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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클레멘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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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레멘스 11세는 1700년부터 1721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1713년 얀세니즘을 비판하는 교황 칙서 「우니게니투스」를 발표하여 프랑스 교회와 갈등을 겪었다. 또한 중국 전례 논쟁에서 공자 숭배를 금지하여 조선 천주교 박해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70명의 추기경을 서임하고 바티칸 도서관을 확장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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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클레멘스 1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클레멘스 11세
로마자 표기Clemens XI
이탈리아어 표기Clemente XI
알바니아어 표기Klementi XI
본명조반니 프란체스코 알바니
직책로마 주교
교황 재임 시작1700년 11월 23일
교황 재임 종료1721년 3월 19일
이전 교황인노첸시오 12세
다음 교황인노첸시오 13세
서품1700년 9월
축성1700년 11월 30일
축성자에마뉘엘-테오도스 드 라 투르 도베르뉴 드 불리옹
추기경 임명1690년 2월 13일
추기경 임명자알렉산데르 8세
출생일1649년 7월 23일
출생지교황령 우르비노
사망일1721년 3월 19일
사망지교황령 로마
이전 직책산타 마리아 인 아퀴로 성당 추기경 (1690년–1700년)
산트아드리아노 알 포로 성당 추기경 (1690년–1700년)
산 실베스트로 인 카피테 성당 사제 추기경 (1700년)
문장
서명
호칭클레멘스
교황 스타일
공식 호칭성하
존칭성하
종교적 호칭거룩하신 아버지
사후 호칭없음
이미지
18세기, 익명의 이탈리아 화파 화가 작품, 바티칸 미술관 소장
일본어 정보
일본어 이름クレメンス11世
일본어 본명ジョバンニ・フランチェスコ・アルバーニ

2. 생애

클레멘스 11세의 메달


알바니 가문 출신인 조반니 프란체스코 알바니는 성직에 입문하여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부제급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1700년 9월에는 사제급 추기경에 취임하여 같은 해 11월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클레멘스 11세의 재위 기간 중에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여 이탈리아가 전쟁에 휘말렸다. 클레멘스 11세는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1707년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장군 빌리히 폰 다운이 남하하여 이탈리아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 때문에 1709년에 오스트리아스페인 왕으로 옹립한 카를 대공을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카를 대공은 1711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선출되어 스페인 왕위를 포기했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과 1714년 라슈타트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분할되었지만, 교황은 이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못했다.

클레멘스 11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1713년 교황 칙서 「우니게니투스」(Unigenitus)를 발표하여 얀세니즘을 공식적으로 탄핵한 것이다. 이는 '갈리카니즘 교회'라고도 불리며 독자적인 노선을 걷던 프랑스 교회에 큰 논쟁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칙서는 파스키에 케넬의 저서에서 발췌한 101개 명제를 오류로 단정하고 얀세니즘을 부정했는데, 얀세니즘이 침투해 있던 프랑스 교회와 프랑스 정부는 이에 반발했다. 프랑스 정부는 칙서 서명을 거부하여 프랑스 내 효력을 무효화했는데, 이는 20세기 이전에 자주 나타나는 정부의 교회 간섭 사례 중 하나였다.

클레멘스 11세는 중국에서의 선교에서 논쟁이 되었던 전례 논쟁에서 도미니코 수도회와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지지하고, 예수회가 인정했던 공자와 조상 숭배를 우상 숭배로 금지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인격자이자 뛰어난 학자였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정치 문제에 휘말리면서 교황청의 정신적 권위를 실추시켰다. 신아이 세이시키와 대화한 것으로 알려진 조반니 시돗티는 클레멘스 11세에게 일본 입항 허가를 청하기도 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조반니 프란체스코 알바니는 1649년 7월 23일 이탈리아 우르비노의 저명한 알바니아계 가문인 알바니 가문(Albani family)에서 태어났다.[5][7][1] 그의 아버지 카를로 알바니(Carlo Albani, 1623~1684)는 귀족이었고, 어머니 엘레나 모스카(Elena Mosca, 1630~1698)는 베르가모(Bergamo) 출신의 페사로(Pesaro) 귀족 모스카 가문(Mosca family) 출신이었다.[2]

