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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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암은 1876년에 태어나 1951년에 입적한 한국의 승려이다. 9세에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22세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으며, 오대산 상원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27년간 머물렀다. 그는 한국 불교의 고위 지도자 직책을 역임했으며, 수행과 인과응보 사상을 강조했다. 한암 스님의 가사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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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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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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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한암 중원 (漢巖重遠) |
출생 이름 | 방 (Bang) |
국적 | 한국 |
출생일 | 1876년 3월 27일 |
출생지 | 화천군, 강원도, 한국 |
사망일 | 1951년 3월 21일 (74세) |
사망지 | 상원사, 오대산, 대한민국 |
종교 | 불교 |
종파 | 대한불교조계종 |
직함 | 대종사 (大宗師) |
스승 | 경허 성우 (鏡虛 惺牛) (1846-1912) |
경력 | 조계종 종정 (宗正) 상원사 선방 수좌 |
2. 생애
9세에 서당에서 공부했으며, 22세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2]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성우의 설법을 들었고, 30세가 되던 1905년에는 양산 통도사 내원선원의 관실이 되었다.
1910년에 맹산 우두암에서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금강산 지장암, 서울 봉은사를 거쳐 50세 때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27년간 동구 밖을 나가지 않았다.
1951년 가벼운 병을 얻은 지 1주일 만에 76세로 입적했다.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신 뒤 가사 장삼을 정제하고 선상에 단정히 앉아 참선하는 듯이 숨을 거두었다.[11][12]
2. 1. 출가 이전
9세에 서당에서 공부했으며, 20세에 집을 나와 승려가 되었다. 금강산의 장안사(長安寺)에 들어가 행름 금월을 은사로 모셨다. 얼마 후 신계사(神溪寺)에서 학업을 계속했다.[1]몇 년 후, 고려 시대의 선승인 지눌의 저서 『수심결』의 "부처를 자신 밖에서 찾지 말라"는 구절을 접하고 1899년에 첫 깨달음을 경험했다.[1]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성우를 만났다. 경허는 한암을 만나자 금강경 구절을 인용했다.[1]
이 말을 듣고 한암은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고, "온 우주가 한 눈에 보이고, 듣고 보이는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한암은 경허 스님 밑에서 공부하거나, 그 지역의 다른 선원에서 수행하며 안거를 보냈다. 1903년 여름 안거를 해인사에서 함께 보냈고, 그 해 가을 경허는 혼자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1912년에 입적했다. 22세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30세가 되던 1905년에는 양산 통도사 내원선원의 관실이 되었다.[11][12]
2. 2. 출가와 수행
9세에 서당에서 공부했으며, 22세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2]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성우의 설법을 들었고, 30세가 되던 1905년에는 양산 통도사 내원선원의 관실이 되었다.1910년에 맹산 우두암에서 수도했고, 개오의 경지에 들었다. 금강산 지장암, 서울의 봉은사를 돌다가 50세 때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27년간 한번도 동구 밖을 나가지 않았다.
한암은 1899년에 첫 깨달음을 경험했다. "부처를 자신 밖에서 찾지 말라"는 가르침은 평생 그의 수행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첫 깨달음을 얻은 후, 한암은 남쪽으로 내려와 수도암에서 경허를 만났다. 경허는 한암에게 금강경 구절을 인용하며 설법했고, 한암은 이 말을 듣고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온 우주가 한 눈에 보이고, 듣고 보이는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한암은 경허의 가르침을 받거나, 다른 선원에서 수행하며 안거를 보냈다. 1903년 여름, 해인사에서 경허와 함께 안거를 보냈고, 그해 가을 경허는 북쪽으로 떠나 1912년에 입적했다.
