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숙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숙번은 조선 초기의 무관으로, 139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제1차 왕자의 난, 제2차 왕자의 난, 조사의의 난 평정에 참여하며 태종의 측근으로 활약했지만, 오만하고 불손한 성격으로 인해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했으며,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안성 이씨 - 이주환 (1967년)
    이주환(1967년)은 제21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동국대학교와 롱아일랜드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동주대학교 겸임교수, 서호도시개발 대표이사 등을 지냈고, 부산 연제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와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 안성 이씨 - 이호정 (정치인)
    이호정은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국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조선의 상호군 - 노한
    노한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여러 요직을 거치며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 조선의 상호군 - 김사형
    김사형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조선 건국에 기여하여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군사 업무를 관장하며 대마도 원정을 지휘하여 왜구 소탕에 공을 세웠으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편찬에 참여했다.
  • 1373년 출생 - 프란체스코 포스카리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1423-1457)로서 밀라노와의 전쟁, 아들의 반역 혐의, 그리고 사임 강요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으며 사후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 1373년 출생 - 조반나 2세
    조반나 2세는 1414년부터 1435년까지 나폴리 여왕으로 재임하며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나폴리를 통치했고 예술과 문학을 후원했지만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앙주 가문의 르네 1세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이숙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숙번
한글이숙번
한자李叔蕃
히라가나리 슈쿠반
가타카나이 스크폰
공직자 정보
출생일1373년
출생지고려 양광도 인주
사망일1440년 (68세)
사망지조선 경상도 함양
본관안성
백응(伯應)
운정(芸亭), 홍산(洪山)
시호충숙(忠肅)
임기1409년 ~ 1410년
경력좌군총제(左軍摠制)
병조판서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
동북면절제사
좌참찬
군주태종 이방원
종교유교(성리학)
직위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
국적조선
국가조선
직책문관
원어 이름李叔蕃
배우자청주 정씨 정총(鄭摠)의 딸
부모이경(부), 영양 남씨(모)
친인척이사정(친조부)
이희(친증조부)
남휘주(외조부)
정총(장인)
윤자량(이부 형)
윤자당(이부 형)

2. 생애

139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가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부터 태종의 측근이 되어,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1402년 조사의의 난 평정에 활약했다.

1413년 병조판서, 이듬해 판의정부사, 1415년 안성부원군에 봉해지는 등 요직을 역임했지만, 성격이 오만하고 불손했으며 태종의 총애를 믿고 뽐낸 탓에 주위의 반발을 사 탄핵을 받아 실각, 1417년 유배되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하기 위해 궁중에 소환되었지만, 일이 끝난 후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내졌다.

2. 1. 생애 초반

아버지는 이경이고 어머니는 영양 남씨로 남휘주의 딸이다. 어머니 남씨는 본래 윤공의 부인이었으나 남편 사후 두 아들 윤자량과 윤자당을 데리고 이경에게 개가하였다. 이숙번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기억력이 비상했다 한다.

139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가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부터 태종의 측근이 되어,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1402년 조사의의 난 평정에 활약했다.

2. 2. 정치, 관료 생활

139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가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부터 태종의 측근이 되어,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1402년 조사의의 난 평정에 활약했다.

1413년 병조판서, 이듬해 판의정부사, 1415년 안성부원군에 봉해지는 등 요직을 역임했지만, 성격이 오만하고 불손했으며 그 위에 태종의 총애를 믿고 뽐낸 탓에 주위의 반발을 사 탄핵을 받아 실각, 1417년 유배되었다.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편찬할 때, 선왕의 고사에 밝다 하여 궁중에 소환되었지만, 청취 후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내졌다.

2. 2. 1. 과거 급제와 정안대군과의 만남

1390년(고려 공양왕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조선 최초로 시행된 1393년(조선 태조 2년) 식년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정안대군의 심복이 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1398년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가 되었다. 지안산군사 재직 당시 정안대군 방원(훗날의 태종)을 도와 사병을 동원, 경복궁 주변에 병력을 출동시켜 한성부를 점령하고, 세자 방석과 그 형 방번을 제거하였다. 또한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방원의 측근이었던 그는 방원에게 “공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을 뿐이다.”라고까지 말했는데, 이는 당시에는 태종의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되었지만, 훗날 태종은 이 말을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그를 경계했다 한다.