알바니는 1660년부터 로마(Rome)의 로마 대학(Collegio Romano)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라틴어에 능숙했으며 교회법과 민법 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했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학회에 자주 출입하였으며,[14] 알렉산데르 8세(Pope Alexander VIII) 치하에서 교황 명예 수사(Prelate of Honour of His Holiness)로, 이노첸시오 12세(Pope Innocent XII)에 의해 사도적 서명 재판소(Apostolic Signatura)의 참사(Referendary)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리에티(Rieti), 사비나(Sabina (region)), 오르비에토(Orvieto)의 총독으로도 봉직했다.

2. 2. 추기경 시절

알바니 추기경의 초상화


교황 알렉산데르 8세는 1690년 알바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산타 마리아 인 아퀴로 성당의 추기경-부제(Cardinal-Deacon)로 삼았다. 그러나 알바니는 나중에 산타드리아노 알 포로 성당의 부제직(Diaconia)을 선택했고, 그 후 추기경-사제(Cardinal-Priest)로서 산 실베스트로 인 카피테 성당의 관할구역(titulus)을 선택했다. 그는 1700년 9월 사제 서품을 받았고, 같은 해 10월 6일 로마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2. 3. 교황 선출

1700년 교황 인노첸시오 12세가 서거한 후,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 알바니 추기경은 평화 조정자로서의 능력으로 유명한 뛰어난 외교관으로 여겨졌으며, 1700년 11월 23일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사흘간의 숙고 끝에 선출을 수락했다.

당시 관례로는 이례적으로, 그는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석 달, 첫 미사를 드린 지 두 달 만에 선출되었지만, 이미 10년 전에 추기경이 된 인물이었다. 약간의 주저 끝에 선출을 수락한 그는 1700년 11월 30일 주교 서품을 받았고 "클레멘스 11세"라는 교황명을 채택했다. 추기경 서품 대주교 베네데토 팜필리가 1700년 12월 8일 그에게 대관식을 거행했고, 그는 1701년 4월 10일 라테라노 대성당의 교구장으로서 직무를 시작했다.

귀족 가문 출신인 알바니는 성직에 입문하여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부제급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1700년 9월에는 사제급 추기경에 취임하여 11월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3. 재위 기간

귀족 가문 출신인 알바니는 성직에 입문하여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부제급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1700년 9월에는 사제급 추기경에 취임하여 11월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재위 기간 중에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여 이탈리아가 전화에 휘말렸다. 클레멘스 11세는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1707년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장군 빌리히 폰 다운이 남하하여 이탈리아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 때문에 1709년에 오스트리아스페인 왕으로 옹립한 카를 대공을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카를 대공은 1711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선출되어 스페인 왕위를 포기했다. 1713년과 1714년에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분할되었지만, 교황은 전혀 관여하지 못한 채로 조약이 실행되었다.

클레멘스 11세의 업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713년 교황 칙서 「우니게니투스」이다. 이는 얀세니즘을 처음으로 공적으로 탄핵한 것이다. 「우니게니투스」는 파스키에 케넬의 저서에서 발췌한 101개 명제를 오류로 단정하고 얀세니즘을 부정하여, "갈리카니즘 교회"라고도 불리며 독자적인 노선을 걷던 프랑스 교회에 큰 논쟁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얀세니즘이 침투해 있던 프랑스 교회와 프랑스 국가는 칙서에 반발했고, 프랑스 정부가 칙서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프랑스에서의 효력을 무효로 하여, 20세기 이전에 자주 보이던 교회에 대한 정부 간섭의 한 예가 되었다.

