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 유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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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포 유바라는 18세기 이탈리아의 건축가, 무대 디자이너, 금세공사로,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에서 건축을 배우고 극장 무대 디자인으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스체나 페르 앙골로' 스타일을 사용했다. 1714년 사보이 공국의 수석 궁정 건축가로 임명되어 토리노에서 수페르가 대성당, 스투피니지 사냥 별장 등을 설계했다. 또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도 활동하며 리스본 왕궁과 마드리드 왕궁 재건 계획을 세웠으나,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그의 건축 스타일은 바로크와 신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베르나르도 비토네 등 후대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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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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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Filippo Juvarra |
본명 | Filippo Juvarra |
출생일 | 1678년 3월 7일 |
출생지 | 이탈리아 메시나 |
사망일 | 1736년 1월 31일 |
사망지 | 스페인 마드리드 |
국적 | 이탈리아인 |
분야 | 건축 |
사조 | 바로크 |
주요 건축물 | |
주요 프로젝트 |
2. 생애
필리포 유바라는 시칠리아 메시나의 금세공 및 조각가 집안에서 태어났다.[1] 시칠리아에서 성장하며 가업을 도왔지만, 1703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제도사로서 스페인 및 시칠리아의 펠리페 5세 대관식(1701년) 축제 장식을 디자인했고, 비트루비우스와 비뇰라의 저서로 건축을 독학했다.[1] 1704년 로마로 이주하여 카를로와 프란체스코 폰타나에게 건축을 배웠다.
독립적인 경력 초기에는 의례 및 축하 행사, 특히 극장 무대 디자인을 맡았다. 유바라의 무대 디자인은 '각도 장면'(scena per angolo)을 통합했는데, 이는 페르디난도 갈리 비비에나가 ''아르키테투라 시빌레''(1711)에서 자신이 발명했다고 주장했지만, 이전에도 사용된 방식이다. 이 스타일은 16세기부터 17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일점 투시 원근 무대와 달랐다(예: 자코모 토렐리 작품). 유바라의 초기 드로잉(1706년)은 나폴리 산 바르톨로메오 극장과 관련이 있지만, 실제 디자인 완성 여부는 불분명하다. 극장 및 무대 디자인 작업은 대부분 추기경 오토보니 후원 하에 팔라초 델라 칸첼레리아의 개인 극장 재건, 오페라 무대 디자인을 맡았다. ''코스탄티노 피오''(1709, 대본: 추기경 오토보니, 음악: CF 폴라롤리)는 유바라가 무대 디자인을 맡은 첫 오페라로, 교황의 세속 극장 금지령 해제 후 처음 등장한 오페라 중 하나였다. 테아트로 카프라니카에서 오토보니 후원 공연의 무대 디자인도 담당했다. 마리 카시미르 다르퀴엔(전 폴란드 여왕의 과부)의 후원으로 팔라초 주카리 내 개인 극장 오페라 무대 디자인을 제작했고, 1713년에는 제노바에서 극장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706년 교황 클레멘스 11세 주최 성 베드로 대성당 성구실 설계 공모전에서 우승, 산 루카 아카데미아 회원이 되었다. 1708년 로마에서 유일하게 실현된 건축 작품인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 성당의 안타모로 예배당을 피에르 르 그로와 협력하여 만들었다.[2] 1711년에는 조각된 문장 판화집 ''로마의 주요 교수들이 만든 다양한 문장 모음''을 출판했다.[3]
메시나로 돌아와 항구 측면에 거대한 곡선형 궁전 파사드를 건설하는 야심찬 계획(미완)을 세웠다. 롬바르디아에서 카라바조 성당 교회 기념 제단(미완, 카를로 주세페 메를로의 작품으로 대체)과 베르가모 대성당 제단, 벨루노 대성당 종탑(현재 기울어짐)을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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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사보이 공국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게 고용되어 수석 궁정 건축가가 되었다. 피에몬테에서 산타 크리스티나 교회(1715-1718), 산 필리포 교회, 산타 크로체 교회, 바실리카 델라 나티비타, 산타 테레사 교회 내 산 조세페 예배당(1725)을 설계했다. 빛이 위에서 떨어지는 중앙 홀을 중심으로 공간이 집중된 복된 카르미네 성모 교회(1732-1736)를 설계 및 건축하고, 토리노의 많은 교회 내부 장식을 도왔다.
