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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 마을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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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은 1968년 2월 22일, 청룡 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하미 마을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35명의 주민들이 사망했으며, 희생자 대부분은 노인, 여성, 아이들이었다. 생존자들은 한국군이 먹을 것을 나눠주겠다며 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한국군은 시신을 매장하고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2000년 12월, 하미 마을에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가 세워졌으나 비문 내용으로 논란이 있었다. 2018년에는 시민 평화 법정이 열려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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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 마을 학살 사건
개요
위치꽝남 성 남베트남 하미 마을
목표하미 마을 주민
날짜1968년 2월 25일
유형대량 학살
사망자135명
가해자대한민국 해병대 (ROK Marines)
이미지
꽝남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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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68년 2월 당시 청룡부대베트남 캄란 만에 주둔하고 있었다. 청룡부대의 작전 구역인 베트남 중남부 지방은 당시 남북 베트남의 분계선이었던 북위 17도선에 인접하여 베트남 인민군,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등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지역이었다.[16]

베트남 전쟁 당시 이 시기는 구정 대공세가 격렬하던 때로, 후에를 비롯한 중부의 도시들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점령하였고, 남베트남군과 미군, 한국군은 이 지역을 재점령하기 위해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19]

한편, 청룡부대는 작전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1968년 2월 12일, 퐁니·퐁넛 양민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주월 미군 사령관에게 보고되었고, 이는 한미 양국 간의 외교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17][5] 베트남 정부의 전쟁범죄조사보고서는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가 5,000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하미 마을 학살은 1968년 2월 25일[6], 청룡부대가 다낭 지역을 중심으로 호이안 전역(戰域)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발생하였다.[18]

3. 학살 발생

1968년 2월 22일(음력 1월 24일), 청룡부대 3개 소대가 베트남 꽝남성의 하미 마을을 포위하고 진입하여 주민들을 세 곳으로 나누어 모았다.[20]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마을 주민들은 한국군이 이전처럼 음식을 나눠주기 위해 모으는 것이라고 여겨 별다른 저항이나 도주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21][23] 이전까지 한국군과 마을 주민들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22][2]

그러나 장교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은 모인 주민들을 향해 자동소총과 유탄 발사기, 수류탄 등으로 공격을 시작했으며[20][24], 약 2시간 만에 마을 주민 135명이 학살당했다.[20] 희생자 대부분은 노인, 여성, 아이들이었고, 총을 들 만한 나이의 남성은 세 명에 불과했다.[24]

대한민국 인류학자 권헌익은 이 학살이 베트콩(VC)의 박격포 공격으로 한국 해병대 장교 및 병사들이 사망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루어졌다고 분석했다.[1] 학살 이후 한국군은 불도저를 동원하여 희생자들의 시신과 무덤을 훼손하고 마을을 파괴했다는 증언이 있으며[20][26][2], 네이팜탄을 사용하여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

이 사건은 퐁니·퐁넛 학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으며[5][6], 미군 내부에서는 한국군의 작전 지역 조정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8] 2000년 12월, 하미 마을에는 희생자 135명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1]

3. 1. 학살 주장에 대한 내용

1968년 2월 22일(음력 1월 24일), 청룡부대 소속 3개 소대가 꽝남성 하미 마을을 세 방향에서 포위하며 진입하여 마을 주민들을 세 곳으로 나누어 모았다.[20]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주민들은 한국군이 이전처럼 음식을 나눠주기 위해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별다른 저항이나 도주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21][23] 학살 이전까지 한국군과 마을 주민들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으며, 일부 주민들은 부대원들을 기억할 정도였다.[22][2] 생존자 팜티호아는 "한국군들이 우리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도망을 가지 그렇게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모이지 않았을 거야."라고 증언했다.[23]

