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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사회민주당 제5차 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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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핀란드 사회민주당 제5차 당대회는 1906년 오울루에서 개최되었으며, 1905년 총파업 이후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후 열린 첫 당대회였다. 이 대회는 당내 노선 정리, 적위대 해산, 그리고 1907년 핀란드 의회 선거를 위한 공약 발표를 주요 내용으로 다루었다. 당내에서는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 여부를 두고 온건파와 급진파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카리, 쿠리카, 볼트 등은 노선 갈등으로 인해 제명되었다. 또한, 비아포리 반란 이후 적위대 해산을 결정하며 무장투쟁 노선을 포기했다. 선거 공약으로는 투표권 확대, 사회 보장 제도 도입 등을 제시했으며, 에드바르드 발파스가 당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일부 당원들은 지하 무장조직 유지를 시도했으나, 당내 갈등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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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사회민주당 제5차 당대회
핀란드 사회민주당 제5차 당대회
정당핀란드 사회민주당
날짜1906년
장소오울루
이전 대회투르쿠 1903
다음 대회헬싱키 1909

2. 역사적 배경

1905년 총파업 이후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1905년 11월 탐페레에서 긴급 회동을 한 바 있으나,[3] 정식 당대회로는 오울루 대회가 처음이었다. 오울루는 포르사 대회가 원래 열릴 예정이었던 장소였지만, 당시 오울루 노동자회관이 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포르사로 장소가 변경되었다. 총파업으로 인해 집회, 결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철폐된 이후 열린 최초의 대회이기도 했다. 이러한 자유화 조치와 총파업의 열기는 사회민주당 당원의 증가로 이어졌다. 1905년 말 사회민주당원 수는 45,000여 명이었으나 오울루 대회 즈음에는 그 수가 두 배 정도로 늘어났다. 또한 사회민주당에 가맹한 노동조합의 수도 1905년의 177개에서 1906년 말에 937개로 급증했다. 1903년 포르사 대회에서는 불과 53개 노동자협회만 참여했지만, 1906년 오울루에서는 400개에 가까운 협회들이 참여했다.[1]

노동자협회들 뿐만 아니라 학생사회민주협회, 당보 편집진, 통신노동동맹, 항만노조, 철도노조, 국민위병, 제1차 소농총회 중앙위 등에서도 대표자들이 참여했다. 옆 나라인 스웨덴에서도 스웨덴 노동조합연합 주석 헤르만 린드크비스트, 사회민주노동당 당서기 칼 구스타프 비크만, 하파란다 노동자협회 대표들이 참석했다.[4]

3. 당대회 진행

오울루는 포르사 대회의 원래 개최 예정 장소였다. 하지만 당시 오울루 노동자회관이 공사 중이었기에 포르사로 장소가 변경되었었다. 1905년 총파업 이후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1905년 11월 탐페레에서 긴급 회동을 한 바 있으나,[3] 정식 당대회로서 총파업 이후 최초는 오울루 대회였다. 또한 총파업으로 인해 집회, 결사의 자유의 제한이 철폐된 이후 열린 최초의 대회이기도 했다. 이 자유화 조치와 총파업의 열기는 사회민주당 당원의 증가로 나타났다. 1905년 말엽에 사회민주당원 수는 45,000 여명이었으나 오울루 대회 즈음에는 그 수가 두 배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또한 사회민주당에 가맹한 노동조합의 수도 1905년의 177개에서 1906년 말에 937개로 급증했다. 1903년 포르사 대회에서는 불과 53개 노동자협회만 참여했지만 1906년 오울루에서는 400개에 가까운 협회들이 참여했다.[1]

노동자협회들 뿐 아니라 학생사회민주협회, 당보들의 편집진, 통신노동동맹, 항만노조, 철도노조, 국민위병, 제1차 소농총회 중앙위 등에서도 대표자들이 참여했고, 옆동네 스웨덴에서도 스웨덴 노동조합연합 주석 헤르만 린드크비스트, 사회민주노동당 당서기 칼 구스타프 비크만, 하파란다 노동자협회 대표들이 참석했다.[4]