수페르가 대성당(1731)은 토리노 시가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위치하며, 사보이 가문의 왕실 영묘이다. 토리노 전투에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서약으로 이 부지가 선택되었다.[4] 14년 이상 소요된 건설 과정은 험난했고, 교회 뒤 수도원과 함께 고전적인 현관, 75m 높이의 바로크 돔이 특징이다.
시칠리아 메시나의 보로미니풍 산 그레고리오 교회,[5] 만토바 산탄드레아 교회에 부벽 돔을 추가했다.
1719년 포르투갈에서 마프라 왕궁을 주앙 5세를 위해 설계(1719–20) 후 런던과 파리로 여행했다. 필리포 유바라의 리스본 왕궁 프로젝트는 1719년부터 리스본 테주 강변 궁전 단지 건설 계획으로, 왕궁과 리스본 대주교를 위한 대성당을 포함했다. 대서양과 연결되는 테주 강 하구에 기념비적인 등대 건설 계획도 세웠다.[6]
Stupinigi 사냥 별장(1729-1731)은 토리노 외곽 왕실 사냥 별장으로, 거대한 레이아웃과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 청동 수사슴 장식의 타원형 중앙 파빌리온, 아치형 창문, 각진 날개는 이탈리아 로코코의 장식적 즐거움과 고전주의, 기발함을 보여준다. 베나리아 레알레 궁전과 산트 우베르토 교회 복원 및 개조 작업도 맡았는데, 후자는 미완성 상태에서 팔각형 돔과 아치형 날개로 절충적인 영향을 보여준다.
토리노의 마다마 궁전(1718-21) 정면은 팔라디오의 키에리카티 궁전 형식을 연상시키지만, 디테일과 창문이 향상되었다. 중세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계단을 보호하는 연극적인 제스처이며, 토리노 중심부를 개방적인 광장으로 개편하는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비엘라 근처 오로파 성소의 '왕실 문'을 디자인했다.[7]
아스카니오 비토치와 카를로 디 카스텔라몬테가 도입한 직교 시스템에 따라 토리노 서쪽 확장 건설에 참여, 팔라초 마르티니 디 시갈라(1716)와 콰르티에리 밀리타리(1716-1728) 건설, 토리노 항소 법원 설계(후임자 베네데토 알피에리 완성), 밀라노 궁전 디자인, 리볼리 성 업데이트 디자인(미완)을 했다. 코라도 자퀸토는 유바라가 토리노 레지나 빌라 궁전 장식에 초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1734년 크리스마스 이브, 마드리드 왕립 알카사르 화재 후 펠리페 5세의 요청으로 새로운 궁전 건설을 감독하기 위해 1735년 4월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계획은 현재 궁전보다 큰 구조와 정원을 포함했지만, 1736년 1월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제자 조반니 바티스타 사케티 등이 디자인을 실행했다.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왕궁 정면과 아란후에스 왕궁 일부도 설계했다.
일부 작가들은 유바라의 스타일에 카를로 폰타나의 영향이 있다고 추정하지만,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구아리노 구아리니 등 다양한 영향을 받은 절충적인 면모를 보였다. 베르나르도 비토네와 베네데토 알피에리는 유바라에게 영향을 받은 건축가이며,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와 판화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유바라의 작품은 바로크 미술, 건축과 함께 신고전주의 부상으로 인기를 잃었다. 1994년 제노바와 마드리드에서 그의 디자인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시칠리아와 로마)

유바라는 시칠리아 메시나의 금세공 및 조각가 집안에서 태어났다.[1] 그는 시칠리아에서 가족과 함께 성장하며 가족 가게에서 일했지만, 동시에 사제직을 공부하여 1703년에 서품을 받았다. 그는 제도사로서 명성을 얻었는데, 스페인 및 시칠리아의 펠리페 5세 대관식(1701년)을 위한 메시나의 축제 장식을 디자인했고, 비트루비우스와 비뇰라의 저서와 같은 책만으로 건축을 독학했다.[1] 1704년 유바라는 로마로 이주하여 카를로와 프란체스코 폰타나에게 건축을 배웠다.
