식을 거행하며, “저, 존 F.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최선을 다해 미국 헌법을 지키고 수호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라고 선서했다.

취임 연설에서 케네디는 냉전으로 동서 대립이 심각한 시대에 자유를 수호하려는 결의를 분명히 했다. 또한 “인류의 공통의 적”인 폭정, 차별, 빈곤, 질병, 그리고 전쟁과의 싸움에 함께 참여하도록 세계 각국에 호소했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후 케네디는 곧바로 내각 구성에 착수했다.
워런 대법원장에게 선서하는 케네디 행정부 각료들 (1961년 1월 21일)
워런 대법원장에게 선서하는 케네디 행정부 각료들 (1961년 1월 21일)

1961년 케네디(오른쪽), 핀란드 대통령 우르호 케코넨(왼쪽)
1961년 케네디(오른쪽), 핀란드 대통령 우르호 케코넨(왼쪽)

국무장관으로 딘 러스크, 국방장관으로 로버트 맥나마라, 재무장관으로 C. 더글러스 딜런을 임명했다. 이 세 사람 중 딜런은 하버드 대학교 동문이자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차관이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케네디가 몰랐고, 전적으로 로버트 A. 러벳의 추천에 의존했다.

그 외에 하버드 대학교 교수 아서 슐레징거를 대통령 고문, 맥조지 번디를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경제학 교수 월트 로스토우를 차석 보좌관, 시카고 대학교 법학 교수 니콜라스 카첸백을 법무차관, 조지 볼을 경제 담당 국무차관, 윌리엄 번디를 동아시아 담당 국무차관에 임명했다.

농무장관에는 오빌 로슬롭 프리먼을 선택했다. 아버지 조지프로부터 강력히 권유받아 법무장관에 동생 로버트 케네디를 기용했고,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국제연합 대사에 임명했다.

딘 애치슨과 로버트 A. 러벳은 1962년 쿠바 위기 때 국가안보회의 집행위원회의 멤버로 선출되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1963년 두 사람은 자유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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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성명임기
대통령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1961년 - 1963년
부통령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1961년 - 1963년
국무장관딘 러스크 (Dean Rusk)1961년 - 1963년
재무장관C. 더글러스 딜런 (C. Douglas Dillon)1961년 - 1963년
국방장관로버트 맥나마라 (Robert McNamara)1961년 - 1963년
법무장관로버트 F. 케네디 (Robert F. Kennedy)1961년 - 1963년
우정장관J. 에드워드 데이 (J. Edward Day)1961년 - 1963년
존 그로노우스키 (John Gronouski)1963년
내무장관스튜어트 L. 우들 (Stewart L. Udall)1961년 - 1963년
농무장관오빌 L. 프리먼 (Orville L. Freeman)1961년 - 1963년
상무장관루터 H. 호지스 (Luther H. Hodges)1961년 - 1963년
노동장관아서 J. 골드버그 (Arthur J. Goldberg)1961년 - 1962년
W. 윌러드 윌츠 (W. Willard Wirtz)1962년 - 1963년
보건교육복지장관애브러햄 A. 리비코프 (Abraham A. Ribicoff)1961년 - 1962년
앤서니 J. 셀레브레즈 (Anthony J. Celebrezze)1962년 - 1963년
국가안보보좌관맥조지 번디 (McGeorge Bundy)1961년 - 1963년
CIA 국장앨런 덜레스 (Allen Dulles)1961년
존 맥코네 (John McCone)1961년 - 1963년


* 바이런 레이몬드 화이트(Byron Raymond White) - 1962년
* 아서 J. 골드버그(Arthur J. Goldberg) - 1962년