또한, 중국에서의 선교에서 논쟁이 되었던 전례 논쟁에서 도미니코회프란치스코회를 지지하고, 예수회가 인정했던 공자와 조상 숭배를 우상숭배로 보아 금지했다. 교황은 인격자였고 뛰어난 학자였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정치 문제에 휘말려 교황청의 정신적 권위가 실추되었다. 신아이 하쿠세키와의 대화로 알려진 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는 클레멘스 11세에게 일본 입항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다.[1]

3. 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유럽에서 교회의 특권이 무너지는 시기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클레멘스 11세는 처음에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황제군이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로마를 위협하자 1709년 1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을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해야 했다.[5][6][7]

우트레히트 조약으로 전쟁이 종식되었으나, 교황령은 파르마 및 피아첸차 공국에 대한 종주권오스트리아에 넘겨주고 코마키오도 잃게 되어 교황령의 위신이 크게 손상되었다.

클레멘스 11세는 1713년에 얀세니즘의 확산에 대응하여 교황 교서 우니게니투스를 발표했다. 프랑스 왕국에서는 갈리칸주의 경향이 강했기에 큰 혼란이 뒤따랐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립대학교 '안젤리쿰'의 성 토마스 대학 강사인 그레고리오 셀레리의 기여로 만들어진 이 교서는[8] 파스키에 퀘넬의 저서에서 101개의 명제를 발췌하여 이단으로 선언하고 파문함으로써 얀세니즘을 비난했다.

많은 프랑스 성직자들과 프랑스 의회는 교서 등록을 거부했고, 지방 정부는 공식적으로 교서를 받아들이지 않아 기술적으로 그 지역에서는 효력이 없었다. 이는 20세기 이전에 흔히 있었던 국가의 종교 문제 간섭의 한 예이다.

3. 2. 얀센주의 논쟁

유럽에서 교회의 특권이 무너지는 시기에 교황으로 재임한 클레멘스 11세는 얀세니즘과의 논쟁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그는 1705년 칙서 ''Vineam Domini''와 1713년 칙서 ''우니게니투스''를 발표하여 얀센파를 단죄했다.[8] 특히 ''우니게니투스''는 파스키에 케넬의 저서에서 101개의 명제를 발췌하여 이단으로 선언하고 얀세니즘을 비판한 것으로,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저서에서 이미 비난받은 명제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선언했다.

프리스티나에 있는 성 테레사 가톨릭 대성당의 클레멘스 11세 스테인드글라스 묘사


그러나 이러한 교황의 노력은 프랑스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갈리아주의 경향이 강했던 프랑스에서는 많은 성직자들이 저항하고 의회가 교서 등록을 거부하는 등 18세기 대부분에 걸쳐 논쟁이 이어졌다. 지방 정부가 공식적으로 교서를 받아들이지 않아 기술적으로 효력이 없는 지역도 있었다. 이는 20세기 이전에 흔히 있었던 국가의 종교 문제 간섭의 한 예시이다.

3. 3. 중국 전례 문제

당시 청나라의 공자 제례와 조선의 제사 문화 등 동양의 전례 문제는 유럽 기독교 신학계의 관심사였다. 1715년 3월 19일,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청나라의 전례를 금지하는 회칙을 발표했다.[15] 이는 1656년 알렉산데르 7세가 인가했던[15][16] 사안이었기에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강희제는 칙령을 내려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클레멘스 11세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공자나 만주족 중국 황제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를 "우상숭배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또한 이교도의 사상에 기독교 언어를 맞추어 이교도를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하는 것도 금지했다.

