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한준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한준겸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활동했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을 지지하다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서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열왕후의 아버지이며, 병자호란 때 딸들이 자결하는 비극을 겪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57년 출생 - 오다 노부타다
    오다 노부타다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며 후계자로서 기대를 모았으나 혼노지의 변에서 아버지와 함께 최후를 맞이한 무장이다.
  • 1557년 출생 - 도쿠이 미치유키
    무라카미 수군 출신인 도쿠이 미치유키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무장으로, 임진왜란 중 사망했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사망 시기는 불분명하다.
  • 1627년 사망 - 자한기르
    악바르 대제의 아들로 무굴 제국의 제4대 황제였던 자한기르는 정치적 혼란과 예술 부흥을 동시에 이끌었지만, 왕위 계승 분쟁, 황후의 영향력, 시크교와의 갈등, 그리고 그의 사생활과 약물 중독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 1627년 사망 - 천계제
    명나라 제15대 황제 천계제는 문맹으로 정치에 무관심하여 환관 위충현과 객씨의 섭정 아래 꼭두각시 황제로 전락, 위충현의 폭정과 부패, 후금의 팽창과 맞물려 명나라 몰락을 가속화시킨 인물이다.
  • 조선 인조 - 인조반정
    인조반정은 1623년 서인 세력이 광해군의 폭정을 명분으로 일으킨 쿠데타이며, 광해군 폐위 후 인조가 즉위했으나 서인 세력 간의 갈등과 외침으로 조선 사회에 혼란을 가져왔다.
  • 조선 인조 - 정축하성
    정축하성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맞서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으나 청군의 빠른 진격과 보급 부족으로 인조가 항복을 결정하며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된 사건이다.
한준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한준겸
작위서평부원군
본관청주 한씨
자녀2남 6녀
아버지한효윤
어머니신금희
배우자회산부부인 창원 황씨
출생일1557년
사망일1627년 7월 17일 (음력)
익지(益之)
유천(柳川)
시호문익(文翼)
원래 이름韓浚謙

2. 생애

선조15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주서, 봉교, 전적을 지냈다. 금천 현감으로 있을 때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호당(湖堂)에 선발되고 1592년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임진왜란 중에 강원도사, 사서, 원주목사, 지평, 필선, 필선, 정언, 교리, 검상, 사인, 부응교, 사간, 집의 등을 거쳤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명나라 제독 마귀를 도와 말먹이와 식량 등을 보급하였다.

그 후 경기감사, 대사성, 경상감사, 병조참판, 전라감사, 부제학을 거쳐, 1605년 호조판서가 되었다. 선조가 죽을 때 한준겸을 비롯하여 일곱 신하들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하였는데,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반역죄로 몰려 죽게 되자 한준겸도 1617년 충주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에 올라 1621년 5도 도원수가 되어 국경 지방을 수비하는 데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사위인 인조가 즉위하자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황성의 딸 회산부부인 황씨와의 사이에서 인열왕후를 포함한 2남 4녀를, 첩실에게서 2녀를 두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둘째 딸인 여이징의 처 한씨, 셋째 딸인 정백창의 처 한씨와, 서녀인 여섯째 딸 진원군 이세완의 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1586년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주서, 봉교, 전적을 지냈다. 금천 현감으로 있을 때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호당(湖堂)에 선발되고 1592년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임진왜란 중에 강원도사, 사서, 원주목사, 지평, 필선, 필선, 정언, 교리, 검상, 사인, 부응교, 사간, 집의 등을 거쳤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명나라 제독 마귀를 도와 말먹이와 식량 등을 보급하였다.

그 후 경기감사, 대사성, 경상감사, 병조참판, 전라감사, 부제학을 거쳐, 1605년 호조판서가 되었다. 선조가 죽을 때 한준겸을 비롯하여 일곱 신하들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하였는데,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반역죄로 몰려 죽게 되자 한준겸도 1617년 충주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에 올라 1621년 5도 도원수가 되어 국경 지방을 수비하는 데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사위인 인조가 즉위하자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황성의 딸 회산부부인 황씨와의 사이에서 인열왕후를 포함한 2남 4녀를, 첩실에게서 2녀를 두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둘째 딸인 여이징의 처 한씨, 셋째 딸인 정백창의 처 한씨와, 서녀인 여섯째 딸 진원군 이세완의 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의 활동

선조15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주서, 봉교, 전적을 지냈다. 금천 현감으로 있을 때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호당(湖堂)에 선발되고 1592년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임진왜란 중에 강원도사, 사서, 원주목사, 지평, 필선, 필선, 정언, 교리, 검상, 사인, 부응교, 사간, 집의 등을 거쳤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명나라 제독 마귀를 도와 말먹이와 식량 등을 보급하였다.