대회 개회사는 오울루의 언론인 칼레 해맬래이넨이 진행했고, 뒤이어 위리외 시롤라가 스웨덴에서 온 내빈들을 환영했다. 또한 비크만의 축하 연설을 시롤라가 핀란드어로 통역했다. 시롤라와 타비 타이니오, 에밀 페르틸래가 대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미코 우오티넨이 서기를 맡았다. 대회에서 논의된 의제는 국민위병의 해산 문제, 전국조직 문제, 그리고 선거와 강령 문제 등이었다.[4] 또한 5월 1일 노동절을 전국적인 노동자 집회일로 만들기가 공식 방침화되었다.[5] 직업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분리 역시 오울루에서 확정되었는데, 이는 한 해 전 노총 설립을 계획한 것이 재확인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 관련 업무가 모두 마티 파시부오리에게 이관되었다.[6] 그리고 토요일 저녁에 히에타섬에서 열린 오울루 노동자극장 행사에 관한 이야기도 논의되었다.[4] 이 행사에 러시아 당국이 500여명의 병력을 보내왔었다.[7] 당시 스웨덴계 보수신문 『후부드스타드스블라데트』는 전국 각지에서 오울루에 모인 노동자 대표 200-300여명이 세이내요키 철도역에서 무전취식을 했다고 비난하는 기사를 썼는데, 사민당 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분명히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8][4]

4. 당내 노선 정리

오울루 당대회 당시, 핀란드 사회민주당(사민당)은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협력을 추구하는 온건파와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급진파로 나뉘어 있었다. 헬싱키와 비푸리를 제외한 탐페레, 투르쿠 등지의 노조들은 협력에 우호적이었고, 다양한 제도 문제에 관한 협력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면 헬싱키, 비푸리 두 대도시와 농촌 지역 노조들은 "순수계급투쟁"을 주장하며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협력 없이 노동 계급만의 힘으로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노선 갈등 외에도 혁명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이 노동조합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제도 있었다.[1]

1905년 11월 열린 특별 당대회에서 의회 선거에 대비해 노선을 정리하기 위해 중앙당을 투르쿠에서 헬싱키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또한 총파업을 전후해 젊은 사회주의자들(11월 사회주의자)이 사민당에 입당하는 것도 "헬싱키 노선"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들 중 한 명인 위리외 시롤라가 오울루 당대회 공동 의장 중 한 명이었고, 이들은 에드바르드 발파스해니넨을 제5대 당주석으로 선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부르주아들과의 협력을 주장하는 노선은 더욱 약화되었고, 결국 오울루 당대회에서 그러한 협력 노선의 공식적 거부가 확정되었다. 이는 러시아 황제로부터 핀란드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여겨졌다. 오토 빌레 쿠시넨은 핀란드 부르주아들과 러시아 제국의 이해가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생각했다.[1]

전국 조직을 개편한 것도 노선 정리에 도움이 되었다. 과거의 당 집행부 체제는 당 평의회와 당 위원회 체제로 대체되었고, 기존의 지구당에 선거구별, 지방별 당 조직이 만들어져 피라미드 구조가 강화되었다. 이는 당 지도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가 정파와 지구당 외에 더 생겨난 것으로, 지도부의 권력이 이전보다 약화된 것을 의미했다.[2]

오울루 대회에서 유호 퀴외스티 카리, 장 볼트, 마티 쿠리카 등이 제명당한 것을 풍자한 우파 언론 『퓌렌』의 만평(알렉스 페데를레위 그림). 이들 고참들을 쫓아낸 대신 사민당이 얻게 된 것이 다이너마이트 상자라고 표현해 놓았다.


노선 정리에는 인적 분쟁도 따랐는데, 대표적인 문제가 유호 퀴외스티 카리와 마티 쿠리카였다. 총파업 이후 카리는 부르주아 호헌파 위주의 메켈린 원로원에 입각했는데 이것이 문제시되었다. 카리의 변호자들은 카리의 입각은 개인 자격으로 행한 것이지 사민당이 당 차원에서 호헌파에게 협력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1] 카리 본인은 당 집행부가 자신의 입각을 허락한 줄 알았다고 말했다.[2] 논쟁 이후 카리의 처분이 당 위원회에 회부되었고 카리의 제명이 결정되었다.[4]

쿠리카는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다. 북미에 갔다 온 뒤 그는 노동운동계에 영향을 미치려 했고, 쇠르내이넨 노동자협회의 대표자로서 당대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당 위원회는 쿠리카를 해당 행위자로 판단했다. 이것은 당의 이념적 성향을 균질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1] 투표 결과 쿠리카의 편을 든 것은 불과 29명이었다. 쿠리카는 쫓겨나기 전에 제 발로 나가겠다며 사임하고 대회장을 나갔다.[4]

한편 헬싱키 적위대 대장 장 볼트도 제명되었다. 실패로 돌아간 비아포리 반란의 책임을 물어서였다. 볼트에게는 발언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10분간 산회한 뒤 대회장에서 내보내졌다.[4]

