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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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봉은 후한 말 백파적 출신으로, 이각을 섬기다 헌제를 보호하고 조조에게 대항했던 인물이다. 이각과 곽사의 내분 당시 이각 암살에 실패하고 헌제를 호송했으며, 흥의장군으로 임명되어 곽사, 양정, 동승과 함께 헌제를 낙양으로 호송했다. 이후 조조에게 패하여 원술에게 의탁, 여포와 협력하여 원술군을 격파했으나 유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기도위로 등장하며, 헌제를 보호하고 조조에게 대항하다가 유비에게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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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봉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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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양봉 |
한자 표기 | 楊奉 |
로마자 표기 | Yang Bong |
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197년 |
사망 원인 | 타살 |
출신지 | 양주북지군 (현재의 섬서성푸핑현) |
관직 및 역할 | |
초기 직책 | 이각 휘하 장수 |
주요 경력 | 흥의장군 거기장군 |
섬긴 세력 | 이각 원술 여포 |
주요 활동 | |
헌제 탈출전 | 헌제 호위 |
기타 활동 | 조조와 적대 |
가족 관계 | |
주군 | 헌제 (일시적 협력) 이각 원술 여포 |
2. 생애
양봉은 원래 백파적의 지도자였다.[1][6] 이후 관직에 나아가 이각을 섬겼다.[1][6] 192년, 이각, 곽사 등은 한나라 수도 장안을 공격하여 중앙 정부와 헌제를 장악했다.
195년, 이각과 곽사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16] 당시 헌제는 이각의 영에 머물고 있었는데, 양봉은 이각과 곽사의 싸움에서 이각을 도왔다.[16] 양봉은 이각의 정치에 의문을 품고 황문시랑 종요, 상서랑 한빈, 이각의 군리 송과 등과 함께 이각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독립했다.[6][17][18] 이후 장제의 중재로 이각과 곽사는 화해하고 헌제를 홍농군으로 옮기는 데 동의하였다.
양봉은 흥의장군(興義將軍)으로 임명되어 곽사, 양정, 동승과 함께 헌제를 호송하여 낙양으로 돌아갔다.[1] 도중에 곽사가 마음을 바꿔 헌제를 매현으로 데려가려 하자, 헌제는 양봉의 진영으로 피신했다. 곽사가 헌제를 되찾으려 하자 양봉, 양정, 동승은 헌제를 보호했다.[1] 곽사는 패배 후 물러났고, 헌제는 양봉의 보호 아래 낙양으로의 여정을 재개했다.
195년 후반, 이각과 곽사는 헌제가 장안을 떠나도록 한 것을 후회하고 군대를 이끌고 헌제를 추격했다. 양봉은 이각과 곽사에 맞서 싸웠지만 패했다. 그는 이락, 한섬, 호재 등이 이끄는 백파적과 궐비가 이끄는 흉노족 군대를 소환하여 헌제를 지원하게 했다.[2] 헌제는 황하를 건너 안읍에 도착했다.
2. 1. 백파적 지도자에서 이각의 부하로
양봉은 원래 황건적의 일파인 백파적의 지도자였다.[1][6] 이후 관직에 나아가 이각을 섬겼다.[1][6] 192년, 이각, 곽사 등은 한나라 수도 장안을 공격하여 중앙 정부와 헌제를 장악했다.195년, 이각과 곽사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16] 당시 헌제는 이각의 영에 머물고 있었는데, 양봉은 이각과 곽사의 싸움에서 이각을 도왔다.[16] 양봉은 이각의 정치에 의문을 품고 황문시랑 종요, 상서랑 한빈, 이각의 군리 송과 등과 함께 이각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독립했다.[6][17][18] 이후 장제의 중재로 이각과 곽사는 화해하고 헌제를 홍농군으로 옮기는 데 동의하였다.