2. 3. 광해군 시기의 시련과 유배

선조15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주서, 봉교, 전적을 지냈다. 금천 현감으로 있을 때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호당(湖堂)에 선발되고 1592년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임진왜란 중에 강원도사, 사서, 원주목사, 지평, 필선, 필선, 정언, 교리, 검상, 사인, 부응교, 사간, 집의 등을 거쳐 1597년 정유재란 때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명나라 제독 마귀를 도와 말먹이와 식량 등을 보급하였다.

그 후 경기감사, 대사성, 경상감사, 병조참판, 전라감사, 부제학을 거쳐, 1605년 호조판서가 되었다. 선조가 죽을 때 한준겸을 비롯하여 일곱 신하들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하였는데,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반역죄로 몰려 죽게 되자 한준겸도 1617년 충주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에 올라 1621년 5도 도원수가 되어 국경 지방을 수비하는 데 힘썼다.

2. 4. 인조반정과 복권

선조15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주서, 봉교, 전적을 지냈다. 금천 현감으로 있을 때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호당(湖堂)에 선발되고 1592년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임진왜란 중에 강원도사, 사서, 원주목사, 지평, 필선, 필선, 정언, 교리, 검상, 사인, 부응교, 사간, 집의 등을 거쳐 1597년 정유재란 때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명나라 제독 마귀를 도와 말먹이와 식량 등을 보급하였다.

그 후 경기감사, 대사성, 경상감사, 병조참판, 전라감사, 부제학을 거쳐, 1605년 호조판서가 되었다. 선조가 죽을 때 한준겸을 비롯하여 일곱 신하들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하였는데,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반역죄로 몰려 죽게 되자 한준겸도 1617년 충주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에 올라 1621년 5도 도원수가 되어 국경 지방을 수비하는 데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사위인 인조가 즉위하자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황성의 딸 회산부부인 황씨와의 사이에서 인열왕후를 포함한 2남 4녀를, 첩실에게서 2녀를 두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둘째 딸인 여이징의 처 한씨, 셋째 딸인 정백창의 처 한씨와, 서녀인 여섯째 딸 진원군 이세완의 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5. 사망과 가족의 비극

선조가 죽을 때 한준겸을 비롯하여 일곱 신하들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하였다. 그런데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반역죄로 몰려 죽게 되자 한준겸도 1617년 충주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사위인 인조가 즉위하자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황성의 딸 회산부부인 황씨와의 사이에서 인열왕후를 포함한 2남 4녀를, 첩실에게서 2녀를 두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둘째 딸, 셋째 딸, 그리고 서녀인 여섯째 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가족 관계


  • 조부 : 한여필(韓汝弼, ? ~ 1571)
  • 조모 : 문화 유씨(文化 柳氏) - 유엄(柳渰)의 딸
  • * '''아버지''' : 한효윤(韓孝胤, 1536 ~ 1580)
  • 외조부 : 신건(申健, 1493 ~ 1566) - 신우호의 아들로 견성군의 처남
  • 외조모 : 순흥 안씨(順興 安氏, ? ~ 1570)
  • * '''어머니''' : 신금희(申金姬, 1532 ~ 1608)
  • ** 형 : 한백겸(韓百謙, 1552 ~ 1615)
  • ** 형 : 한중겸(韓重謙, 1555 ~ 1579)
  • ** 누나 : 홍적(洪迪)의 처
  • ** 누나 : 심흔(沈忻)의 처