그의 독립적인 경력의 첫 번째 단계는 의례 및 축하 행사, 특히 극장 무대 디자인이었다. 유바라의 무대 디자인은 문자 그대로 '각도 장면'인 ''스체나 페르 앙골로''(scena per angolo)를 통합했는데, 이 스타일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페르디난도 갈리 비비에나는 자신의 논문 ''아르키테투라 시빌레''(1711)에서 이 스타일을 발명했다고 주장하지만, 이 스타일은 그 이전에도 유바라의 작품을 포함하여 분명히 사용되었다. 이 스타일은 16세기에 개발되어 17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일점 투시 원근 무대와 달랐다. (예: 자코모 토렐리의 작품) 유바라의 초기 드로잉 중 몇 점(1706년)은 나폴리 산 바르톨로메오 극장과 관련이 있지만, 그가 실제로 극장 무대 디자인을 완성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극장 및 무대 디자인 작업의 대부분은 추기경 오토보니의 후원 하에 로마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팔라초 델라 칸첼레리아의 추기경 개인 극장 재건을 도왔으며 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 무대도 디자인했다. 유바라가 모든 무대를 디자인한 첫 번째 오페라는 추기경 오토보니의 대본과 CF 폴라롤리의 음악으로 제작된 ''코스탄티노 피오''였다. 이 오페라는 1709년에 초연되었고, 오토보니의 새롭게 개조된 개인 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으며, 교황의 세속 극장 금지령이 해제된 후 처음으로 등장한 오페라 중 하나였다. 그는 또한 테아트로 카프라니카에서 오토보니가 후원한 공연의 무대 디자인 작업도 했다. 로마에서 그의 또 다른 주요 후원자는 마리 카시미르 다르퀴엔 전 폴란드 여왕이었는데, 그녀를 위해 유바라는 팔라초 주카리에 있는 그녀의 작은 개인 극장에서 공연된 오페라 무대 디자인을 제작했다. 1713년에는 극장 프로젝트로 제노바로 갔다.
1706년 유바라는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조직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새로운 성구실 설계를 위한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권위 있는 산 루카 아카데미아의 회원이 되었다. 1708년 그는 처음으로 극장이 아닌 중요한 건축 작품을 만들었는데, 로마에서 실현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바로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예배당 조각을 제작한 프랑스 조각가 피에르 르 그로와 긴밀하게 협력하여 구상한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 성당에 있는 작지만 훌륭하게 만들어진 안타모로 예배당이다.[2]
유바라는 조각가이기도 했다. 1711년에는 조각된 문장의 판화집인 ''로마의 주요 교수들이 만든 다양한 문장 모음''(Raccolta di varie targhe fatte da professori primarii di Roma)이 출판되었다.[3]
로마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후, 유바라는 고향인 메시나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주거 및 상업 시설을 위한 거대한 곡선형 궁전 파사드로 항구 측면에 건설하는 야심찬 계획(미완)을 세웠다. 그는 롬바르디아에서 몇몇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여기에는 카라바조의 성당 교회(결코 건설되지 않았고, 건축가 카를로 주세페 메를로의 작은 작품으로 대체됨)를 위한 기념 제단과 베르가모 대성당 제단이 포함되었다. 그는 또한 벨루노 대성당의 장식적인 종탑(현재 기울어져 있음)을 디자인했다.