양봉은 흥의장군으로 임명되어 곽사, 양정, 동승과 함께 헌제를 호송하여 낙양으로 돌아갔다.[1] 도중에 곽사가 마음을 바꿔 헌제를 매현으로 데려가려 하자, 헌제는 양봉의 진영으로 피신했다. 곽사가 헌제를 되찾으려 하자 양봉, 양정, 동승은 헌제를 보호했다.[1] 곽사는 패배 후 물러났고, 헌제는 양봉의 보호 아래 낙양으로의 여정을 재개했다.
195년 후반, 이각과 곽사는 헌제가 장안을 떠나도록 한 것을 후회하고 군대를 이끌고 헌제를 추격했다. 양봉은 이각과 곽사에 맞서 싸웠지만 패했다. 그는 이락, 한섬, 호재 등이 이끄는 백파적과 궐비가 이끄는 흉노족 군대를 소환하여 헌제를 지원하게 했다.[2] 헌제는 황하를 건너 안읍에 도착했다.
2. 2. 헌제 보호와 낙양 호송
양봉은 본래 백파적(白波賊) 출신으로 이각(李傕)을 섬겼다.[1] 195년, 장안에서 이각과 곽사(郭汜)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양봉은 이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이각에게서 떨어져 나왔다.[18] 쇠약해진 이각은 장제(張濟)의 중재로 곽사와 화해하고 헌제(獻帝)를 홍농군(弘農郡)으로 옮기는 데 동의하였다.이후 헌제가 낙양으로 이동할 때, 양봉은 흥의장군(興義將軍)에 임명되어 곽사, 양정(楊定), 동승(董承)과 함께 헌제를 호위하였다.[2] 곽사가 헌제를 도로 데려가려 하자 양봉은 양정, 동승과 함께 이를 저지하였다. 곽사가 물러난 후, 헌제는 양봉의 보호 아래 낙양으로의 여정을 계속했다.
195년 후반, 이각과 곽사는 헌제를 보내준 것을 후회하고 추격해왔다. 양봉은 이각, 곽사와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옛 백파적 동료인 이락(李樂), 한섬(韓暹), 호재(胡才)와 남흉노(南匈奴)의 거비(去卑)에게 구원을 요청했다.[21] 이각 등을 잠시 밀어내기도 하였으나 격전 끝에 거의 다 죽고 섬현(陝縣)까지 내몰렸다.
결국 헌제 일행은 황하(黃河)를 건너 하동군(河東郡) 대양현(大陽縣)을 거쳐 안읍현(安邑縣)에 당도하였다. 196년 8월경, 헌제는 양봉과 동승의 호위를 받으며 낙양으로 돌아왔고, 양봉은 그 공으로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었다.[9]
2. 3. 권력 다툼과 조조의 개입
196년(건안 원년), 동승과 장양은 환도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양봉과 이락은 미온적이었다. 동승은 한섬의 공격을 받고 야왕현(野王縣)의 장양에게로 피신했다. 호재와 양봉이 한섬을 치려다 헌제의 만류에 그만두었다. 양봉·이락·한섬도 환도에 동의해 길을 나섰다.[22] 6월,[23] 의랑(議郞) 동소가 연주목 조조의 명의로 편지를 써 양봉에게 전하였다. ‘저는 장군의 명성을 듣고 진심으로 그 의로움을 사모하였습니다. 장군께선 천자를 환난에서 구해 옛 도읍으로 모셔왔으니 그 보좌한 공은 세상에 필적할 자가 없습니다. ... 장군은 안쪽에서, 저는 바깥에서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저는 식량이 있고 장군은 군사가 있으니 상호 있고 없는 것을 융통해[유무상통, 有無相通] 돕기가 충분합니다. 죽으나 사나 고생을 같이합시다.[사생계활, 死生契闊]’ 양봉이 기뻐서 다른 사람들에게 ‘연주의 군대가 가까이 영천군 허현(許縣)에 있으면서 병력도 식량도 넉넉하니 응당 나라가 의지할 바’라며 공동으로 표를 올려 조조가 진동장군(鎭東―), 그리고 그 아버지 조숭의 작위였던 비정후(費亭侯)를 받게 해주었다.[24]7월, 헌제가 낙양 땅을 다시 밟았다. 8월, 장양은 큰 공을 세우고도 하내군으로 돌아가 대사마가 되었고, 양봉 역시 하남윤 양현(梁縣)으로 나가 거기장군이 되었다. 위장군 동승과 대장군 겸 사례교위 한섬만이 헌제를 곁에서 보위하였다. 한섬이 자신의 공적을 믿고 멋대로 정사에 관여하므로 동승이 조조를 슬쩍 끌어들였다.[25] 조조는 한섬과 장양을 탄핵하였고 한섬은 주살당할까 두려워 양봉에게로 도피하였다. 헌제는 그간의 공로를 들어 일절 죄를 묻지 않았다.
