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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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재는 후한 말기의 인물로, 백파적 출신으로 헌제를 호위했으며 장군직을 역임했다. 195년 헌제가 장안을 탈출할 때 이각, 곽사 등의 습격을 받자 양봉, 동승과 함께 이락, 한섬 등과 힘을 합쳐 물리쳤다. 이후 헌제를 따라 하동으로 이동하여 장군으로 임명되었으나, 196년 낙양으로 환도하지 않고 하동에 남아 있다가 원한을 산 인물에게 살해당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헌제 호위 중 전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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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재 | |
---|---|
호재 (胡才) | |
기본 정보 | |
생몰년 | 미상 |
출신지 | 양 (楊) |
칭호 | 평한장군 (平漢將軍) 대사마 (大司馬) |
관직 | |
소속 | 백파적 동탁 이각 곽사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동씨 (董氏) |
주요 활동 | |
활동 시기 | 후한 말기 |
주요 활동 | 동탁 암살 모의 가담 이각과 곽사의 난에 가담 한수와 함께 이각 공격 |
2. 생애
호재는 백파적(白波賊) 출신으로, 195년(흥평 2년)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여 동쪽으로 향할 때 양봉과 동승의 요청으로 이락, 한섬 등과 함께 헌제를 호위하였다. 이들은 이각, 곽사 등의 추격을 막아내며 헌제가 황하를 건너 하동군 안읍현(安邑縣)에 도착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호재는 장군직에 가절(假節)을 받고 삼공처럼 개부(開府)하는 특권을 얻었다.[1][2]
196년(건안 원년), 헌제가 낙양으로 환도할 때 호재는 이락과 함께 하동군에 남았다. 이후 호재는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자에게 살해당했다.[3]
2. 1. 백파적 지도자
195년(흥평 2년), 이각, 곽사, 장제의 습격으로 헌제 일행이 장안을 나와 동쪽으로 향했을 때, 양봉과 동승은 하동군에 있던 옛 백파적 이락, 한섬, 호재, 그리고 남흉노의 거비(去卑)에게 구원을 청했다.[1] 이들은 힘을 합쳐 이각 등을 물리치고 수천 명을 참수하였다.이후 헌제 일행이 홍농군 섬현(陝縣)까지 내몰렸을 때, 동승과 이락은 야음을 틈타 황하를 건너기로 하였다. 이때, 동사하거나 익사한 이들도 허다하여 그 참혹함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하내태수 장양이 쌀을, 하동태수 왕읍(王邑)이 비단을 공급하였고, 한섬·호재·이락은 모두 장군직에 가절(假節)을 받았으며 삼공처럼 개부하였다.[2]
196년(건안 원년), 동승과 장양은 환도에 적극적이었으나, 양봉과 이락은 미온적이었다. 호재와 양봉이 한섬을 치려다 헌제의 만류에 그만두었고, 이후 호재와 이락은 하동군에 남았다. 호재는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이에게 살해당했다.[3]
호재는 처음에는 이락, 한섬과 함께 하동 백파군(백파적)의 지휘관(두목)이었다. 이각의 부하 양봉도 원래 백파군의 동료였다.
흥평 2년(195년), 이각, 곽사의 난의 영향으로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향했을 때, 동승과 양봉은 백파군을 호위로 초청했다. 호재도 이락, 한섬과 함께 이에 응하여 이각, 곽사의 추격을 피해 헌제를 호위했다.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헌제가 안읍을 임시 수도로 정했을 때, 호재는 장군으로 임명되었다(『후한서』 동탁 열전에 따르면 정동장군, 『삼국지』 동탁전에는 정서장군. 후자에 따르면 한섬이 정동장군으로 임명되었다).
헌제가 낙양에 입성한 후, 호재는 이락과 함께 하동으로 돌아갔다. 하동으로 돌아간 후, 호재는 원한으로 인해 살해되었다.
2. 2. 헌제 호위
195년(흥평 2년) 11월(음력), 장안을 나와 동쪽으로 향하던 헌제 일행은 이각, 곽사 등에게 습격받았다. 이들을 호위하던 양봉과 동승은 옛 백파적 출신 이락, 한섬, 호재, 그리고 남흉노의 거비(去卑)[1]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들은 힘을 합쳐 이각 등을 물리치고 수천 명을 참수하였다.섣달, 이각 등의 추격에 홍농군 섬현(陝縣)까지 내몰렸다. 황하를 건너 하동군 대양현(大陽縣)을 거쳐 안읍현(安邑縣)에 당도하였다. 한섬·호재·이락은 모두 장군직에 가절(假節)을 받았으며 삼공처럼 개부하였다.[2]
196년(건안 원년) 5월, 양봉·이락·한섬도 환도에 동의해 낙양으로 길을 나섰으나,[3] 호재와 이락은 하동군에 남았다. 이후 호재는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이에게 살해당했다.
2. 3. 하동 주둔과 죽음
195년(흥평 2년) 11월(음력), 장안을 나와 동쪽으로 향하던 헌제 일행은 이각, 곽사 등에게 습격받았다. 호위를 맡았던 양봉과 동승은 하동군에 있던 옛 백파적 이락, 한섬, 호재, 그리고 남흉노의 거비에게 구원을 청했다.[1] 이들은 힘을 합쳐 이각 등을 물리치고 수천 명을 참수하였다.섣달, 이각 등의 재추격에 홍농군 섬현(陝縣)까지 내몰렸다. 황하를 건너 하동군 대양현(大陽縣)을 거쳐 안읍현(安邑縣)에 당도하였다. 하내태수 장양이 쌀을, 하동태수 왕읍(王邑)이 비단을 공급하였다. 한섬·호재·이락은 모두 장군직에 가절(假節)을 받았으며 삼공처럼 개부하였다.[2]
196년(건안 원년) 5월, 양봉·이락·한섬도 환도에 동의해 낙양으로 길을 나섰으나,[3] 호재와 이락은 하동군에 남았다. 이후 호재는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이에게 살해당했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참조
[1]
서적
후한서 동탁전, 삼국지 무제기, 후한기
[2]
서적
삼국지 동탁전, 후한서 동탁전, 후한기
[3]
서적
후한기 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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