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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야시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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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야실리스는 히타이트 왕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로, 하니갈바트 왕 샤티와자를 옹립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이리두, 하란, 와시슈칸니, 타이테를 정복했다. 샤티와자가 하니갈바트의 속주 군주가 된 후, 피야실리스는 아카드 이름 샤리쿠수를 받고 아슈타타와 카르케미시를 하사받아 유프라테스 서쪽의 미탄니 영토를 다스렸다. 그는 카데시를 탈환하고 아르자와 원정에서 무르실리 2세를 지원했으며, 무르실리 2세 재위 9년 전에 사망했다. 이후 그의 아들이 카르케미시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와 업적

피야시실리는 히타이트의 왕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로, 미탄니 정복과 히타이트 제국 확장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히타이트 군대를 이끌고 미탄니를 정복했으며,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히타이트의 지배력을 강화했다.[1]

피야시실리는 샤티와자와 함께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미탄니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했다. 수필룰리우마 1세는 피야시실리에게 샤리쿠수라는 이름을 주고, 카르케미시를 포함한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이집트가 공격한 카데시를 탈환한 후에는 그곳의 총독으로도 임명했다.

피야시실리는 아르자와 원정에서 무르실리 2세를 도왔으며, 무르실리 2세 재위 9년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카데시 등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곧 진압되었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1]

2. 1. 초기 생애와 미탄니 정복

수필룰리우마 1세는 하니갈바트의 투슈라타 왕의 아들 샤티와자와 조약을 체결하고 자신의 딸 중 한 명과 결혼시켰다. 피야시실리스는 히타이트 군대를 이끌고 샤티와자를 하니갈바트의 왕으로 세웠다.[1] 히타이트 문헌에 따르면 피야시실리스와 샤티와자는 유프라테스강카르케미시에서 건너 이리두로 행군하였다. 이리두와 하란을 함락시킨 후, 와시슈칸니를 거쳐 수도 타이테도 정복하였다.[1]

샤티와자가 하니갈바트의 속주 군주가 된 후, 수필룰리우마는 피야시실리에게 아카드 이름 샤리쿠수라는 이름을 주고 아슈타타 (에칼테, 아후나, 테르카 포함)와 카르케미시의 영토를 주었다.[1] 이 지역들은 이전 미탄니에 속해 있었다. 수필룰리우마 1세는 "카르케미쉬, 무르무릭, 시프리, 마주와티, 슈룬 땅의 모든 도시들 - 이 요새 도시들을 내 아들에게 주었다."라고 하였다.[1] 사실상 유프라테스 서쪽의 하니갈바트의 모든 영토는 히타이트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고, 피야시실리가 통치했다.

이집트가 카데시를 공격하자 수필룰리우마는 도시를 포위하고 탈환하여 그곳도 피야시실리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샤리쿠수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피야시실리는 기원전 1320년경 아르자와 원정에서 무르실리 2세를 지원했다. 그 후 피야시실리는 카르케미시로 돌아왔다.

2. 2. 히타이트 속주 총독

수필룰리우마 1세가 샤티와자를 하니갈바트의 봉신 왕으로 임명한 후, 피야시실리에게 샤리쿠수라는 아카드식 이름을 주고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이전 미탄니 영토 전체를 다스리게 했다.[1] 여기에는 아슈타타 영토(도시 에칼테, 아후나, 테르카 포함)와 카르케미시가 포함되었다.[1]

수필룰리우마 1세이집트가 공격했던 카데시를 탈환한 후, 피야시실리를 그곳의 총독으로도 임명하였다. 피야시실리는 샤리쿠수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카르케미시로 돌아와 통치하였다.

피야시실리는 무르실리 2세 재위 9년 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카데시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피야시실리의 아들이 무르실리 2세에 의해 카데시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2. 3. 아르자와 원정과 말년

피야실리스는 기원전 1320년경 아르자와 원정에서 무르실리 2세를 지원하고[1] 카르케미시로 돌아왔다.

피야실리스는 병에 걸려 무르실리 2세 재위 9년 전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카데시와 누하세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피야실리의 아들이 무르실리 2세에 의해 카르케미시의 왕으로 임명되었다.[1]

3. 히타이트 제국에 미친 영향

피야시실리스는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로, 히타이트의 군사적, 정치적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히타이트 군대를 이끌고 미탄니를 정복하고, 샤티와자를 하니갈바트의 왕으로 세우는 데 기여했다.[1] 이 과정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이리두, 하란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수필룰리우마 1세는 피야시실리에게 '''샤리쿠수'''라는 아카드 이름을 주고 아슈타타와 카르케미시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1] 이후 피야시실리는 이집트로부터 카데시(킨자)를 탈환하는 등 히타이트 제국의 동부 국경을 안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아르자와 원정에서 무르실리 2세를 지원하기도 했다.

3. 1. 동부 국경 안정화

수필룰리우마 1세가 하니갈바트의 투슈라타 왕의 아들 샤티와자와 조약을 체결하고 그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킨 후, 피야시실리스는 히타이트 군대를 이끌고 샤티와자를 하니갈바트의 왕으로 세웠다.[1] 히타이트 문헌에 따르면, 피야시실리스와 샤티와자는 유프라테스강카르케미시에서 건너 이리두로 행군하였다. 이리두와 하란을 점령한 후, 그들은 와시슈칸니로 진군하여 수도 타이테도 정복하였다.

샤티와자가 하니갈바트의 속주 군주가 된 후, 수필룰리우마 1세는 피야시실리에게 아카드 이름 '''샤리쿠수'''를 주고 아슈타타와 카르케미시의 영토를 주었다.[1] 유프라테스 서쪽의 이전 미탄니 영토 전체가 피야시실리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집트가 카데시(킨자)를 공격하자, 수필룰리우마 1세는 도시를 포위하여 탈환하고 그곳도 피야시실리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샤리쿠수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면서, 피야시실리는 기원전 1320년경 아르자와 원정에서 무르실리 2세를 지원했다. 그 후 피야시실리는 카르케미시로 돌아왔다.

피야시실리는 병에 걸려 무르실리 2세 재위 9년 전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카데시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 피야시실리의 아들이 무르실리 2세에 의해 카데시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4. 현대 한국 정치 및 외교에 주는 함의

피야시실리스의 사례는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과 번영을 추구했던 고대 소국의 외교 전략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 한국의 정치 및 외교, 특히 주변국과의 관계와 국익 추구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함의를 제공한다.


  • 실리 외교의 중요성: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념이나 명분보다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실리 외교가 중요하다. 피야시실리스는 헷갈리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외교 정책을 펼쳤다.
  • 주변국과의 관계 설정: 한국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국익을 우선시해야 한다. 피야시실리스처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며 국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 국력 강화의 필요성: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국력 강화가 필수적이다. 피야시실리스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여 소국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 유연한 외교 전략: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피야시실리스는 강대국 간의 갈등을 이용하고, 필요에 따라 동맹을 바꾸는 등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외교 전략을 수정했다.


피야시실리스의 사례는 강대국 사이에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해야 하는 한국에게, 실리 외교, 주변국과의 관계 설정, 국력 강화, 유연한 외교 전략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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