이때 낙양은 아주 궁핍했다. 궁실은 예전에 불타 없어져 백관이 담벼락에 의지했으며 굶주림도 심해 상서랑(尙書郞) 이하가 직접 돌벼를 채취해왔다. 기어이 아사하거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이도 있었다. 조조가 양봉에게 말하길, “서울에 양식이 없어 황제를 잠깐 남양군 노양현(魯陽縣)으로 거둥케 하려 합니다. 노양은 허현 근방이라 운송이 쉬워 식량 부족의 근심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조조가 자신을 추천해줬던 것에 대한 답례도 후하게 해왔던 터라 양봉은 의심하지 않았다. 조조는 노양 방향의 남쪽이 아닌 환원관(轘轅關)을 지나 허가 있는 동쪽으로 황제를 인도하였다. 뒤늦게 조조의 농간이었음을 깨닫고 한섬과 같이 추격했지만 먼저 다다른 경기병 부대가 양성산(陽城山) 골짜기에서 복병에 당하는 등 놓치고 말았다.[26]
196년 10월,[18] 양봉과 한섬이 영천군 정릉현(定陵縣) 일대를 유린하였다. 조조는 이에 응하지 않고 양봉의 본거지인 양을 바로 찔러 무너뜨렸다. 양봉과 한섬은 양주의 원술에게로 달아났다.[18]
2. 4. 원술에게 의탁과 여포와의 협력
세력을 잃은 양봉은 원술에게 의탁했다.[3] 197년,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자, 진규의 설득에 넘어가 한섬과 함께 여포에게 투항했다.[12] 여포는 진규의 조언에 따라 양봉과 한섬에게 서찰을 보내 협력을 제안했고, 양봉과 한섬은 이에 내응하여 여포와 함께 장훈이 이끄는 원술군을 공격하여 대파했다.[28][29] 이들은 구강군 수춘현(壽春縣) 방향으로 수륙병진하며 지나는 곳마다 노략하고 종리현(鍾離縣)에서 회수 북쪽으로 회귀하기도 하는 등[18] 서주와 양주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30]2. 5. 최후
양봉의 최후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삼국지》 위서 동탁전에는 조조가 헌제를 맞이한 후 양주, 서주 사이에서 약탈을 일삼다 유비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5] 《삼국지》 촉서 선주전에는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긴 유비에게 해서현에서 공격받아 참수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3] 이 기록은 196년의 일로, 197년에 원술과의 싸움에 참가했다는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과는 모순된다. 영웅기에는 유비와 회견했을 때 참수당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14][15]197년,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고 여포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장수 장훈에게 양봉과 한섬을 부하로 삼아 여포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여포는 진규의 제안을 따르고 양봉과 한섬을 설득하여 원술에게 등을 돌리게 했다. 양봉과 한섬은 여포와 함께 장훈이 이끄는 원술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28] 이후 양봉과 한섬은 병사들을 이끌고 회수 북쪽의 중리현(鍾離縣)까지 여러 지역을 약탈한 후 돌아갔다.[18][29]
3. 평가