2. 2. 초기 경력 (로마)
유바라는 시칠리아 메시나의 금세공 및 조각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시칠리아에서 성장하며 가족 가게에서 일했지만, 동시에 사제직을 공부하여 1703년에 서품을 받았다. 동시에 제도사로서 명성을 얻었는데, 스페인 및 시칠리아의 펠리페 5세 대관식(1701년)을 위한 메시나의 축제 장식을 디자인했고, 비트루비우스와 비뇰라의 저서와 같은 책만으로 건축을 독학했다.[1] 1704년 로마로 이주하여 카를로와 프란체스코 폰타나에게 건축을 배웠다.그의 독립적인 경력의 첫 번째 단계는 의례 및 축하 행사, 극장 무대 디자인이었다. 유바라의 무대 디자인은 '각도 장면'인 ''스체나 페르 앙골로''(scena per angolo)를 통합했는데, 이 스타일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페르디난도 갈리 비비에나는 ''아르키테투라 시빌레''(1711)에서 이 스타일을 발명했다고 주장하지만, 이전에도 유바라의 작품을 포함하여 분명히 사용되었다. 이 스타일은 16세기에 개발되어 17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일점 투시 원근 무대와 달랐다. (예: 자코모 토렐리 작품) 유바라의 초기 드로잉(1706년)은 나폴리 산 바르톨로메오 극장과 관련이 있지만, 그가 극장 무대 디자인을 완성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극장 및 무대 디자인 작업 대부분은 추기경 오토보니 후원 하에 로마에서 이루어졌다. 팔라초 델라 칸첼레리아의 추기경 개인 극장 재건을 도왔으며 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 무대도 디자인했다. 유바라가 모든 무대를 디자인한 첫 번째 오페라는 추기경 오토보니의 대본과 CF 폴라롤리의 음악으로 제작된 ''코스탄티노 피오''였다. 이 오페라는 1709년에 초연되었고, 오토보니의 새롭게 개조된 개인 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으며, 교황의 세속 극장 금지령이 해제된 후 처음으로 등장한 오페라 중 하나였다. 그는 테아트로 카프라니카에서 오토보니가 후원한 공연의 무대 디자인 작업도 했다. 로마에서 그의 또 다른 주요 후원자는 마리 카시미르 다르퀴엔(전 폴란드 여왕의 과부)이었는데, 그녀를 위해 유바라는 팔라초 주카리에 있는 그녀의 작은 개인 극장에서 공연된 오페라 무대 디자인을 제작했다. 1713년에는 극장 프로젝트로 제노바로 갔다.
1706년 유바라는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조직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새로운 성구실 설계를 위한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산 루카 아카데미아의 회원이 되었다. 1708년 그는 처음으로 극장이 아닌 중요한 건축 작품을 만들었는데, 로마에서 실현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바로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예배당 조각을 제작한 프랑스 조각가 피에르 르 그로와 긴밀하게 협력하여 구상한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 성당에 있는 작지만 훌륭하게 만들어진 안타모로 예배당이다.[2]
유바라는 조각가이기도 했다. 1711년에는 조각된 문장의 판화집인 ''로마의 주요 교수들이 만든 다양한 문장 모음''(Raccolta di varie targhe fatte da professori primarii di Roma)이 출판되었다.[3]
2. 3. 메시나 시절
유바라는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금세공 및 조각가 집안에서 태어났다.[1] 그는 시칠리아에서 가족과 함께 성장하며 가업을 도왔지만, 동시에 사제직을 공부하여 1703년에 서품을 받았다.[1] 제도사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스페인 및 시칠리아의 펠리페 5세 대관식(1701년)을 위한 메시나의 축제 장식을 디자인했고, 비트루비우스와 비뇰라의 저서와 같은 책만으로 건축을 독학했다.[1]
로마에서 잠시 활동한 후, 고향인 메시나로 돌아와 주거 및 상업 시설을 위한 거대한 곡선형 궁전 파사드로 항구 측면에 건설하는 야심찬 계획(미완)을 세웠다.
