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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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다 노부타다는 1557년 오다 노부나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시야마 전투, 이와무라 성 전투, 이세 나가시마 공격 등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1576년에는 아버지로부터 오다 가문의 가독과 미노국 동부, 오와리국 일부를 양도받아 기후성의 성주가 되었다. 1582년, 다케다 가쓰요리 정벌에 참여하여 다카토성을 함락시키는 등 활약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아케치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배신하자 교토 묘카쿠지에 머물다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니조 신고쇼에서 농성하다가 자결했다. 과거에는 무능한 장수로 평가받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후계자로서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무장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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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타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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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오다 노부타다 |
본명 | 오다 노부타다 (織田 信忠) |
출생 | 1557년 |
사망 | 1582년 6월 21일 |
사망 장소 | 혼노지 |
별칭 | 기묘마루 (유년 시절 이름) 신충 스가 구로 (간쿠로라고도 함) 삼위 중장 기후 주나곤 |
계명 | 다이운인 삼품 우림 선암 대선정문 게이토쿠인 고쇼인덴 증삼품 우림 낭열암 대선정문 |
씨족 | 오다 씨 |
관직 | |
관위 | 종5위하 데와노스케 정5위하 아키타성개 종4위하 종4위상 좌근위소장 정4위하 종3위 좌근위 중장 |
가문 | |
가신 | 오다 가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오다 노부나가 |
어머니 | 구안 게이주? |
양어머니 | 노히메 |
형제 | 오다 노부카쓰 오다 노부타카 하시바 히데카쓰 오다 가쓰나가 오다 노부히데 오다 노부타카 오다 노부요시 오다 노부사다 오다 노부요시 오다 나가쓰구 오다 노부마사 기타 |
배우자 | 정실: 없음 ( 다케다 신겐의 딸 신쇼니와 혼약) 측실: 시오카와 나가미쓰의 딸, 스즈 외 |
자녀 | 히데노부 히데노리 쓰다 다다노부 |
경력 | |
소속 | 무로마치 막부 |
섬긴 군주 | 아시카가 요시아키 |
주요 전투 | 오다니성 공성전 나가시마 포위전 이와무라성 공성전 시기산 공성전 이타미 공성전 다카토성 공성전 덴모쿠잔 전투 혼노지의 변 |
2. 생애
고지 3년(1557년), 오다 노부나가의 장남(노부마사가 실재한다면 차남)으로서 오와리에서 태어났다.[5][6] 유모는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딸인 조토쿠인(浄徳院)이었다. 노히메에게 입양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린 시절 이름은 기묘마루(奇妙丸)였다. 처음에는 오다 간쿠로 노부시게(織田勘九郎信重)라고 불렀고, 나중에 노부타다(織田信忠)로 개명했다.
에이로쿠 시대에 오다 씨는 미노 국을 통해 가이 다케다 씨 영토와 접촉하게 되었고, 1567년 11월에 다케다 씨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노부타다와 다케다 신겐의 여섯 번째 딸인 마쓰히메 사이에 약혼이 이루어졌다.
다케다 씨와 오다 씨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에이로쿠 시대에 다케다 씨는 오다 씨의 동맹국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미카와 국과 도토우미 국 방향의 영토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겐키 3년(1572년)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에 따라 신겐은 오다 씨의 영토를 침략하기 시작했다(서상 작전(西上作戦)). 신겐의 죽음으로 약혼은 사실상 파기되었고, 오다 노부타다의 결혼은 취소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1573년 아시카가 막부의 멸망에 기여했다. 그 후, 다케다 씨는 가쓰요리의 통치 말기에 오다 씨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노부나가는 화해를 거부했다.
겐키 3년(1572년)에 성인식을 하였고, 고호쿠 공략에 출진한 이후, 노부나가를 따라서 이시야마 합전, 이세 나가시마 공격,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전하였다.[1] 1575년, 이와무라 성 전투에서 총대장으로 아키야마 노부토모를 항복시키고 이와무라 성을 개성시켰다. 이후 다케다 가문과의 전투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1576년,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오다 가문의 가독과 미노 국 동부 및 오와리 국 일부를 양도받아 그 지배를 맡아 기후 성의 성주가 되었다.