5. 적위대 청산

하카니에미 폭동에서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국민위병(제1차 적위대) 조직 정리가 필요하게 되었다.[4] 이 폭동으로 원로원은 국민위병과 시민위병(백위대)을 모두 금지시켰다.[4]

오울루 당대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적위대는 퀴멘락소 등에서 경찰보다 나은 치안 유지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변호를 받았다.[4] 적위대를 자율소방대나 체육동호회로 전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4] 그러나 적위대로 인해 노동조합이 능동저항당이나 무력동맹과 연루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4] 원로원이 적위대 활동을 금지한 상황에서 적위대 유지는 지하 비밀 활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노동운동과 맞지 않는다고 여겨졌다.[2]

결국 당위원회는 적위대 해산을 결정했고,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았다. 적위대 대표로 당대회에 참석한 유시 투오미넨도 아쉬움을 표했지만 해산에 찬성했다.[4] 적위대 해산은 무장투쟁 준군사조직이 노동운동의 하위 부문으로 포기되었음을 의미했다.[2]

6. 선거 공약

이듬해 봄으로 예정된 초대 의회선거에서 내세울 정견 역시 오울루 대회에서 결정되었다. 투표권 확대 외에도 지방선거 선거권, 소작법 개정, 노동안전법 제정, 장애보험과 노령보험, 점진적 증세, 의무교육과 양성평등을 공약으로 결정했다.[1]

7. 지도부 선출

대회 마지막 날인 8월 26일에 제6기 지도부 선거가 진행되었다. 에드바르드 발파스가 269표를 받아 새 당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부주석에는 알렉산테리 얘르벤패, 당서기에는 위리외 시롤라가 선출되었고, 미나 실란패와 오스카르 요한손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시롤라는 당서기 취임을 고사하여, 전임 당서기 마티 투르키아가 유임되었다.[4]

8. 지하조직의 일시적 유지

튀욀래삭티비스미 참여자들과 협력하여 지하무장조직을 계속 유지하려던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핀란드 노동운동이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핀란드의 자치권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발전도 담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폭력투쟁에 있어서 러시아의 무정부주의 이론가 표트르 크로폿킨(그 전 해에 『빵의 쟁취』가 핀란드어로 번역되었다)과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힌케 베르게그렌의 노선을 따랐다.[9]

그러나 9월이 되자 이들의 계획은 다른 당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분란이 발생했고, 위리외 매켈린과 쾨시 린드스트룀은 탐페레 노동자협회에서 이탈했다. 매켈린은 동시에 『칸산 레흐티』 주석직에서도 물러났다. 위리외 시롤라는 청년 사회주의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으나, 매켈린, 린드스트룀, 타이니오, 살린 등은 선거운동에 집중하기를 원했고 시롤라의 변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9]

참조

[1] 간행물 Suurlakon ja eduskuntavaalien välissä – Sdp:n edustajakokous Oulussa 1906 http://www.makelinse[...] Yrjö Mäkelin -seura 2006-12-30
[2] 서적 Sosialismin tulo Suomeen – Ensimmäisiin yksikamarisen eduskunnan vaaleihin asti https://helda.helsin[...] WSOY 1961
[3] 웹사이트 Puoluekokoukset, puheenjohtajat ja puoluesihteerit 1899– http://www.sdp.fi/fi[...] Suomen Sosialidemokraattinen Puolue 2016-01-19
[4] 서적 Suomen Sosialidemokratisen puolueen viidennen edustajakokouksen pöytäkirja https://yksa.darchiv[...] Suomen Sosialidemokraattisen Puolueen puoluetoimikunta 1906
[5] 뉴스 Työväen vappu val­ta­kun­nal­lis­tet­tiin Oulussa 1906 - katso kuvat vanhan ajan vap­pu­tun­nel­mis­ta http://www.kaleva.fi[...] Kaleva 2013-04-28
[6] 간행물 Työmiehen kasvu poliitikoksi: Matti Paasivuoren (1866-1937) rooli suurlakossa ja ammatillisessa liikkeessä http://www.ennenjany[...] Ennen ja nyt 2015-01-08
[7] 뉴스 Socialdemokratiska arbetarepartimötet i Uleåborg http://digi.kansalli[...] Hufvudstadsbladet 1906-08-23
[8] 뉴스 Från allmänheten. Bristande hyfsning och bistande rättskänsla. http://digi.kansalli[...] Hufvudstadsbladet 1906-08-21
[9] 간행물 Oululaiset nuoressa työväenpuolueessa http://www.makelinse[...] Yrjö Mäkelin -seura 200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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