그러나 한국군은 모인 주민들을 향해 장교의 지시에 따라 자동소총과 유탄 발사기, 수류탄 등으로 공격을 시작했다.[20][24] 약 2시간 동안 이어진 학살로 마을 30가구 주민 135명이 목숨을 잃었다.[20] 희생자 대부분은 노인, 여성, 아이들이었으며, 총을 들 만한 나이의 남성은 단 3명뿐이었다.[24] 한 생존자는 한국군이 가족에게 지하 대피소로 들어가라고 명령한 뒤 수류탄을 던져 살해하거나 부상을 입혔으며, 심지어 유아를 표적으로 삼기도 했다고 증언했다.[2]

대한민국 인류학자 권헌익에 따르면, 이 학살은 베트콩(VC)의 박격포 공격으로 한국 해병대 포병 기지에서 장교 1명, 하사관 1명, 사병 4명이 사망한 것에 대한 보복 성격으로 이루어졌다. 학살 당일 공격 전 2시간 동안 155mm 포격이 있었고, 헬리콥터 2대가 마을 상공을 선회하며 탈출하려는 주민들에게 기관총을 발사했다. 이후 헬리콥터와 트럭으로 약 200명의 해병대원이 마을로 투입되어 더 많은 민간인을 근거리에서 살해했다.[1][1]

학살이 끝난 날 밤, 살아남은 주민들과 인근 미라이 지역에서 온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소속 병력들이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을 만들었다. 훼손이 심한 시신들은 한 곳에 모아 묻었다.[24] 1969년 11월, 미군 조사단은 폐허가 된 하미 마을에서 부패한 시신으로 가득 찬 구덩이를 발견하였다.[25] 생존자들은 다음 날 한국군이 불도저를 동원해 돌아와 무덤과 미처 묻지 못한 시신들을 밀어버리고 마을 전체를 평탄화하며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고 주장했다.[20][26][2] 권헌익은 해병대가 불도저로 얕은 무덤을 밀었을 뿐 아니라, 이후 헬리콥터에서 네이팜탄을 사용하여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고 지적하며, 시신과 무덤에 대한 이러한 공격이 사건의 가장 비인도적인 측면으로 기억된다고 평가했다.[1][4]

부상당한 생존자들은 다낭 항에 정박 중이던 독일 의료선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26] 그러나 이들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장악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난민촌 입주가 거부되었고, 일부는 다낭 같은 대도시에서 걸인이 되거나 복수를 위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전투원이 되기도 하였다.[27]

2000년 12월, 하미 마을에는 학살 희생자 135명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졌다.[1]

3. 2. 학살 주장의 근거

학살 생존자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한 생존자는 한국군이 마을에 들어와 가족에게 지하 대피소로 피신하라고 명령한 뒤, 수류탄을 던져 가족들을 살해하거나 부상을 입혔으며, 심지어 영아까지 표적으로 삼았다고 증언했다.[2] 다른 증언에 따르면, 학살은 마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일제히 사격을 가하거나 수류탄을 던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7]

학살은 해병대 제2사단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알려졌다.[2] 인류학자 권헌익은 이 학살이 베트콩 (VC)의 박격포 공격으로 한국 해병대 포병 대위, 상사 각 1명과 사병 4명이 사망한 것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분석했다.[1] 그의 연구에 따르면, 학살 당일 공격 약 2시간 전부터 155mm 포격이 있었고, 헬리콥터 2대가 마을 상공을 선회하며 탈출하려는 주민들에게 기관총을 발사했다. 이후 약 200명의 해병대가 헬리콥터와 트럭으로 마을에 투입되어 민간인들을 근거리에서 살해했다.[1]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 어린이, 노인으로 총 135명에 달했으며, 30가구가 피해를 입었다.[1][3] 일부 마을에서는 단 3명만 생존하고 나머지는 모두 살해당하기도 했다.[7] 권헌익은 학살 이후 해병대가 불도저를 이용해 희생자들의 시신을 얕은 구덩이에 서둘러 매장했으며, 이후 헬리콥터에서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고 주장했다.[1] 그는 시신과 무덤에 대한 이러한 훼손이 사건의 가장 비인간적인 측면으로 기억된다고 지적했다.[4]