1577년 2월에는 사이카 공격에서 나카노 성을 함락시켰고, 3월에는 스즈키 시게히데를 항복시켰다. 8월에는 다시 반역한 마쓰나가 히사히데 토벌의 총대장이 되어, 아케치 미쓰히데를 선봉으로 하시바 히데요시 등 여러 장수를 이끌고 시기산성 전투에서 마쓰나가 히사히데 · 히사미치 부자가 농성한 신기산성을 함락시켰다.
1578년에는 고즈키 성 전투에서 모리 데루모토가 이끄는 10만 대군에 맞서 오다 노부나가는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삼아 아케치 미쓰히데, 니와 나가히데, 다키가와 가즈마스 등 여러 장수를 구원군으로 보냈다. 하시바 히데요시도 오다 노부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나, 교착 상태에 빠지자 오다 노부나가는 전략상의 이유로 고즈케 성에서 철수하고 미키 성 공략에 전념했다. 결국 아마고 가쓰히사 등은 항복하고 고즈케 성은 함락되었다.
1580년에는 오와리 국 남부를 총괄하던 사쿠마 노부모리와 안도 모리나리가 추방되면서, 오다 노부타다는 미노 국 · 오와리 국 2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5][6]
1582년, 오다 노부타다는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미노 · 오와리의 군사 5만 명을 이끄는 총대장이 되어 다케다 가쓰요리 정벌에 나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 호조 우지마사와 함께 다케다 영토로 진격하였다. 노부타다는 이나 방면에서 진격하여 시나노 남부의 다케다 측 거점인 이이다 성, 다카토 성을 함락시켰다.
다케다 가쓰요리는 노부타다의 빠른 진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스와 호에서 철퇴, 신푸 성을 불태우고 도망쳤다. 노부타다는 추격전을 개시하여, 노부나가의 본대가 다케다 영토에 들어오기 전에 덴모쿠 산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 다케다 노부카쓰 부자를 자결로 몰아넣고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켰다.
3월 26일 고후에 입성한 노부나가는 노부타다의 전공을 크게 칭찬하며, "천하의 뜻도 받으라"는 의지를 표명했다. 노부타다는 사양했지만, 노부나가는 오다 가문의 가독은 물론 천하인의 지위도 노부타다에게 계승시키겠다는 것을 내외에 선포한 것이었다.[7]
1582년 6월 2일,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을 때, 오다 노부타다는 빗추 국 다카마쓰 성을 포위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보내기 위해 교토의 묘카쿠지에 머무르고 있었다.[1] 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지에 있던 오다 노부나가를 습격하자, 노부타다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혼노지로 향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쓰히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이복동생 쓰다 겐자부로, 교토소지대 무라이 사다카쓰 등과 함께 황태자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의 저택인 니조 신고쇼로 이동했다. 노부타다는 사네히토 친왕을 탈출시킨 후,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과 함께 농성하며 분전했다.[8] 하지만 아케치 군의 정예 이세 사다오키가 공격해 오자, 병력 수에서 크게 밀린 노부타다는 결국 자결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2. 1. 소년기
고지(弘治) 3년(1557년), 오다 노부나가의 장남(노부마사가 실재한다면 차남)으로서 오와리에서 태어났다.[5][6] 유모는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딸인 조토쿠인(浄徳院)이었다. 노히메에게 입양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린 시절 이름은 기묘마루(奇妙丸)였다. 처음에는 오다 간쿠로 노부시게(織田勘九郎信重)라고 불렀고, 나중에 노부타다(織田信忠)로 개명했다.에이로쿠(永禄) 시대에 오다 씨는 미노국을 통해 가이 다케다씨 영토와 접촉하게 되었고, 1567년 11월에 다케다 씨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노부타다와 다케다 신겐의 여섯 번째 딸인 마쓰히메 사이에 약혼이 이루어졌다.
다케다 씨와 오다 씨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에이로쿠 시대에 다케다 씨는 오다 씨의 동맹국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미카와국과 도토우미국 방향의 영토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겐키(元亀) 3년(1572년)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에 따라 신겐은 오다 씨의 영토를 침략하기 시작했다(서상 작전(西上作戦)). 신겐의 죽음으로 약혼은 사실상 파기되었고, 오다 노부타다의 결혼은 취소되었다.