케네디의 재임 기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와 미소의 우주 개발 경쟁, 흑인 민권 운동의 고조 등 많은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지만, 특히 쿠바 미사일 위기 대응에 있어서는 "제3차 세계 대전"과 "미소 전면 핵전쟁"의 위기를 회피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1962년 케네디 대통령과 콩고 총리 시릴 아둘라(Cyrille Adoula)
1962년 케네디 대통령과 콩고 총리 시릴 아둘라(Cyrille Adoula)
]1960년부터 1963년 사이에 24개국이 탈식민화 과정에서 독립했다. 케네디는 "제3세계"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경제 원조를 확대하고 지식이 풍부한 대사들을 임명했다. 그의 행정부는 곡물 원조 프로그램(Food for Peace)과 평화봉사단(Peace Corps)을 설립하여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제공했다. 곡물 원조 프로그램은 미국 외교 정책의 중심 요소가 되었고, 많은 국가들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콩고 위기를 그의 대통령직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외교 정책 문제 중 하나로 간주했으며, 유엔 활동을 지원하여 카탕가의 분리 독립을 막았다. 1962년 10월 2일, 케네디는 콩고와 다른 지역에서 유엔 평화유지 작전 자금 조달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보장하기 위해 유엔 채권 발행 법안에 서명했다.

한편, 베트남 전쟁의 확대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4.1. 국내 정책

케네디 대통령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 연설에서 "뉴프런티어 정신"을 제창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국내 정책을 "뉴프런티어 정책"이라고 불렀다. 이 정책은 다음과 같은 7가지 주요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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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이 항목들을 구체화한 66개의 특별 교서를 통해 의회에 입법을 권고했다. 여기에는 공립학교 및 교원 급여 보조를 위한 교육에 대한 연방 정부 지출 확대, 주택 정책 촉진, 고령자 의료 확충, 도시 재건, 흑인 및 소수 민족의 지위 향상, 인종 차별 법안 폐지 등이 포함되었다. 1년 차에는 불황 대책, 최저 임금 인상, 미국 평화 봉사단 창설, 2년 차에는 통상 확대법을 성립시켰다.

1961년 4월, 의원들은 경제 불황 지역에 대한 원조에 찬성했고, 5월에는 시간당 임금을 1달러에서 1달러 25센트로 인상하는 데 찬성했다. 1962년 9월, 의회는 케네디의 무역 확장 결의서를 통과시켜 대통령에게 관세 삭감 권한을 부여, 유럽 경제 공동체 국가들과 자유 무역을 가능하게 했다.

케네디의 성공적인 프로그램 중 하나는 1961년 3월 행정 명령으로 시작된 미국 평화 봉사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개발도상국에 미국인들을 보내 생활 수준 향상을 도왔다.

그러나 의회는 내각 수준의 도시 문제부와 고령자 의료 계획을 거부하는 등 케네디는 입법상 패배를 겪기도 했다. 이 계획들은 린든 B. 존슨 대통령 시기에 통과되었다. 케네디의 농장 프로그램도 실패했다.

민권 운동에 강연하는 케네디
민권 운동에 강연하는 케네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동등한 권리 주장은 케네디 정권의 주요 국내 논점이었다. 1961년, "자유의 기수"라는 비폭력 단체가 흑백인들을 포함, 버스를 타고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들어갔다. 백인 폭동 발생 후, 로버트 케네디 법무 장관은 연방 보안관을 보내 질서 회복을 도왔다. 1962년, 제임스 메러디스는 미시시피 대학교에 최초로 등록된 흑인 학생이 되었다.

1963년, 인종적 항의와 데모가 미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5월 버밍햄 폭동 후, 케네디는 앨라배마 대학교 흑백 공동 입학을 위해 앨라배마 주군을 연방화했다. 9월에는 앨라배마 주 3개 도시 학교들의 공동 입학 보장을 위해 다시 주군을 연방화했다. 8월 28일, 20만 명이 워싱턴 D.C.에서 "자유의 행렬"을 결성, 흑인들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케네디는 인종 차별 없이 공공장소에 손님을 허락하는 입법을 의회에 요청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케네디는 1961년 3월 1일 대통령령 10924호에 서명하여 평화봉사단을 창설했다(같은 해 9월 22일 의회 승인). 개발도상국 지원 프로그램이었으나, "미국의 과도한 타국 개입 상징"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4.2. 대외 정책

케네디 대통령 재임 기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대로, 미국과 소련 간의 대립이 매우 심각했던 시기였다. 케네디는 쿠바에 대해 피그스 만 사건에서 미흡한 대응으로 큰 실패를 겪었다.