2000년 12월, 하미 마을에는 학살 희생자 135명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졌다.[1]

2018년 4월, 대한민국 내 변호사 단체와 베트남 관련 시민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베트남 시민 평화 법정이 열렸다.[13] 이 모의 법정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미 마을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 등이 원고로 참여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법정은 판결을 통해 해당 사건이 "중대한 인권 침해이며, 전쟁 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다.[14]

4. 학살 이후

학살 이후 해병대는 불도저를 이용하여 희생자들의 시신을 얕은 무덤에 매장했으며, 이후 헬리콥터에서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증거를 인멸하려 시도했다.[1] 인류학자 권헌익은 시신과 무덤에 대한 이러한 훼손이 사건에서 가장 비인도적인 측면으로 기억된다고 지적했다.[4] 한국군은 다음 날 다시 마을로 돌아와 마을을 완전히 파괴했다.[2]

이 사건 이후 마을 주변 지역은 베트콩의 활동 거점이 되었으며, 주민들은 1973년 한국군이 철수할 때까지 저항을 이어갔다.[4] 이 지역은 나중에 베트남 인민군에 의해 인민군 영웅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한편, 미군 내부에서는 하미 마을 학살과 퐁니·퐁넛 학살 등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한국군을 완전한 후방 부대로 돌리거나 베트콩이 완전히 장악하여 민간인 피해를 문제 삼지 않을 지역으로 재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8]

2017년 7월 10일자 『뉴욕 타임스』 사설은 베트남 정부가 미래 지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 대한민국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상황을 지적하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미 사람들에게 그 비참한 과거는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9]

4. 1. 위령비 건립과 논란

2000년 12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기부로 하미 마을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착공되었다. 그러나 완공을 앞둔 2001년, 월남참전전우복지회 측은 비문에 새겨진 내용을 문제 삼아 수정을 요구했다.[22] 비문에는 "1968년 음력 1월 26일 청룡병사들이 미친 듯이 와서 양민을 학살했다"는 등 한국군의 학살 행위를 명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28][10][11]

하미 마을 주민들과 디엔증사 인민위원회 주석 응웬반하이는 "고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 돈으로 세웠으면 증오비를 세웠지 위령비를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며 비문 수정을 거부했다.[29][10][11] 한국 정부는 주 베트남 대사관을 통해 베트남 정부에 수정을 요청했고, 베트남 정부는 지방 당국에 주민 설득을 지시하기도 했다.[10][11]

결국 비문 내용은 수정되지 않았으나, 연꽃 그림이 그려진 대리석 판으로 비문을 덮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22][10][11] 하미 주민들은 이를 "역사에 뚜껑을 덮는 짓"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0][11]

이후 위령비 건립 및 관리 문제를 둘러싸고 위령비 건립을 주도한 김문구 월남참전전우복지회 이사장과 구수정 한국-베트남 평화재단 이사 간의 갈등이 이어졌다.[30] 김 이사장은 구 이사 측이 평화기행 프로그램에 하미 위령비 방문을 포함시킨 것을 두고 "어렵게 세운 위령비를 상업적으로 이용한다"고 비판했다.[30] 반면 구 이사는 "기념물은 세운 이후 특정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며, 평화의 소녀상을 예로 들어 반박했다.[30]

이러한 갈등의 근본 원인은 한국군에 의한 학살 진위 여부에 대한 시각 차이에 있었다. 김 이사장은 2000년 현지 조사 당시 한국군 학살이라고 단정하는 주민이 없었고 마을이 격전지였음을 들어 한국군 학살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30] 또한 위령비는 하미 마을 희생자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한국군 5,000여 명을 함께 위로하기 위해 3만달러를 기부하여 세운 것이라고 밝혔다.[30] 그는 비문 내용 때문에 준공식을 보이콧했으며, 디엔증사 공무원들이 비문 삭제를 빌미로 한국 관광 등의 접대를 요구했다고 주장하며, 비문이 삭제되지 않고 덮인 것에 대해 사기라고 비판하며 베트남 공무원들을 고소하기도 했다.[30]