3. 토리노에서의 활동 (사보이아 궁정 건축가)
1714년 유바라는 사보이 공국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 의해 무대 디자인 프로젝트에 고용된 후 수석 궁정 건축가로 승진했다. 그는 토리노에서 산타 크리스티나 교회(1715-1718), 산 필리포 교회,[4] 산타 크로체 교회,[4] 바실리카 델라 나티비타, 산타 테레사 교회 내 산 조세페 예배당(1725)을 설계했다.[4] 그는 또한 빛이 위에서 떨어지는 극적인 효과를 가진 중앙 홀을 중심으로 공간이 집중된 복된 카르미네 성모 교회(1732-1736)를 설계하고 건축했다. 그는 토리노의 많은 교회 내부 장식도 도왔다.[4]
유바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수페르가 대성당은 1731년에 건설되었으며 토리노 시가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이 대성당은 사보이 가문의 왕실 영묘였다. 이 부지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토리노 전투에서 포위 공격을 받은 프랑스 군대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면서 작전 현장을 살피면서 이곳에서 한 서약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4] 건설은 험난했고, 산 정상 평탄화에 2년을 포함하여 14년 이상이 소요되었으며, 돌과 물자를 산꼭대기로 운반하는 데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었다.[4] 교회 뒤에는 수도원이 세워졌다. 고전적인 현관은 높이가 75m에 달하는 수직적인 바로크 돔이 있는 중앙 집중식 교회에 부착되어 있으며, 이 돔은 산 위에 산을 만드는 효과를 낸다.
Stupinigi 사냥 별장(1729-1731)은 토리노 외곽 6마일에 왕실 사냥 별장으로 지어졌으며, 거대한 레이아웃과 화려하게 장식된 인테리어는 이 궁전을 여름 휴가를 위한 훌륭한 배경으로 만들었다. 청동 수사슴으로 장식된 거대한 타원형 중앙 파빌리온은 아치형 창문으로 전면에 배치되어 각진 날개로 확장되며, 이탈리아 로코코의 장식적인 즐거움을 묘사하는 고전주의와 기발함이 혼합되어 있다. 유바라는 고전적 웅장함에 대한 후원자의 요구를 충족시켰지만, 마치 구불구불한 리본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건물을 장식하고 건설하려는 바로크적 열망을 담아냈다. 파빌리온 내부에는 회반죽과 도금된 디테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유바라는 또한 베나리아 레알레 궁전으로 불리는 사보이 왕가의 거대한 궁전 단지와 산트 우베르토 교회를 복원하고 개조하는 위임을 받았다.
그의 궁전 건설 걸작 중 하나는 토리노의 마다마 궁전(1718-21)의 정면이다. 이는 팔라디오의 키에리카티 궁전의 형식성을 연상시키지만, 디테일과 창문이 향상되었다. 정면은 ''피아노 노빌레''를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세 성으로 들어가는 웅장한 입구 계단을 보호하는 제스처에 불과하다. 그는 또한 비엘라 근처의 오로파 성소의 ''왕실 문''을 디자인했다.[7]
유바라는 아스카니오 비토치와 카를로 디 카스텔라몬테가 도입한 직교 시스템에 따라 토리노 서쪽으로 세 번째 확장을 건설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팔라초 마르티니 디 시갈라(1716)와 콰르티에리 밀리타리(1716-1728) 건설이 포함되었다. 그는 토리노의 ‘’항소 법원’’을 설계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 작업은 그의 후임자인 베네데토 알피에리가 완성했다. 그는 또한 밀라노의 궁전 디자인을 도왔다. 그는 리볼리 성을 업데이트하기 위한 디자인을 만들었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4. 포르투갈 및 기타 지역 활동
필리포 유바라는 1719년 포르투갈에 머물며 주앙 5세를 위해 마프라의 왕궁을 설계했으며(1719–20), 이후 런던과 파리로 여행했다.[6]
필리포 유바라의 리스본 왕궁 프로젝트는 171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리스본의 테주 강을 따라 건설될 야심찬 궁전 단지였다. 이 프로젝트에는 주앙 5세와 포르투갈 왕실을 위한 기념비적인 왕궁뿐만 아니라 리스본 대주교를 위한 새로운 대성당도 포함되었다.[6]
유바라는 포르투갈에 머무는 동안 대서양과 연결되는 테주 강 하구에 리스본에 기념비적인 등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도 세웠다.[6]
5. 마드리드 시절과 죽음
