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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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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조반정은 1623년 서인 세력이 광해군의 폭정과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명분으로 일으킨 쿠데타이다. 광해군은 북인의 권력 남용, 중립 외교 정책, 궁궐 재건 등으로 비판받았고, 서인 세력은 능양군을 추대하여 반정을 일으켰다. 반정 성공 후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했으며, 북인 세력은 숙청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은 서인 세력 간의 권력 다툼과 이괄의 난을 초래했으며, 친명배금 정책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등 조선 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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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지도 정보
사건 개요
사건명인조반정
한자 표기仁祖反正
로마자 표기Injo Banjeong
발생 시기1623년 음력 3월 12일
발생 장소조선
주요 가담 세력서인
주요 인물김자점
이귀
최명길
김류
이서
신경진
구굉
정충신
주요 결과광해군 폐위, 인조 즉위
배경광해군의 실정
대북 세력의 독주
반정 세력
주도 세력서인
군사 지휘관김류
이괄 (반정 직후 합류)
주요 인사김자점
이귀
최명길
이서
신경진
구굉
정충신
군사 동원약 1000명
반정 과정
거사 계획이귀김자점 주도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
거사 실행1623년 음력 3월 12일 새벽 거사 시작
창덕궁 장악 후 광해군 폐위
인조 즉위
반정 성공 요인민심 이반
광해군의 실정
대북 세력의 실각
반정 이후
인조의 즉위반정 직후 즉위
대북 세력 제거대북 세력 숙청 및 제거
정국 변화서인이 주도하는 정권 수립
결과광해군 폐위 및 유배
인조 즉위
서인 정권 수립
역사적 평가
긍정적 평가광해군의 실정 극복
왕조 교체 없이 왕권 교체
부정적 평가서인 중심의 정국 운영
당쟁 격화의 원인
관련 영화
영화 제목인조반정
제작 년도1926년
감독이경손
장르역사 영화

2. 배경

당파 정치의 폐해를 절감했던 광해군은 관료들 간의 파벌 싸움에 개입함으로써 초월적인 왕권을 확립하려 했다. 광해군은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과 같은 일류 학자들을 등용하고, 명나라후금의 대립에서는 중립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이면에서 권력 중추를 장악한 북인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의 형제인 영창대군임해군을 살해했다. 더욱이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왕후는 경운궁에 유폐되었다. 여기에 더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경희궁과 같은 궁궐의 복구 또한 왕조의 재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2. 1. 붕당 정치의 시작과 전개

조선 초기, 훈구파는 15세기 말 성종 때부터 중앙에 진출한 사림파와 대립하였다.[3] 훈구파는 4차례의 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탄압했으나, 사림파는 이를 극복하고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 정계를 장악하였다.[4] 그러나 1575년, 후임 이조정랑직을 놓고 심의겸김효원이 다툰 사건을 계기로 사림파는 서인동인으로 분열되며 본격적으로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는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훈구 정치의 청산과 향후 국정 운영 방법의 차이를 둘러싼 후배 세대와 선배 세대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율곡 이이가 동인과 서인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1584년에 그가 죽은 후 선조가 동인을 가까이하며 동인이 득세하였다.[5]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 출신의 정철이 취조 과정에서 많은 동인들을 옥사시키자 동인들은 이에 앙심을 품었다. 1591년 정철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다가 선조의 진노를 사서 실각하며 서인들이 대거 몰락하였다.(건저 문제)[6] 다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들은 서인에 대한 처결 문제를 두고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졌다.[6]

2. 2. 광해군 시대의 정치 상황

임진왜란 중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606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영창대군을 낳으면서 후계 구도가 복잡해졌다. 선조가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의중을 보였기 때문이다.[7] 임진왜란을 거치며 정권을 잡은 북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적통론을 내세운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했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자들은 대북파를 이루었다.[8] 1608년 선조 사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가 득세하고 소북파는 몰락하였다.

