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령군
1. 개요
혜령군은 조선의 왕족으로, 태종의 아들이자 세종의 이복 동생이다. 1427년 홍녕군에 봉해졌다가 2년 후 혜령군으로 개봉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광패한 행동으로 세종의 근심을 샀으며, 1430년에는 온녕군과 싸움을 벌여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다. 1438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지만, 1440년에 사망했다. 묘소는 현재 광교역사공원에 있으며, 부인과 아들, 손자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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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 출생 -
로렌초 발라
로렌초 발라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철학자, 문헌학자로, 고전 문헌 연구를 통해 중세 시대의 권위에 도전하고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의 위조 사실을 밝혀내고, 스콜라 철학을 비판하는 등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
1407년 출생 -
황수신
황수신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음서 출신임에도 세조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도승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며, 세조 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고 『경국대전』 편찬 및 불경 언해에도 기여했다. -
1440년 사망 -
이숙번
이숙번은 조선 초기의 공신이자 문신으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을 도와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병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쳤으나 오만한 성격으로 유배 후 세종 때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했으며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
1440년 사망 -
이츠코아틀
이츠코아틀은 15세기 아즈텍 제국의 4대 틀라토아니로서, 아즈텍 삼국 동맹을 결성하여 제국 건설의 기틀을 다지고 국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역사 기록을 재편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
조선 태종의 자녀 -
양녕대군
양녕대군은 조선 태종의 장남으로 왕세자였으나 폐위되었고, 동생 세종을 도왔으며 숭례문 현판 글씨를 쓰는 등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
조선 태종의 자녀 -
함녕군
함녕군 이인은 조선 태종의 아들이자 외교적 업적을 남겼으며 세종의 신임을 받았고, 단종과 세조 시대에도 활동하다 1467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2. 생애
1427년(세종 9년) 홍녕군에 봉해졌다가 2년 후 혜령군으로 개봉되었다. 1438년(세종 20년) 계품사가 되어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받아오는 공을 세웠으나, 1430년(세종 12년) 온녕군과 싸움, 1433년(세종 15년) 성절 하례 불참 등 문제 행동으로 세종의 근심을 샀다. 1440년(세종 22년) 사망하자 세종은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예로써 장사지내게 하였다.
2.1. 문제 행동과 처벌
이지(李祉)는 1427년(세종 9년) 홍녕군(弘寧君)에 봉해졌고, 2년 후 혜령군(惠寧君)으로 개봉되었다. 1430년(세종 12년), 온녕군과 종학에서 싸움을 벌이고 광패한 행동을 일삼아 세종이 그의 출입을 엄금하고 정2품 직첩과 녹봉을 거두어 벌하였다.
세종은 혜령군의 광패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이지(李祉)는 어릴 때부터 광패(狂悖)하고 교만하며 방자하여, 글을 읽게 하였으나 책을 펴 보기도 싫어하므로, 이에 활 쏘기를 배우게 하였더니 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끊임 없이 함부로 놀기만 좋아하였다.
* 일찍이 경회루 연못에 떨어져 죽게 된 것을 세자가 마침 보고 구원하여 살았는데, 나는 이르기를, ‘어린 까닭이니 자라서 철이 나면 반드시 여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이미 장성하였는데 아직도 행동을 고치지 아니하는구나.
* 일찍이 남의 기생 첩을 빼앗아 광망(狂妄)함이 날로 심하므로, 그의 구사(丘史)를 잡아 가두고 명하여 집에 있게 하여 출입을 못하게 하고, 또 만나보지도 아니하여 스스로 마음을 고쳐 새로워지기를 기다렸으며, 또 학업(學業)을 폐할까 염려하여 종학(宗學)에서 수업(受業)하도록 하면서도 오히려 만나보지 아니하였더니, 막 종학에 나아가자마자 맨 먼저 금령을 범하여 함부로 장난을 하였으니, 그 광패(狂悖)함이 날로 늘어가매 내가 심히 근심한다.
1433년(세종 15년), 성절 하례(聖節賀禮)에 불참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2.3. 죽음과 사후
1427년(세종 9년) 혜령군은 홍녕군(弘寧君)에 봉해졌고, 2년 후 혜령군(惠寧君)으로 개봉되었다. 1440년(세종 22년) 사망하자 세종은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관곽과 쌀·콩 합하여 100석, 베 40필, 저포(苧布) 3필, 종이 200권을 부의로 내렸다.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정척(鄭陟)에게 호상(護喪)을 명하여 예로써 장사지내게 하였고, 혜령군에게 양회(襄懷)라는 시호를 내렸다. 세종이 친히 혜령군의 집에 가려 하였으나 더위 등을 이유로 신하들이 반대하여 중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