173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대 마드리드 왕립 알카사르가 화재로 파괴되었다. 이는 스페인 부르봉 왕 펠리페 5세가 유바라에게 새로운 궁전 건설을 감독하도록 요청하는 계기가 되었다. 1735년 4월, 유바라는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건설 계획을 시작했다. 유바라의 계획은 현재의 궁전보다 훨씬 큰 구조와 넓은 정원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선형 파사드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식적인 경직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왕궁의 정면과 아란후에스 왕궁의 일부를 설계했다. 그러나 유바라는 스페인에 도착한 지 9개월이 채 안 된 1736년 1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왕궁을 위한 그의 계획은 나무 모형으로 만들어졌지만, 그의 모든 디자인은 그의 제자인 조반니 바티스타 사케티를 포함하여 그가 죽은 후에 실행되었다.
6. 영향
일부 작가들은 유바라의 초기 훈련이 로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의 스타일에 카를로 폰타나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유바라는 작품 활동에서 절충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의 더 모험적인 건축을 포함한 많은 다른 영향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한 구아리노 구아리니의 작품에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유바라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은 바로크 건축가로는 베르나르도 비토네와 베네데토 알피에리가 있다. 유바라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는 판화 매체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유바라의 작품은 바로크 미술과 건축의 많은 부분과 함께 신고전주의의 부상과 함께 인기를 잃었다. 1994년, 그의 디자인을 주제로 한 대규모 전시회가 제노바와 마드리드에서 개최되었다.
7. 작품 목록
Raccolta di varie targhe fatte da professori primarii di Romait[3]는 1711년에 출판된 유바라의 조각된 문장 판화집이다.
유바라는 고향인 메시나에서 주거 및 상업 시설을 위한 거대한 곡선형 궁전 파사드로 항구 측면에 건설하는 야심찬 계획(미완)을 세웠다. 그는 롬바르디아에서 몇몇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여기에는 카라바조의 성당 교회(결코 건설되지 않았고, 건축가 카를로 주세페 메를로의 작은 작품으로 대체됨)를 위한 기념 제단과 베르가모 대성당 제단이 포함되었다. 그는 또한 벨루노 대성당의 장식적인 종탑(현재 기울어져 있음)을 디자인했다.
1714년, 유바라는 그가 가장 잘 알려진 건축 작품을 설계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처음 사보이 공국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 의해 무대 디자인 프로젝트에 고용된 후 수석 궁정 건축가로 승진했다. 피에몬테에서 유바라는 산타 크리스티나 교회(1715-1718), 산 필리포 교회, 산타 크로체 교회, 바실리카 델라 나티비타, 산타 테레사 교회 내 산 조세페 예배당(1725)을 설계했다. 그는 또한 빛이 위에서 떨어지는 극적인 효과를 가진 중앙 홀을 중심으로 공간이 집중된 복되신 카르미네 성모 교회(1732-1736)를 설계하고 건축했다. 그는 또한 토리노의 많은 교회 내부를 장식하는 것을 도왔다.
유바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수페르가 대성당은 1731년에 건설되었으며 토리노 시가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이 대성당은 부분적으로 그림 같은 기념물이었고 부분적으로 사보이 가문의 왕실 영묘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부지는 당시 공작이자 미래의 국왕이었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토리노 전투에서 포위 공격을 받은 프랑스 군대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면서 작전 현장을 살피면서 이곳에서 한 서약 때문에 선택되었다.[4] 건설은 험난했고, 산 정상 평탄화에 2년을 포함하여 14년 이상이 소요되었으며, 돌과 물자를 산꼭대기로 운반하는 데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었다. 교회 뒤에는 수도원이 세워졌다. 고전적인 현관은 높이가 75m에 달하는 수직적인 바로크 돔이 있는 중앙 집중식 교회에 부착되어 있으며, 이 돔은 산 위에 산을 만드는 효과를 낸다.