2. 2. 2.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재직 당시 정안대군 방원(훗날의 태종)을 도와 사병을 동원, 경복궁 주변에 병력을 출동시켜 한성부를 점령, 세자 방석과 그 형 방번을 제거하고,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 방원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방원에게 “공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을 뿐이다.”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에는 태종의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되었지만, 태종은 후일 이 말을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그를 경계했다고 한다.

2. 2. 3. 제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 진압

1399년(정종 1) 이숙번은 좌부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초 박포(朴苞)가 이방원과 사이가 좋지 않던 방간(芳幹)을 부추겨 군사를 일으키자, 하륜 등과 함께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제거하고 박포를 처형하였다. 이어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었고, 하윤과 함께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정안대군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새로 설치한 내갑사(內甲士)의 좌번(左番) 담당 책임자가 되었다가,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가 되었다. 그해 말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 등이 친이성계파 인사들과 함께 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도진무(都鎭撫)가 되어 좌도도통사와 함께 출정, 이들을 진압하고 돌아왔다. 이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2. 2. 4. 주요 관직 역임

1406년 겸 중군총제(兼中軍摠制)·겸 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가 되고, 1407년 겸 충좌시위사상호군(兼忠佐侍衛司上護軍)·겸 의흥시위사상호군(兼義興侍衛司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1408년 십사상호군(十司上護軍)이 폐지되면서 겸 중군도총제(兼中軍都摠制)가 되고, 이듬해 동북면절제사가 되었다. 이어 참찬의정부사·겸지의흥부사(兼知義興府事)를 거쳐, 1412년 말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413년 병조판서를 거쳐 1414년의정부찬성사가 되었는데, 뒤에 의정부의 직제 개편에 따라 1414년 초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좌참찬을 거쳐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 한편, 1414년 지춘추관사로서 영춘추관사 하륜(河崙) 등과 함께 《고려사》의 일부 내용 중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일부 고쳐서 바로잡도록 명을 받았다.

2. 3. 생애 후반

1413년 병조판서, 이듬해 판의정부사 등을 역임했지만, 성격이 오만하고 불손했으며 태종의 총애를 믿고 뽐낸 탓에 주위의 반발을 사 1417년에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하기 위해 궁중에 소환되었지만, 일이 끝난 후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내졌다.

2. 3. 1. 권력 남용과 몰락

1415년(태종 15년)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다시 좌찬성에 임명되고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자신의 공이 워낙 큰 것에 자만하여 횡포를 많이 부렸다.

일례로 태종 때 한양 서쪽에 새로운 대문 서전문(西箭門)을 만들 일이 있었는데, 원래 서전문은 이숙번의 집 주변에 건설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숙번은 자기 집 앞에 성문이 만들어지는 것을 싫어하여 이를 막고 상왕 이방과가 거주하는 인덕궁 앞으로 성문을 만들었다.(태종실록 13년 6월 19일) 태종 14년에는 설을 맞아 상왕과 태종이 오는데 이숙번과 하륜이 국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아 사간원의 비판을 받았다. 이에 이숙번과 하륜은 분노하여 자신을 비판한 사간들을 처벌하려 했으나, 이숙번의 상관인 영의정 성석린과 우정승 남재 등이 이숙번이 국왕에게 무례했음을 인정하며 사간원의 처벌을 반대했다. 이숙번은 자신의 상관인 성석린과 남재의 집에 들어가 사간원 처벌에 동의하는 서명을 강제로 받아오는 등(태종실록 14년 1월 2일) 상관과 국왕을 막론하고 무례한 횡포를 자주 벌였다.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태종은 바로 그를 유배형에 처했다. 1416년(태종 16) 왕이 가뭄을 걱정하고 여러 대신들이 날마다 재앙을 의논하며 몸 둘 바를 모르고 분주하였으나, 이숙번은 병을 이유로 여러 달 궁궐에 나타나지 않았다.

태종은 이숙번이 대궐에 출입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고, 때를 같이하여 이숙번의 무례(無禮)와 불충(不忠)을 고하는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태종은 "이 같은 신하가 있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하며 진노하였다. 또한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죽음 이후 세자(世子, 양녕대군)에게 자주 뵐 것을 청하는 것은 역모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1417년에 유배되었다.