겐키 3년(1572년)에 성인식을 하였고, 고호쿠 공략에 출진한 이후, 노부나가를 따라서 이시야마 합전, 이세 나가시마 공격,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전하였다.[1]
2. 2. 노부나가의 후계자
1575년, 이와무라 성 전투에서 총대장으로 아키야마 노부토모를 항복시키고 이와무라 성을 개성시켰다. 이후 다케다 가문과의 전투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1576년,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오다 가문의 가독과 미노국 동부 및 오와리국 일부를 양도받아 그 지배를 맡아 기후성의 성주가 되었다.1577년 2월에는 사이카 공격에서 나카노 성을 함락시켰고, 3월에는 스즈키 시게히데를 항복시켰다. 8월에는 다시 반역한 마쓰나가 히사히데 토벌의 총대장이 되어, 아케치 미쓰히데를 선봉으로 하시바 히데요시 등 여러 장수를 이끌고 시기산성 전투에서 마쓰나가 히사히데 · 히사미치 부자가 농성한 신기산성을 함락시켰다.
1578년에는 고즈키 성 전투에서 모리 데루모토가 이끄는 10만 대군에 맞서 오다 노부나가는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삼아 아케치 미쓰히데, 니와 나가히데, 다키가와 가즈마스 등 여러 장수를 구원군으로 보냈다. 하시바 히데요시도 오다 노부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나, 교착 상태에 빠지자 오다 노부나가는 전략상의 이유로 고즈케 성에서 철수하고 미키성 공략에 전념했다. 결국 아마고 가쓰히사 등은 항복하고 고즈케 성은 함락되었다.
1580년에는 오와리국 남부를 총괄하던 사쿠마 노부모리와 안도 모리나리가 추방되면서, 오다 노부타다는 미노국 · 오와리국 2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5][6]
2. 3. 다케다 정벌
1582년, 오다 노부타다는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미노 · 오와리의 군사 5만 명을 이끄는 총대장이 되어 다케다 가쓰요리 정벌에 나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 호조 우지마사와 함께 다케다 영토로 진격하였다. 노부타다는 이나 방면에서 진격하여 시나노 남부의 다케다 측 거점인 이이다 성, 다카토 성을 함락시켰다. 특히 다카토 성 공략에서는 직접 선봉에 서서 해자까지 접근하여 울타리를 부수고 성벽 위에 올라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용맹함을 보였다.[2]다케다 가쓰요리는 노부타다의 빠른 진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스와 호에서 철퇴, 신푸 성을 불태우고 도망쳤다. 노부타다는 추격전을 개시하여, 노부나가의 본대가 다케다 영토에 들어오기 전에 덴모쿠 산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 다케다 노부카쓰 부자를 자결로 몰아넣고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켰다.
3월 26일 고후에 입성한 노부나가는 노부타다의 전공을 크게 칭찬하며, "천하의 뜻도 받으라"는 의지를 표명했다. 노부타다는 사양했지만, 노부나가는 오다 가문의 가독은 물론 천하인의 지위도 노부타다에게 계승시키겠다는 것을 내외에 선포한 것이었다.[7] 논공행상에 의해 가와지리 히데타카는 가이 국과 시나노 국 스와 군, 모리 나가요시는 시나노 국 다카이 · 미노치 · 사라시나 · 하니시나 군, 모리 나가히데는 시나노 국 이나 군을 받아, 미노 · 오와리 · 가이 · 시나노 4개국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2. 4. 혼노지의 변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을 때, 오다 노부타다는 빗추국 다카마쓰 성을 포위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보내기 위해 교토의 묘각사에 머무르고 있었다.[1]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지에 있던 오다 노부나가를 습격하자, 노부타다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혼노지로 향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쓰히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이복동생 쓰다 겐자부로, 교토소지대 무라이 사다카쓰 등과 함께 황태자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의 저택인 니조 신고쇼로 이동했다. 노부타다는 사네히토 친왕을 탈출시킨 후,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과 함께 농성하며 분전했다.[8]
하지만 아케치 군의 정예 이세 사다오키가 공격해 오자, 병력 수에서 크게 밀린 노부타다는 결국 자결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노부타다의 목은 아버지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아케치 측에 발견되지 않았다.[8]
『유임모반기』와 『연성원기록』에 따르면, 니조 신고쇼에서 농성할 당시 노부타다는 직접 칼을 휘두르며 적병을 베는 등 용맹하게 싸웠다고 한다. 노부타다의 시종이었던 시모가타 야자부로라는 젊은이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는데, 노부타다는 그의 용맹함을 칭찬하며 다음 생애에 상을 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9]
3. 평가