1904년, 29세의 한암은 통도사의 선원 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전을 공부하던 중 스스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을 발견하고, 선원 문을 닫고 우두암으로 수행을 떠났다. 1912년까지 그곳에 머물던 중, 불을 지피다가 세 번째 깨달음을 얻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2. 3.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1910년에 맹산군 우두암에서 수도하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서울 봉은사를 거쳐 50세 때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27년간 동구 밖을 나가지 않았다.[11][12]한암 스님은 수행 정진으로 유명했으며, 생애 마지막 25년 동안 오대산 상원사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암 스님의 편지를 보면, 1926년에서 1933년 사이에 최소 두 번 오대산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이후 몇 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던 이유는 오대산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에 대한 책임과 건강 악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암 스님은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게 될 서울행을 여러 차례 거부했으며, 사람들은 이것을 그가 오대산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으로 오해한 듯하다. 한암 스님은 일본 경찰서장과의 대화에서 치과 진료를 위해 서울에 갔고, 불국사를 보기 위해 남쪽으로 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3] 이는 오랜 기간 편지를 주고받았던 경봉 스님에 의해 확인되었는데, 경봉 스님은 인근 통도사에 거주하며 일기에 한암 스님이 며칠 동안 그를 방문하고 오대산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4]
2. 4. 종단 활동
한암 스님은 이 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묘향산 남쪽 70~80km 떨어진 맹산 지역의 여러 사찰에서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향산은 당시 주요 불교 중심지였고, 한암 스님이 경허 스님의 제자이자 통도사 선원장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 스님들이 그에게 비슷한 역할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남쪽에는 만공, 북쪽에는 한암"이라는 말도 이 시기에 생겼을 수 있다. (당시 만공 스님은 수덕사에 있었다.)한암 스님은 1922년까지 금강산의 안장사에 있었고,[2] 1926년에는 서울 외곽의 봉은사에 있었다. 이후 오대산 상원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인근 월정사 스님들이 그에게 머물면서 가르침을 주기를 요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암 스님은 수행 정진으로 유명했으며, 생애 마지막 25년 동안 오대산 상원사를 떠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암 스님의 편지를 보면 1926년에서 1933년 사이에 최소 두 번 오대산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오대산에 머물렀던 이유는 오대산 수행승들에 대한 책임과 건강 악화 때문으로 보인다. 한암 스님은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게 될 서울행을 여러 차례 거부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그가 오대산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으로 오해한 듯하다. 한암 스님은 일본 경찰서장과의 대화에서 치과 진료를 위해 서울에 갔고, 불국사를 보기 위해 남쪽으로 갔다고 밝혔다.[3] 이는 경봉 스님과의 편지 왕래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경봉 스님은 통도사에 거주하며 한암 스님이 며칠 동안 방문하고 오대산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4]
이 기간 동안 한암 스님은 본인의 동의 없이 한국 불교의 고위 지도자 직책에 여러 차례 선출되었다. 1929년에는 조선 불교 승려 대회에서 한국 불교 7대 종정 중 한 명으로, 1934년에는 선학원 부회장, 1936년에는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종단 재편성으로 다시 종정에 선출되었고, 1945년 사임했지만 1948년에 다시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2. 5. 입적
1951년 가벼운 병을 얻은 지 1주일 만에 76세로 입적했다.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신 뒤 가사 장삼을 정제하고 선상에 단정히 앉아 참선하는 듯이 숨을 거두었다.[11][12]한암은 그의 죽음에 이르게 된 사건들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 중, 1951년 1월 중국군의 공세가 유엔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빠르게 남진하고 있었다. 한국군은 진격하는 중국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오대산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월정사가 불타는 모습이 보이던 중 한국군들이 상원사에 도착했다. 그들은 임무를 설명하며, 모든 사람에게 짐을 챙겨 즉시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한암은 법당으로 돌아가 정식 가사를 입고 앉아, 중대장에게 건물들을 불태우라고 말했다. 한암은 자신의 임무는 절을 지키는 것이고, 중대장의 임무는 절을 불태우는 것이므로, 그들은 각자의 일을 하는 것이기에 아무런 갈등(또는 악업)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대장은 한암을 떠나게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전쟁 중 명령 불복종의 위험을 감수하고 대신 뜰에 있는 모든 나무 문과 창문을 모아 태웠다. 이렇게 상원사는 이 지역에서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찰 중 하나가 되었다.[5][6]
한암은 두 달 후인 1951년 3월 21일, 짧은 병환 끝에 입적했다.
3. 한국전쟁과 상원사
한국전쟁 당시 북한 게릴라군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월정사를 불태운 국군이 상원사까지 태우려 하였다. 이때 승려들에게 절을 불태워야 하니 하산하라고 권하는 군인들 앞에서 한암은 가사를 갖추어 입고 법당에 정좌한 채, "내 몸을 함께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겠다"며 하산을 거부하였다. 군인들은 하는 수 없이 절의 모든 문짝을 떼어 쌓아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내어서 절이 불타는 것처럼 보이게 한 뒤 철수했고, 상원사는 불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선우휘의 소설 《상원사》는 이 일을 다룬 소설이다.[5][6]
1951년 1월 중국군의 공세가 유엔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빠르게 남진하고 있을 때, 한국 육군은 진격하는 중국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오대산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월정사가 불타는 모습이 보이던 중 한국 군인들이 상원사에 도착하여, 그들은 임무를 설명하며, 모든 사람에게 짐을 챙겨 즉시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한암은 법당으로 돌아가 정식 가사를 입고 앉아, 중대장에게 건물들을 불태우라고 말했다. 한암은 자신의 임무는 절을 지키는 것이고, 중대장의 임무는 절을 불태우는 것이므로, 그들은 각자의 일을 하는 것이기에 아무런 갈등(또는 악업)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대장은 한암을 떠나게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전쟁 중 명령 불복종의 위험을 감수하고 대신 뜰에 있는 모든 나무 문과 창문을 모아 태웠다. 이렇게 상원사는 이 지역에서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찰 중 하나가 되었다.[5][6]
한암은 두 달 후인 1951년 3월 21일, 짧은 병환 끝에 입적했다.