이에 대해 구 이사는 김 이사장의 주장이 결국 베트남 공무원들에게 향응을 제공해 비문을 수정하려 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고 반박하며, 하미 마을 학살은 국내 연구와 시민참여재판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30]

2001년 당시 주 베트남 대한민국 대사관 역시 디엔증사에 비문 시정을 요청했으며, 월남참전전우복지회와 당시 통역을 맡았던 구수정 이사 등에게 사실 확인 및 협조를 요청했으나, 사안에 대한 양측의 입장 차이가 커 사업 초기부터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보도도 있었다.[31]

4. 2. 위령제

하미 마을 사람들은 매 해 음력 1월 24일을 전후로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2013년 3월 6일 45주기 위령제가 열렸고, 학살 이후 최초로 한국인이 위령제에 참가하였다.[32]

4. 3. 시민평화법정

2018년 4월 22일부터 23일까지 민변과 한베평화재단을 비롯한 여러 시민사회 단체들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을 개최하였다.[33][13] 이 법정은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과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 응우옌 티탄(동명이인)이 원고로 나서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34]

시민평화법정의 재판부는 원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해당 사건을 "중대한 인권 침해이며, 전쟁 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으로 규정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다.[14] 또한 국가배상법에 따른 배상을 판결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진상조사를 권고하였다.[35][36]

시민평화법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모의법정이었지만, 베트남 전쟁 시기 학살 문제를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37] 법정 측은 공소 시효를 없애는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37]

한편, 민변은 1968년 당시 퐁니·퐁넛 마을 사건을 조사하였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자료 공개를 청구하는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38] 국정원은 처음에는 "외교적 불이익"을 이유로 정보 공개를 거부하다가 법원의 공개 명령을 받자, 다시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자료 공개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39]

5. 진상 규명 노력과 과제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은 1968년 2월 25일, 꽝남성 하미 마을에서 해병대 제2사단 (청룡부대)에 의해 민간인 135명이 희생된 사건이다.[6] 이는 같은 부대가 불과 며칠 전 인근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을 일으킨 직후 발생했으며[5][6], 베트콩(VC)의 공격에 대한 보복 성격으로 자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 사건은 베트남 전쟁 중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이후 진상 규명 노력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 인정 및 사과 등 해결해야 할 과제를 남기고 있다.

5. 1. 진상 규명 노력

민변과 한베평화재단을 비롯한 여러 시민사회 단체들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 특히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33]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8년 4월 22일부터 23일까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33] 이 법정은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과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응우옌 티탄(동명이인)이 원고로 참여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34] 시민평화법정 재판부는 원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국가배상법에 따른 배상을 판결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진상 조사를 권고하였다.[35][36] 비록 법적 구속력이 없는 모의법정이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 베트남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이 보편적 인권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 공론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시민평화법정 측은 공소시효를 없애는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37] 판결에서는 해당 사건들이 "중대한 인권 침해이며, 전쟁 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이 있다는 점이 언급되었다.[14]

또한, 민변은 1968년 중앙정보부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을 조사했던 자료의 공개를 요구하는 정보 공개 청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38] 국가정보원은 처음에는 "외교적 불이익"을 이유로 정보 공개를 거부했으나, 법원의 공개 명령 판결 이후에는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다시 정보 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39]

2017년 7월 10일자 『뉴욕 타임스』 사설에서는 베트남 정부가 미래 지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해결에 더 집중하는 상황을 지적하며 "하미 마을 사람들에게 그 비참한 과거는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9]