3. 3. 1. 조선 천주교 박해에 미친 영향

1715년 3월 19일,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청나라의 공자 제례와 조선의 제사 문화 등 동양의 전례 문제를 금지하는 회칙을 발표했다.[15] 이는 1656년 알렉산데르 7세가 인가했던[15][16] 사안을 뒤집은 것이어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강희제는 칙령을 내려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강희제가 클레멘스 11세에게 보낸 공개 서한


교황의 이러한 결정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천주교의 조상 제사 거부는 조선 말기 집권 세력에게 박해의 주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13]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을해박해(1815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등 수많은 박해 사건으로 선교사와 천주교도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클레멘스 11세는 중국례 논쟁(Chinese Rites controversy)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공자나 만주 중국 황제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를 "우상숭배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3. 4. 기타 활동

클레멘스 11세는 선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독일 북부와 필리핀에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또한 빈민 구제 사업에도 열성적이었다. 그는 학자다운 태도를 지니고 바티칸 도서관의 장서를 늘리고 로마의 문화재 보존에도 힘썼으며, 성 요셉에 대한 신심이 깊어 성무일도를 만들었다. 1716년에는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 축일을 로마 예식의 보편 교회로 확대했다.[1]

또한, 중국에서의 선교에서 논쟁이 되었던 전례 논쟁에서 도미니코회프란치스코회를 지지하고, 예수회가 인정했던 공자와 조상 숭배를 우상 숭배로 보아 금지했다. 신아이 세이시키와의 대화로 알려진 조반니 시돗티는 클레멘스 11세에게 일본 입항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다.[1]

3. 5. 시복 시성

클레멘스 11세는 다음 인물들의 시복을 확정했다.

  • 체슬라프 오드로바즈(Ceslas Odrowaz) (1712년 8월 27일)
  • 야코프 바린게즈(Jakov Varingez) (1700년 12월 29일)
  • 페레그리노 라치오시(Peregrine Laziosi) (1702년 9월 11일)
  • 페루자의 요한과 사소페라토의 베드로 (1704년 9월 11일)
  • 부온피글리오 몬달디(Buonfiglio Monaldi) (1717년 12월 1일)
  • 그레고리오 10세 (1713년 7월 8일)
  • 쥘리의 움벨린(Humbeline of Jully) (1703년)


또한, 다음 인물들의 시복을 공식 선포했다.

  • 알렉시스 팔콘니에리(Alexis Falconieri), 바르톨로메오 델리 아미데이(Bartholomew degli Amidei), 베네딕트 델란텔라(Benedict Dellantella) (1717년 12월 1일)
  • 요한 프란시스 레지스(John Francis Régis) (1716년 5월 24일)
  • 테레사(Theresa) (1705년 5월 20일)
  • 산샤(Sancha) (1705년 5월 10일)


클레멘스 11세는 다음 인물들을 시성했다.

  • 안드레아 아벨리노(Andrew Avellino), 볼로냐의 카타리나(Catherine of Bologna), 칸탈리스의 펠릭스(Felix of Cantalice), 비오 5세 (1712년 5월 22일)
  • 겸손(Humility) (1720년 1월 27일)
  • 오바진의 스테파노(Stephen of Obazine) (1701년)
  • 로잔의 보니파시오(Boniface of Lausanne) (1702년)


1720년 2월 8일, 클레멘스 11세는 캔터베리의 성 안셀무스(Saint Anselm of Canterbury)를 교회 박사로 임명하고, "''Doctor magnificus''"("위대한 박사")와 "''Doctor Marianus''"("마리아 박사")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3. 6. 추기경 서임

클레멘스 11세는 15차례의 추기경 서임식에서 총 70명의 추기경을 서임했다. 이 가운데 그의 후임 교황이 된 인물로는 인노첸시오 13세가 된 미켈란젤로 데이 콘티와 클레멘스 12세가 된 로렌초 코르시니가 있다. 클레멘스 11세는 8명의 추기경을 "in pectore"(비밀 서임)으로 임명하고 나중에 그들의 이름을 공표하여 추기경 임명을 확정했다.