1961년 6월,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수상과의 정상회담에서 대등하게 맞섰으며, 이후 베를린 위기와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강경책과 온건책을 적절히 사용하여 사태를 해결했다. 혼란스러웠던 동남아시아의 라오스에는 무력 개입을 하지 않았고, 1962년 6월에는 3개 파벌 연립 정부 수립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베트남 문제에 있어서는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과의 갈등 속에서 1960년 이후 군사 원조를 대폭 늘리고, '군사 고문단'이라는 명목으로 미군 정규군을 증파했다. 이로 인해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진 후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결국에는 통제 불능 상태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5. 암살 (1963)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는 1964년 대통령 선거 운동을 위해 텍사스주를 방문했다. 댈러스에서 시내를 퍼레이드하던 중, 리 하비 오스월드에게 암살당했다. 향년 47세, 대통령 취임 후 불과 2년 10개월 만이었다.

케네디 부부는 댈러스 러브필드 공항에 도착하여, 대통령 전용차로 코넬리 주지사 부부와 함께 시내를 퍼레이드했다. 딜리 플라자에서 총격이 발생했고, 케네디는 목과 머리에 총상을 입고 파크랜드 기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 1시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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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선이 퍼레이드 경로. 노란색 글씨의 자프루더 위치의 거의 정면의 빨간 선에서 사격되었다.
빨간 선이 퍼레이드 경로. 노란색 글씨의 자프루더 위치의 거의 정면의 빨간 선에서 사격되었다.


암살 순간은 아브라함 자프루더가 촬영한 8mm 영상(자프루더 필름)에 기록되었다. 이 영상은 리 하비 오스월드 외 다른 저격수의 존재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건 직후, 얼 워런 대법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 위원회(워런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64년 9월, 워런 보고서가 발표되어 오스월드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지어졌으나,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다. 하원 암살 조사 위원회 보고서는 오스월드가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공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케네디 암살은 여러 음모론을 낳았다. CIA, 망명 쿠바인 그룹, 마피아, 쿠바 정권, 군산복합체 등이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암살범으로 지목된 오스월드는 혐의를 부인했으며, 이틀 후 잭 루비에게 사살되었다. 루비는 마피아와 관련이 있었으며, 4년 후 사망했다.

케네디 암살은 미국 역사상 어두운 사건 중 하나이다. 클레이 쇼 재판은 암살 관련 유일한 법정 사례였으나, 쇼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CIA가 워런 위원회 비판자들에게 압력을 가했고, 쇼가 CIA를 위해 일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5.1. 국장

화이트하우스를 떠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관
화이트하우스를 떠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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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의 국장은 암살 사건 3일 후인 1963년 11월 25일(월)에 거행되었으며, 전 국민이 애도했다. 이 국장에는 92개국에서 국가원수 및 정부 고위 관료 220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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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석자
프랑스대통령 드골, 외무장관 쿠브 드 뮈르빌
영국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 에든버러 공 필립, 수상 휴움, 노동당 당수 윌슨
서독수상 에르하르트, 서베를린 시장 브란트
일본수상 이케다 하야토, 외무대신 오히라 마사요시
한국대통령 박정희
소련제1부수상 미코얀
유엔사무총장 우탄트


국내에서는 전 대통령 트루먼, 전 대통령 아이젠하워, 전 부통령 닉슨, 뉴욕 주지사 록펠러, 상원의원 골드워터, 앨라배마 주지사 월리스, 마틴 루터 킹, 존 글렌 등이 참석했다.