4. 사상과 가르침
한암 스님은 상원사 선원장으로서 승려의 전통적인 계율을 지키고 수행에 정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불교 수행의 다양한 방법들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았으며, 인과응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7]
4. 1. 수행법
한암 스님은 불교 승려의 전통적인 계율을 지키는 근면함과 수행의 진실함으로 알려져 있었다.[7] 그는 상원사 선원장으로서, 참선 기간 동안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고 의식을 배우도록 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그처럼 긴 참선 기간이 실제로 그러한 것들을 공부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스님들이 참선, 염불, 경전 이해, 필요한 의식 수행, 사찰 유지 및 보호, 이 다섯 가지에 능숙해야 한다고 말했다.[7]그는 화두(公案)와 묵조선(默照禪)으로 알려진 참선 방법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어서 꽤 유연했으며, 어떤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본질적으로 더 좋거나 나쁘다고 강조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방법이 학생에게 가장 적합한지에 달려 있었다. 한암 스님은 불교 수행의 다양한 방법들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21 선문답"이라는 글에서[8] 그는 과거의 훌륭한 선사들이 다양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화두와 반조(Turning the light around)를 모두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예를 제시했으며, "스님들이 실천해야 할 다섯 가지"에서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어떻게 차별적인 의식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게 하고, 따라서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지 설명했다.
"화두를 들거나 반조를 통해서 모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한쪽을 얕다고 하고 다른 쪽을 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전 선사들이 삶을 통해 이를 보여준 모든 경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 중 누구도 화두를 드는 것과 반조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행자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것을 배웠는가?!"
일반적으로, 한암 스님의 수행에 대한 관점은 절대적인 방법보다는 "방편"에 가까워 보인다. 예를 들어, "21 선문답"에서 어떤 화두로 수행하는 것이 가장 좋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한암 스님은 전통적인 화두 수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대답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즉시 받아들여 사용한다."
4. 2. 인과응보
한암 스님은 인과응보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이는 그의 글에서도 드러난다.[9]1947년 2월 22일, 상원사에서 두 어린 스님이 촛불을 켜둔 채 자리를 비워 큰 화재가 발생했다. 한암 스님은 이를 특정인의 잘못이 아닌, 자신과 절 전체의 인과응보로 설명했다.[9]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일제강점기에 결혼한 스님들과 전통 계율을 지킨 스님들 간의 갈등으로 조계종 내 분란이 심했다. 1949년 가을, 한암 스님은 모든 문제를 조화롭게 해결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0] 그는 경봉 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종단과 불교의 흥망성쇠는 인과응보에 달려있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한암 스님은 경봉 스님에게 인과응보를 무시하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조언했다.
5. 관련 문화재
한암스님 가사는 등록문화재 제645호이다.
참조
[1]
서적
Diamond Sūtra (金剛般若波羅密經: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sūtra)
T.8, no.235
[2]
간행물
"Sŏnjung banghamlokso" (Address to the Assembly of Sunims at KŏnbongTemple)
1996
[3]
논문
"Ikeda-kiyoshi keibu kyokuchō wo Hōkangan zenji fu hō (池田淸警務局長を方漢巖禪師ふ訪: Police Superintendent Ikeda-kiyoshi visits Sŏn Master Pang Hanam)."
1934
[4]
서적
Samsogul ilji (三笑窟 日誌: Samsogul Diary)
Kŭngnak sŏnwŏn
1992
[5]
웹사이트
"'상원사에 불을 지르란 한암스님' 한마음선원장 대행스님 입적"
http://newsplus.chos[...]
2010-08-01
[6]
웹사이트
Hanam Sunim
http://www.woljeongs[...]
[7]
서적
Son Master Pang Hanam: A Preliminary Consideration of His Thoughts According to the Five Regulations for the Sangha (in Makers of Modern Korean Buddhism)
SUNY
2010
[8]
서적
Hanam ilballok(漢巖 一鉢錄: The One Bowl of Hanam)
Minjoksa
1996
[9]
서적
A Study of the letters of Korean Seon Master Hanam
Dongguk University
2002
[10]
뉴스
Daehoesojibul tŭkmyŏng (Special Order to the Assembly)
Bulgyo shinbo, p. 1
1949-10-05
[11]
영상
"<특집> 한암스님 마음의 달을 비추다"
http://www.btn.co.kr[...]
BTN불교TV
2018-05-22
[12]
저널
방한암의 선적(禪的) 지향점과 역할의식에 관한 연구
http://philinst.snu.[...]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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