2. 3. 2. 탄핵과 유배

1415년(태종 15년)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다시 좌찬성에 임명되고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자신의 공이 워낙 큰 것에 자만하여 횡포를 많이 부렸다. 태종 때 한양 서쪽에 새로운 대문 서전문(西箭門)을 만들 일이 있었는데, 원래 이숙번의 집 주변에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이숙번이 이를 막고 상왕 이방과가 거주하는 인덕궁 앞으로 성문을 만들어버렸다.(태종실록 13년 6월 19일) 태종 14년에는 설을 맞아 상왕과 태종이 오는데 이숙번과 하륜이 국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아 사간원의 비판을 받았다. 이숙번과 하륜이 분노해 자신을 비판한 사간들을 처벌하려고 했으나, 이숙번의 상관인 영의정 성석린과 우정승 남재 등이 이숙번이 국왕에게 무례했음을 인정하며 사간원의 처벌을 반대했다. 이숙번은 자신의 상관인 성석린과 남재의 집에 들어가 사간원 처벌에 동의하는 서명을 강제로 받아오는 등 상관과 국왕을 막론하고 무례한 횡포를 자주 벌였다.(태종실록 14년 1월 2일)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태종은 바로 그를 유배형에 처했다. 1416년(태종 16) 왕이 가뭄을 걱정하고 여러 대신들이 날마다 재앙을 의논하며 몸 둘 바를 모르고 분주하였으나, 이숙번이 병을 이유로 여러 달 궁궐에 나타나지 않았다.

태종은 이숙번이 대궐에 출입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고, 때를 같이하여 이숙번의 무례(無禮)와 불충(不忠)을 고하는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태종은 이 같은 신하가 있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하며 진노하였다. 또한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죽음 이후 양녕대군을 자주 뵐 것을 청하는 것은 역모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마침내 1417년에 유배되었다.

2. 3. 3. 유배 생활과 용비어천가 편찬 참여

이후 양사로부터 원래 성품이 망령된데다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를 믿고 거만하고 동료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이숙번은 사직 상소를 올렸고, 자신의 별장이 있는 황해도 연안에 가서 살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종은 이숙번의 희망대로 가서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벌이 가볍다는 반발에 부딪히자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고 이숙번의 공신 녹권과 직첩은 모두 회수되었으며 1417년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를 짓게 되자 승정원도승지 김돈(金墩)의 천거로 개국 초의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다 하여 서울에 불려와서 편찬에 참여한 뒤, 편찬이 끝나자 함양 유배에서는 풀려나 경기도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허락받았다. 하지만 정계 복귀는 하지 못했고 1440년 (세종 22년)에 사망하였다.

2. 3. 4. 사망

양사로부터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직 상소를 올리고, 자신의 별장이 있는 황해도 연안에 가서 살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태종은 이숙번의 청대로 하였으나, 벌이 가볍다는 반발에 부딪혀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고 공신 녹권과 직첩은 모두 회수되었으며 1417년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한 뒤 함양 유배에서 풀려나 경기도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허락받았으나,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1440년에 사망하였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이희(李禧, 고려에서 이부시랑 역임)
할아버지이사정(李思正)
아버지이경(李坰, 고려말 삼중대광 문하시중 역임, 시호는 문정(文靖))
어머니영양남씨(英陽南氏), 남휘주(南輝珠)의 딸
부인서원부부인 청주 정씨,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의 딸
아들이정(李楨)
장녀강순덕의 처
김해의 처
이부 형윤자량 (본관은 칠원, 대제학 역임)
이부 형윤자당 (본관은 칠원, 좌찬성 역임)
외조부남휘주(南輝珠)


4. 일화

성현(1439년 ~ 1504년)의 수필집 《용재총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윤자당의 어머니 남씨는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 함양에서 살았다. 윤자당이 일곱 살 때 어머니를 따라 무당집에 가서 운명을 물어보았더니, 무당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아이는 귀한 상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반드시 동생의 힘 때문에 귀함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남씨가 "과부의 아들이 어찌 동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의아해했지만, 무당은 남씨가 곧 재혼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뒤에 남씨는 이씨 집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재상 이숙번이었다는 것이다.

5. 등장 작품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