그는 또한 시칠리아 메시나의 기괴한 보로미니풍의 산 그레고리오 교회를 포함한 다른 교회들을 건축했다.[5] 만토바에서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설계한 산탄드레아 교회에 높은 부벽 돔을 추가했다.
Stupinigi 사냥 별장(1729-1731)은 토리노 외곽 6마일에 왕실 사냥 별장으로 지어졌으며, 거대한 레이아웃과 화려하게 장식된 인테리어는 이 궁전을 여름 휴가를 위한 훌륭한 배경으로 만들었다. 청동 수사슴으로 장식된 거대한 타원형 중앙 파빌리온은 아치형 창문으로 전면에 배치되어 각진 날개로 확장되며, 이탈리아 로코코의 장식적인 즐거움을 묘사하는 고전주의와 기발함이 혼합되어 있다. 유바라는 고전적 웅장함에 대한 후원자의 요구를 충족시켰지만, 마치 구불구불한 리본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건물을 장식하고 건설하려는 바로크적 열망을 담아냈다. 파빌리온 내부에는 회반죽과 도금된 디테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이러한 기대를 더욱 충족시킨다. 유바라는 또한 베나리아 레알레 궁전으로 불리는 사보이 왕가의 거대한 궁전 단지와 산트 우베르토 교회를 복원하고 개조하는 위임을 받았다. 후자는 미완성 상태에서 팔각형 돔과 바깥쪽으로 아치형 날개를 통해 절충적인 영향을 보여준다.
그의 궁전 건설의 걸작 중 하나는 토리노의 마다마 궁전(1718-21)의 정면이다. 이는 팔라디오의 키에리카티 궁전의 형식성을 연상시키지만, 디테일과 창문이 향상되었다. 정면은 통풍이 잘 되는 ''피아노 노빌레''를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세 성으로 들어가는 웅장한 입구 계단을 보호하는, 거의 연극적인 제스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또한 혼잡한 중세 시대의 토리노 중심부를 더 개방적이고 계획적인 연결된 광장으로 개편하기 위한 야심 찬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그는 또한 비엘라 근처의 오로파 성소의 ''왕실 문''을 디자인했다.[7]
유바라는 또한 아스카니오 비토치와 카를로 디 카스텔라몬테가 도입한 직교 시스템에 따라 토리노 서쪽으로 세 번째 확장을 건설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팔라초 마르티니 디 시갈라(1716)와 콰르티에리 밀리타리(1716-1728) 건설이 포함되었다. 그는 토리노의 ‘’항소 법원’’을 설계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 작업은 그의 후임자인 베네데토 알피에리가 완성했다. 그는 또한 밀라노의 궁전 디자인을 도왔다. 그는 리볼리 성을 업데이트하기 위한 디자인을 만들었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코라도 자퀸토는 유바라가 토리노의 레지나 빌라와 같은 궁전을 장식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초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참조
[1]
논문
Filippo Juvarra and Architectural Education in Rome in the Early Eighteenth Century
1982
[2]
서적
A “Dialogue” between Sculptor and Architect: the Statue of S. Filippo Neri in the Cappella Antamori
Aldershot
[3]
웹사이트
Raccolta di varie targhe...
http://members.tripo[...]
[4]
서적
The Alps, Switzerland and the north of Italy: with numerous engravings
https://books.google[...]
Alexander Montgomery, Publisher
[5]
문서
Destroyed by earthquake in 1908
[6]
논문
Filippo Juvarra: 1678-1736, architetto dei Savoia, architetto in Europa
https://www.academia[...]
2019-03-19
[7]
웹사이트
The sanctuary of Oropa
province of Biella tourist office
20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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