동소는 양봉을 용감하지만 생각이 짧고 의심을 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18] 양봉은 백파적의 지도자였으며, 이각의 부하가 되었다.[1] 195년, 이각과 곽사 사이의 내분 발생했을때 이각이 헌제를 인질로 잡자, 상사를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장안을 떠났다. 3개월 후, 장제는 이각과 곽사를 설득하여 화해하고 헌제가 옛 수도 낙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양봉은 흥의장군(興義將軍)으로 임명되었고, 곽사, 양정(楊定), 동승과 함께 헌제를 호송하여 낙양으로 돌아갔다.[2] 195년 후반, 이각과 곽사는 헌제가 장안을 떠나도록 한 결정을 후회하고 군대로 추격했지만 양봉은 군대를 이끌고 이각과 곽사에 맞서 싸웠지만 패했다. 이후 헌제가 황하를 건너 안읍(安邑)에 도착하였다. 196년 8월경, 헌제는 양봉과 동승의 호위를 받으며 낙양으로 돌아왔고, 헌제는 그들의 공헌을 인정하여 양봉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하고 양국에 주둔하도록 명령했다.
군벌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가 헌제를 자신의 기지로 호송했고, 양봉은 조조를 막으려 했지만 제때 따라잡지 못했다. 헌제와 새로운 중앙 정부를 확실하게 장악한 후, 조조는 196년 11월 군대를 이끌고 양봉을 공격하여 그를 격파했다. 양봉은 남쪽으로 도망쳐 군벌 원술에게 합류했다.[3] 197년, 원술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인접한 군벌인 여포를 동맹으로 삼고 싶어했지만, 여포는 진규의 조언을 듣고 이 제안을 거절했다. 여포는 진규의 제안을 따르고 양봉과 한섬을 설득하여 원술에게 등을 돌리게 했다. 양봉과 한섬은 여포와 함께 장훈이 이끄는 원술의 군대를 공격하여 적을 격파했다. 197년 후반, 그들은 여포의 명령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군벌 유비의 물자를 약탈했다. 그러나 유비는 성공적으로 그들을 함정에 유인하여 양봉을 죽였다.[4][5]
4. 삼국지연의에서의 양봉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양봉은 기도위로 등장하며, 황보력을 참수하려던 이각을 말리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각의 전횡과 푸대접에 내부에서 기습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종남산(終南山)으로 도주한다.
헌제가 홍농으로 이동할 때 양봉은 헌제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가고, 곽사가 헌제를 도로 데려가려 할 때 서황과 함께 곽사군을 물리친다. 이후 곽사가 이각과 연합하여 공격해오자 동승과 함께 헌제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만, 옛 백파적 한섬, 이락, 호재에게 구원을 청한다.
동승, 양봉은 헌제를 모시고 낙양으로 환도하던 중, 이락이 이각, 곽사와 협력하여 헌제를 위협하자 서황을 시켜 이락을 쓰러트린다. 헌제가 낙양에 도착한 후 조조를 불러들이고, 조조는 이각과 곽사를 격파한다. 양봉과 한섬은 조조를 견제하기 위해 대량(大梁)으로 이동하고, 조조가 허도로 천도할 때 이를 막으려 하지만 실패한다. 서황은 만총의 권유로 조조에게 귀순하고, 양봉은 조조의 복병에 당해 한섬과 함께 원술에게 도망간다.
원술이 여포를 공격할 때 양봉은 제7로군을 맡아 출진하고, 한섬은 제6로군을 맡는다. 진등의 설득으로 한섬과 함께 한나라로 귀환하려 하고, 여포와 협력하여 원술군을 격파한다. 여포는 양봉을 낭야목(瑯琊牧)으로 천거하지만, 진규의 계략으로 서주에 머무르지 못하고 낭야로 향한다. 이후 약탈을 벌이다 유비에게 유인되어 관우와 장비에게 피살되고, 그 머리는 조조에게 헌상된다.
