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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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창대군은 조선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통 왕자였다. 선조는 적통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 대북파에 의해 계축옥사로 역모에 연루되어 폐서인된 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1614년,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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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의 |
작위 | 대군 |
출생 | 1606년 4월 12일 |
출생지 | 한성부 조선 |
사망 | 1614년 3월 19일 (향년 7세) |
사망지 | 강화도, 경기도, 조선 |
묘소 | 영창대군묘 |
가계 | |
왕가 | 이씨 |
아버지 | 선조 |
어머니 | 인목왕후 |
양자 | 이필, 창성군 |
이름 (언어별) | |
한글 | 영창대군 |
한자 | 永昌大君 |
로마자 표기 | Gyeongchang-daegun |
한글 (본명) | 이의 |
한자 (본명) | 李㼁 |
로마자 표기 (본명) | Yi Ui |
2. 생애
1606년 4월 12일(음력 3월 6일)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의 유일한 적장자로 태어났다. 선조는 방계승통에다가 서출이라는 점을 의식하여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했고, 유영경 등 몇몇 신하들과 영창대군의 세자 책봉을 몰래 의논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세자 권정례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던 선조는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세자를 바꿀 계획을 세웠으나, 이는 무산되었다. 선조는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비해 한준겸 등 7명에게 영창대군의 뒤를 부탁하였는데, 이를 유교칠신(遺敎七臣)이라 부른다. 이이첨, 정인홍 등은 세자를 바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다가 사실무근한 소문을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이들을 다시 등용하였다.
1611년(광해군 3년) 12월에 영창대군에 봉해졌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영창대군은 그해 3월 15일 관작이 복구되었다.
2. 1. 왕위 계승 갈등
선조는 서자 출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지만, 적통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세자 교체를 고민했다. 소북파 유영경 등은 영창대군을 지지했으나, 1608년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무산되었다.[3]광해군 즉위 후,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는 1613년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았다.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10] 그해 7월부터 11월까지 양사, 홍문관, 승정원 등이 번갈아가며 거듭 탄핵하였으나 광해군은 모두 거절하였다.[8][9]
1614년, 이이첨 일파는 강화 부사 정항을 시켜 악의적으로 영창대군의 방에 불을 때게 하였고 음식도 끊었다. 영창대군은 뜨거운 바닥 위에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밤낮없이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기운이 다해 죽었고,[16] 이이첨과 정항은 영창대군이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했다.[17]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9세였다.
2. 2. 죽음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는 박응서 등에게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거짓으로 자백하게 하고, 외할아버지 김제남은 사사되었으며,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16] 곽재우, 기자헌, 이경석 등이 영창대군의 석방을 청하는 탄원서를 올렸으나 모두 묵살되었다.1614년 이이첨 일파는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에게 지시하여 영창대군이 머물던 방의 온돌을 뜨겁게 달구고 음식을 끊었다.[16] 영창대군은 뜨거운 바닥에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밤낮없이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기운이 다해 죽었다.[16] 이이첨과 정항은 영창대군이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했다.[17]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9세였다. 일설에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 이정표가 잿물을 이용해 독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2. 3. 사후
1614년(광해군 6)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 아래(현 성남시 태평3동 근처)에 시신이 매장되었다가, 1971년 8월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고은리(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24-5)로 이장되었다.[18] 이장 과정에서 묘지명(墓誌銘) 등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매몰되었다가 1993년 성남시 태평3동 4911 골목길에서 도시가스 시설 배관공사 도중 다섯 조각으로 파손된 채 발견되었다.[18]인조반정(1623년) 이후 복권되었으며, 이복형 경창군의 넷째 아들 창성군이 양자로 입적되어 가계를 이었다.
영창대군묘 묘지석은 1623년(인조 1)에 대리석으로 제작되었으며, 크기는 높이 107㎝, 너비 76㎝, 두께 20㎝이다. 비문은 신흠(申欽)이 짓고, 글씨는 김천령(金千齡)의 서체로 썼으며, 해서로 썼다. 영창대군묘는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3. 논란
선조는 적통 후계자를 원했기에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서자이자 둘째 아들인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고, 유영경 등 소북파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급사하자 어린 영창대군이 아닌 광해군이 즉위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는 영창대군과 인목왕후의 아버지인 김제남에게 혐의를 씌웠다. 김제남은 사약을 받았고, 영창대군은 누나 정명공주와 함께 서인(평민)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면서 영창대군은 명예를 회복했다.