오다 노부타다에 대한 평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각에서 비롯된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와의 비교를 통해 어리석고 무능한 장수라는 평가가 널리 퍼져 있었다. 고야나기 미쓰토시(高柳光寿)는 1962년 저서 『청사단홍(青史端紅)』에서 노부야스의 할복 사건 진상에 대해,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적장자인 오다 노부타다보다 이에야스의 적장자 노부야스가 더 뛰어나 미래를 우려하여 노부야스를 제거했다는 설을 제시했다.[8] 이 설은 학계 권위자였던 고야나기 미쓰토시의 영향으로 널리 퍼져 노부타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시켰으나, 노부야스의 할복 동기에 대한 가능성 제시에 불과하며 두 사람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비교한 것은 아니다.[8]
최근 노부타다의 업적이 재평가되면서, 노부나가의 후견을 고려하더라도 군무와 정무를 무난하게 처리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며, 어리석다는 기존 설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8]
혼노지의 변 당시, 노부타다는 교토에서 탈출하여 안토(安土)에서 재기를 도모하라는 측근의 간언을 거절하고, "함부로 이 장소에서 물러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결단을 내렸다는 일화가 『겐다이키(当代記)』에 기록되어 있지만, 신빙성은 불확실하다.[8]
3. 1. 긍정적 평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각에서 비롯된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와의 비교를 통해 어리석고 무능한 장수라는 평가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 근거는 고야나기 미쓰토시(高柳光寿)의 1962년 저서 『청사단홍(青史端紅)』에서 노부야스의 할복 사건 진상에 대해 언급된 설에 기인한다.[8] 이 설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적장자(嫡長子)인 오다 노부타다에 비해 이에야스의 적장자 노부야스가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미래를 우려하여 노부야스를 제거한 것이 사건의 진상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고야나기 미쓰토시가 당시 학계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널리 퍼져 노부타다를 어리석다고 보는 이미지가 오랫동안 고착되었다. 그러나 이 설은 어디까지나 노부야스의 할복을 중심으로 두고, 그 동기의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며, 두 사람의 업적을 냉정하게 비교한 것은 아니다.[8]최근에는 노부타다의 업적이 재평가되면서, 노부나가의 후견을 고려하더라도 노부타다는 무난하게 군무와 정무를 처리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8] 따라서 노부타다가 어리석다는 기존의 설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으며, 현재는 후계자로서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무장이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3. 2. 부정적 평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각에서 비롯된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와의 비교를 통해 어리석고 무능한 장수라는 평가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 근거는 고야나기 미쓰토시(高柳光寿)의 1962년 저서 『청사단홍(青史端紅)』에서 노부야스의 할복 사건 진상에 대해 언급된 설에 기인한다. 이 설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적장자(嫡長子)인 오다 노부타다에 비해 이에야스의 적장자 노부야스가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미래를 우려하여 노부야스를 제거한 것이 사건의 진상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고야나기 미쓰토시가 당시 학계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널리 퍼져 노부타다를 어리석다고 보는 이미지가 오랫동안 고착되었다.[8] 그러나 이 설은 노부야스의 할복을 중심으로 그 동기의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 두 사람의 업적을 냉정하게 비교한 것은 아니다.최근에는 노부타다의 업적이 재평가되면서, 노부나가의 후견을 고려하더라도 노부타다는 군무와 정무를 무난하게 처리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따라서 노부타다가 어리석다는 기존의 설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으며, 현재는 후계자로서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무장이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8]
혼노지의 변에서 노부나가는 탈출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지만, 노부타다에게는 교토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있었다. 겐다이키(当代記)』에 따르면, 아케치 미쓰히데의 습격 당시 측근 중에는 안토(安土)로 도망쳐 재기를 도모하라고 간언하는 자도 있었지만, 노부타다는 "이 정도의 모반을 꾀하는 놈(미쓰히데)이라면 어떻게 교토 시내의 출입구에 손을 대지 않았겠는가. 추하게 도망쳐 도중에 죽는 것이야말로 분하다. 함부로 이 장소에서 물러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8]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결단은 잘못된 것이었고 노부타다는 너무나도 청렴했던 셈이다. 다만, 이 『겐다이키』에 기록된 일화의 신빙성은 불확실하다.