자동차로 국회의사당에서 화이트하우스로 이동한 후, 모든 참석자들은 세인트 매슈 대성당까지 걸어갔다. 화이트하우스에서의 장례 행렬은 스코틀랜드 배관 악단이 아일랜드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해군이 선도하고, 두 명의 가톨릭 사제, 그 뒤를 이어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대포차에 실린 대통령의 관, 대통령기를 든 기수, 아무도 타지 않은 말, 그 뒤를 재클린, 로버트, 에드워드 세 사람이 선두로 걸었고, 그 뒤를 미국 정부 고위 인사(새 대통령 존슨도 포함됨), 그리고 각국 정상들이 약 2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 세인트 매슈 대성당에 도착했다. 교회에서 고별 미사가 거행되었고, 세인트 매슈 대성당 계단 아래에서 장례 행렬이 출발할 때, 당시 3세였던 케네디 대통령의 장남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눈앞에서 대포차에 실려 끌려가는 아버지의 관에 대해 거수 경례를 했다. 관은 매장을 위해 장례 행렬의 북소리와 함께 아링턴 국립묘지로 향했다. 묘지에서 매장식이 거행되었고, 세 대의 예포가 21발의 굉음을 울렸으며, 예복을 입은 병사들이 각각 세 발의 총성을 울리고, 육군 중사가 장례 나팔을 불었고, 그 슬픈 소리가 황혼의 아링턴 언덕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영원의 불꽃에 재클린, 로버트, 에드워드가 횃불로 점화했고, 관을 덮고 있던 국기가 재클린에게 건네지면서 장례식은 조용히 끝났다.

6. 유산

존 F. 케네디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가로 꼽힌다. 그의 취임 연설 중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오."라는 문구는 유명하다. 1963년 6월 26일 서베를린 방문 연설에서 케네디는 베를린 장벽공산주의 실패의 증거로 제시하며,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독일어)."라고 연설하여 서베를린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1961년 오스트리아 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회담했으나 베를린 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위기가 고조되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는 해상봉쇄를 통해 소련의 미사일 반입을 저지하고, 비밀 협상을 통해 터키의 미사일 제거에 합의하여 핵전쟁 위기를 극복했다.

케네디는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1950년대 초에는 조셉 매카시의 매카시즘에 협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54년 매카시 탄핵 결의안 투표에 기권하여 엘리너 루즈벨트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6.1. 사후 평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과 함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은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꼽힌다.

1963년 6월 26일 서베를린 방문 연설에서 케네디는 베를린 장벽공산주의 실패의 증거로 제시하며, "모든 자유인은 그들이 어디에 있건 베를린 시민이라 할 수 있으므로 저 또한 자유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독일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서베를린 연설 현장
서베를린 연설 현장


케네디 사후,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전 등 그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공산 정부(쿠바)를 유지하고 군비 확장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베트남전 역시 초기에는 철수 의지를 보였던 지도자로 평가받았으나, 비밀 해제된 자료에 따르면 정치적 목적으로 전쟁을 확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의 역사 기술이 '성공의 기록'에서 '미국도 잘못이 있고 결점이 있다, 그의 결점 역시 인정해야 한다.'라는 수정주의로 변화함에 따라, 케네디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케네디가 오벌 오피스에서 쿠바로의 공격 무기 반입 금지 선언에 서명하는 모습
케네디가 오벌 오피스에서 쿠바로의 공격 무기 반입 금지 선언에 서명하는 모습

케네디가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와 협의하는 모습
케네디가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와 협의하는 모습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제3차 세계 대전"과 "미소 전면 핵전쟁"의 위기를 회피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1961년 12월, 베네수엘라 대통령 로물로 베탕쿠르와 함께 진보를 위한 동맹을 홍보하는 케네디
1961년 12월, 베네수엘라 대통령 로물로 베탕쿠르와 함께 진보를 위한 동맹을 홍보하는 케네디

진보를 위한 동맹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나, 많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통령 선거에서의 부정 및 마피아와의 관계, 마릴린 먼로를 비롯한 여러 상대와의 백악관에서의 불륜, 피그스 만 침공과 베를린 장벽 건설에서의 우유부단한 태도, 라틴 아메리카 여러 국가에 대한 정치적 간섭 및 군사적 간섭,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확대와 에이전트 오렌지 살포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도 동시에 존재한다.