광해군은 붕당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으며, 명나라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 정책을 폈다.[9] 그러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으며,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10]

당파 정치의 폐해를 절감했던 광해군은 관료들 간의 파벌 싸움에 개입함으로써 초월적인 왕권을 확립하려 했다. 광해군은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과 같은 학자들을 등용하고, 명나라후금의 대립에서는 중립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이면에서 권력 중추를 장악한 북인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의 형제인 영창대군임해군을 살해했다. 더욱이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왕후는 경운궁에 유폐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경희궁과 같은 궁궐 복구 또한 왕조 재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3. 인조반정의 전개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심기원 등 서인 세력은 광해군임해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명분으로 반정을 모의하였다.[11][12] 1620년(광해군 12년) 신경진과 김류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서, 이귀, 김자점, 최명길과 그의 형 최내길 등이 이에 동조했다.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밤,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서인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12] 이이반이 도중에 밀고하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는 실행에 옮겨졌다.

능양군과 이서, 신경진, 이귀, 이괄, 김류, 김자점, 심기원, 구굉, 구인후, 최명길, 최내길 등은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궐 문을 열어주어 반정에 성공했다. 광해군은 북쪽 후원의 소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는데 젊은 내시가 업고 가고 궁인 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광해군이 이미 숨은 뒤에 군사들이 궁궐에 들어왔는데 궁중이 텅 비어있었고 왕을 찾지 못했다. 이때 횃불을 잘못 버려 궁전을 잇달아 태워 인정전만 남고 모두 탔다.[13]

3. 1. 반정 모의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심기원 등 서인 세력은 광해군임해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명분으로 반정을 모의하였다.[11][12] 1620년(광해군 12년) 신경진과 김류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서, 이귀, 김자점, 최명길과 그의 형 최내길 등이 이에 동조했다.

3. 2. 반정 실행

1620년 신경진과 김류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서와 이귀·김자점·최명길과 그의 형 최내길 등이 이에 동조했다.[11][12]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밤,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서인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12] 이이반이 도중에 밀고하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는 실행에 옮겨졌다.

능양군과 이서, 신경진, 이귀, 이괄, 김류, 김자점, 심기원, 구굉, 구인후, 최명길, 최내길 등은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궐 문을 열어주어 반정에 성공했다. 광해군은 북쪽 후원의 소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는데 젊은 내시가 업고 가고 궁인 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광해군이 이미 숨은 뒤에 군사들이 궁궐에 들어왔는데 궁중이 텅 비어있었고 왕을 찾지 못했다. 이때 횃불을 잘못 버려 궁전을 잇달아 태워 인정전만 남고 모두 탔다.[13]

4. 결과

폐주(광해군)와 폐동궁(이질)는 곧 체포되어 수레에 태워서 따르게 하였고, 체포한 흉도들을 경운궁에 가두고 대장 이흥립을 시켜서 호위하게 하였다. 광해군은 왕자의 신분인 군(君)으로, 폐동궁 이지는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유배되었다. 이 때 광해군 정권 때의 권세가였던 이이첨 · 정인홍 · 유희분을 비롯하여 무려 40여 명이 참수되었고, 숙청되어 귀양간 자가 200여 명이라 전해진다. 반정 모의에 참여했으나 밀고했던 이이반도 반역죄로 주살당했다.

조선 역사에서 일어난 4번의 쿠데타 중에서 인조반정처럼 반대파를 철저하게 압살한 적은 없었다. 또한 정인홍의 경우 당시 88세의 고령으로 굳이 죽일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처형하였다. 그것도 사약이 아닌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정승을 지낸 인물 및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처형할 때 목을 베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1689년 송시열이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은 것과 상반된다. 이로써 대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북인 정권의 우상인 조식 계통의 남명학파는 크게 배척받았다.