4. 가계
관계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아버지 | 오다 노부나가 | 1534년 - 1582년 | |
어머니 | 기츠노 | 1528년 - 1566년 | 시호: 규안경주(久庵慶珠) |
양어머니 | 노히메 | ||
형제 | 오다 노부카츠 | 1558년 - 1630년 | |
오다 노부타카 | 1558년 - 1583년 | ||
하시바 히데카츠 | 1567년 - 1585년 | ||
오다 카츠나가 | 1568년 - 1582년 | ||
오다 노부히데 | 1571년 - 1597년 | ||
오다 노부타카 | 1576년 - 1602년 | ||
오다 노부요시 | 1573년 - 1615년 | ||
오다 노부사다 | 1574년 - 1624년 | ||
오다 노부요시 | - 1609년 | ||
오다 나가츠구 | - 1600년 | ||
오다 노부마사 | 1554년 - 1647년 | ||
자매 | 도쿠히메 | 1559년 - 1636년 | |
후유히메 | 1561년 - 1641년 | ||
히데코 | - 1632년 | ||
에이히메 | 1574년 - 1623년 | ||
호오닌 | |||
산노마루도노 | - 1603년 | ||
츠루히메 | |||
처 | 마츠히메 | 다케다 신겐의 딸 | |
시오카와 나가미츠의 딸 | |||
알려지지 않은 측실(들) | |||
아들 | 오다 히데노부 | 장남 | |
오다 히데노리 | 1581년 - 1625년 | 하시바 히데카츠의 딸과 결혼 |
오다 노부타다는 오다 노부나가의 적남이다. 장남은 오다 노부마사라는 설이 있다. 친어머니는 이코마 씨라는 설이 있는데, 만약 이코마 씨가 생모라면 친형제는 오다 노부카쓰, 이복동생은 오다 노부타카, 하시바 히데카쓰이다.
5. 대중문화 속의 오다 노부타다
- 신이 마사미 『아버지는 노부나가』(코단샤, 2003년) … 후에 제목을 바꿔 문고본으로 발행 『오다 노부타다〜아버지는 노부나가』(가쿠요쇼보, 2010년)
- 코노에 타카하루 『오다 노부타다 「혼노지의 변」에 쓰러진 노부나가의 적장자』(PHP문고, 2004년)
- 노부하라 준이치로 『벚꽃의 성』(코분샤문고, 2006년)
- 하뉴 미치히데 『소설 오다 삼대기』(PHP문고, 2006년)
- 스즈키 키이치로 『노부나가와 노부타다』(마이니치신분샤, 2009년)
- 우에다 히데토 『몽환』(츄오코론신샤, 2020년)
- 여풍림화산(1986년, TBS, 오다 노부타다: 마츠무라 유키)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2]
문서
Shincho Koki, Vol. 15
[3]
문서
塩川氏以外、諸説があって出自は定かではない
[4]
웹사이트
岐阜県史
https://www.library.[...]
[5]
문서
天正5年(1577年)6月付け
[6]
논문
2012
[7]
서적
織田信長 戦国時代の「正義」を貫く
平凡社
2020-12
[8]
논문
2007
[9]
서적
士林泝洄
[10]
웹사이트
肥後・新陰流兵法 東京稽古会
https://sites.google[...]
2019-12-04
[11]
서적
織田信忠
中公新書
[12]
서적
細川幽斎・忠興のすべて
新人物往来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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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오다 노부타다는 죠노스케(城介) 관위를 지냈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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