6.2. 케네디를 기념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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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3월에 발행된 50센트 동전에 케네디의 옆모습 초상화가 사용되었다. 이 동전은 같은 해 8월까지 9,870만 개나 주조되었지만 개인이 소장하게 되어 현재는 거의 유통되지 않는다.
* 키티호크급 항공모함의 4번함 존 F. 케네디(USS John F. Kennedy, CVA-67/CV-67)
* 뉴욕존 F. 케네디 국제공항(구 아이들와일드 국제공항)
* 플로리다주의 존 F. 케네디 우주센터
* 케네디가 졸업한 하버드 대학교의 행정학·정치학 대학원의 명칭은 미국 정치에 대한 케네디의 공헌을 기념하여 케네디 사후인 1966년에 "케네디 스쿨(John F. Kennedy School of Government)"로 개칭되었다.
* 워싱턴 D.C.존 F. 케네디 센터(The John F. Kennedy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 1971년 준공된 종합 문화 시설이다.
* 미국 육군특수부대 병사를 양성하는 기관인 존 F. 케네디 특수전 센터 및 학교
*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의 2번함 존 F. 케네디(USS John F. Kennedy, CVN-79)(2024년 취항 예정)
* 출신지 보스턴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1979년 개관). 매사추세츠 대학교 보스턴 캠퍼스 내에 있는 케네디를 기념하는 박물관이다. 인접하여 에드워드 M. 케네디 상원의원 연구소가 있다.

7. 가족 관계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로즈 케네디의 아들로, 1917년 5월 29일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에서 태어났다. 케네디 가문은 아일랜드인의 후손으로 19세기 후반 대기근으로 미국에 이주한 로마 가톨릭교회 집안이다.

케네디 형제. 좌로부터 법무 장관 로버트 F. 케네디, 연방 상원 에드워드 M. 케네디와 대통령 존 F. 케네디
케네디 형제. 좌로부터 법무 장관 로버트 F. 케네디, 연방 상원 에드워드 M. 케네디와 대통령 존 F. 케네디

케네디의 출생지, 매사추세츠주 브룩라인
케네디의 출생지, 매사추세츠주 브룩라인

1931년경 하이애니스 포트의 케네디 가족, 왼쪽 상단의 흰 셔츠를 입은 존 F. 케네디
1931년경 하이애니스 포트의 케네디 가족, 왼쪽 상단의 흰 셔츠를 입은 존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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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1888년 9월 6일 ~ 1969년 11월 18일)
* 어머니: 로즈 케네디 (1890년 7월 22일 ~ 1995년 1월 22일 - 보스턴 시장과 의원을 지낸 존 F. 피츠제럴드의 딸)
* 배우자: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1929년 7월 28일 ~ 1994년 5월 19일)
*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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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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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출생사망비고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주니어1915년 7월 25일1944년 8월 12일조지프의 장남, 미국 해군 대위,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사
로즈 마리 케네디1918년 9월 13일2005년 1월 7일조지프의 장녀, 정신지체와 뇌수술 실패로 수용시설에서 지냄
캐슬린 애그니스 케네디1920년 2월 20일1948년 5월 13일조지프의 차녀, 프랑스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
유니스 메리 케네디1921년 7월 10일2009년 8월 11일조지프의 삼녀, 스페셜 올림픽 창시자, 딸 마리아 O. 슈라이버가 영화 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결혼했으나 2017년 이혼
패트리샤 헬렌 케네디1924년 5월 6일2006년 9월 17일조지프의 사녀, 남편은 피터 로퍼드 (1966년 이혼)
로버트 프랜시스 케네디1925년 11월 20일1968년 6월 6일조지프의 삼남, 제64대 미국 법무 장관, 미국 상원의원 (뉴욕주 선출, 1965년 ~ 196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살 당함
진 앤 케네디 스미스1928년 2월 20일2020년 6월 17일조지프의 오녀, 클린턴 정부 시절 아일랜드 주재 미국 대사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1932년 2월 22일2009년 8월 25일조지프의 사남, 미국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선출 1962년 ~ 2009년), 아내는 변호사 빅토리아 레지 케네디

8. 기타

케네디는 흡연자였으며, 특히 쿠바산 시가를 즐겨 피웠다. 키는 185cm였다.