능양군은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상(階上)의 호상(胡床)에 앉았다. 광해군을 원수로 여기는 인목대비가 있던 경운궁(서궁)은 굳이 군사력으로 점령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능양군은 경운궁의 대비에게 사람을 보내고 직접 행차하여 국왕으로 즉위할 근거를 만들어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한 즉각적인 복수를 주장하고 자기 권위를 한껏 내세우면서 능양군에 대한 승인 명령을 늦추었다.

특히 국왕의 인장을 자신에게 넘기라는 인목대비의 명령은 반정 세력에게 국왕이 달라질 수 있는 위험이었지만, 능양군은 그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능양군은 땅에 엎드려 긴 시간 고초와 위기를 넘기면서도 휘하 세력을 앞세워 끈질기게 대비를 설득하고 압박한 끝에 결국 국왕의 인장과 즉위 명령을 받아냄으로써 국왕 즉위를 정당화했다[14].또한 인목대비는 대신들에게 하교하여 광해군의 36죄목을 나열했다.

광해군은 강화도유배되었고, 이이첨과 김개시 등 광해군의 측근들은 참수형에 처해졌다.

한편,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대비 인목왕후와 그녀의 딸 정명공주는 석방되었다.

4. 1. 반정 이후의 정치 상황

인조반정으로 광해군과 대북파는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14] 이이첨, 정인홍, 유희분 등 광해군 때의 권신들은 처형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숙청되었다.[14] 특히 정인홍의 경우 당시 8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참수형을 당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정승을 지낸 인물 및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목을 베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 1689년 송시열이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은 것과 상반된다. 이로써 대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북인 정권의 우상인 조식 계통의 남명학파는 크게 배척받았다.[14]

반정 모의에 참여했으나 밀고했던 이이반도 반역죄로 주살당했다. 광해군은 왕자의 신분인 군(君)으로, 폐동궁 이지는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14]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한 즉각적인 복수를 주장하고 자기 권위를 한껏 내세우면서 능양군에 대한 승인 명령을 늦추었다. 특히 국왕의 인장을 자신에게 넘기라는 인목대비의 명령은 반정 세력에게 국왕이 달라질 수 있는 위험이었지만, 능양군은 그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능양군은 땅에 엎드려 긴 시간 고초와 위기를 넘기면서도 휘하 세력을 앞세워 끈질기게 대비를 설득하고 압박한 끝에 결국 국왕의 인장과 즉위 명령을 받아냄으로써 국왕 즉위를 정당화했다.[14] 한편,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와 그녀의 딸 정명공주는 석방되었다.

4. 2. 이괄의 난

이괄인조반정 당일에 반정군을 지휘해야 할 김유가 예정 시각에 도착하지 않자 반정군을 지휘하여 거사를 성사시켰다. 이괄의 과단성이 없었으면 인조반정은 성공하지 못했을 쿠데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저평가 되자 불만을 품게 되었다.[15] 평안병사로 임명되어 관서 지방으로 근무를 하던중인 1624년 3월에 역모고변이 있었다. 이괄을 문초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대신들의 주청을 인조가 물리쳤으나, 그 대신 이괄의 아들인 이전을 한양으로 압송해 오도록 하였다. 그러자 이괄은 3월 13일 아들을 압송하러 온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15]

이괄은 평안도의 순천·자산, 황해도의 수안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개성을 지나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인조는 이괄의 가족을 처형한후 공주로 피난했다. 3월 29일 이괄은 한양에 입성했으나 같은날 안령에서 토벌군에 크게 패하여 경기도 이천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4월 1일에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15] 반군에 의해 한양이 점령된 이괄의 난은 조선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수도방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북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군대가 수도방어에 동원되었고 관서 지방의 방어 체제가 크게 약화되었다. 이로인해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원인이 되기도 했다.[15]

4. 3. 외교 정책의 변화와 호란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명분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당시 후금의 성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결국 정묘호란병자호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다만, 반정 주체 세력들이 모두 친명배금 외교 정책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귀, 장유, 최명길 등은 실리적 외교 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다.