3. 1. 살해 방법 논란
광해군일기에는 당시 강화부사 정항이 온돌을 뜨겁게 달구어 증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19],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 이정표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독살하였다고 기록하여, 그를 살해한 방법을 두고 논란이 있다.[20]3. 2. 전은설(全恩說) 논쟁
당시 집권당인 대북이 장악한 삼사와 승정원 등에서는 영창대군의 처벌을 계속 상소하였다. 그러나 남인 및 일부 소북, 서인은 처벌을 반대하였고, 사림은 배가 다른 이복형제이지만 계통상 모자, 형제간의 의가 있다며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며 영창대군 처형을 반대하였다.[7] 그밖에 나이 어린 유자(幼子)가 역모를 할 뜻이 있었겠느냐며 그를 비호하는 여론도 나타났다. 그러나 대북파의 계속된 상소로 그는 유배소에서 죽게 되었다.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
아버지 | 선조 | 1552년 | 1608년 |
어머니 | 인목왕후 | 1584년 | 1632년 |
누나 | 정명공주 | 1603년 | 1685년 |
매형 | 홍주원 | 1606년 | 1672년 |
양자 | 창성군 이필 | 1627년 | 1689년 |
창성군은 이복형인 경창군의 4남이다.한국어 [21] |
5. 평가
영창대군은 당쟁에 휘말려 9세의 어린 나이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왕자로 평가된다. 대북파는 계축옥사를 조작하여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리고, 영창대군을 정명공주와 함께 서인(평민)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했다. 1614년 3월 19일, 강화부사 정항은 극도로 온도를 높인 온돌 방에 영창대군을 감금하여 잠을 자던 중 증살(분형)로 사망하게 했다. 이후 인조가 즉위하면서 영창대군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웹사이트
안성 영창대군 묘, 가장 참혹하게 생을 마감한 비극의 왕자
https://m.blog.naver[...]
2021-05-26
[2]
웹사이트
영창대군묘 - 경기문화재연구원
https://gjicp.ggcf.k[...]
2021-08-23
[3]
웹사이트
'[화정실록] 9세의 영창대군은 어떻게 증살(蒸殺)당했나'
http://enews.imbc.co[...]
2021-08-23
[4]
웹사이트
가장 참혹하게 죽음을 맞은 비극의 조선 왕자 영창대군
https://m.blog.naver[...]
2021-05-26
[5]
웹사이트
영창대군 이야기
https://m.blog.naver[...]
2021-05-26
[6]
웹사이트
창왕과 영창대군이 죽은 강화 살창리마을
https://ncms.ncultur[...]
2021-08-01
[7]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5-26
[8]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5-26
[9]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5-26
[10]
웹사이트
강화부사 정항이 영창대군을 살해하다.
https://m.blog.naver[...]
2021-05-26
[11]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광해 75권, 6년(1614년) 2월 10일 2번째 기사
[12]
서적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https://m.series.nav[...]
2012-04-03
[13]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5-26
[14]
웹사이트
경기도 기념물 제75호 영창대군묘 (永昌大君墓)
http://www.heritage.[...]
2021-05-26
[15]
웹사이트
'화정' 전진서, 역모 누명으로 귀향..'영창의 비극' 시작
https://www.hankyung[...]
2021-05-26
[16]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광해 75권, 6년(1614년) 2월 10일 2번째 기사
[17]
서적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역사의 아침
2008
[18]
뉴스
'묘지명(墓誌銘)'엔 삶과 죽음의 스토리가 있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03-02
[19]
웹사이트
"강화 부사 정항이 영창 대군 이의를 살해하다"
http://sillok.histor[...]
[20]
웹사이트
"동양위 신익성에게 영창 대군의 비문을 쓰도록 명하다"
http://sillok.histor[...]
[21]
문서
선원보략수정의궤(璿源譜略修正儀軌) 1874년판에 기록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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