추수감사절 전날 백악관에서 칠면조를 "사면"하여 방사하는 행사는 케네디에게 보내진 "Good Eatin', Mr. President(맛있게 드세요, 대통령)"라는 메시지를 목에 건 칠면조를 케네디가 먹지 않은 것에서 유래했으며,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절인 1989년에 공식 행사로 자리 잡았다.

기네스북의 "가장 빠른 말씨의 사람" 항목에서 1961년 12월에 한 연설의 "1분간 327단어" 기록이 정치인 중 최고 속도로 인정받은 적이 있다.

1962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케네디의 생일 파티 후 케네디와 이야기하는 먼로
1962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케네디의 생일 파티 후 케네디와 이야기하는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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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케네디는 결혼 전은 물론, 결혼 후와 심지어 대통령 취임 후에도 여러 여성들과 불륜 관계를 지속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에는 여배우와 마피아의 애인, 부하의 아내(소위 “불륜”)까지 포함되어 있다.

상원의원 시절 의원 사무소의 접수원이었던 파멜라 타냐, 여배우 앤지 디킨슨, 여배우 진 카먼, 백악관의 워킹걸 프리스티아 위어와 질 카우엔, 메리 핀쇼 마이어, 그리고 독일 외교관의 아내 등이 그 대상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공개된 FBI 보고서에 따르면, 백악관을 감시하던 FBI는 케네디가 2년 10개월의 재임 기간 동안 백악관 내에서 친밀한 관계를 가진 여성을 최소 32명이나 목록에 올렸다.

백악관 비밀경호국(경호관)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케네디의 여성 관계가 초래할 경호상의 위험이었다. 보좌관 데이브 파워스는 여성들을 들일 때 필요한 보안 점검이나 신체 검사를 허용하지 않고 경호관 앞을 그냥 지나가게 했다. 경호관 중 한 명인 래리 뉴먼은 "우리는 대통령이 다음날 아침 살아 있을지 죽어 있을지 알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쿠바 정세로 인해 암살 시도 가능성이 경고되던 시기였다.

가장 유명한 여성은 1950년대 후반부터 여동생 패트리샤의 남편이자 할리우드 배우인 피터 로포드(Peter Lawford)의 소개로 만난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였다. 이들은 대통령 취임 후인 1962년 5월까지 불륜 관계를 유지했다.

1960년 2월, 대통령 예비 선거 전에는 시카고 마피아 "시카고 아웃핏"(Chicago Outfit) 보스 샘 지안카나(Sam Giancana)의 지시를 받은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로부터 시나트라와 지안카나의 애인이었던 주디스 엑스너(Judith Exner)(본명: 주디스 캠벨)를 소개받았다. 대통령 예비 선거 당시에도 먼로와 동시에 불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만났다. 백악관에서 캠벨과의 통화 기록은 70회, 둘만의 식사는 20회 이상이었다고 한다.

먼로와의 관계는 케네디가 마피아와 깊은 관계가 있는 시나트라를 통해 먼로를 알게 되었고, 지안카나 등 마피아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며, 마피아 단속을 강화하려던 케네디 정권에 대한 거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을 우려한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의 강력한 충고로 인해 종식되었다. 캠벨과의 관계 또한 곧 끝났다.

먼로는 관계가 끝난 직후인 1962년5월 19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Madison Square Garden)에서 열린 케네디의 45세 생일 파티에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여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불렀다.(해피 버스데이 미스터 프레지던트(Happy Birthday, Mr. President) 참조)

케네디와 먼로가 함께 찍힌 사진은 시크릿 서비스에 의해 회수되었기 때문에 이때 촬영된 사진이 현재까지 확인된 유일한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