5. 인조반정에 대한 평가

인조반정은 광해군 대의 실정을 바로잡고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 더 큰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친명배금 정책은 정묘호란병자호란을 불러와 조선 사회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고, 이에 따라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주체 세력들이 모두 친명배금의 외교정책을 실시한 것은 아니다. 비록 서인들이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실정의 하나로 지목하여 폐위시키기는 했지만, 이들 역시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후금이 강성해지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며, 따라서 소수이기는 하지만 실리적 외교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귀, 장유, 최명길이다. 조선 역사상 가장 실패한 반정으로 알려져 있다.

5. 1. 긍정적 평가

5. 2. 부정적 평가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명분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행동으로, 결국 정묘호란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주체 세력들이 모두 친명배금 외교정책을 실시한 것은 아니며, 이귀, 장유, 최명길 등은 실리적 외교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다.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에서는 인조반정이 조선 역사상 가장 실패한 반정이라고 비판한다. 반정 이후 서인 내부의 권력 다툼과 이괄의 난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는 점에서도 한계점을 보인다.

6. 가담자

인조는 삼전도에서 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를 하는 굴욕을 당했다. 김류병자호란 때 강화도 수비를 맡았던 아들 김경징이 방비를 전혀 하지 않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처형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괄은 인조반정 성공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안령에서 대패하여 이천으로 도주했다가 부하들에게 목이 잘렸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했다가 유생들로부터 매국노라는 지탄을 받고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심기원은 회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는 역모를 획책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김자점은 효종 때 유생들의 지탄으로 유배되었고, 이에 앙심을 품고 역모를 획책하다가 탄로나 능지처참을 당했다.

1644년 모반 혐의로 체포된 심기원은 임문정형이라 하여 인조가 문루 위에 임어한 가운데 처형당하였다. 그는 오살(五殺)이라 하여 두 다리와 두 팔 순서로 사지가 토막났고, 이로 인해 비명과 함께 피를 뿌리며 고통스럽게 나뒹굴다가 고통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에 목이 잘려 거리에 효수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였는데, 그를 역모로 몰아 죽게 한 옛 동지이자 당시 정적 김자점 또한 1651년 모반 혐의로 처형당할 때 심기원과 똑같은 방법으로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괄의 난과 관련하여, 박영서는 반란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이괄의 군대에게 협력을 거부했다가 살해당했다. 이중로는 토벌군을 이끌고 반란군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이성부는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물에 투신하여 자살했다. 이이반은 거사 동지였으나, 실패를 우려하여 조정에 밀고하였고, 이로 인해 반정이 성공한 후 참수당했다. 이흥립은 광해군을 배신하여 반정 성공에 기여했으나, 이괄의 난 때 반란군에게 투항했다가 난이 평정된 후 수감되었고, 신병을 비관하여 옥중 자살했다.

참조

[1] 웹사이트 인조반정 [仁祖反正] https://terms.naver.[...]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2] 웹사이트 이중로 정사공신교서 및 초상 - 이중로 초상 [Royal Certificate of Meritorious Subject Issued to Yi Jung-ro and Portrait of Yi Jung-ro, 李重老 靖社功臣敎書 및 肖像 - 李重老 肖像]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두피디아
[3] 웹사이트 붕당 - 조선의 사림들이 정치적인 입장이나 학맥에 따라 만든 집단 https://terms.naver.[...]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2015-02-10
[4] 웹사이트 붕당 [朋黨]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두피디아
[5]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
[6]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
[7]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
[8]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
[9] 서적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10] 웹사이트 인목대비 [仁穆大妃]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두피디아
[11] 서적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12] 서적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랜덤하우스중앙 2001
[13] 웹인용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0-08-05
[14] 저널 The Logic and Significance of the Deposition of Kings in the Joseon Period http://dx.doi.org/10[...] 2019-06-30
[15] 웹사이트 이괄의 난 [李适─亂] 두산백과 두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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