양봉은 원래 백파적의 지도자였으며, 이후 이각의 부하가 되었다.[1] 195년 이각과 곽사 사이의 내분 때, 양봉은 이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장안을 떠났다.[2] 장제의 중재로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갈 때, 양봉은 헌제를 호송하는 역할을 맡았다.[2] 곽사가 헌제를 다시 데려가려 하자 양봉은 헌제를 보호하며 맞서 싸웠다.[2]
195년 후반, 이각과 곽사가 헌제를 추격해오자 양봉은 백파적과 궐비가 이끄는 흉노족 군대의 도움을 받아 헌제를 지켰다.[2] 196년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온 후, 양봉은 차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되고 양국에 주둔했다.[3] 조조가 헌제를 허로 호송한 후, 양봉은 조조에게 패배하고 서황은 조조에게 항복했다.[3] 양봉은 원술에게 합류하여 양과 서를 약탈했다.[3]
197년, 원술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여포와 동맹을 맺으려 하자, 양봉은 장훈(張勳)과 함께 여포를 공격했다.[4] 그러나 여포와 진규의 계략으로 양봉과 한섬은 원술에게 등을 돌리고 여포와 함께 원술군을 격파했다.[4] 이후 양봉과 한섬은 중리(鍾離)까지 약탈하다가 여포의 명령으로 유비의 물자를 약탈하려 했으나, 유비의 함정에 빠져 양봉은 죽고 한섬은 도망쳤다.[4][5]
참조
[1]
서적
Houhanshu vol. 72
[2]
서적
Houhanshu vol. 72
[3]
서적
Sanguozhi vol. 1
[4]
서적
Records of Heroes
[5]
서적
Houhanshu vol. 72
[6]
웹사이트
三國志/卷06#李傕、郭汜
[7]
웹사이트
三國志/卷17#徐晃
[8]
문서
以降も最期まで楊奉は韓暹と運命を共にする。
[9]
웹사이트
三國志/卷06#李傕、郭汜
[10]
웹사이트
三國志/卷01
[11]
웹사이트
三國志/卷14#董昭
[12]
웹사이트
三國志/卷07#張邈
[13]
웹사이트
三國志/卷32
[14]
문서
その後、韓暹も旧友で[[沛郡]]杼秋県[[県令|屯帥(県尉)]]でもある張宣の討伐を受け、殺害された。三国志董卓伝注引英雄記による
[15]
웹사이트
三國志/卷06#馬騰、韓遂
[16]
서적
헌제기
후한서 72권 열전 제62 동탁
[17]
서적
삼국지
6권 위서 제6 동탁
[18]
서적
후한기
28권
[19]
서적
자치통감
61권 한기 제53 헌제 흥평 2년
[20]
서적
헌제춘추
태평어람 92권 황왕부 제17 효헌황제
[21]
서적
후한서》동탁전, 《삼국지》무제기, 원굉의 《후한기》에서는 [[우현왕]]. 《후한서》헌제기에서는 [[좌현왕]]
[22]
서적
후한기
29권
[23]
서적
삼국지
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24]
서적
삼국지
14권 위서 제14 동소
[25]
문서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에서는 동승이 원술의 부하 장노(萇奴)와 연계하여 조조가 보낸 [[조홍 (삼국지)|조홍]]을 막았다고 하였으나 이 기록과 상충된다.
[26]
서적
헌제춘추
후한서 72권 열전 제62 동탁
[27]
서적
영웅기
삼국지 7권 위서 제7 여포
[28]
서적
구주춘추
삼국지 7권 위서 제7 여포
[29]
서적
후한서
75권 열전 제65 여포
[30]
문서
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에는 196년의 일로 잘못 삽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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