생질서 : 조기(趙琦) - 인조 후궁 귀인 조씨의 부친

  • ** 누나 : 권흔(權昕)의 처
  • ** 누나 : 서용갑(徐龍甲)의 처
  • ** 누나 : 황유길(黃有吉)의 처
  • ** 누나 : 조졸
  • '''부인''' :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 창원 황씨(昌原 黄氏, 1561 ~ 1594) - 황성(黃珹)의 딸
  • * '''장남''' : 한회일(韓會一, 1580 ~ 1642)
  • ** 며느리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이성중[1]의 딸
  • * '''차남''' : 한소일(韓昭一, 1591 ~ 1608)
  • ** 며느리 : 전주 유씨(全州 柳氏) - 유영경의 딸
  • * '''장녀''' : 청주 한씨(淸州 韓氏)
  • ** 사위 : 이유연(李幼淵, 1571 ~ 1615)
  • * '''차녀''' : 정부인(貞夫人) 청주 한씨(淸州 韓氏, 1586 ~ 1637)[2]
  • ** 사위 : 여이징(呂爾徵, 1588~1656)
  • * '''3녀''' : 정부인(貞夫人) 청주 한씨(淸州 韓氏, 1588 ~ 1637)[2]
  • ** 사위 : 정백창(鄭百昌, 1588 ~ 1635)
  • * '''4녀''' : 인열왕후(仁烈王后, 1594 ~ 1635)
  • ** 사위 : 인조(仁祖, 1595 ~ 1649)
  • '''측실''' : 전주 이씨 이강아지(李强阿之, 1583 ~ ?) - 청원군(靑原君) 이간(李侃)[3]의 서녀
  • * '''5녀''' : 이환(李煥)의 처
  • * '''6녀''' : 현부인(縣夫人) 청주 한씨(淸州 韓氏, 1612 ~ 1637)[2]
  • ** 사위 :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 1603 ~ 1655)[4]에게 출가

3. 1. 본처와 자녀

한준겸은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 창원 황씨(1561 ~ 1594)와 혼인하여 2남 4녀를 두었다. 황씨는 황성(黃珹)의 딸이다. 장남 한회일(韓會一, 1580 ~ 1642)은 이성중의 딸 전주 이씨와 혼인하였고, 차남 한소일(韓昭一, 1591 ~ 1608)은 류영경의 딸 전주 류씨와 혼인하였다.

장녀 청주 한씨는 이유연(李幼淵, 1571 ~ 1615)에게, 차녀 정부인(貞夫人) 청주 한씨(1586 ~ 1637)는 여이징(1588~1656)에게, 3녀 정부인(貞夫人) 청주 한씨(1588 ~ 1637)는 정백창(1588 ~ 1635)에게, 4녀 인열왕후(1594 ~ 1635)는 조선 인조(1595 ~ 1649)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 전주 이씨 이강아지(李强阿之, 1583 ~ ?)는 청원군(靑原君) 이간(李侃)의 서녀로, 슬하에 2녀를 두었다. 5녀는 이환(李煥)에게, 6녀 현부인(縣夫人) 청주 한씨(1612 ~ 1637)는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 1603 ~ 1655)에게 출가하였다.

3. 2. 첩실과 자녀

한준겸은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 창원 황씨(昌原 黄氏)와 혼인하여 4녀를 두었고, 측실인 전주 이씨 이강아지(李强阿之)에게서 2녀를 두었다.[3]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昌原 黄氏)는 황성(黃珹)의 딸로, 1561년에 태어나 1594년에 사망했다. 장녀는 이유연(李幼淵)에게 시집갔고, 차녀(1586~1637)와 3녀(1588~1637)는 각각 여이징(呂爾徵)과 정백창(鄭百昌)에게 시집갔다.[2] 4녀는 인조의 비 인열왕후(1594~1635)이다.

측실 전주 이씨 이강아지는 청원군(靑原君) 이간(李侃)의 서녀로 1583년에 태어났다.[3] 5녀는 이환(李煥)의 처가 되었고, 6녀(1612~1637)는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 1603~1655)에게 출가하여 현부인(縣夫人)이 되었다.[2][4]

참조

[1] 문서 세종의 아들인 왕자 계양군의 현손
[2] 문서 병자호란때 순절하였다
[3] 문서 익양군의 손자
[4] 문서 성종의 5대손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