클레멘스 11세의 재위 기간 동안 가브리엘레 필리푸치는 추기경직을 사임했고, 교황은 1706년 6월 7일에 이를 수락했다. 또한 클레멘스 11세는 1709년 6월 19일에 프란체스코 마리아 데 메디치의 추기경직 사임을 수락했다.[1]

4. 죽음과 매장

클레멘스 11세의 장례식


클레멘스 11세는 1721년 3월 19일 오후 12시 45분 로마에서 사망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 바닥에 매장되었다. 그의 전임자들처럼 화려한 묘에 안장되지 않았다.[11]

3월 10일 오전 11시경, 클레멘스 11세는 시스테롱 주교 피에르 프랑수아 라피토와 면담했다. 교황은 주교에게 자신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며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라피토 주교는 이를 믿지 않았다. 3월 14일, 라피토 주교가 교황의 조카에게 교황이 프랑스 총리 기욤 뒤부아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도록 설득하려 할 때, 클레멘스 11세는 병이 들었다. 그러나 클레멘스 11세는 섬망 상태였고 그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3월 16일, 사순 제4주일에 교황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퀴리날레 궁전의 개인 예배당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그날 약을 복용했지만 흉통을 느꼈고 방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호흡 곤란을 겪었다.[11]

다음 날, 클레멘스 11세는 개인 예배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후 라벤나 대주교 제로니모 크리스피를 포함한 여러 고위 성직자들과 만났다. 그러나 정오 무렵, 그는 갑자기 심한 오한과 함께 매우 강한 에 휩싸여 곧바로 침대에 누웠고, 저녁 식사도 거부했다. 그의 맥박은 매우 느렸고 피가 섞인 걸쭉한 액체를 토해냈다. 그날 밤 잠을 잘 수 없었지만 열은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나 다음 날 열이 훨씬 더 심하게 재발했고, 맥박이 불규칙해졌다. 은 거품이었고, 다시 피가 섞여 그의 폐에 문제가 있음을 나타냈고, 의사들은 그의 상태가 치명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멘스 11세는 고해성사를 하고 신앙고백을 한 후 오후 8시에 성찬을 받았다. "왕위 계승자"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임종하는 교황을 만나려고 했지만, 교황의 위독한 상태를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날 밤, 교황청 사크리스탄 니콜로 아고스티노 델리 아바티 올리베리, 포르피리오 주교가 종부성사를 집행했다.[11]

3월 19일, 열이 심하게 재발했고, 클레멘스 11세는 눈이 흐려지고 호흡이 점점 약해지면서 말하는 능력을 서서히 잃었고, 정오 직후 사망했다.[11]

5. 문화적 유산

요한 23세는 저서 "영혼의 일기"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준비하던 중 보편 기도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강력히 권장하였다.

참조

[1] 뉴스 Fr Lombardi: Papal journey a blessing for all Albanians http://en.radiovatic[...] 2014-09-21
[2] 웹사이트 Family Tree of Giovanni Francesco Albani https://gw.geneanet.[...] null
[3] 서적 The Catholic Encyclopedia Robert Appleton Company 2010-12-05
[4] 서적 Papal Genealogy: The Families and Descendants of the Popes https://books.google[...] McFarland
[5] 서적 Catholics and Sultans: The Church and the Ottoman Empire 1453–1923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6] 학술지 Crypto-Christianity in the Balkan Area under the Ottomans
[7] 서적 I Kanun delle montagne albanesi: Fonti, fondamenti e mutazioni del diritto tradizionale albanese https://books.google[...] Edizioni di Pagina
[8] 웹사이트 Pope Benedict XIII (1724–1730): Consistory of December 9, 1726 (VI) http://www2.fiu.edu/[...]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 2022-07-18
[9] 서적 Bonnie Prince Charlie: A Biography of Charles Edward Stuart Unwin Hyman 1988
[10] 학술지 Vatican Syriac Manuscripts: Volume 1 http://syrcom.cua.ed[...] 2011-04-17
[11] 웹사이트 Sede Vacante 1721 http://www.csun.edu/[...] CSUN 2015-09-23
[12] 백과사전 Clement XI pope https://www.britanni[...]
[13] 백과사전 신해박해 [辛亥迫害] null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
[15]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
[16]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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