5. 2. 과제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은 대한민국 해병대 제2사단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베트콩 (VC)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추정되는 이 학살은[1] 생존자 증언과 연구를 통해 구체적인 과정이 드러나고 있다. 2000년 12월, 학살로 희생된 여성, 어린이, 노인 등 민간인 135명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하미 마을 현지에 세워졌다.[1][1][3] 그러나 사건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책임 인정이나 사과 등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2017년 7월 10일자 『뉴욕 타임스』 사설은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 해결을 강조하면서도,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하며, 하미 마을 주민들에게는 이 비극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상기시켰다.[9]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로 남아있다.

참조

[1] 서적 After the Massacre: Commemoration and Consolation in Ha My and My Lai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 웹사이트 1968 - the year that haunts hundreds of women https://bbc.co.uk/ne[...] 2020-09-14
[3] 서적 Everyday Life in Southeast Asia https://archive.org/[...] Indiana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Anatomy of US and South Korean Massacres in the Vietnamese Year of the Monkey, 1968 https://apjjf.org/-H[...]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 2018-06-07
[5] 뉴스 미국의 관심은 ‘학살은폐 책임’ 최초공개된 미국 비밀보고서의 의미… 정부는 참전군인의 명예를 위해서 진상조사에 나서라 http://h21.hani.co.k[...] 2011-02-23
[6] 문서 Kwon, p. 1.
[7] 뉴스 韓国 軍も企業もベトナム参戦 http://www.asahi.com[...] 2011-02-23
[8] 뉴스 편견인가, 꿰뚫어 본 것인가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의 보고서 “쿠앙남성 주둔 한국군은 무능·부패·잔혹” http://h21.hani.co.k[...] 2011-02-09
[9] 뉴스 Vietnam’s South Korean Ghosts https://www.nytimes.[...] 2017-07-10
[10] 문서 野田正彰「ベトナム人虐殺を封印する韓国人の病理」『新潮45』2014年2月号、p39-40。
[11] 문서 伊藤正子『戦争記憶の政治学: 韓国軍によるベトナム人戦時虐殺問題と和解への道』平凡社,2013年、ISBN 4582441203
[12] 웹사이트 韓国軍による虐殺が50年後も隠蔽されている ベトナム・ハミ村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22-09-22
[13] 웹사이트 「ベトナム民間人虐殺市民平和法廷」ソウルで開かれる http://japan.hani.co[...] 2019-07-07
[14] 웹사이트 “미투도 김영란법도 ‘노’라고 말할 권리 위한 것” http://www.hani.co.k[...] 2019-07-07
[15] 문서 윤충로,한국의 베트남전쟁 기념과 기억의 정치,사회와 역사,제86집,2010,163p
[16] 웹사이트 청룡부대의 월남 참전 http://www.haebyeong[...]
[17] 뉴스 여기 한 충격적인 보고서가 있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0-11-14
[18] 웹사이트 해병대신문 9호 - 청룡부대 파월 특집 http://www.rokmcnews[...] 2012-01-12
[19] 문서 Anatomy of a War by Gabriel Kolko
[20] 서적 학살, 그 이후 Archive
[21] 서적 학살, 그 이후 Archive
[22] 서적 미안해요! 베트남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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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웹사이트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판결 https://blog.naver.c[...] 2018-04-22
[36] 뉴스 시민평화법정 대한민국, 베트남학살 책임인정·배상하라 https://www.lawtimes[...] 법률신문 2018-04-23
[37] 뉴스 정식재판 땐 소멸시효 난관…“특별법 추진” http://www.hani.co.k[...] 한겨레 2018-04-23
[38] 뉴스 베트남 민간인 학살 어렵게 입 뗀 생존자 “참상 알려져서 다행”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18-04-26
[39] 뉴스 국정원 또 “베트남 민간인학살 정보 비공개”…법원 판단도 무력화 http://www.hani.co.k[...] 한겨레 201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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